커미션 작업물

바람

소설 TYPE / 오마카세 / 뮤지컬 더 픽션

골방 by 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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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봄이다. 따뜻한 바람이 외투를 벗고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잎을 틔우고 꽃을 맺는다. 겨우내 얼어있던 작은 시냇물도 제 모습을 되찾아갔다. 그동안 변하지 않은 건 일 년 전이나 지금이나 타자 소리가 멈추지 않는 그레이 헌트의 작업실뿐인 것 같았다.

그레이는 벌써 다섯 시간째 앉은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내내 문장과 씨름하고 있었다. 쉬엄쉬엄하라는 와이트의 말에도―흔한 기회가 아니었다― 그레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이렇게 말했다.

“흐름 깨지면 안 되지. 괜찮아.”

다 좋은데, 왜 하필 오늘 불이 붙었는지 모르겠다. 집중하라고 잔소리할 때는 듣지도 않으시더니. 어쩔 수 없이 수긍하긴 했다만, 이제는 오히려 와이트가 좀이 쑤실 지경이었다. 그래도 편집자가 돼서 열중한 얼굴로 마감하는 작가를 감히 방해할 수는 없기에 가만히 관찰하기만 했다.

웃음기 하나 없이 진지하게 새로운 문장을 써 내려가는 그레이의 얼굴 위로 햇살이 내렸다. 굴곡진 면면을 따라 온화함이 어려있다. 와이트는 문득 십 년 전의 그레이도 이런 표정으로 소설을 썼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때는 아마 지금보다는 젊고 또한 패기가 넘쳤을 것이다. 눈매도 날카롭고 눈빛도 형형했으리라. 어린 시절 읽은 《그림자 없는 남자》는 꼭 그런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상상이 이어질 무렵 시선을 느낀 그레이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친 와이트가 멋쩍게 웃자 그레이의 얼굴에도 눈 녹듯 웃음기가 스며들었다. 면면에 드리운 그림자가 보기 좋았다. 와이트는 턱을 괴어 고개를 기울였다.

“산책 좀 하는 건 어떠세요.”

그레이는 그제야 팔을 쭉 펴고 기지개를 켰다. 어깨에서 둔탁한 파열음이 났다. 아이고. 작게 탄식한 그레이가 웃음을 터뜨리며 허리를 통통 두드렸다.

“그럴까? 좀 쉬긴 해야겠다.”

“그래요. 작가님 일중독이세요.”

“언제는 중독 좀 되라며.”

그레이는 눈썹을 들먹이며 일전에 와이트가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와이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보았다.

“요새는 마감 밀리지도 않으시잖아요.”

“네 덕에 잘하고 있지.”

그레이는 펜 자국이 무성한 종이를 손끝으로 훑으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와이트가 조용히 운을 떼었다.

“작가님.”

“응?”

그레이가 더할 나위 없이 온화한 시선을 보냈지만, 와이트는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그는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가 시선을 떨어뜨렸다.

이 말을 해야 할까. 해도 될까. 와이트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헤어짐을 염두에 두는 습관이 있었다. 그래야 갑작스레 그 순간이 닥친다 해도 덜 아플 수 있으니까. 정 주지 않고 선을 긋는 건 일종의 방어기제였다. 그래서 그레이와의 만남에도 끝이 있으리라 항상 생각했다. 묻고 싶었다. 우리의 끝은 어디냐고. 그를 무작정 떠볼 생각은 없었다. 다만 어떤 대답을 한다 해도 믿기 힘들 것 같다는 게 망설임의 첫 번째 이유였고 어린애처럼 군다고 여길까 두려운 게 두 번째 이유였다. 게다가 와이트에게 그레이는 십여 년의 그리움과 동경이었으나, 자기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편집자에 불과했으니.

그레이는 와이트가 먼저 말을 꺼낼 때까지 묵묵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와이트는 평소와 다르지 않은 어조로 물었다. 두려움을 감추기 위한 최선의 노력이었다.

“연재 끝나도 저 안 쫓아내실 거죠?”

와이트는 항상 예상하는 답지를 가지고 질문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 짧은 물음에서는, 확신을 전혀 읽어낼 수 없었다. 게다가 끝에 다다라 눈치를 보는 것까지. 그레이는 더욱 다정하게 말했다.

“내가 너를 왜 쫓아내.”

“진짜로요.”

“진짜로.”

와이트는 그제야 음성에 장난기를 섞어 넣었다.

“저는 계속 작가님 글 보고 싶단 말이에요.”

“블랙을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당연히 그런 줄 알았는데. 와이트는 그레이의 금빛 눈동자를 응시했다. 자신의 인생으로 소설을 쓴다면 아마 주인공의 눈동자 색은 저럴 것이라는 생각 따위를 했다. 와이트는 서랍 안에 넣어둔 선물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발음을 일부러 뭉개어 웅얼거렸다.

“작가님을 좋아하는 거죠.”

“나를?”

작업실에 산들바람 같은 정적에 잠겼다.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흐른다. 창밖에서 흔들리는 이파리마저 두 사람의 시간 속에 붙잡힌 것 같았다. 와이트는 앞으로 맞이할 시간도 이렇게 느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레이 헌트라는 인간을 만나기 전까지 홀로 보내야 했던 고통의 순간들을 모두 지워버릴 수 있을 만큼 천천히.

그레이는 티 없이 웃으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고맙네. 다시 써야겠어. 어떤 작품이든 말이야.”

“저는 항상 작가님의 팬이에요.”

아마 앞으로도, 끝까지 당신의 팬일 것이다. 나를 살린 당신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레이가 와이트의 손등 위에 손을 겹쳐 올렸다. 그레이는 눈을 감으며 양손을 모아 쥐었다. 기도를 올리는 모양새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덕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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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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