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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TYPE / 오마카세 / 뮤지컬 더 픽션

골방 by 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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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 헌트는 굳은살이 박인 뭉툭한 손가락 끝으로 테이블을 규칙적으로 두드리며 문장을 골랐다. 뭐가 더 좋을까. 혼잣말처럼 흘린 단어들은 허공을 지나 맞은편에 앉아있는 이에게 닿았지만, 대답은 없었다. 편집자 와이트 히스만은 안경까지 얌전히 벗어둔 채 그레이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레이는 몸을 이리저리 기울이며 와이트의 시야를 벗어나 보려 했지만, 와이트는 그를 따라 눈동자를 굴리기만 했다. 넋이 아주 나가 있는 건 아니었다.

아이고. 무릎을 짚어 몸을 일으키며 짧게 탄식한 그레이는 자세를 고쳐 앉아 무심하게 물었다.

“뭘 관찰하는 거야?”

“그냥요.”

와이트는 흘러나온 음성이 낯설어 미간을 좁혔다. 붕 뜬 채 어디에도 닿지 못할 것 같은 목소리. 그레이는 특별히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는지 다만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만 저었다.

“나는 마감하게 하고, 혼자 쉬는 거야?”

와이트는 그제야 못 이기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절반으로 부러진 채 굴러다니는 빨간 색연필이 시야에 걸렸다.

“작가님이 원고를 주셔야 교정하죠.”

“아, 그런가. 그럼 얼른 드려야지, 우리 편집자님.”

그레이는 빠르지 않은 속도로 타자기를 두드렸다. 찰칵, 찰칵. 글자 하나마다 사진을 찍는 것처럼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실상 기록이라는 면에서는 전연 다르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저게 셔터 소리였다면 어땠을까. 그의 사진 한 장이라도 품에 남겨뒀다면.

한참 원고를 옮겨 적던 그레이는 타자기에서 종이를 꺼내 뭉치 위에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까부터 똑같은 얼굴이야.”

“작가님 머리가 많이 세었어요.”

그레이는 오른손을 올려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그 위로는 햇살이 내려 눈동자와 더불어 금빛으로 반짝였다. 눈앞에 있는 그의 모습은 마치 환상처럼, 따뜻하고 비현실적이었다. 그레이는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매일 마감하니까 그렇지. 마감에 쫓기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잖아?”

“알죠. 잘, 알죠.”

“그러니까 와이트, 너도 쉬엄쉬엄해. 매일 밤새고 무리하면 나처럼 된다.”

그레이는 평소와 다르지 않게 활기차 보였으나 와이트는 조그만 움직임도 없이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누군가 이 장면을 목격한다면, 그레이만이 유일하게 살아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와이트는 한참이 지난 후에야 시선을 거두어 텅 빈 자신의 책상을 응시했다.

“그래도 멋져요.”

그레이는 아랫입술을 앞으로 툭 내밀었다가 입꼬리를 말아 올려 웃었다.

“그래? 하긴, 난 항상 나이 든 내 모습이 궁금했어.”

와이트는 이 대화를 어떻게 이어 나가야 할지 짐작조차 할 수 없이 입술만 힘겹게 달싹였다.

“궁금하셨다고요?”

“나이가 들면 연륜이란 것도 생길 거고. 나이 든 사람은 젊은 시절을 알지만, 젊은 사람들은 모르잖아. 나이 든 자기를.”

만약 내가 당신의 기회를 빼앗아버린 거라면. 나의 욕심이 당신을 희생시켰다면. 생각들이 순식간에 가지를 뻗어 발밑에서부터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소름 끼치는 두려움이 엄습한다. 생각을 멈추기 위해 아무 말이나 해야 했다. 와이트는 겨우 입을 열었다. 그의 안색이 파리했다.

“어떤데요?”

“나쁘지 않아. 가끔 허리가 쑤시는 거 말곤.”

그레이는 허리 근처를 통통 두드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와이트는 자신의 떨리는 손을 외면하며 다시 물었다.

“옛날로 돌아가고 싶진 않으세요?”

“음, 글쎄.”

그레이는 아예 연필을 내려놓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까처럼 손끝으로 책상을 두드리던 그레이는 아예 눈을 휘어 웃으며 말했다. 눈가 주름이 보기 좋게 잡혔다. 상상했던 그대로다.

“가끔 궁금하긴 하네, 네 어린 시절.”

“저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에 당황스러움을 숨기지 못했다. 내가 아는 작가님이라면, 이런 이야기를 할 리가 없다. 왜 당신의 세월에 내가 끼어있나. 나는 그저 잠시 머문 사람일 뿐인데. 와이트는 생각했다. 찰나에 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그레이’를 보고 있는지 의심했다. 무의식이 꿈을 왜곡한 게 아닐까. 이건 그가 기억하는 그레이가 아니었다. 그토록 혼란스러워하는 마음을 과연 아는지 모르는지, 그레이는 여유롭게 턱을 괴고 말했다.

“좀 더 일찍 만났으면 어땠을까, 생각이 드는 거지.”

“…….”

와이트는 말문과 함께 숨통이 틀어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좀 더 일찍 만났으면? 당신이 한 가정을 되뇌었다. 그럴 리가 없다. 품었던 의심은 확신으로 뒤바뀌었다. 당신은 그런 말을 할 리가 없다. 여기서 끝내야 한다. 와이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이를 악물었다.

“우리가, 만나지 않았다면, 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레이의 표정이 눈에 띌 정도로 일그러졌다. 화가 났다기보다는 몹시 놀란 것 같았다.

“내가, 그런 말을 했어?”

“…….”

“와이트.”

“더 속고 싶지 않아요.”

나의 착각 따위로 당신에 관한 기억을 더럽히고 싶지 않다. 어차피 번지고 지워질 시간과 기억이라고 해도 이따위 환상으로 죄책감을 속이지 않을 것이다. 와이트는 손바닥이 하얗게 질리도록 주먹을 쥐었다.

이윽고 눈을 뜨고 그레이를, 또 그가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핏자국이 남아있는 타자기에 햇살이 내린다. 한 줄기 빛이, 찾아왔다. 내게 찾아온 빛. 그 빛을 내가, 내 손으로 꺼뜨렸다. 창을 넘어 들어오던 햇빛마저 암흑에 잡아먹혔다. 그를 삼키고 죽인 블랙은 나였어. 와이트는 책상 위에 웅크려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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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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