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
소설 TYPE / 오마카세 / 뮤지컬 더 픽션
잘그락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레이는 귀 뒤에 연필을 꽂아둔 것을 잊었는지 필통을 뒤적이며 또 연필을 찾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와이트는 입술 새를 비집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서랍을 열었다.
“작가님, 연필 더 깎아둘까요?”
그레이는 그제야 옆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연필을 꺼냈다. 그는 멋쩍게 웃으며 한 자루를 도로 필통에 넣었다.
“아이구, 이게 참. 정신이 이렇게 없어서…….”
와이트는 짧게 소리 내어 웃었다.
“타자기가 더 편하지 않으세요?”
그레이는 처음 들어보는 인터뷰 질문이라도 되는 양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응’ 또는 ‘아니’라고 대답해도 될 텐데. 매사를 저렇게 골똘히 생각하는 것도 참 그답다고 생각했다. 그레이는 연필심 끝부분을 엄지로 꾹 누르면서 말했다.
“타자기보다는 연필이 낫지.”
“왜요?”
“단어가 내 안으로 들어와서 나가는 기분이랄까.”
“오.”
와이트가 웃음기를 가득 머금은 얼굴로 감탄하자 그레이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뭐야, 그 웃음은.”
“방금 진짜 예술가 같았어요.”
“그동안은 아니었어?”
“아이, 참. 그 얘기가 아니잖아요.”
그레이가 미심쩍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곁눈으로 보았으나 와이트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레이는 자신이 이제 막 글쓰기를 시작하던 시절을 떠올렸다. 연필을 고른 데에 특별한 이유가 있던 건 아니다. 값이 가장 싸니까. 돈 없는 무명 작가에게 싼 것 말고는 대안이 없다.
의미를 찾기 시작한 건 오히려 마음이 여유로워진 후였다. 연필은 지울 수 있지 않은가. 오천 단어를 썼어도 작품에 해가 된다면 버리는 게 작가의 숙명이다. 이미 지워진 단어는 떠올리려 해도 떠올려지지 않으니, 떠나보낸 문장에 대한 미련을 깔끔하게 치워버리기엔 연필이 가장 적합했다.
“일부러 뭉툭하게 깎아두라고 하시는 건요.”
“예리한 글씨로 쓴 단어는 글쎄, 내 것 같지 않더라고.”
너무 뾰족하면 찔렸을 때 아프잖아. 그레이는 농담처럼 뒷말을 이어 붙였다. 그는 튀어나온 연필심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더니 연필을 얼굴 가까이 가져가 킁킁 냄새를 맡았다.
“기름보단 나무 냄새가 좋지.”
와이트는 그를 따라 연필 냄새를 맡았다. 깊숙한 탄광에서 날법한 고소하고 퀴퀴한 냄새가 코끝에 맴돌았다.
“그런 것도 같네요.”
“그리고 연필을 쓰면 내가 얼마나 많이 글을 썼는지 알 수 있어서. 그래서 좋아.”
그레이는 흐뭇한 얼굴로 어느새 짧아진 몽당연필을 손바닥 안에서 굴렸다. 와이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 것 같아요. 어떤 마음이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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