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라는 운명
소설 TYPE / 오마카세 / 뮤지컬 더 픽션
작가가 사람을 떠나서는 안 된다. 인간과 유리된 문학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쓰레기다. 작가가 사람을 떠나는 순간, 작품에도 작가에게도 치명적인 독이 된다. 그레이가 가진 오랜 철학이자 철칙이었다. 단칸방에 세 들어 살더라도 도시에 머물기를 고집했고 항상 사람을 찾았다. 대화할 수 없다면 관찰이라도 했다. 그 일련의 과정을 거쳐 단 한 줄이라도 도움 되는 글을 쓰는 일. 그것을 작가의 사명이자, 숙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를 떠나게 한 것 역시 사람이었다.
세상을 따뜻하게 보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아무리 어두운 골목이라도 빛은 들 거라고, 아무리 어지러운 세상이라도 그 끝은 있을 거라고. 한 줄의 글이 살아가는 이곳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순진한 사람이었다.
그 믿음을 원동력으로 삼아 《그림자 없는 남자》를 집필했다. 구상부터 완결까지 오 년이 걸렸다. 설령 상대가 끔찍한 연쇄살인마라고 해도 작가는 자기 소설 속 주인공을 떠올린 시점부터 온점을 찍을 때까지 동침해야 한다. 대단한 작업실도 없던 시절, 침대 위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집필한 소설이다. 이제는 ‘쓰레기 삼류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자식과 다름없는 작품이 맹렬한 비난에 사장(死藏) 당하는 기분은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오기를 결정했다. 공식적으로는 요양이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명백히 도망이었다. 완벽한 성공은 없어도 완벽한 실패는 존재했다.
처음엔, 해방감을 기대했다. 누구의 방해도 없이 글을 쓸 수 있을 거란 희망, 오로지 내 생각만으로 내 글을 완성하는 상상. 그러나 외로웠다. 책상 앞에 앉아있는 대부분의 시간에 잡념과 씨름했다. 내 소설을 인정해 줄 사람이 정말 단 한 명도 없을까? 들인 시간과 노력을 이해하진 못해도 그 안에 담은 생각 정도는 읽어줄 수 있지 않나? 온전히는 아니어도, 소설 한 권만큼의 이해도 받지 못하는 건 비참했다. 화도 났다. 그럴 때면 세상을 향해 삿대질해 보기도 했다. 그러고도 바뀌는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서러워 울다가도 펜을 잡으면 춤을 추듯 행복한 자신이 혐오스럽고 또 사랑스러웠다. 글을 쓰는 건 슬픈 천명이라고 연민하기도 했다. 부끄러운 과거다.
연재를 시작하고부터는 얌전히 골몰할 시간조차 사치여서 작업실 밖에 나가기도 어려웠지만, 작업이 손에 익어 마감 사나흘 전에 원고를 넘기기도 했다. 제 몫의 일을 완전히 끝낸 뒤라고 해도 원고를 검토하는 와이트를 보고 있자면 그저 작업실에 붙어있기도 겸연쩍어 종종 바깥을 구경했다.
뉴욕 도심은 새삼스러웠다. 가는 곳마다 사람이 범람하고 밤에도 불이 꺼지지 않는다. 그 속에 다시 서 있는 것이 어색했다. 그렇게 기억과 감각을 대조하여 걷다 보면, 아주 가끔 그를 알아보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주로 “단행본을 샀다”는 말로 주의를 끌어놓고 이어 가방에 있던 공책이나 손에 든 조간신문 귀퉁이에 사인을 요청했다. 대체 작가의 사인이 계약서 외에 어떤 효력이나 가치가 있는가 생각해 보았지만, 언제나 뚜렷한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생활도, 풍경도, 세상도 변했지만, 무엇보다 가장 크게 실감하는 변화는 서술이었다. 《그림자 없는 남자》 초판본에 등장하는 인물은 말과 행동, 심지어는 생각까지 냉소적이었다. 정의에 심취해 잿더미를 쓴 것이다. 연재를 위해 십여 년 만에 초판본을 읽었을 때는 기가 막혔다. 이토록 암울한 세상을 그려놓다니, 그것도 블랙의 시선에서! 그래서 연재할 때는 범죄자와 블랙을 제외한 등장인물의 성격을 모두 바꾸었다. 세상에는 여전히 선한 사람이 대부분이며 능동적으로 제 삶을 살아간다. 세간에서는 판매량을 늘리기 위해 내용을 뜯어고친 게 아니냐고 했지만, 세월이 흐르면 사람도 바뀐다.
편지할 사람은 없지만, 받을 누군가가 있다면 첫 줄에 안부로 이렇게 쓸 수 있다. 지금의 나는 분명히 행복하다. 많은 사람이 소설을 읽어준다는 사실도 물론 기쁘지만, 마음을 이해하는 단 한 사람이 편집자로서 곁에 있지 않은가. 활자를 바라보는 눈동자는 여전히 두렵다. 그러나 시간으로 쌓아둔 신뢰는 두터웠다.
지금도 열심히 문장을 다듬는 편집자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더는 그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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