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개인로그
부슬비가 약한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나부끼듯 내리는 밤이었다. 사흘 째 오락가락하는 비에 도로며 건물이며 모든 것들이 축축이 젖어있었다. 바닥에 고인 얕은 물 웅덩이 위로 차의 헤드라이트며 건물 외부의 간판이 발하는 빛이 흔들거리며 떠다닌다. 잠시 그것에 시선을 두었다, 거의 내리지도 않는 비를 피하는 것처럼 건물 외벽의 튀어나온 장식 아래에서 오가는 사람들의 면면을 훑는다. 이반은 이렇게 한 발짝 빗겨 서서 타인들을, 그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와 소음과 풍경을 보고 있을 때면 마치 영화의 한 장면 끄트머리에 서서 지켜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영화를 본 것은 한 손으로도 꼽을 수 있는 횟수이지만, 비유하자면 그렇다는 뜻이다). 그러한 기분을 느낄 때면 이반은 제가 이 풍경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게 될 일은 영영 없을 거란 생각을 하곤 했다. 미국에서의 인간관계가 극도로 협소하긴 하나 전무한 것은 아니었음에도, 이반은 앞으로도 섞여들지 못할 거라 느꼈다. 근거에 대해 설명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그것은 허무맹랑하다면 허무맹랑한 직감에 의한 어떠한 예감이었기 때문이다.
이반의 눈에 비친 미국은 국가 간의 감정 따위를 배제하고 보았을 때에도 위선적인 곳이었다.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한데 녹아 뒤섞이는 멜팅 팟을 표방하면서도, 실상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다양한 인종이 섞여 사는 것은 맞았다. 그러나 그 인종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은 확연히 존재했고 주류인 이들은 ‘비주류’가 자신들의 자리를 넘보거나, 자신들보다 뛰어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반은 주류와도 같은 생김을 가졌을지언정 물 위의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 존재였다. 자신의 삶을 즐길 줄 아는 이들이 이반은 낯설었다. 가까워질 수 없다 생각했다. 이반은 이제 겨우 몸부림과 발악이 없는 삶에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여전히 똑같은 밑바닥일지 몰라도 잃었다고 생각한 길을 아주 희미하게, 보기 시작했다. 주류의 사람들이 당연하다는 듯 밟아오고 누려온 것들을 이반은 28년 가까이 모르고 살았다. 그 간극을 어떻게 메울 수 있을까.
웃는 얼굴로 스쳐지나가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길을 채운다. 투어라도 온 사람들의 행색이었다. 이반은 건물의 그림자 안으로 한 걸음 물러났고, 때마침 뒤에서 철퍽, 물 묻은 바닥을 딛는 터덜거리는 발걸음이 귓가를 두드린다. 이반은 몸을 돌려 골목의 안쪽에서 걸어 나오는 이를 마주했다. 간신히 노숙자의 행색은 면한 이의 꼬질한 몰골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찼다. 시선을 자꾸만 이곳저곳으로 돌리며 나타난 이는 이반에게서 약을 사가는 고객 중의 하나였다. 평소에도 손을 벌벌 떨어대며 산만하게 이리저리 눈을 돌리곤 했으나, 한층 더 산만해 보이는 모습에 이반의 고개가 설핏 기울었다. 골목 안으로 반 걸음쯤 발을 들이다 멈춰섰다. 사람들은 어둠 내린 골목이 마냥 캄캄하기만 할 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어두운만큼 골목은 빛에 예민했고, 때때로 물체의 윤곽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곤 했다. 산만하기 그지없는 제 고객을 앞세워 저 뒤에 몸을 숨긴 것은, 누가 봐도 마약쟁이를 구슬러 마약상을 잡으러 온 경찰이었다. 이반은 어이없다는 듯 실소했다.
“장난해요? 꼬리를 붙여왔잖아.”
“기, 기다려! 약! 내 약은 줘야지!”
이반이 약한 힐난조의 말을 내뱉기가 무섭게 골목 안 두 인영이 쫓아 나오기 시작했다. 이반은 미련없이 몸을 돌려 바글바글한 투어객들 사이를 밀치고 지나며 달리기 시작했다. 약같은 소리 하네. 꼬리를 줄줄 달고 온 주제에 약을 달라는 소리가 나오냔 말이다. 짜증스러움에 혀를 찬 이반이 큰 길을 달리다 맬컴 X 대로 옆으로 뻗은 웨스트 130번가로 몸을 돌렸다. 사람들이 많은 길을 다니면 몸을 숨기기에도 용이할 테고, 총을 맞을 일도 없을 테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반에게 장애물로 작용하기도 했다. 웨스트 130번가를 달려 모퉁이의 놀이터를 끼고 5번가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옆에 난 작은 샛길로 몸을 튼다. 골목을 가로지른 이반이 한 차례 더 몸을 틀었다. 시끌벅적한 큰길과 달리 조용한 골목 안으로 세 사람분의 발소리가 시끄럽게 울려퍼졌다. 꼬리를 달고 펍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이반의 머릿속에 지난 시간동안 익혀온 할렘의 뒷골목이 속속들이 떠오른다. 잡히면 곤란한 정도가 아니라 불법체류자 신세인 저는 추방일 터였다. 추방되어 고국으로 돌아간다? 그것은 이반에게 곧 죽음을 의미했다. 라스칼로프가 러시아로 돌아온 저를 살려둘 리가 없었다. 그것은 이반이 그에게 복수할 마음을 갖고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와 관계가 없었다. 쫓아낸 곳으로 돌아왔다는 것만으로도 이반은 살해당할 정당한 이유가 생기는 거였다.
경찰에게 쫓긴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동안 꼬리를 달고 나타난 정키들의 수는 몇 되었고, 그 때마다 이반은 이런 식으로 뉴욕의 이곳저곳을 헤집으며 달리기를 했어야 했다. 십 대 때에도 하지 않던 줄행랑을 지금 와서 해야한다는 게 우습기도 했고, 한 편으론 짜증이 났다. 여하튼 인생을 약에 던져버린 정키라는 것들은 제 뒤에 뭐가 따라붙는지도 모르고 눈을 시뻘겋게 해서는 약을 사겠다고 나타나, 사람을 이런 식으로 귀찮게 만든다. 끈질기게 뒤에서 따라붙는 발소리가 여전히 둘이었다. 이쯤 뛰었으면 하나 정도는 떨어져나갈 법도 한데. 이반은 달리는 속도를 멈추지 않으며 이 끈질긴 경찰들을 떨어뜨려야 할지 고민했다. 밤에만 움직이는 덕분에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단 차가 나는 골목 아래로 뛰어내리며 이쯤 뛰었으니 보다 좁은 건물 사이로 숨어들어 슬슬 경찰들을 따돌려보는 것이 좋을까 고민하던 참이었다.
옆의 건물 틈에서 새하얗게 빛나는 것처럼 파르란 손이 불쑥 튀어나와 어깨와 머리를 감싸 당겼다. 그리 힘이 좋아 보이는 손도 아니었다. 몸을 끌어당기는 힘은 솜털처럼 가볍게만 느껴졌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반은 종잇장처럼 딸려 들어간 것이다.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하고 잡혔다는 것 역시 믿기지 않았다. 희게만 보이는 손이 부드럽게 입을 덮어 가렸다. 쉬이. 내가 도와주겠습니다. 여성의 것인지 남성의 것인지, 젊은 사람의 것인지 늙은 사람의 것인지 정확히 분간할 수 없는 기이한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임을 만들어냈다. 이반은 그 기묘함에 뿌리치려던 손을 멈추었다. 다급한 발소리가 점차로 가까워진다. 그림자에 잠긴 탁한 녹안이 어둠 속에서 느릿하게 팔락였다. 두 남자가 건물 틈바구니를 빠르게 스쳐 지난다. 이반은 저를 쫓는 경찰들의 얼굴을 처음으로 볼 수 있었다.
멀어지던 발소리가 이윽고 완전히 잦아들고, 이반은 저를 쫓던 경찰들이 상당히 멀어졌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손을 거둬가라는 의미로 입을 가린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몸을 편히 돌리기에도 좁은 골목이었다. 이반의 시선은 여전히 건물 밖을 향한 채였다. 희미한 베리 류의 향이 코끝을 맴돌았다. 이반은 긴장을 놓지 않았으나 제 뒤의 정체모를 사람이 제게 우호적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서서히 호흡의 속도를 늦춰가며 숨을 가라앉힌다. 이반이 숨을 고르는 것을 기다려주기라도 했던 듯, 이반의 호흡이 잦아들자 예의 목소리가 다시 귓가를 맴돌았다.
"당신은 여기서 이런 일로 잡혀 들어갈 사람이 아닙니다. 당신에게는 이보다 더 중요한 업이 안배되어 있어요."
이반은 박장대소하지 않기 위해 숨을 참았고, 짧게 조소했다. 이게 무슨 밑도 끝도 없는 허무맹랑한 말이란 말인가. 마치 사이비 종교의 교주가 할 법한 말이란 생각이 들었다. 믿지 않는 이반의 반응을 눈치 챈 것인지 하얀 손이 한쪽 어깨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어딘가 서늘하게 느껴지는 손이었다.
"나는 멸망으로부터 당신을 구원하기 위해, 당신의 할 일을 알리기 위해 내려왔습니다."
"퍽이나 그렇겠네요."
낮게 깔려드는 비아냥이 날카로웠다. 바람을 타고 나부끼던 부슬비는 건물 틈을 가리지 않고 깊이 스며든다. 젖은 공기가 서늘하게 이반의 코끝을 스쳤다. 심장이 덩달아 서늘하게 식어내린다. 그러지 않아도 요즘의 뉴욕은 다가오는 멸망으로 소란스러웠고, 그 멸망이라는 것을 이용해 사람들의 약해빠진 마음을 파고들어 등쳐먹는 일이 빈번했다. 등 뒤의 목소리가 그런 부류의 사람은 아닐 거라는 것을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 해서 이반의 신뢰가 증가하는 것은 아니다.
"증명 해봐요. 나는 얼마 전에 믿음이란 걸 다 버렸으니까."
"……이렇게 증명하면 믿겠습니까? 내가 당신과는 다른 존재라는 것을."
어깨 위에 올라와 있던 손이 이반의 눈앞으로 내밀어졌다. 여성의 것처럼 가늘고 긴 손이었다. 그리고, 뒤를 이어 벌어지는 일에 이반은 제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하얀 손이 공기 중에 녹아들듯 사라졌다. 가장자리서부터 풀어지듯 엷어져 온전히 사라져버린 것이다. 손을 들어 보도록 해요. 여전히 뒤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이반은 저도 모르게 한 손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보이지 않는 무형의 손이 깍지를 껴 손을 잡아온다. 이반의 손끝이 움찔 떨렸다. 여전히 보이지 않았으나 또렷하게 느껴졌다. 서늘한 손의 감각이.
"이게…"
"능력입니다. 당신이 나를 받아들인다면 갖게 될 힘이죠."
"…가진 이후엔?"
"7월에 다가올 멸망을 위해 빌려주는 것입니다. 당신은 그 때 멸망을 위해 싸워줘야 해요."
또다. 그놈의 멸망. 멸망이라는 것이 과연 진정으로 일어날 일이라는 건가. 이반은 코웃음을 쳤지만, 여전히 선연한 손의 촉감을 느끼고 있는 이상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 일을 일으킨 존재가 하는 말을 마냥 무시할 수도 없었다. 한편으론 보이지 않게 되는 이 능력이라는 것이 제게 상당한 도움이 될 거란 생각 역시 들었다. 오늘과 같은 상황에서 유용하게 쓸 수 있으리라. 이반은 보이지 않는 손을 스르륵 놓았다.
"아까 나를 구원하기 위해 내려왔다고 했죠. 하지만 당신이 하려는 게 적어도 진짜 구원은 아닐 거예요. 내가 시궁창을 굴러온 게 몇 년인데, 이제야 나타나서 구원이니 뭐니 떠들어요?"
"당신의 삶 역시 처음부터 안배되어 있던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영역의 일이죠."
허울 좋은 구실이다. 누구든 대충 주워섬길 수 있는 대답이었다. 이반의 입매가 사늘하게 비틀렸다. 누군가의 삶은 시궁창을 구르도록 안배되어 있고, 또 다른 누군가의 삶은 부와 권력에 둘러싸여 호의호식하도록 안배되어 있다는 말인가. 그딴 게 신의 안배라면 이반은 신의 안배가 켜켜이 쌓여 만들어진 이 곳을 충분히 증오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물을 게 있어요."
"얼마든지."
"멸망을 위해서 어떻게 싸우라는 뜻인지, 솔직하게 말해요."
"당신은… 멸망이 이루어지도록 싸우면 됩니다."
이반이 이를 드러내듯 웃었다.
"그거면 됐어요."
건물 틈 밖으로 걸어 나가는 이반의 뒤에서 무언가 털썩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볼 필요 없습니다. 이제 가치를 잃은 껍데기일 뿐입니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려는 이반의 시선을 나직한 목소리가 붙잡는다. 그와 동시에, 이반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신경질적인 외모의 남자였다. 그의 뒤로 펼쳐진 새카만 여덟 쌍의 날개가 탁한 녹안을 가득 채웠다. 이반의 새로운 구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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