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렵제

까마귀가 우짖는 밤

au픽션


왕이 마음을 잃고 광기를 띄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인지, 사람들은 종종 궁금해하곤 했다. 날 때부터 미친 사람이 어디있겠어. 뭔가 계기가 있었겠지. 왕의 광기가 처음 고개를 치켜들었을 때 일부 사람들은 왕을 동정했다. 일국의 정점에 서는 자리가 마냥 가벼운 자리만은 아니니 광기에 휩싸이는 것도 아주 불가능한 일도 아니라는 게 그들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왕의 광기는 끝을 모르고 날뛰었고, 어느 시기를 기점으로 왕을 향한 동정론은 깨끗하게 자취를 감추었다. 왕의 신경을 거스르는 자는 모조리 죽어나갔다. 왕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아도 왕이 원하면 죽는 것이 왕궁의 삶이었다. 무자비한 왕의 검 끝이 저를 겨눌까 사람들은 두려움에 몸을 떨었고, 왕국의 백성들은 자신들을 돌보지 않는 나라의 아비에게 불만과 원망을 쌓아갔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들은 푸르카스를 두고 운이 좋았다 한데 입을 모았다. 왕에게 날카로운 충언을 건네고도 목숨을 잃는 대신 변방의 작은 마을로 귀양을 오게 되었으니 말이다. 푸르카스가 왕궁에서 쫓겨난 것이 벌써 햇수로 십 년을 넘겼다. 왕의 광기가 본격적으로 혀를 날름거리기 전이었다. 혹은 그저 왕의 단순한 변덕이었을는지도 몰랐다. 자비로운 얼굴로 내 너를 살려주마, 속삭였다가도 다음 날이면 뎅강 잘려나간 목이 처형장의 흙바닥을 뒹굴었다. 푸르카스는 왕의 광기를 일찍이 경계했다. 그리하여 아름다운 왕이 광기에 잡아먹히지 않도록 이런저런 방책을 궁리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었다. 왕에게 내재된 광기의 씌앗은 푸르카스의 노력을 비웃듯 일찍이 싹을 틔웠고 순식간에 거대하게 자라났다. 

 

나라 끝의 변방은 소식이 항상 늦었다. 느리지만 푸르카스는 수도의 정세에 대해 항상 귀를 열어두었다. 정기적으로 집안의 사용인이 은밀하게 찾아와 소식을 전했다. 근위대장 라노테 라니에리의 참수 소식이 닿은 것은 그의 머리가 이미 꺼죽하게 썩어내린 뒤였다. 소식을 접한 푸르카스는 이제 진정으로 왕을 구원할 방도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왕은 사람으로서의 마음을 완전히 잃었다. 그를 움직이는 것은 광기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는 왕이 아닌 나라를 생각해야 할 때가 다가온 것이다. 푸르카스는 며칠 밤낮을 궁리했다. 저는 이 곳에 발이 묶인 몸. 수도에선 이미 왕을 몰아내기 위한 움직임이 은밀히 일어나고 있었다. 그들과 접촉할 수만 있다면, 그들과 함께 움직일 수만 있다면 왕을 몰아내는 것에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푸르카스는 항상 제게 따라붙는 짙은 녹안을 떠올렸다. 그는 왕명을 받고 푸르카스가 허튼 짓을 하지 않도록, 혹여나 반역을 꾀하지 않도록. 달아날 수 없도록 만드는 인간 족쇄였다. 그런 명을 내렸던 적이 있음을 지금의 왕은 과연 기억하고 있을까. 

 

푸르카스는 종종 이반을 동정했다. 자신을 감시한다는 명목으로 변방에 함께 온 자이다. 좌천이 아니고 무어란 말인가. 또한 푸르카스는 이반을 동정했다. 그가 품고 있는 마음을, 답을 줄 수 없는 자신을 마음에 품은 것을. 집안의 사용인이 은밀히 찾아와 수도의 소식을 전할 수 있는 것도 이반의 재량 덕분이었다. 푸르카스는 이반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교묘히 이용했다. 이반 역시 푸르카스가 자신을 이용한다는 것을 알았다. 푸르카스의 마음에 제가 아닌 다른 이가 자리하고 있는 것 또한 알았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란 것은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이반은 푸르카스가 그런 식으로라도 저를 필요로 한다는 것에 위안을 얻었다. 

 

왕의 광증이 날로 심해지는 것을 들을 적마다 이반의 마음 한 구석엔 불안이 자라났다. 왕이 푸르카스의 존재를 잊어버렸길 기웠했다. 그러나 왕은 광기에 삼켜졌을지언정 본디 가진 영민함을 잃지는 않았다. 이반은 어느 날 제 앞으로 떨어져내린 왕의 칙서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칙서는 말하고 있었다. 간교한 혀를 놀려 왕의 심기를 어지럽혔던 문신 푸르카스의 목을 수도로 가져오라고. 이반은 감히 왕의 칙서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잔인했다. 잔인해도 너무나 잔인했다. 마음에 담은 이의 목을 어찌 손수 쳐 그 머리를 안고 수도로 돌아갈 수 있겠는가. 기한은 사흘이었다. 당장 내일 출발하지 않으면 사흘이란 기한을 맞출 수 없었다. 이반은 밤이 깊도록 책상 앞에 못 박힌 듯 앉아 궁리했다. 모든 경우의 수를 따져보아도 결국 도달하는 결말은 단 하나였다. 

 

달도 구름에 모습을 감춘 칠흑같은 밤이었다. 이반은 단검을 챙겨들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푸르카스의 방을 찾았다. 창백한 가운데 선연히 빛을 발하는 눈이 의문을 담고 있었다. 왕이 당신의 목을 원해요. 내뱉어지는 목소리는 건조했다. 잠시 눈을 내리깔았던 이반은 고개를 들어 다홍빛 눈을 마주했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은 채 이반은 말을 이었다. 나는 잠든 당신의 목을 노리고 방에 찾아왔어요. 하지만 이상함을 느낌 당신이 깨어났고, 몸싸움 끝에 칼에 찔린 것은 나에요. 그리고 당신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달아날 거예요. 마침 달빛도 없는 밤이니까요. 푸르카스는 아무런 반응도 않은 채 가만히 이반을 마주했다. 저승에서도 목 없는 당신은 만나고 싶지 않네요. 피식 웃은 이반이 검 끝을 제 가슴에 겨누었다. 내뱉은 한 호흡 끝에 날카로운 단검이 가슴뼈를 부수고 펄떡이는 심장을 갈랐다. 느리게 번지는 핏자국을 보던 푸르카스가 몸을 일으켰다. 초점 잃은 탁한 녹안을 눈꺼풀 아래로 감겨주었다. 한 줌의 동정을 내려놓은 푸르카스는 간단히 제 짐을 챙겼다. 수도로 가 제 연인을 만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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