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렵제

개인로그


마약상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을 무작정 죽일 수 있는 인내심이다(물론 반은 우스갯소리다). 특성상 일일이 방문을 할 수도, 광고를 할 수도 없으니 한 장소를 암묵적으로 정해두고 고객들이 찾아오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일이었다. 이반은 특별한 일 없이 시간을 죽이는 것에 이골이 날 정도로 익숙해져 있었고, 며칠 전의 기다림 역시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건물 사이, 교묘하게 얼굴이 가리워지는 위치에 기대선 채 팔짱을 끼고 있는 이반 앞으로 나이든 남자 하나가 다가와 멈췄다. 마약상으로 오래 일을 하다보면 자연스레 익히게 되는 것이 있었다. 얼굴을 마주하는 상대가 약에 중독이 되어있는지, 되어있지 않은지. 물론 그 눈이 모든 약쟁이들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반의 감은 대체로 맞아 들어가는 편이었다. 이반은 제 앞에 선 남자의 얼굴을 마주했다. 남자는 약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장년의 남자를 경계하는 탁한 녹안이 예리했다.

 

"자네가 이반이지?"

"……"

"알렉세이가 이곳으로 오면 있을 거라 일러줬어. 그리고 자네가 믿지 않을 거라고도 했지."

"알렉세이가 그 말만 하진 않았을 텐데요."

 

무언가를 더 요구하는 이반의 어조에 껄껄 웃음을 터트린 남자가 그랬지, 그랬어. 하고 이반의 말을 받았다.

 

"자네의 휴대전화 단축번호 4번이 자기라던데. 맞나?"

 

이반은 제 단축번호 리스트를 생각했다. 단축 번호로 등록된 사람은 한 손에 꼽을 정도―애초에 주소록에 저장된 번호 자체가 적었다―였고 4번은 알렉세이가 맞았다. 이반의 미간이 잠시간 좁혀들었다. 누구길래 제가 거래를 위해 찾는 장소까지 알려주는 건지, 못마땅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리라.

 

"조만간 44번으로 옮기려구요. 그래서, 누구세요?"

"앨런 타일러라고 하네. 알렉세이가 미국에 왔을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지."

 

알렉세이의 인간관계에 대해 관심을 둔 적은 없었다. 알렉세이 역시 이반과 그런 이야기를 굳이 나누지 않았다. 그랬기에 이반은 자신이 거래하는 장소까지 알려줘 가며 만나도록 만든 앨런 타일러라는 이 장년의 남자에게 호기심이 일었다. 장년임을 감안했을 때 남자는 체격이 다부졌다. 흰머리가 성성했고, 짧게 깎은 수염이 턱에 돋아있었다. 전체적으로 편한 동네 아저씨 같은 느낌을 내고 있었으나 이반은 그의 그런 모습이 어딘가 인위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작은 총포상을 하고 있네."

"평범한 총포상이면 알렉세이가 날 소개시켜주진 않았을 테고. 또 뭘 하죠? 밀매?"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되어서 좋군. 주로 멕시코 카르텔과 거래하고 있네."

 

그거였군. 짧은 대화로 이반은 알렉세이가 앨런에게 저를 소개시킨 이유를 쉽게 유추해냈다.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건너오기 직전까지 무기 밀매에 주로 손을 대던 것을 알고 앨런과 저를 연결시켜준 것이다. 멕시코 카르텔은 기본적으로 거래의 규모가 큰 편이었으나, 이반은 그들은 썩 좋아하지 않았다. 거래를 위해 만나 본 멕시코 카르텔의 인간들이란 하나같이 성격이 더러웠다. 계속 이 곳에 서서 할 이야기는 아니라는 생각에 이반이 걸음을 뗐고, 앨런이 자연스럽게 보조를 맞춰 나란히 걸었다.

 

"밀매에는 손 뗐다고 알렉세이가 말하지 않던가요?"

"했지."

"그런데도 굳이 날 찾은 이유는요."

"나도 이제 나이가 많이 들었는데, 주변에 총포상을 넘겨줄 만한 사람이 없더군. 알렉세이에게 혹시 주변에 인재가 없냐 물었더니 대번에 자네 이름을 꺼내던데."

 

헛웃음을 터트린 이반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펍으로 돌아가면 알렉세이가 소중히 모셔놓은 술 컬렉션들을 모조리 비워 보이리라. 솔직히 말하면 무기 밀매는 이제 지긋지긋했다. 러시아에서 일리야를 보조했던 주세 탈세 건을 제외하곤 이반의 손을 거친 일들은 모두 다 무기 밀매에 관련된 일들이었다. 저를 미국에 오게 만든 일도 무기 밀매가 아니었던가. 그런 일에 또 손을 대라니, 질이 나쁜 농담이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그것 외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달리 없다는 것 역시 간과할 수 없었다. 한 번 밑바닥에 떨어진 인생은 저가 발 딛은 땅을 벗어나기가 어렵다. 이반이 몸담은 세계는 출렁이는 물이 아닌 늪이었다. 빠져나가는 것보다 가라앉는 것이 쉬운 그런. 약간의 선득함을 품은 이른 봄바람이 옷자락 사이를 스치고 흘러간다. 이반은 고개를 돌려 앨런을 쳐다보았다.

 

"내가 미국에 오게 된 이유도 말 하던가요?"

"그건 듣지 못했는데."

"무기 밀매 때문이었어요. 큰 건을 물었더니 보스라는 작자가 겁을 먹고 내쳤죠."

 

담담한 이반의 눈을 빤히 보던 앨런이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이반은 그의 반응이 쉬이 이해가지 않아 고개를 기울였다. 대체 어느 부분이 웃긴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꼬리를 말고 이제 밀매에는 손대지 않겠다? 자네가 윗사람이 되면 내쳐질 이유가 없잖은가. 오래 해 온 일이라던데. 그것 외에 자네가 할 수 있는 일은 달리 있나?"

 

정곡이었다. 이반이 평생 해 온 것은 빼앗고, 훔치고, 짓밟고, 법의 그늘 아래에서 법을 비웃으며 움직인 일 뿐이었다. 앨런의 말대로 그것 외에 저가 할 수 있는 일이 달리 뭐가 있을까. 한번 빠진 늪에서는 벗어날 수 없다. 이반의 도톰한 입술에 자조적인 웃음이 맺혔다 뚝 떨어져 내렸다.

 

“아프네요, 너무 제대로 찔려서."

 

앨런은 껄껄 웃었다. 이반은 그에게서 인위적이란 느낌을 받았던 이유를 깨달았다. 그 역시 늪에 깊이, 아주 깊이 몸을 담근 이였다. 평생을 늪에서 살아온 악어와도 같은. 이반은 조금 허탈하게 웃었다. 하여튼 주변에 득시글거리는 것이라곤 눈을 내놓고 언제든 아가리를 벌릴 준비를 하고 있는 악어들뿐이다. 저 역시 그들과 똑같은 생김을 하고 있는데, 늪을 벗어나 양지로 나아가려 했다. 잠시 헛된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그 일을 넘겨받거나 돕고 싶지는 않아요."

"생각할 시간이라면 얼마든지 줄 수 있지. 자네가 결국은 내 손을 잡을 거라는 걸 알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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