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구원
개인로그
악마는 교만을 먹고 자랐다. 혼돈한 존재인 인간의 교만함이 악마의 배를 채웠고, 힘을 키웠다. 사실, ‘자랐다’는 표현에는 어폐가 있었다. 어린 시절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당연히 자랐다는 표현 또한 맞지 않았다. 악마는 '자랐다'는 말이 가진 어감을 그리 싫어하지 않았다. 자란다는 것과 강해진다는 것은 그 두 가지를 관통하는 공통적인 의미의 조각이 있었으므로. 악마는 새로운 날개 한 쌍이 피어날 적마다 그 다음의 날개를 염원했다. 끊임없이 욕망하고 갈구했다. 힘을 갈구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세상에 난 이상 모든 존재는 끊임없이 갈구하고 욕망한다. 물질계에서 신의 말씀을 전한다 하여 성직자의 이름을 업은 이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제 앞에서 무릎을 꿇고 무거운 존재감에 짓눌려 영겁의 시간 속에 갇힌 성직자들이 몇이던가. 탐욕에서 비껴난 존재라고 해 봐야 개목걸이를 걸고 목줄을 바치며 신의 충실한 종이 되기를 자처한 천사들 정도일까. 그러나 악마는 충성 또한 하나의 갈구에 지나지 않는다 생각했다. 우러러 보는 존재의 애정 또는 관심을 결국은 갈구하게 되지 않던가. 푸르카스는 갈구하는 존재에게서 드물게 애정을 느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애정愛情이라기보다는 애완愛玩에 가깝다 칭해야 하리라.
처음 물질계로 발을 딛고 제 힘과 권능을 물질계에 투영시킬 수 있는 동조자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운이 좋게도 가까운 곳에서 거대하고 끊임없는 갈구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삶을 향한 거대하고도 큰 욕망이 마르고 약한 몸 안에 한가득 고여 있었다. 그녀는 비유하자면, 터지기 직전의 풍선이었다. 몸이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갈구가 독이 되어가고 있음을 그녀만이 몰랐다. 매일 밤마다 내일 하루를, 이틀을, 사흘을 나흘을 닷새를 살게 해 달라 비는 기도는 그녀가 찾는 신이 응답하기엔 너무나 탁하고 어두웠다. 그래서 푸르카스는 어울리지 않는 휘광으로 그녀의 눈을 속이고 기도하는 손을 잡아주었다. 그녀만을 위한 신인 양 굴었다. 약해진 인간의 마음은 틈이 많았다. 스며드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매일 밤 가녀린 몸을 이끌고 지옥에서 자주 올려다보았던 인간세상의 밤거리를 휘저었다. 푸르카스를 신이라 맹목적으로 믿는 그녀에게서 몸의 주도권을 넘겨받는 것은 손가락을 까딱이는 것만큼이나 쉬웠다. 푸르카스는 제가 입은 껍데기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그녀와의 동조율도 높았고, 주도권을 내주는 것과 동시에 그녀의 의식은 알아서 물 밑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다. 말 그대로 그녀는 푸르카스에게 모든 주도권을 넘겼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너무나 나약한 몸이라는 점이었다. 푸르카스가 그녀의 몸을 이끌고 밤거리를 휘젓고 나면, 그녀는 금세 열병을 앓았다. 침대에 누워 쌕쌕거리며 푸르카스에게 사과했다. 저가 사과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천사님의 일에 방해가 되어 죄송하다 했다. 푸르카스는 방 한구석의 그림자 진 어둠 속에 숨어 그녀를 가만히 쳐다볼 뿐이었다.
이후 그녀는 다시 홀로 밤을 보내는 일이 잦아졌다. 푸르카스는 그녀를 남겨두고 물질계의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새로운 동조자를 찾아야 했다. 높은 동조율과 그녀의 고분고분한 성정이 아쉬웠으나, 보다 강하고 튼튼한 껍데기를 찾아야 했다. 그녀의 몸은 다가올 멸망 이전에 스러질 것이 뻔했고, 설령 멸망의 날을 맞이한다 하더라도 금방 쓸모가 없어질 터였다. 쓸모없는 껍데기에게 오래 머물러있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물질계를 가득 메운 혼돈한 에테르가 활짝 편 날개를 스친다. 위태로운 기운에 감싸인 느낌이 인간의 표현을 빌려 짜릿한 것도 같았다. 위태로움은 나쁘지 않았다. 묘하게 호승심을 자극시키는 데가 있었기에. 여덟 쌍의 날개가 짙은 밤하늘을 갈랐다.
"왜 저는 투명해지는 능력을 얻게 된 거예요?"
사흘 째 흐린 날이 계속되고 있었다. 가족이라는 것에게 외출을 금지당해 침대에 베개를 받치고 기대앉은 그녀가 묻는다. 침대 가에 선 푸르카스는 평소와 다르게 손을 뻗어 그녀의 금발을 쓰다듬듯이 움직였다. 물론 실제로 그녀의 머리카락에 닿지는 못하였으나, 이 나약한 동조자는 푸르카스가 인간의 행동 양식을 배워 흉내 내는 것을 좋아했다.
"존재를 지워버리는 권능에서 비롯된 것이겠죠."
"존재를 지운다는 게 어떤 거예요? 그냥 이렇게 투명해지나요?"
"존재가 지워지면 이 세상에 관련되어 있는 존재 모두에게 아무런 영향력도 끼칠 수 없게 되는 겁니다. 지금의 나처럼요."
푸르카스가 손을 들어 그녀의 이불을 움켜쥐듯 움직였다.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 이불을 내려다보며 그녀가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작게 끄덕여지는 머리를 내려다보는 다홍색 눈에 무감한 빛이 가득이었다.
"오늘 몸을 빌려줄 수 있겠습니까?"
"얼마든지요. 부모님이 꼼짝도 말라고 하셨지만, 오늘은 유난히 몸도 가벼워요. 날아갈 것 같아요."
온순하게 몸의 주도권을 내려놓는 그녀의 몸으로 스며드는 푸르카스의 입매가 희미하게 비틀렸다. 그녀를 대신할, 새로운 동조자로 점찍은 인간이 활동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그는 밤에 익숙했고, 또한 어둠에 몸을 담그고 사는 이였다. 푸르카스는 예감했다. 새로운 동조자가 될 인간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악마를 받아들일 것이라고. 이불에 덮여있던 가녀린 다리를 침대 아래로 내려 일어선다. 나약한 껍데기를 입는 것도 오늘로써 마지막이다. 푸르카스를 담은 창백한 몸이 소리 없이 움직인다. 부슬비가 약한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나부끼듯 내리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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