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렵제

Linkman

with. 레이먼드


오후 다섯 시가 지나야 느지막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일반적이던 알렉세이가 평소와 달리 직원들이 출근하기도 전에 펍 Holyoke의 문을 열었다. 가게의 문을 열었음을 알리는 팻말은 여전히 Close에 머물러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낡은 가죽 수트케이스를 든 다부진 체격의 사내가 아무렇지 않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바 안쪽에서 차갑게 얼어 농도가 짙어진 보드카를 따르던 알렉세이의 시선이 사내의 서글서글한 얼굴에 가 닿는다. 오랜 친구를 맞이하는 듯한 미소가 이내 알렉세이의 얼굴 위로 번져나갔다.

 

"그 얼굴은 여전하네, 전직 형사 나리."

"그렇게 말하는 얼굴은 전보다 좀 더 늙은 것 같은데."

 

인사를 주고받는 목소리엔 퉁명을 가장한 반가움이 묻어났다. 알렉세이는 방금 따라두어 보얗게 성에가 낀 잔을 사내에게로 슥 내밀어 주곤, 새로이 제 몫의 술을 따랐다. 그 사이 입은 벌써 의문을 줄줄 흘려내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펍을 찾아오겠다 연락한 이유의 배경이 너무 궁금한 탓이었다.

 

"그래서, 이반을 찾고 있다고? 이반은 어떻게 알았어? 나 모르게 사고라도 쳤나, 그 녀석."

"요즘 취재 중인 건이 있는데, 정보원이 말하길 이반이라는 딜러가 거기 관련된 인물을 알고 있다더라고. 근데 그 이반이라는 딜러가 너랑 일한다기에 연락한 거지."

"이반이? 그 자식이 뉴욕에서 알 만한 사람이 많지 않을 텐데."

 

알렉세이는 진심으로 의문스러운 얼굴이 되어 술잔을 비웠다. 러시아에서 뉴욕으로 쫓겨 온 이반은 알렉세이 자신이 러시아에서 보았을 때보다 더욱 날카로워져 있었고, 일적으로든 사적으로든 사람에게 곁을 내주려 하지 않았다. 저를 거치지 않은 사람은 잘 만나지 않았다. ―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것이 어쩌면 제 오산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뉴욕에 온 지 어느덧 제법 시간이 되었고, 이반은 더 이상 자신이 교도소 안에서 보았던 십 대의 아이가 아니었다.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으나 십여 년이 지난 후 만난 이반의 모습이 내심 불안했으므로 알렉세이는 은연중에 아직까지도 이반에게 어리던 모습을 겹쳐보고 있었다. 알렉세이는 뉴욕에 온 직후의 이반을 떠올렸다. 러시아의 겨울을 그대로 묻혀온 듯 싸늘함이 안팎으로 가득해 그러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한편으론 언제든 허드슨 강물에 몸을 던져버릴 것만 같았다. 지금이야 그 싸늘함이 많이 무뎌졌다곤 하나 이반의 뿌리 깊은 불신은 여전했다. 뉴욕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돕고 있는 제게도 믿음을 주지 않았으니, 말은 다한 셈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레이먼드 자네니까 만나게 해주긴 할 텐데, 이반은 별로 좋아하지 않을 거야. 기자인 것도 안 좋아할 텐데 전직 형사였다는 것까지 알면 더."

"어차피 기자로 만나러 온 거니까 형사였던 걸 밝힐 일은 없겠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하는 레이먼드를 보며 알렉세이는 걱정을 사서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레이먼드에겐 밝히지 않았지만 이반은 자신이 일찍 부른 이유에 대해서 모르고 오는 중일 터였다. 기자가 취재 때문에 만나고 싶어 한다는 말을 전하면 그 즉시 이반은 한 며칠 잠수를 탈 게 뻔했으므로. 이반을 뭐라고 살살 구슬리면 좋을지에 대한 궁리는 꼬리에 꼬리를 물어 레이먼드와 이렇게 얽히지 말았어야 했다는 곳까지 닿았다. 심한 비약이었으나 알렉세이는 그 정도로 골치가 아팠다. 알렉세이에게 이반은, 비유하자면 골칫덩어리 애증의 조카 같았고(이반이 알았다간 분명 제 머리에 바람구멍을 내려 할 게 뻔했다) 레이먼드 또한 마찬가지로 골칫덩어리의 버릴 수 없는 무언가였다(지긋지긋해서 그만보고 싶은데 미운 정이 들어버려 안보이면 찝찝했다). 때문에 알렉세이는 이 골칫덩어리 두 사람을 연결시켜주어야 하는 제 불우한 신세를 탓했다.

 

레이먼드는 알렉세이가 미국에 건너와 러시아에서의 삶을 청산하려다 제 버릇 남 못 준다고 마약상 일에 손을 대는 과정에서 만난 악연이라면 악연이었다. 당시의 그는 뉴욕 경찰국 소속의 형사로, 맞닥뜨리는 순간 알렉세이는 자신의 아메리칸 드림이 그대로 끝을 맞이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레이먼드는 밥줄을 끊지 않을 테니 정보원으로 일해 달라 먼저 제안해왔고, 추방당하거나 또 감옥살이를 하고 싶지 않았던 알렉세이로서는 당연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이 올해로 팔 년이던가, 구 년이던가. 여하튼 미운 정이라도 정이라고 차곡차곡 쌓일 정도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레이먼드가 돌연 형사를 그만 두고 일 년간 연락이 없다 싶더니 어느 날 불쑥 기자의 명함을 들고 찾아왔을 때, 알렉세이는 저 스스로도 어이가 없을 정도로 그가 반가웠다. 그 반가움을 너무 드러낸 덕분에 아직까지도 종종 그에게 이런저런 정보를 물어다 주는 신세가 되긴 했지만 말이다.

 

"아이고, 난 모르겠다. 이반은 직접 잘 구슬러 봐."

"그렇게 골칫덩어리 딜러야? 성격이 이상한가?"

"뭐 그렇다기 보다…"

 

문에 달린 종이 딸랑이는 소리에 알렉세이는 그대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어, 왔냐. 알렉세이의 어색한 인사와 함께 고개를 돌린 레이먼드의 시선이 이반과 마주쳤다. 알렉세이가 혼자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이반은 예상치 못한 낯선 인물의 등장에 엷은 경계를 띄며 가까이 다가왔다. 당연하다는 듯이 이반 몫의 술을 건넨 알렉세이가 닮은 듯 확연히 다른 두 쌍의 녹안을 번갈아 보았다.

 

"이반, 이쪽은 레이먼드 피셔라고 내가 오래 알고 지내던 친구야. 레이먼드 자네한텐 따로 소개하지 않아도 되지?"

 

이반이 따로 소개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눈빛으로 묻는 사이 레이먼드는 제 명함을 꺼내 이반에게로 슥 밀었다. 제게로 내밀어진 것에 시선을 주었던 이반의 미간이 설핏 찌푸러들었다. 예상했던 반응에 알렉세이는 내심 속으로 긴장했다. 그러나 이반은 어쩐 일로 알렉세이의 그 다음 예상을 깨트리고 제게 건네진 술잔을 비운 다음 명함을 집어 들어 찬찬히 훑었다. 드디어 좀 정상적인 사람처럼 굴려는 건가. 이반이 알았다면 당장에라도 총을 꺼내 들 생각을 하며 알렉세이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손님이 있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내가 알렉세이에게 말하지 말아달라고 했어요. 한 번 만나고 싶었는데 기자라고 하면 안 나타날까 봐요.”

“나를 왜요?”

 

이반의 얼굴이 의문을 품고 알렉세이와 레이먼드를 번갈아 보았다. 알렉세이에게 무슨 작당을 했느냐 추궁하는 눈빛을 해 보인 이반이 레이먼드의 얼굴을 보고서는 무언가 기억을 더듬듯 희미하게 가늘어졌다. 레이먼드는 이반의 경계가 조금이라도 허물어지길 느긋하게 기다렸고, 온화한 표정 아래 가려진 깊고 날카로운 눈매를 마주하며 기억을 뒤적이던 이반의 눈빛 위로 짧은 깨달음이 스쳐 지났다. 이반은 레이먼드 피셔라는 이 남자를 알고 있었다.

 

“새벽에 종종 조깅하죠? 피셔 씨."

"그냥 레이먼드라고 불러요. 근데 내가 조깅하는 건 어떻게 알아요?"

"조깅하면서 가끔 마주치거든요, 우리."

 

레이먼드는 매일 마주치는 상대가 아니어서 되레 이반의 기억에 남아있었다. 마주칠 때마다 저렇게 드문드문 조깅을 해서 운동이 되는가를 생각했던 적이 있었으므로. 그렇게 띄엄띄엄 조깅한 것 치고 레이먼드 피셔는 근육이 짜임 있게 몸을 감싸고 있었고, 다부지고 잘 단련된 몸을 갖고 있었다. 이반은 문득 알렉세이와 동년배쯤으로 보이는 사내의 젊은 시절이 궁금했다. 알렉세이가 기자를 알고 있다는 것도 어딘가 이상했고, 레이먼드의 몸은 그냥 기자의 몸이라고 하기엔 너무 잘 만들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 레이먼드 피셔는 젊은 시절 운동 선수였거나, 몸을 많이 쓰는 다른 직업을 갖고 있던 게 아니었을까. 여하튼 이반의 중요한 의문점은 그게 아니었다. 사회·범죄부 기자가 일개 마약상에 불과한 저를 어떻게 알고 있으며, 무엇 때문에 찾아왔느냐 하는 것이었다.

 

"조깅하면서 한 번씩 보던 얼굴을 이렇게 마주칠 줄은 몰랐네요."

"나도 우리 사이에 그런 인연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이반은 서글서글하게 웃는 레이먼드의 미소를 쳐다보았다. 마치, 그런 사소한 인연이라도 있으니 질문을 조금 더 편히 할 수 있겠다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미소였다(혹은 단지 기자에 대한 이반의 편견이거나). 어쩐지 유난히 조용해진 알렉세이가 또 한 잔의 보드카를 비운다. 이반의 시선이 짧게 알렉세이의 얼굴에 닿았다 멀어진다. 묘하게 움직임이나 표정이 어색했다.

 

"두 사람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까 사무실로 옮기는 게 어때? 가게 열 시간도 다 됐고 하니."

"하긴. 그게 서로 방해되지 않고 좋겠는데. 이반, 괜찮다면 사무실로 자리를 옮길까요?"

"…지금 이게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좋아요. 옮겨서 이야기 듣죠."

 

때마침 출근하는 직원 두엇을 본 알렉세이가 들어가 보라는 듯 사무실을 향해 손짓했다. 앞장 선 이반이 익숙하게 문을 열고 들어섰고, 뒤따라 들어온 레이먼드가 응접용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등허리를 곧게 편 바른 자세가 인상적이었다. 마치 정석적으로 올바른 자세의 틀 따위에 끼워 넣었다 뺀 것 같았다. 이반은 머릿속으로 레이먼드 피셔에 대해 자기관리가 꾸준하거나, 꾸준했을 사람이라는 꼬리표를 달았다. 자세는 그 사람의 무의식을 상당히 반영하기 때문에, 꾸며낸 것이라면 의식하지 못한 사이 쉽게 허물어진다. 하지만 레이먼드는 바의 스툴에 앉아있을 때부터 자세가 곧고 발랐다. 모르긴 몰라도 책상 앞에서 오래 앉아있었을 몸은 아닌 듯싶었다. 반듯하게 각 잡힌 자세를 유지하는 일을 했었나? 이반이 저만의 생각에 잠긴 사이 레이먼드는 낡은 수트케이스에서 익숙하게 수첩과 펜을 꺼내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인터뷰를 하려는 것처럼 보이는 레이먼드의 태도에 이반은 의문을 품은 채 맞은편 자리에 앉아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모종의 준비를 마친 듯한 레이먼드의 청록색 눈이 이반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요즘 취재 중인 건이 있는데, 그 건의 중요한 정보를 쥐고 있다는 제보를 받아서 이렇게 찾아왔어요."

 

빙빙 두르지 않고 바로 본론을 꺼내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이반의 얼굴에 순수한 의문이 떠올랐다. 기자라는 사람이 관심을 갖고 취재를 할 만큼의 정보가 제겐 없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물론 딜러들 사이에 이런저런 이야기가 도는 일이 있긴 하지만 그것은 비유하자면 별 것 아닌 가십 같은 이야기들이었고, 그가 원하는 정보는 정보상에게나 가야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반은 레이먼드가 자신을 찾아온 일에 대해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최근에 성행하고 있는 사이비 종교가 있어요. 겉으론 종교지만 그 아래론 아동이나 여성을 대상으로 한 인신매매와 성적으로 착취하는 조직이 숨어있죠. 그런데 이 조직이 작은 규모가 아니에요. 홀로 움직이지도 않고요. 이런저런 취재로 그 조직의 뒤를 봐주는 정치인의 존재를 확인했고, 마피아가 얽혀있다는 것도 확인했어요. 그리고 내 정보원이 말하길 이반이라는 딜러가 정보를 갖고 있다더군요. 그 조직과 뒤를 봐주는 정치인을 연결시켜준 사람에 대해서요."

 

차분하고 간결한 설명 후 반응을 살피는 눈빛이 예리하다. 이반은 모호한 표정을 지으며 턱을 괴듯 입을 가렸다. 레이먼드가 말하는 '정보'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눈치 챈 탓이다. 레이먼드가 취재하고 있는 사건은 보도될 경우 상당한 파장을 불러올 게 불 보듯 뻔했다. 어디까지 그에게 말을 해주는 게 좋을까. 천연덕스러운 녹안이 눈우물이 깊은 눈을 주시한다. 원하는 정보를 캐내려는 기자의 눈이라기엔 거칠고 속을 꿰뚫을 듯 첨예한 구석이 있었다. 문득 의아함이 고개를 치들었다. 보통 기자의 정보원이 일개 딜러의 이름을 알고 있나? 제 이름이 그 정도로 퍼져있었다면 저는 이미 붙잡혀 추방을 당해도 당했을 것 같았다. 제 인생에 만나 본 기자라곤 지금 마주한 레이먼드가 다였지만 이반은 확신했다. 기자가 언급한 정보원이 저처럼 뒷세계의 사람이며, 저 역시 알고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이반은 뉴욕에 와 저와 안면을 튼 이들을 하나씩 짚어가며 떠올렸다.

 

"기자는 원래 발이 그렇게 넓나요? 나를, 그리고 내가 딜러라는 걸 아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을 텐데요."

"기자에게 정보력은 곧 생명이죠."

 

그 말은 곧 그의 정보원 가운데 뒷세계의 사람 또한 포함되어 있다는 의미와 일맥상통했다. 입을 가리고 있던 손을 거둔 이반이 짧게 미소했다.

 

"내가 아는 정보도 그렇게 중요한 정보는 아닐 거예요."

"상관없어요, 원래 모든 건 사소한 지점에서 출발하는 거니까요."

 

이반은 진지하게 이야기를 들으려 하는 레이먼드의 선이 굵은 얼굴을 잠시간 빤히 쳐다보다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구구절절 많은 이야기가 오갔지만 요는 그러했다. 이반이 관리하는 구역과 인접한 구역의 딜러가 손등에 용 문신을 새긴 남자와 종종 이야길 나누는 것을 보았고, 그로부터 얼마 후 그와 가진 술자리에서 어느 정치인과 용 문신을 가진 남자를 연결시켜주고 그 대가로 굵직한 고객 몇을 넘겨받았다고 했다는 것과 딜러들 사이에서 용 문신의 남자가 이미 여러 명의 딜러와 접촉했고, 동일한 제안을 했으며 그가 그런 제안을 하고 다니는 데엔 어느 사이비 교단이 연결되어 있다는 헛소문에 가까운 이야기가 돌았다는 것. 이반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레이먼드의 수첩 위로 옮겨졌다. 빠르게 내용을 적어가며 필요한 부분에 대하여 보충설명을 요하는 레이먼드를 보며 이반은 묘한 익숙함과 찝찝함을 느꼈다. 그것은 조깅을 하던 중 마주친 것에서 기인한 익숙함과는 달랐다. 좀 더 오래되고, 자주 겪어본 종류의 감각이었다. 레이먼드가 수첩 위에 바삐 쓴 내용을 훑어보는 사이 이반은 익숙함의 근원을 찾고자 했다. 각자의 생각에 잠긴 사이 시계의 초침이 째깍이며 세 바퀴를 돌았다. 이반과 레이먼드는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마주했다.

 

"레이먼드 씨. 당신 그냥 기자 아니죠?"

"이반. 당신이 직접 연결시켜 준 거죠."

 

거의 비슷한 타이밍에 터져 나온 질문이 허공에서 부딪혀 바스라졌다. 뒤이어 찾아온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휘젓는다. 서로가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눈빛들이 안 그런 척 예리하다. 이반은 기자라는 신분으로 제 앞에 앉아있는 남자의 정체를 의심했고, 알렉세이가 이 남자를 알고 있기 때문에 만남이 주선된 것에 짜증이 났으며, 의심의 여지없이 확신을 품고 제게 날아든 질문의 답을 고민했다.

 

"근거는요?"

"커넥터에 대한 모든 근거가 조금만 비틀어보면 당신을 가리키고 있거든요."

"나는 그냥 조그만 구역을 관리하는 딜러일 뿐인데요."

 

내가 외국인이라는 건 알렉세이가 말하지 않던가요? 이쪽 사람들에 대해서 잘 몰라요. 이반은 제 것과 닮은 듯 다른 녹안을 가만히 마주했다. 진실을 말하듯 흔들림 없는 눈이었으나, 레이먼드는 그다지 믿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온화한 인상 속에서 날카로운 갈퀴를 닮은 어떤 것이 빛나고 있었다. 저 눈빛을 비롯한 여러 가지 요소들이 한데 모여 이반으로 하여금 레이먼드의 정체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저건 사회·범죄부 기자의 경험만으로 생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치 범죄와 좀 더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이반이 눈을 깜빡였다.

 

"레이먼드 씨, 형사에요?"

 

레이먼드가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이반은 그 웃음의 의미가 긍정에 가깝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알렉세이가 레이먼드 피셔라는 이 남자와 저를 만나게 한 이유를 더욱 알 수 없어졌다. 인생을 끝내주겠다는 의미인가? 이반이 상념에 잠겨있는 사이 살짝 자세를 고쳐 앉은 레이먼드가 주의를 끌듯 헛기침했다.

 

"형사는 전직이고, 지금은 정말 기자가 맞아요.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됩니다."

 

레이먼드가 눈으로 말하는 듯했다. 그러니 진실을 털어놓아 보라고. 이반은 적당히 사람 좋아 보이는 눈빛을 거두고 조금은 떨떠름해 하는 눈빛을 내비쳤다. 레이먼드가 묻는 것에 솔직히 대답을 해주었다간 귀찮아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대체 어느 놈이 제 이름을 댄 건지는 몰라도 걸리면 곱게 두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레이먼드가 묻는 것은 현재 취재 중인 사이비 종교의 껍데기 아래에 감춰진 인신매매 조직과 그 뒤를 봐주는 검은 손을 이어준 것이 이반인지 아닌지에 대한 것이었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커넥터는 이반이 맞았다. 그러나 이반은 경찰이 조금이라도 제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소지를 어떤 사소한 것이든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계속 교묘하게 화살 끝이 다른 이를 향하도록 만들고 있던 거였다. 물론 이 예리한 남자에겐 통하지 않은 듯 했지만. 이반은 작위적으로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더 잡아떼는 것도 무의미한 것 같네요. 맞아요, 내가 연결시켜준 거."

 

그러나 그것이 다였다. 이반도 레이먼드가 취재 중인 사이비 교단에 대해 깊이 아는 것은 없었다. 단지 동양계인 동료 딜러로부터 그의 지인이 뒤가 구리며 결정적인 약점을 갖고 있는 정치인을 찾는다는 말을 듣고서 마침 제 고객 가운데 있는 정치인 한 사람을 소개시켜준 것뿐이었다. 댓가로 넘겨받은 고객은 용 문신의 남자가 거래는 오가는 것이 확실해야 한다며 넘긴 것이었으며 이반이 그들과 동석한 것은 단 한 번으로, 처음 서로를 연결시켜주는 자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반은 레이먼드에게 새로이 진실을 알려주었다. 레이먼드의 수첩은 벌써 여러 장의 배를 새로이 까뒤집은 뒤였다. 기실 이반은 그들과 연관되어있는 사이비 종교의 탈을 쓴 조직이 인신매매를 하던 뭘 하든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러한 종류의 범죄는 이반의 시선을 끌기엔 이미 너무나 익숙한 것들이었으므로. 다만 전직 형사였다는 레이먼드 앞에서 굳이 그러한 티를 드러낼 생각이 없을 뿐이었다.

 

"그런 식으로 범죄와 연관되어있는 줄은 몰랐어요."

 

이반은 짐짓 놀란 것처럼 어깨를 으쓱여보였으나, 레이먼드는 그 말을 딱히 믿는 것 같지 않았다. 아무려면 어떨까. 그는 전직 형사일 뿐이니 저를 감방에 처넣을 수도 없다. 이반은 괜한 배짱을 부렸다.

 

"아까는 왜 그 딜러가 커넥터인 것처럼 말했어요?"

"첫째, 최근 거슬리게 구역을 침범했다. 둘째, 그래서 엿을 먹이고 싶었다. 셋째, 나에 대한 그 어떤 실마리도 드러나길 원치 않았다. 이 정도면 답이 됐을까요?"

 

늘어놓은 구실마다 지극히 이기적이고 개인적이었다. 이반은 전직 형사였던 레이먼드가 자신의 그런 이유들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신경 쓰지 않았다. 마침 자꾸만 거슬리던 딜러를 당장 치워낼 수 없게 되었음에 아쉬움을 삼킬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가 엿 먹길 바라는 마음은 여전했기 때문에 이반은 보다 확실하게 못박아두기로 했다.

 

"레이먼드 씨. 사실을 말한 대신 대가가 있어요."

"이거 약간 강매 같은걸요. 물건 덥석 안겨주고 돈 내놓으라는 기분이 드는데… 어떤 종류의 대가 말인가요. 돈?"

"아뇨. 그건 됐고, 후에 취재 내용을 밝히게 된다면 이 사건에서 나에 대한 언급은 실오라기만큼도 없어야 해요. 무명의 제보자라는 설명이 붙는 것도 안 돼요. 필요한 인물이 있다면 아까 말했던 딜러를 그 자리에 끼워 넣어요. 아까 말한 걸로 시나리오는 충분하죠?”

“아하. 아예 이 사건과는 무관한 사람인 것으로 해 달라?”

 

이반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에선 있는 듯, 없는 듯 지내고 싶거든요. 자신이 불법체류자라는 사실은 굳이 덧대지 않았다. 그가 알렉세이의 친구라 해도, 전직 형사이자 현직 기자인 사람에게 자신의 정보를 많이 알게 할수록 독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이반은 레이먼드가 자신이 받아 적은 내용들을 충분히 정리할 때까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그를 지켜보았고, 이윽고 정리를 끝마친 레이먼드가 자리에서 일어날 쯤에야 함께 일어나 악수를 청했다. 단단하고 강직한 힘이 느껴지는 손을 맞잡은 후에야, 이반은 무기밀매를 할 때 거래를 마친 후 악수를 하던 그대로 버릇처럼 손을 내밀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반이 속으로 묘한 머쓱함을 느끼는 걸 아는지 모르는 지, 손을 맞잡은 레이먼드가 눈가에 잔주름이 지도록 싱긋 웃었다.

 

"앞으로 조깅하다 마주치면 아는 척 정도는 해 줄 거죠, 이반?"

"글쎄요, 앞으로 자주 마주치면 할지도 모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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