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lus domestica
그 상처와 저주는 어쩌면 영원히 우리의 생존 속에서 재생될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칼날이 향하던 첫 순간은 요람에서 빠져나온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이었다. 그것에 악의가 있었는지, 그저 가볍게 던진 돌과 같은 존재였는지는 이제와서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 자신이 제대로 된 칼을 손에 쥔 것은 얼마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이 처음이다. 허나, 지금 그가 손에 쥐고 있는 것은 과거에 들이밀어졌던 것과 전혀 다르다. 날이 이리도 무뎠던가-아니. 제 손까지 상처를 입혔던가-전혀. 타인을 베어가를때 욱신거리는 감각이 느껴졌던가-그럴리가! 마지막으로, 칼을 휘두르던 이들은 눈물을 흘렸던가 -단 한 번도 그런 적 없어.
레이브 비르타넨은 칼을 든 채로 울고있었다. 자신에게로 온전히 칼날을 향하지도 못 한 채, 타인을 깊게 찌르지도 못 한 채. 진심을 담지 못한 이는, 그저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는 이는 끊임없이 칼을 휘둘러 저와 상대에게 수많은 흉터만 남길 뿐이었다. 영원히 남은 이 흉터들은 제가 당신을, 당신이 나를 볼때마다 끊임없이 이 날의 기억을 재생시키겠지. 칼을 쥐지 않았던 날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 투명한 혈이 흐른 자리에는 평생 지워지지 않는 자국이 남아있을테니까. 그렇다면 다시금 도망치자. 더는 제게 다가오지 못하도록. 더는 상처를 떠올리지 않도록, 더는 그 누구도 괴롭지 않도록… ….
오년 전, 하룻 밤 사이에 식물원의 내부가 전부 망가진 적이 있다. 한차례의 폭풍우. 사람들은 자연이 식물의 편을 들어줬기에 벌어진 일이니 괘념치 말라고 하였지. 허나 실상은 달랐다. 녹음이 가득 찬 세계 속, 다른 이들의 생존을 위해 일하는 자가 꼴보기 싫었던 이들이 폭풍우를 틈타 벌인 일이었다. 폭풍우 따위로 전부 뒤엎어질 곳이 아니었다는 걸 알고있었다. 그놈의 ‘천재’가 아니었더라도 충분히 알 수 있었겠지, 자연의 위대함이 아닌 인간의 악의로 가득 찬 그 공간을 두 눈에 담았다면. 그렇게 제 호의는 짓밟혔다. 누구를 탓하기엔 그 대상은 너무나도 모호했으며, 누구를 용서하기엔 그 악의는 너무나도 지독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문을 걸어잠근 채, 다시는 그 누구도 멋대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 뿐. 들어오는 이들을 향해 칼날을 들이밀며 다가오지 말라고 하는 것 뿐. 칼날을 세우지 않으면 내가 망가지니까. 더이상 버티게 되지 못한다면 나는 생존을 포기하고야 말테니까. 수없이 반복된 단절. 이해를 갈구하는 마음이 짓밟힐수록 이 툰드라 속 온실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도 줄어들었지.
문을 걸어잠그기 전 마지막으로 편지를 썼다. 답장은 오지 않았다. 편지가 왔다. 모두가 모일 수 있다. 문을 완전히 걸어잠그기 전, 제 안으로 들여보낼지를 결정할 마지막 기회였다. 그간 바빴으니까. 연락을 한 줄도 몰랐는데, 레이브. 올마이? 돌아온 것은 썩어버린 사과 한 알 뿐이었다.
결심을 마친건 저주를 내릴 무렵이었다. 더이상 제 땅에 그 누구도 서지 못하게 만드리라. 들어오는 이에게는 저주 있으리, 이 안에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리! 그 꼴이 꼭 제 앞에 있는 이가 살던 곳과 닮지 않았던가. 입 밖으로 그런 말을 꺼냈을때 당신이 보일 반응을 생각하니 괜스래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이대로라면 평생 그 답을 들을 일은 없을터인데도 불구하고. 실소와 함께 문을 닫은 이후 흐르는 것은 투명하고도 마치 해풍과도 같이 진득한 혈액이었다. 툰드라를 적실만큼 흘러내려 더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도록 만들었다. 분노, 괴로움, 슬픔, 원망, 그 모든 것을. 자신조차 그 속에서 가라앉을 뿐이었다. 목이 말랐어, 이제는 목이 타들어가. 어느쪽이 나은지는 이제와서 더는 알 방도가 없어. 그럼에도 더는 괴롭지 않으리라 생각했어. 이대로 내가 선 곳을 더이상 네 시야가 닿지 않는 바다로 만들어버린다면 괜찮을거라 생각했어!
몸을 웅크린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한차례의 폭풍이 지나간 뒤에 남은 것은 사무치는 외로움이었다. 발버둥을 치기엔 너무나도 늦었다. 제 뿌리를 적시는 액체를 삼킨 채로 그저 천천히 죽어가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이대로만 있는다면 더이상 괴로울 일은 없겠지. 더이상 정신적인 생존을 끊임없이 논하지 않아도 괜찮겠지… …. 그러니 내게 다가오지 말아줘, 다가와줘. 날 혼자 두지 말아줘.
허나, 당신은 다가온다. 르노, 라이켄. 너는 르노의 라이켄. 노버스 정원사가 아닌 당신이 다가온다. 바닥에 심긴 테이프의 릴에서 나온 검은 줄기들이 위로 솟아난다. 아, 바람 잘 날 없던 열 아홉의 당신은 어떤 삶을 살았기에 스물 아홉의 당신이 된 채로 이리도 짙은 녹빛에 가까운 검은 빛과 함께 무성히 피어나는가! 반추, 수치, 죄책감, 그 외의 것들은 네가 피어날 곳의 양분이 되었음이 자명했다. 자신은 그 재생을 멈출 수 없다. 바닥을 바라보던 시선이 당신에게로 향한다. 미안하다. 거짓말도, 변명도, 짤막하게나마 이어졌던 회피도. 다른 녀석도 아닌 네게 그래서는 안 되었어. 그 한마디에 고개를 들면 마주하는 것은 우림이었다. 끊임없이 비가 내려온다. 그 삶에 우수를 가득 채운 것은 자신이었다. 당신은 끊임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단 한 번도 날 버린적이 없었다. 책상 서랍 속, 몇 장 씩이나 뭉쳐있는 보내지 못한 편지들. 몇 반을 읽어 접은 자국이 가득한 편지들. 투명한 혈액에 흐려진 시야 속, 당신은 여전히 편지들을 두 손 가득 들고있었다. 아, 변한줄 알았는데. 그리 변하지도 않았나, 너는. 바보같은 라이켄, 일찍 말했으면 좋았잖아.
폭풍우가 쓸고 간 툰드라에서 뻗어진 젖은 손은 수 십년의 세월이 지나 낡디 낡은 스크랩북을 품에서 꺼내 펼친다. 한 장을 찢어낸다 Malus domestica, 네가 내게 건냈던 것. 썩어버린 사과 속, 그 씨앗을 여전히 소중히 품은 채로 살아왔다. 그러니 이번에는 내가 네게 건네기로 한다. 저주같은거 하고싶지 않았어. 썩지 말아줘, 너 또한 계속해서 살아가줘. 비록 내게 남은 상처는 쉬이 아물지 않겠지만, 네게 남긴 흉터는 계속해서 네 마음을 짓누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나를, 우리를 재생하고 싶다면 손을 잡아줘. 그리한다면 태초부터 악의따윈 품지 못했던 저주는 언젠가 결국 흩어지고야 말테니.
Malus domestica
:그 상처와 저주는 어쩌면 영원히 우리의 생존 속에서 재생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두려워 할 것은 없었다. 우리는 살아가기에, 다시금 관계의 재생을 논할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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