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mple3

창작

 0. 소돔

 

 

불을 지를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이 마을은 언젠가 불 탈 것이다. D는 그저 그 사람의 손을 꽉 잡고 마을에서 도망쳤다.

손끝 너머로 느껴지던, 그 사람의 심장 박동. 핏줄을 타고 흐르는 거센 맥박과 달리, 차분하기 그지없던 D의 고동.

어두운 밤길을 맨발로 뛰어, 평생을 살아 왔던 마을로부터 멀어진다. 마냥 넓다고 생각했던 마을의 끝자락까지는 가는데 걸린 시간은 겨우 20분 남짓. 고작 이 정도 크기의 마을에 평생을 메어 있었구나. 그 사람이 헛웃음을 흘린다.

D와 그 사람은 한참을 뛰어, 삭막한 바위산 꼭대기에 도달한 뒤에 걸음을 멈춘다. 그 사람은 숨을 헐떡인다. 숨을 고르던 그 사람이 뒤를 돌아보려 하자, D는 손을 뻗어 그 사람의 얼굴을 붙잡는다. 뒤 돌아보지마. 그 사람이 지그시 눈을 감는다. D의 흐릿한 눈동자 위로 작아진 마을이 비춰진다.

 

 

 

 

 

1. 사샤에게

 

 

알렉스는 일요일마다 교회에 갔다.

할라이트빌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 작은 마을에서, 교회는 종교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희미한 빛이 내려 앉은 새벽녘을 가로 질러, 푸르스름하게 물든 행인 무리에 섞여 교회에 가는 행위는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알렉스의 첫 번째 기억 역시 어머니의 품에 안겨 교회에 가던 순간이었다. 그가 기억하는 모든 순간에 교회와 십자가 함께 했다. 단 하루, 오늘을 제외하고는.

알렉스는 저녁부터 줄곧 구토를 했다. 그날 점심으로 먹은 빵이 상했던 모양이었다. 몇 분에 한 번씩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투명한 위액을 뱉어내는 그를 부모님은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교회에 갈 수 있겠니?'

어머니가 물었다. 꾸물거리는 무늬로 가득 찬 화장실 카펫 위에 주저 앉아, 그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어.'

등 뒤로 부모님이 자리를 뜨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세면대를 잡고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목구멍에서 시큰한 통증이 느껴졌다. 다음 날 알렉스는 결국 교회에 가지 못했다.

 

마을의 모든 사람이 교회에 간다는 것은, 예배 시간에 마을이 텅 빈다는 의미였다. 요동치던 속은 삼십분 전에 갑자기 진정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무리해서라도 교회에 갔을 텐데. 그가 느릿한 움직임으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질리도록 게워내고 난 후라 허기가 졌다.

주방으로 향하던 알렉스의 발 끝을 붙잡은 것은 집 밖에서 난 짧은 소음이었다. 철과 철이 부딪혀 나는 서늘한 굉음이 그의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텅 빈 마을에서는 작은 소음도 몇 배는 크게 들리고는 했다. 알렉스는 몸을 돌려 문 밖으로 향했다.

부모님이 나갈 때만 하더라도 아직 어스름에 잠겨 있던 밖은 어느새 밝아졌다. 그는 조용한 걸음으로 집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조금 전의 소음이 환청이라도 되는 듯 주변은 고요하기만 했다. 아무런 특이점도 발견하지 못한 채 집으로 들어가려던 순간, 열려 있는 우체통이 그의 시야에 들어찼다.

이변이라면 이변이었다. 편지는 매주 수요일, 마을의 우체부가 가지고 왔고 그 외의 요일에는 늘 우체통을 닫아뒀다. 저 우체통이 아무런 이유 없이 열려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숨을 죽이고 우체통 쪽으로 다가갔다. 서늘한 기운이 들었다. 이 별 거 아닌 변화는 그가 ‘마을의 악마’에 대해 떠올리게 만들었다. 과거에 이 마을에 악마의 자식이 살았다는 소문이 있었다. 어른들이 아이를 겁주기 위해 지어낸 소문이겠지만 이 순간 갑자기 그 소문이 떠올랐다. 알렉스가 마른 침을 삼켰다. 우체통 안에는 낯선 편지가 한 통 들어 있었다. 그가 주위을 둘러봤다. 주변은 여전히 침묵으로 덮여 있을 뿐이었다. 손을 뻗어 편지를 낚아 채고, 내용물을 들어 있던 편지지를 펼치는 과정은 아주 빠르게 이뤄졌다. 마른 종이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사샤에게

 

어제는 눈이 왔어.

창문 너머로 눈이 내리는 걸 보고 있으니까, 너와 눈 밭을 걸었던 일이 생각나더라.

그때는 바람이 잔잔했고 눈송이가 아주 느리게 떨어졌었지.

그 눈이 너와 함께 보는 마지막 눈일 줄은 몰랐어.

어제 내린 눈은 네가 떠나고 내린 첫 눈이기도 했어, 밖으로 나가보고 싶었는데, 바람이 너무 쎄서 나갈 수 없더라. 눈보라 때문에 내가 있는 집이 무너질까봐 무서웠다고 하면, 네가 웃었을 텐데. 입 밖으로 내고 나니, 비웃어 줄 네가 없었어.

나 없이 맞는 너의 첫 눈은 어땠어?

그게 궁금해서 편지를 적어봤어. 그냥 그 뿐이야.

ps. 답장은 보내지 않아도 돼.

시덥잖은 푸념과 함께, D가.

 

 

알렉스는 손 끝으로 글자를 누르며, 눈썹을 찌푸렸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사샤와 D가 누구인가?'라는 의문이었다. 다음으로는 이 편지가 쓰여진 시기에 대한 의구심이 지나갔다. 그는 고개를 들어, 주변 풍경을 바라보았다. 일렁이는 공기와 푸른 나무. 한 여름에 겨울을 이야기하는 편지는 이상한 점 투성이었다. 그는 편지가 들어 있던 봉투를 살펴보았다. 우표도, 주소도 없이, 매끈한 후면은 새하얀 광택을 낼 뿐이었다. 알렉스의 시선이 편지로 돌아왔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있을까 싶어 햇빛에 편지를 비춰보던 그는 구석에 아주 작게, 썼다 지운 글자를 발견했다.

 

사랑하는 사샤 그레이에게, D가.

 

알렉스의 손 끝이 글자 위로 향했다. 우둘투둘한 문장의 자취를 더듬으며, 그는 꺼림칙한 기분을 느꼈다.

 

 

*

 

"사샤 그레이가 누군지 알아요?"

 

저녁 식사 자리에서 그 말을 꺼낸 건 분명한 실수였다.

목이 졸린 듯 눈을 부릅 뜬 어머니가 입술을 달싹였다. 혀 끝을 타고 나온 것은 적막 뿐이었다.

"그 이름을-"

어머니는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끝내 문장을 완성하지 못했다. 어머니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면, 아버지는 분노하고 있었다.

"그 이름을 어디서 들었니?"

어머니가 끝맺지 못한 말을 아버지가 이어갔다. 아버지는 입꼬리를 올려, 상냥함을 가장한 채 물었지만, 그 뒤틀린 표정 때문에 더 위협적으로 보였다.

"마을에서,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걸 들었어요."

반사적으로 거짓말이 튀어나갔다. 편지에 대해 말한다면, 부모님이 그 편지를 불태워 버릴 거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그 편지를 잃어서는 안된다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 다리가 바닥에 끌리며, 듣기 싫은 소리를 냈다. 아버지는 천천히 그에게로 걸어왔다.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린 아버지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이름에 대해 잊고 평범하게 행동해. 다른 이의 입에 오르내릴 만한 일은 하지말렴."

어깨에 와닿는 아버지의 무게가 꼭 자신에게 매달려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버지가 알렉스를 붙잡고 있던 손을 거두었다. 느린 걸음으로 알렉스에게서 멀어져, 다시 자리에 앉은 순간까지도 아버지의 두 눈은 알렉스를 응시했다.

"자, 이제 식사를 계속할까?"

아버지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어머니가 가느다랗게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좋아요. 그 전에 기도를 다시 올릴까요?"

그는 손을 모았다. 아버지의 입에서 음울한 기도문이 흘러나왔다. 모두가 눈을 감고. 기도를 올리거나 기도하는 척을 했다.

 

*

 

그 뒤로도 계속해서 D의 편지가 도착했다. 처음 몇 통은 첫 번째 편지와 마찬가지로 일요일에 도착했다. 편지를 발견했을 때는 부모님과 함께 교회에서 돌아오던 길이라, 그는 시덥지 않은 질문을 던져가며, 부모님의 주의를 끌어야 했다. 한 번은 정말로 들킬 뻔 했지만, 때마침 건너편 이웃이 부모님께 말을 건 탓에, 알렉스는 몰래 편지를 빼돌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 주부터는 알렉스가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발견 할 수 있게끔 편지가 오는 시간이 바뀌었다.

그는 마을 잡화점에서 일주일에 세 번 일했다. 마을 사람들만 이용하는 자그마한 가게였는데, 퇴근하는 시간이 그때그때 달랐다. 편지를 넣어두고 가는 사람이 그의 일정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이거나, 그를 계속 감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의미였다. 그런 사람이 보내는 편지를 계속 확인하다는 게 멍청한 짓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짐을 챙겨 가게에서 나올 때면 늘 '오늘은 모른 척 하자'라고 다짐했다. 그리고 눈 앞의 편지를 발견하면 조금 전의 다짐은 간단하게 무너져 결국 편지를 꺼내고는 했다.

 

알렉스는 이번에도 편지를 챙겨 방으로 올라갔다. 잘 다녀왔냐고 묻는 부모님께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종종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공부 중일 동생의 방을 지나쳐, 자신의 방에 들어가 문을 잠근 뒤에서야 품 속에 들어 있던 편지를 꺼냈다.

편지의 내용은 D가 사샤에게 전하는, 혼잣말 같은 내용이었다. 어느 날은 사무치게 그리워 했고 어느 날은 악에 받쳐 원망했다. 사샤를 향한 D의 심경은 날짜와 함께 바뀌어갔다. 한 가지 변함 없는 것은 D가 한결같이 사샤를 그리워 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직접적으로 '보고 싶다'라는 문장을 쓰지는 않았지만, 알렉스는 확신했다. 신경 쓴 듯 정갈하게 쓰여진 글씨, 감정을 억누르지 못해 힘 주어 잡은 연필이 부러진 흔적. 이 모든 게 그리움의 편린이었다.

알렉스는 편지의 글자를 차례로 쓰다듬었다. 오래된 흔적을 더듬어 읽듯 손 끝으로 문장을 따라갔다. 글자 위로 스며든 애틋함을 읽어내렸다. 그러다 문득 알렉스의 손길이 멈췄다. [공원의 붉은 의자 맞은 편 나무에 새긴 낙서]라고 적힌 부분이었다. 멍하니 글자를 바라보던 알렉스가 불현듯 몸을 일으켰다. 쥐고 있던 편지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 급하게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조심성 없이 계단을 내려오는 알렉스에게 어머니가 핀잔을 주려 했지만, 가게에 두고 온 물건이 있다고 외치며 집 밖으로 뛰쳐 나갔다.

어느새 어두워진 거리의 깜빡이는 가로등, 간격을 맞춰 지어진 집들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불빛을 지나쳐 공원까지 단숨에 뛰어간 알렉스가 붉은 의자 앞에 서서 숨을 골랐다. 알렉스는 반쯤 진정된 호흡을 들이키며, 나무 앞으로 걸어갔다. 뿌리 부분에서 시야에 들어오는 가장 높은 곳까지, 나무 전체를 훑은 끝에 알렉스는 무릎 부근에 희미한 낙서를 발견했다.

[언젠가 이곳에서 다시-D와 사샤.]

편지에 적힌 바로 그 낙서였다.

사샤와 D는 이 마을에 살았었다. 고용감이 핏줄을 타고 심장까지 흘러갔다. 알렉스는 그 낙서를 망막에 새기려는 듯 한참동안이나 바라봤다. 그의 등 뒤로 인기척이 느껴지기 전까지. 알렉스가 퍼뜩 뒤를 돌아봤다. 바라 본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방금 전까지 누가 있었던 듯, 밟힌 자국이 있는 수풀만이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악마일까?

반사적으로 떠오른 생각이었다.

 

2 흔적

 

 

"오랜만에 보는구나."

 

학교의 경비를 맡고 있는 남자가 알렉스에게 손을 흔들었다. 알렉스가 경비를 향해 마주 손을 흔들었다.

 

"일요일에도 봤잖아요."

 

경비 역시 일요일마다 교회에 가는, 이 마을의 일부였다.

 

"그랬지."

 

경비는 알렉스에게 한 걸음 다가와, 그의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일요일마다 마을의 모든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야. 안 그러니, 알렉산더?"

 

경비가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알렉스는 경비의 말이 눈에 띄게 작위적이라고 생각했다.

 

"학교에는 무슨 일이니?"

 

"그냥, 오랜만에 학교 구경 좀 하려고요."

 

"갑자기? 졸업하고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잖아."

 

경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알렉스는 재빨리 머리를 굴려 변명거리를 찾아냈지만, 입 밖으로 나온 말을 누가봐도 핑계였다.

 

"갑자기 학창시절이 그리워졌나보죠."

 

"과거에 얽매이는 건 안 좋은 일이야, 알렉산더. 알고 있지?"

 

일순에 경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네?"

 

알렉스가 되물었다. 경비의 말을 따라 갈 수 없었다. 알렉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경비의 얼굴을 바라봤다. 웃고 있는 경비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경비가 한 발자국 더, 알렉스에게 다가왔다.

 

"알고 있지?"

 

그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경비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알렉스의 어깨를 두드렸다.

 

"내일 교회에서 보자꾸나."

 

알렉스는 여전히 자신의 어깨 위에 올라와 있는 경비의 손을 떼어냈다. 경비를 향해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인 알렉스는 한달음에 학교 입구까지 내달렸다. 학교 안으로 들어가지 전, 알렉스는 뒤를 돌아보았다. 경비는 조금 전 그자리에 못박힌 듯 서서 알렉스를 지켜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자 경비는 입꼬리를 비틀며 미소지었다. 알렉스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 이내 건물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휴일의 학교는 음울함이 느껴질 정도로 조용했다. 알렉스가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발소리가 텅 빈 복도에 울려퍼졌다. 바닥에서 시작된 소리는 벽에 부딪히며 그 몸집을 키워나갔고 창문 너머로 비춰지는 햇살이 불 꺼진 복도를 회색으로 물들였다. 지난 몇 주 동안, 알렉스는 편지에 적힌 모든 장소를 찾아 다녔다.

 

[반 쯤 부숴진 십자가를 옆으로 밀치고 들어가서]

교회가 새 건물로 옮겨지기 전 사용했던 폐건물이었다. 알렉스는 그곳에서 누군가 가져다 놓은 담요 두개와 기름 없는 가스등을 발견했다.

 

[별을 바꿔치기 하겠다고 위로 올라가려다 사다리를 떨어트렸잖아.]

겨울이면 크리스마스 트리가 되는 광장은 나무였다. 알렉스는 트리 주변 바닥에서 패인 자국을 발견했다.

 

[교회에 가는 대신 담벼락에 십자가를 그려놓고 기도문을 알려줬어.]

교회 뒷 쪽 담벼락에는 스프레이로 그린 듯 한 십자가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편지에 적힌 사소한 문장들을 단서로, 두 사람의 흔적을 찾아 나갔고 그럴수록 알렉스는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원인 모를 미움과 약간의 부러움. 편지의 꼭대기 마다 적힌 '사샤에게'를 볼 때마다 속이 울렁거렸다. 알렉스는 자신이 사샤를 시기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목적 없는 감정보다 더 거슬리는 것은 시선이었다.

편지에 쓰인 장소에 방문할 때면, 늘 시선이 느껴졌다.

집에 돌아 온 알렉스는 문을 잠그고 그간 받은 편지를 모두 꺼냈다. 한 번 알아차리니 모르고 지나쳤던 것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나무 뒤에서 그리고 창문 너머에서.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시선이 느껴지는 곳을 바라보면, 다정하게 웃는 이웃이 그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알렉스와 시선이 마주치면 그들은 한결 같이 말했다.

 

'교회에서 보자'

 

익숙한 말이었다. 이 마을에서 교회에서 보자는 말은 의례 하는 인사와 같았으니까. 알렉스가 뒤를 돌아보았다. 유리로 된 창문 너머로 경비의 그림자가 보였다. 알렉스는 사물함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걸음을 멈췄다. 알렉스가 학교에 온 것은 오늘 받은 편지에 적힌 문장 때문이었다.

 

[초록색 사물함이 싫다고 빨간색 스프레이를 가져와 칠하려다 압수당했잖아.]

 

이 마을에 학교라고는 그가 졸업한 학교 하나 뿐이었다. 알렉스는 그 학교의 사물함이 초록색이라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기억을 되새기며, 편지에 나온 사물함을 찾기 시작했다. 여름 방학 직전, 붉은 스프레이 자국이 남아 있는 사물함을 본 적이 있었다. 딱 한 번 밖에 못 봤지만,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알렉스는 낮은 곳에 위치한 사물함을 주의 깊게 살펴봤다. 여기 저기 긁힌 자국과 살짝 엇나간 경첩. 닦아내려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한듯 흐릿하게 남아 있는 스프레이 자국. 이 사물함을 스쳐간 수많은 사람 중 사샤가 있을 것이다.

알렉스는 챙겨 온 편지를 꺼냈다.

 

학교가 끝나고 아무도 없는 시간이 되면 넌 나를 학교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어.

어둑한 밖과 달리 복도는 늘 밝았지.

사물함에 기댄 채 한참을 이야기하다, 선생님의 눈을 피해 빈 교실로 나를 이끌었어.

학교에 다니지 못한 내가 교실 안을 볼 수 있는 건, 너와 함께 할 때 뿐이었어.

 

사샤는 이 사물함에 기대어 D와 이야기를 나눴을 것이다. 알렉스는 사물함의 겉 면을 손 끝으로 두드려봤다. 미약한 확신 말고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다. 이번에는 꽝이라 생각하며 걸음을 돌리려던 순간, 사물함과 바닥 사이에 끼인 종이가 눈에 들어왔다.

뭔가를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알렉스가 몸을 낮췄다. 끄트머리만 살짝 튀어나온 종이를 누르고 빼내려 애를 썼다. 미끄러운 바닥 덕분에 그가 간신히 종이를 빼낸 순간, 갑자기 복도의 불이 켜졌다.

 

"뭐하는 거니?"

 

위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낡은 신발이 그의 시선에 들어왔다. 알렉스는 종이를 손 안에 넣어 가린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비가 바로 옆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동전을… 떨어트려서요."

 

"그런 소리는 못 들었는데."

 

"제가, 착각했나봐요."

 

"정말로?"

 

경비는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알렉스는 티 나지 않게 침을 삼켰다.

 

"네."

 

경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알렉스의 눈을 뚫어져라 응시할 뿐이었다. 시선을 피해서는 안 됐다. 시선을 피하면, 거짓말 하고 있는 걸 들킬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경비는 한참을 그를 응시하다 이내 입을 열었다.

 

"내일, 교회에서 보자."

 

알렉스는 거세게 고개를 끄덕였다. 몸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건물 밖으로 걸었다. 등 뒤에서 자신을 따라 걷는 경비의 걸음 소리가 들렸지만, 끝내 뒤 돌아보지 않았다. 건물을 빠져나오고, 학교에서 충분히 멀어진 후에야 그는 용기를 내 뒤를 돌아봤다. 등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밀려오는 탈력감에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구겨진 종이가 손 안에서 바스락거렸다. 그는 손바닥을 펼쳐 노랗게 바랜 종이를 꺼냈다.

 

[오두막에서 기다릴게.]

 

D의 글씨였다.

 

 

 

3.

 

오두막. D가 말하는 오두막이 찾기 위해, 알렉스는 다시 한 번 모든 편지를 정독했고 도서관에서 마을 지도까지 찾아봤다. 편지에서는 별다른 단서를 얻지 못했다. D는 단 한 번도 오두막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으니까. 편지에 적히지 않은 것은 오두막 뿐 아니었다. D가 어디에 사는지. 몇 살인지, 나이와 성별을 포함해 D에 대한 것은 단 한 줄도 적혀 있지 않았다. 오로지 사샤에 대한 것과 그와 함께 했던 일에 대해서만 적혀 있었다.

알렉스는 대신 '오두막'이라는 단어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 마을에 집은 모두 똑같이 생겼다. 같은 크기의 집들이 같은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었으니 '오두막'은 마을 밖에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떠오를 곳이 하나 있었다. 노인의 집.

마을 사람들은 그를 그냥 '노인'이라고 불렀다. 노인은 마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숲 길에 홀로 살았다. 노인은 이 마을에서 유일하게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이었고 유일하게 나이를 먹고도 결혼하지 않은 여성이었다.

노인을 부르는 또 다른 호칭은 '이단자'였다. 그녀는 외지인이었고 식사 전에 기도를 하는 일도 없었다. 처음에는 몇 몇 사람들이 노인을 찾아가 교회에 나오라고 설득했지만, 노인은 사람들의 호의에 감사 하는 대신, 신을 믿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 날 이후로 마을의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노인이 사는 곳 근처에 가지 말라고 주의를 줬다. 노인이 어린 아이를 잡아 먹는 괴물이라거나 악마의 자식을 낳아 기르고 있다는 소문이 아이들 사이에서 퍼졌다. 그러니 알렉스가 오두막 앞에서 긴장한 채 서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마을의 어떤 사람을 데려다놓아도 분명 겁을 먹을 것이다. 알렉스는 자신이 겁쟁이가 아닌 이유를 계속해서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오두막은 말 그대로 음산했다. 나무로 지어진 벽면은 초라했고 군데군데 벌레가 먹은 자국이 보였다. 여기저기 쳐진 철조망이 마을사람들은 침입을 막기 위한 것인지, 노파가 밖으로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함인지 그는 알 수 없었다. 저 안에 D에 대한 단서가 있을 확률이 몇 퍼센트나 될까. 폐건물 처럼 보이더라도 엄연히 사람이 사는 집이었다. 그리고 타인의 집에 몰래 들어가는 것은…

 

"가택 침입이지."

 

알렉스가 중얼거렸다. 아무리 D에 대해 알고 싶더라도 정도는 지켜야 한다. 결정을 내린 알렉스가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린 순간. 금색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마른 침을 삼켰다. 그 노인이었다.

 

"누구세요?"

 

노인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노인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그녀의 동공이 순식간에 꺼졌다. 그리고 알렉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알렉스?"

 

노인의 손이 알렉스의 팔을 붙잡기 직전, 그는 재빨리 마을 쪽으로 내달렸다. 노인은 자신을 알고 있었다. 어째서? 그는 단 한 번도 노인을 만난 적이 없었다. 단 한 번도. 알렉스는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마을까지 뛰었다. 어차피 노인의 느린 걸음으로는 자신을 붙잡지 못하리란 걸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지금 멈춰서면 돌이킬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고 내딛은 발 바닥에서 통증이 느껴질 때 쯤, 그는 그 자리에 멈췄다. 허리를 숙이고 양팔로 무릎을 짚은 채 숨을 골랐다. 호흡이 목구멍을 찢고 나올 때마다, 통증이 느껴졌다.

 

"알렉산더, 여기서 뭐 하니?"

 

누군가 그를 불렀다. 알렉스는 간신히 고개만 들어 자신을 부르는 이를 바라봤다. 옆 가게의 주인이었다. 눈동자를 움직여 주변을 둘러 보았다. 그는 상점가에 있었다.

 

"운동, 을"

 

숨이 모자라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운동을 하고 있었다고?"

 

"네…"

 

"이렇게 탈진할 정도로? 전에는 그런 적 없었다."

 

웃고 있는 이웃의 눈매라 가늘어졌다. 입매는 여전히 곡선을 그리며 웃고 있었다. 사방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상점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냥, 생각이 많아서요"

 

그가 조금 전 보다는 정제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그럼. 뭐… 일요일에, 교회에서-"

 

이웃은 말을 하다 말고 알렉스의 뒤 쪽을 바라봤다. 알렉스의 고개 역시 이웃의 시선을 따라갔다. 노인이 그곳에 서 있었다. 늘 흐리멍텅하던 노인의 눈에 선명한 이채가 돌았다.

 

"내 아들은 어디 있어? 알고 있지?"

 

노인이 입을 쩍 벌리고 웃었다. 노인의 얼굴에 미약한 희망이 묻어나서, 알렉스의 속이 울렁거렸다. 노인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그 비루한 몸이 어떻게 그렇게 빨리 움직였는지 감도 잡히지 않을 순식간에. 알렉스의 바로 앞에서 노인이 손을 뻗었다. 노인은 알렉스의 팔이 동아줄이라도 된다는 듯 강하게 붙잡았다. 팔목에서 강한 고통이 느껴졌다. 노인의 손톱이 살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내 아들은 살아 있어?"

 

피부가 맞닿은 곳에 자글자글한 주름이 느껴졌다. 노인에게서는 아무런 악취도 나지 않았다. 그저 늙고 간절한 어머니의 모습이 보일 뿐이었다.

 

"저는 모르겠어요."

 

알렉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거짓말."

 

노인이 품에서 편지를 꺼냈다. 알렉스가 늘 한 개씩 지니고 다니던, D의 편지었다.

 

"내 아들이 너한테 쓴 편지야. 단테와 연락하고 있었던 거지?"

 

"저는-"

 

사샤가 아니에요. 해야 할 말은 명확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는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저는"

 

목구멍을 비집고 나오는 말이라고는 끝맺지 못한 짧은 단어 하나였다. 바로 뒤에서 두 사람의 실랑이를 지켜 보던 이웃이 노인의 어깨를 잡아 알렉스에게서 떼어냈다. 노인은 힘 없이 뒷걸음질 쳤다. 노인이 잡았던 팔에 멍이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눈으로 본 팔목에는 아무런 자국도 남아 있지 않았다. 손톱 자국은 커녕 눌린 흔적조차 없었다.

노인은 비틀거리며 다시 알렉스에게 다가오려고 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에 의해 저지 당했다. 상점가에 있던 사람들은 그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노인과 알렉스를 둘러 싸고 있었다. 그리고 노인이 내딛은 한 걸음을 신호 삼아, 노인을 밀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크게 소리치며, 노인을 밀었고 그들의 짐승 같은 힘을 이기지 못한 노인이 뒤로 넘어졌다.

 

"마녀 주제에 어딜 기어 들어 와."

 

"더러운 마녀!"

 

사람들의 외침과 함께 둔탁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누군가 노인에게 돌을 던진 것이다. 볼품 없는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돌을 던진 이에게 향했다. 알렉스는 사람들이 그 치를 나무랄 것이라 생각했다. 돌을 던지는 건 심하다고 노인이 다치지 않았냐고 말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누구도 그 사람을 비난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하나 둘, 노인에게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노인은 바닥에 주저 앉은 모습 그대로,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한 채 자신을 향해 던져진 돌을 맞았다. 노인의 몸이 천천히 무너졌다. 노인의 머리에서 시작된 피가 바닥을 물들였다. 노인의 붉은 머리카락과 흩뿌려진 피가 한데 뒤엉켰고 노인의 숨도 천천히 옅어지기 시작했다.

누군가 알렉스의 손에 묵직한 것을 쥐어줬다. 알렉스는 그것을 바라봤다. 주먹만한 크기의 돌이었다. 옆에 있는 이가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너도 던져야지?"

 

이 행위가 마을의 공동체임을 증명하는 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노인에게 돌을 던져, 마녀의 숨을 꺼트리는 것이 알렉스가 여전히 마을의 인원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알렉스가 천천히 팔을 들어올렸다. 지금 이 돌을 던지지 않으면, 사람들은 계속해서 알렉스를 의심할 것이다. 어쩌면 다음 번에 저 자리에서 돌팔매질을 당하는 건 알렉스가 될지도 몰랐다. 그의 호흡이 가빠졌다.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가 귓가에 전달됐다. 무언가 목구멍을 막고 있는 듯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손에 힘이 빠졌다. 돌이 알렉스의 발치에 떨어졌다. 도저히 던질 수 없었다. 그는 미동 없는 노인을 바라봤다. 이미 숨을 거뒀는데도 몇 몇 사람들은 여전히 돌을 던지고 있었다.

 

"알렉산더? 안 던질 거야?"

 

누군가 알렉스에게 물었다.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숨을 쉬려 노력하며, 멍하니 노인을 바라 볼 뿐이었다.

 

"그냥 둬."

 

"하지만 알렉산더도…"

 

"일요일이 되면 알게 되겠지. 마녀가 알렉산더를 괴롭힌 건지 아니면-"

 

저 노인의 말대로 단테와 연락하고 있었던 건지. 끝까지 듣지 않아도 이어질 말을 알 수 있었다.

 

"그보다 마녀를 불태워야지."

 

"그래, 악마의 힘으로 죽은 척 한 걸지도 모르잖아."

 

"확실히 끝을 내자고!"

 

마을 사람들이 잔뜩 고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들의 웃음 소리가 알렉스의 귓가에 달라 붙었다. 끈적하고 기분 나쁜 웃음이 내딛는 걸음마다 달라 붙었다. 알렉스는 그대로 뒤로 돌아, 집을 향해 뛰었다. 그런 알렉스를 향해 사람들이 외쳤다.

 

"일요일에 교회에서 보자."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에 도착해서야 알렉스는 편하게 숨을 쉴 수 있었다.

 

*

 

집에 도착한 그는 자신의 방에 틀어 박혔다. 문을 잠그고 이불을 뒤집어 썼다. 사람들이 끝내 노인을 죽였다. 돌을 던져 노인의 숨통을 끊어 놓았다. 죄 없는 자만이 돌을 던지라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성경의 구절이 떠올랐다. 죄 없는 자만이 돌을 던지라. 그렇다면 노인의 죄는 무엇일까. 마을 사람들은 모두 죄가 없는 이라 돌을 던질 수 있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자신은 어째서 돌을 던지지 못한 걸까. 죄인이라?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대답하지 않았다. 문 밖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답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고함이 이어졌다. 대답하지 않았다. 조금 전 일어난 소란을 부모님은 이미 전해 들었을 것이다. 이 마을은 그런 곳이었다.

 

"평범하게 살겠다고 했잖아."

어머니가 악에 받쳐 소리쳤다. 대답 할 수 없었다. 누군가 자신의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알렉스가 입을 벌렸다. 소리를 내기 위해 아무것도 없는 목을 긁었다. 뱃속에서 시작되어 내장을 타고, 말과 비슷한 무언가를 입 밖으로 토해냈다.

 

"연락하지 않았어요. 편지를 보냈으니까, 단테는 살아 있을 거예요. 네, 제가 사샤에요."

 

조금 전 노인에게 했어야 할 대답이었다. 목을 조르는 듯한 압박감이 사라졌다. 말이 목에 걸려 숨이 막혔던 것이다. 사샤는 몸을 웅크렸다. 5년 전, 사샤는 D와 함께 이 마을에서 도망쳤다.방 밖에서 문을 두들기던 소리가 더 커졌다. 문을 부수려는 듯 강한 소리와 함께 아버지와 울부짖었다.

 

"아무 일도 없던 거라고 네 입으로 말했어."

 

그는 분명 말했다. 어느 새벽, 사샤를 버리고 홀로 집으로 돌아와 말했다. 아무 일도 없던 거라고 다 잊겠다고. 자신은 잠시 시험에 들었던 것 뿐이며 여전히 평범하고 신실한 두 분의 자식이라고 말했다.

 

"이게 다 그 악마 때문이야. 악마한테 홀린 거라고!"

 

어머니가 신경질 적으로 말했다. 사샤는 큰 소리로 외쳤다.

 

"세상에 악마 같은 건 없어요!"

 

문을 두드리던 소리가 끊겼다. 자신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노인은 이단이 아니며, 그 자식인 D 또한 악마가 아닌, 평범한 사람이라는 걸. 자신은 악마에 홀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D를 사랑했다는 걸.

그것이 그의 죄였다.

모든 걸 버리고 떠날만큼 사랑한다고 말해놓고 정말 전부 버리고 떠나게 되니 무서웠다.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곳에서 오로지 D에게만 의지해 살아가는 게 무서웠다. 안락한 집 밖은 그가 예상 했던 것보다 훨씬 차가웠다. D와 자신의 사이를 묻는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연인이라 말 할 수 없었다. D는 이곳 사람들은 괜찮다고 자신들을 이해 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그를 설득했다. 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정착한 곳의 사람들은 처음부터 두 사람의 사이를 예상하고 있었고 그들이 말하기만 한다면, 언제든 받아들여 줄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그도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두 사람은 자주 싸우기 시작했고 눈이 쌓인 어느 날, 그는 잠들어 있는 D를 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가는 내내 자고 있던 D의 얼굴이 떠올랐다. 마침내 집에 도착한 알렉스는 그 모든 일을 잊기로 결심했다.

 

또 다시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사샤는 신경질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거칠게 문을 열면 소리쳤다.

 

"그냥 날 좀 내버려둬요!"

 

문 앞에 있는 것은 부모님이 아니라 동생이었다. 동생은 당황한 듯 눈동자를 굴리다 이내 입을 열었다.

 

"그건, 어렵지 않기는 한데. 당장 그것보다 급한게 있어서."

 

허탈함이 밀려와 사샤는 한숨을 쉬었다.

 

"뭔데?"

 

"조금 전에 부모님이 누가 집 앞을 어슬렁거리는 걸 발견했어."

 

"그래서?"

 

사샤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근데 그 사람 생긴게 음. 형이 아는 누구를 닮은 것 같아서."

 

순간 온 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혹시'하는 생각이 사샤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뜸 들이지 말고 말해!"

 

"형이랑 어울려 다니던 그 빨간머리 남자 같았어."

 

D였다. 사샤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우표 없는 편지, 자신의 귀가 시간에 맞춰 도착하던 그 편지. D는 이 마을 근처에 있었다.

 

"그 사람이 편지를 하나 두고 갔는데, 부모님이 그걸 읽은 것 같아."

 

동생은 그렇게 말하며, 사샤의 손에 종이 하나를 쥐어주었다. 사샤는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펼쳤다. 편지의 내용은 평소와 같았다. D는 자신을 그리워했다. 하지만 맨 아랫줄에 평소와 다른 내용이 하나 있었다.

 

[ps. 더는 이 마을에 있지 못 할 것 같아. 그러니까 공원에서 기다릴게.]

 

마지막 문장을 읽는 것과 동시에 동생이 사샤에게 말했다.

 

"이번에 가면 돌아오지마."

 

사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

 

사샤의 눈에 가득 들어찬 D의 붉은 머리카락이나, D의 배에 흥건한 붉은 피, 붉게 충혈된 부모님의 눈은 사샤를 고통스럽게 했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사샤는 D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D를 품에 안고 부모님을 노려보고 있었다.

 

"겁만 주려고 한 거야. 그런데 저 새끼가 자꾸 너를 만나겠다잖니."

 

어머니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괜찮아. 불에 태우면 악마도 부활하지 못 할 거야. 그리고 나서 교회에 가서"

 

부모님은 끝 없이 말을 하고. 사샤는 그 모든 말을 알아 듣지 못했다. 사람의 언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D를 끌어 안고 일어났다. D는 성인 남성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가벼웠다. 그게 죽어가고 있어서인지, 아니면 그간 제대로 먹지 못해서인지 구분 할 수 없었다. 사샤는 그대로 마을 밖으로 달렸다.

저 너머에서 불빛이 보였다. 마을 사람들이 노인을, D의 어머니를 불태우고 있었다. 사샤는 노인의 시체가 있는 곳에서 멈춰 섰다. 마을 사람들이 사샤와 D를 바라봤다. 사샤는 혹여 사람들이 D를 빼앗아 갈까봐 더욱 끌어 안은 채, 노인을 태우고 있는 장작을 발로 찼다. 장작은 근처에 나무에 부딪혀 불씨를 퍼트렸다. 일정한 간격으로 심어져 있는 나무에 도미노처럼 연달아 불이 붙었다. 사람들은 불을 끄려고 했지만, 불은 점점 커질 뿐이었다. 사샤는 노인과 닮은 무언가가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핏자국이 떨어졌고 그 핏자국은 다시 불길로 바뀌었다. 사샤는 그 모습을 뒤로 한 채 다시 뛰기 시작했다.

뜀박질을 거듭할 수록 심장이 빨라졌다. 마침내 다시 닿은 피부를 통해 심장 박동이 전해질지도 몰랐다. 핏줄을 타고 흐르는 자신의 거센 맥발과 달리, 희미하기 그지 없는 D의 고동.

어두운 밤길을 미친듯이 뛰어, 또 다시 마을로부터 멀어진다. 미약했지만, D의 심장을 뛰고 있었다. 마을 끝자락까지 가는데 20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걸음이 너무 느리게 느껴졌다. 사샤는 그제서야, D가 자신을 이끌고 있었기에 20분 밖에 걸리지 않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옆 마을에 새벽까지 하는 병원이 있었다. D의 숨이 끊기기 전에 도착한다면, 살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심장이라도 떼어 줄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D가 되살아난다면, 사샤는 D를 끌어안고 사과할 것이다. 그리고 D와 함께 살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어쩌면 그 전에 이 마을에 불을 지를지도 몰랐다.

사샤는 한참을 뛰어, 바위 산 꼭대기에 도달했다. 하지만 멈추지도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그저 D의 심장이 멈추지 않기를 바라며, 계속해서 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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