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 - 도위소병

[도위소병] 청혼

청혼할 결심

골판지상자 by 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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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9 이거 옮기는거 꽤 귀찮네요

서로의 마음이 이어지고서 지금까지, 임소병이 남궁도위의 마음을 의심한 순간이란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해와 착각이라면 이루어지기 전에 질릴 대로 하였다는 이유도 분명히 있겠지만, 워낙 남궁도위란 사람은 투명하고 올곧아 그 속이 보려 하지 않아도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굳이 꺼내 보지 않아도 손에 해답을 준다는 감각은 그 맑음에 손이 저릴 정도로 생경한 것이었다.

 

그 마음이 변질할 걱정을 하지 않았다면 그것 또한 아니다, 물의 흐름이 변칙적이듯이 사람의 마음도 그와 비슷해, 겉에 훤히 드러나는 남궁도위의 애정이 변하지 않을까 홀로 조마조마해 임소병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을 새다 퀭한 눈으로 아침을 맞이한 적도 많았다. 손으로 헤아리기는 부족한 정도로, 그렇지만 발까지 동원한다면 충분한 정도로 그러하였다. 그러나 가만 지나는 시간은 그런 불안을 녹이기에 충분하였고. 임소병이 폭포에 휩쓸린 쥐 마냥 남궁도위의 마음을 받아들인 후로는 정말, 안온한 매일만이 이어졌다는 것이다.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이는 사랑을 손에 넣었으니. 이 정도에서 나는 족하다며 물러나는 것이, 어쩌면 자신으로써는 더 어울리는 대처일지도 모르겠다고 임소병은 생각했다. 달에 돌아오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은 입에 당과를 물고 있는 듯이 달고. 둘의 정사파애정관계사를 모르는 사람은 이 중원에 없을 정도다. 헤어지는 기간이 길다는 것이 흠이지만 그것은 각 문파의 수장으로써 그들이 감내해야만 할 시련이기에. 임소병은 그것도 그럭저럭 납득하는 채였다.

 

서탁 위에 어지럽게 놓인 필기구 등을 보다가 손에 들었던 책을 놓고 등을 불어 끈다. 은은한 빛으로 따뜻하게 빛나던 방의 내부가 옅은 숨과 함께 훅 꺼져 빛을 잃었다. 침소로 향할까 했지만, 오늘은 굳이 끌리지 않아, 임소병은 보료 위에 누워 숨을 골랐다. 둘이서 잠을 청했던 날보다 혼자 잠드는 날이 훨씬 많고 오래되었을 텐데도, 누워있는 제 옆에 타인의 숨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 어색해졌다는 것이 우습기도 하다.

 

남자와 남자, 양과 양. 자신의 몸이 아무리 음에 가깝다고 할지언정 어쨌든 자신은 사내로 태어났고 그것은 남궁도위도 같았으니 혼인과 같이 분에 넘치는 것을 욕심내는 것은 어쩌면 산적으로써 난 제 본능일지도 모른다. 으레 일찌감치 포기한 것에 처지가 조금 달라졌을 뿐인데 한번 닿아보고 싶어지는 건 왜일까. 온기가 닿지 않아 차가운 면의 표면을 쓰다듬으며.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전할 사람이 먼 투정을 한다. 몸이 차네, 자리가 불편하네, 또는 보고 싶다는 말과 같은 것들이 허공을 날아 어느새 잠이 든 임소병의 침묵 사이로 사라졌다.

 

 

임소병이 사는 산채들과 남궁세가의 거리는 그리 가깝지 않다. 합비에 산채가 있었다면야 핑계를 대서라도 오래 머물러 봄 직하겠는데, 산채가 있는지는 차치하고 산조차 없는 평지이기에 나름대로 생각해낸 꼼수는 한 번도 써먹어 본 적이 없었다. 생각해보면, 평생 평지에서 살아와 절벽이 무섭다며 떠는 인간이, 주기적으로 산을 타서 저를 만나러 온다는 것이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적도 있었다.

 

사람도 먹거리도, 인정하긴 싫지만, 저쪽 구석의 산골짜기보다야 안휘나 그 안의 합비가 수준이 높은 것이 당연한데, 이 도련님이 굳이 산을 타서 저를 보러 오겠다고 하는 연유가 뭔지를 도대체 납득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찾아와만 준다면 녹림의 수준에서 최고의 대우를 약속할 수는 있겠으나. 그게 남궁의 최선과는 다를 것이다.

 

결과가 보이는 문제에 꼭 부딪혀 보겠다고 하는 짓거리를 보통 사람들은 헛수고라 합니다? 하는 말에도 남궁도위가 멈추지 않았기에 결국 주기적으로 서로 왕래하는 것으로 정해지게 되었으나. 한동안 임소병은 그래, 바닥에 누워서 얼어 죽고 나중에 보자. 하는 심정으로 남궁도위를 보곤 하였다.

 

나중에서야 깨달은 것은, 임소병이 산에서 내려가듯, 남궁도위에게도 산에서 오를 시간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단지 형평의 의미에서만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는, 제게 산이 너무 높아서는 안 됩니다. 하고 제 몸을 끌어안은 채 말하는 남궁도위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알 수 있었던 것이었다.

 

임소병에게 녹림은 자신과 다름없다. 자랑스러운 자신을 내보이는 일이 부끄러웠다거나, 그런 의미로 남궁도위의 방문을 꺼렸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날 것도 못 먹는 곱게 자란 도련님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베푼 호의였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렇게 임소병만 홀로 남궁의 평지에 익숙해져 버리면, 영영 남궁도위는 산을 오르지 못할 터였다. 서로의 기울기를 맞추어 같이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이 될 필요가 있었다. 동떨어져 태어난 사람들이기에, 오히려 그 과정이 더 필요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합비에 도착하기에는 걸어서 앞으로 하루쯤, 말을 타는 것 보다 달리는 게 빠른 무인이라 다행인 점도 있었다. 하루 잠을 청할 객잔을 찾아 들었다. 건물의 안쪽은 사람들의 말소리와 활기로 가득차 있었다. 구석진 곳에 자리잡고서 어깨에 매었던 짐을 싼 짐을 내려두고. 임소병은 음식을 주문하였다.

 

좀 지나지 않아 닭고기 국물에 적신 따끈한 만두와 얇은 면 요리가 나왔다. 수저로 만두를 국물과 함께 떠 입에 넣자. 간이 잘 밴 소의 맛이 입안에 퍼졌다. 우물거리며 만두를 씹어 삼키는 사이, 옆 자리에서 조잘대는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임소병과 남궁도위의 이야기였다. 남궁세가가 가까워서인지는 몰라도. 임소병이 합비를 찾을 때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은 때론 입에 올려 떠들기 쉬워진다는 말로 들리기도 한다. 비무대회에서 아래를 까인 남궁세가의 가주, 혹은 전 소가주가 단수를 한다는 이야기는 흥미롭다는 점에서 그 정도를 더한다. 불쾌하다 여길 수도 있겠으나. 임소병은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들의 이야기가 오가는 것을 꽤 기껍게 여기는 편이었다.

 

일단 정마대전이 끝난 후로도 남궁도위에게 오가는 혼서가 없었다는 것도 그 이유라 할 수 있겠지만. 어떤 하나의 관계로 정립되기 어려운 자신들이 남에게 비록 그 표현이 천박하대도 정인 사이로 구전될 수 있다는 것은 나쁘지 않은 감상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었다.

 

물론, 임소병은 그럼에도 상당히 쪼잔한 편이기에 그들이 먹던 만두 두 개가 바람에 휩쓸려 탁자 아래로 떨어지게끔 하는 심술을 부렸다. 원래 사파는 속이 좁으니까 사파 하는 거다. 옆 사람들이 짜증을 내는 소리를 무시하고 객실이 존재하는 2층으로 짐을 챙겨 들어가서 임소병은 몸을 침상에 뉘었다. 고요한 방 안으로 아래층의 시끌거리는 소리가 잔잔하게 들리는 듯 하였다.

 

누워서 생각하다 보면, 지금쯤 남궁도위에게 곧 도착할 거라는 전언이 전해졌을까 싶었다. 눈을 동그랗게 떠서는 준비할 시간도 없이 오시냐고 하려나, 그러면서도 입꼬리는 스리슬쩍 올라가 있을 것 같아서. 그런 모습이 당연하게 상상이 된다는 것이 좋았다. 내일은 같이 잠들게 될까, 무슨 이야기를 할까. 시시껄렁한 사고를 지속하다 보면 까무룩 잠드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도, 머지않은 만남을 떠올릴 때마다 항상 들뜬다는 건, 목덜미가 간지럽거나, 손끝이 찌릿찌릿한 듯하다는 표현만으로는 설명하기가 어렵다.

 

모든 순간을 함께하고 있어도 만나고 싶어지는 날이 올 것 같은데. 그러지도 못하고 있으니 애탐이 아니 더 할까. 오늘이 어서 내일을 좇아 그대를 만날 수 있길. 사소하게 소망한다.

 

 

 

걷다보니 생각보다 빨리 남궁세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임소병은 담을 넘어 남궁도위가 지금쯤 수련하고 있을 연무장으로 향했다. 그가 들어온다고 힐난하거나 방문을 거절할 사람은 남궁세가에 없겠지마는. 남궁도위를 놀래켜준다고 하던 일이 버릇되어 몸에 밴 탓이었다. 임소병이 제대로 산문을 통과해 남궁세가에 들어간 것은 손에 꼽는 일이었기에, 소식 없는 방문에도 불구하고 담을 넘어 마주한 시비들은 놀라기는커녕 이제 오셨냐며 익숙하다는 양 인사해왔다.

 

그것은 남궁도위도 다르지 않았다. 탁, 탁 하는 땅에 신발이 가볍게 마찰하는 소리를 듣다 보면. 뒤에서 습격해오는 자신의 정인이 있다. 장난스레 찔러오는 공격을 받아내고 나면 언제나의 실실거리는 얼굴이 제 앞에 자리하고 있다. 지겹게도 보고 싶었던. 바로 그 사람이다.

 

“이제 오셨습니까? 저녁쯤에야 도착하실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이르게 오셨네요.”

 

“그래서 싫습니까? 싫으면 좀 놀다 오지 뭐.”

 

“아뇨. 혹시 일찍 오실까 싶어 조찬을 준비해 두었는데 다행입니다. 아직 식사하시지 않으셨다면 같이 드시겠습니까?”

 

“음, 아뇨. 오늘은 그 전에 할 일이 하나 있어서.”

 

남궁도위의 눈에 의문이 고이는 것은 한 순간이었다. 공적인 일들을 제하면 서로를 우선시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있을 정도의 둘이었다. 곰곰이 무슨 일이 있었나를 떠올려봐도, 딱히 짚이는 구석은 없었다. 고민하는 남궁도위를 바라보며, 임소병은 날이 참 좋다는 생각을 했다. 만나면 확신할 수 있을 걸 알았다. 문득 새벽에 든 상념에 무작정 저지르리라 생각했던 일이지만. 오늘이어서 기쁘다는 감정이 들었다.

 

오늘이 봄의 첫 날도, 겨울의 마지막 밤도 아닌 그리 중요치 않은 날이며, 그리하여 지나가듯 말하는 나의 이 청혼에는 어떤 핑계도 이유도 없다는 것이. 참으로 만족스럽지 않을 수 없다.

 

구전이 아닌 기록으로 남아, 이 사랑이란 이름의 안온함이 나의 죽을 순간까지. 당신의 이름자 옆에 남아 이어지기를 욕심내어 감히 바란다. 우스꽝스러운 허례허식에 가까운 절차라도, 성대하게 열어 모두에게 알려졌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내가 당신의 옆에 있는 것이. 언제라도 당연하고, 지당한 것이 되어. 미래의 글 줄 하나에까지도 남겨지게 된다면. 그걸로 완벽하지 아니한가.

 

“이제 슬슬 혼례를 올릴까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 상대를 찾아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입에서 토해낸 나비같은 말이. 얼굴에 스며들어 진홍빛 열기로 번지는 것을 바라보며. 임소병은 웃었다. 급하게 소매를 붙잡아오는 손길은 자신의 고백만큼 투박하지만 그렇기에 최고의 대답이나 다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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