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렵제

After that day

관계로그 with. 넬리

술은 때때로, 혹은 상습적으로 사람을 바꿔놓고는 한다. 그렇게 될 즈음이면 사람이 술을 마시는 게 아니라 술이 사람을 잡아먹는다. 그것은 보드카 국이라는 오명 아닌 오명―이반은 오명이라고 불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술을 잘 마시는 것이 흉은 아니지 않은가.―을 가진 국가 출신인 이반이 지겹게 보아 온 광경이었다. 그리고 지금 당장 실시간으로 보고 있기도 했고. 건물에 기대앉은 남자에게선 가까이 가지 않아도 고약한 냄새와 함께 지독한 술 냄새가 풍겨오고 있었다. 이반은 이기지도 못할 술을 고주망태가 될 때까지 퍼마시는 것이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스스로 몸도 가누지 못할 만큼 술을 마셔 도움이 되는 게 대체 뭐가 있단 말인가. 술을 마음껏 마셔도 되는 것은 살짝 취기가 올라 기억이 끊기기 전까지다. 이반은 한심함을 감추지 않은 눈빛으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누런 종이로 싸맨 병을 소중한 보물인 양 품에 안은 채 길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남자가 침대에 누운 양 다리를 뻗더니 숫제 드러누웠다. 아직 해도 떨어지지 않은 때였다. 물론 알콜 중독자쯤으로 보이는 저 몰골의 사람에게 드러눕는 시간은 의미가 없긴 할 것이다. 남자가 드러눕자 진로를 가로막힌 이들이 불편함을 위시한 불쾌감, 약간의 경멸 등을 드러내며 남자를 피해갔다. 저로 인해 인도를 걷던 사람들이 그를 피해 빙 둘러간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저 역시 펍으로 가려면 그가 막고 있는 곳을 지나가야했다. 이반은 저럴 바엔 차라리 술을 마시고 난동을 부리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 편이 구경하는 재미는 더 있었으므로. 먹고 있던 핫도그를 마저 씹어 넘긴 이반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남자가 드러누운 곳까지 걸어간 이반은 남자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세상모르고 기절한 얼굴이라, 혀를 한 번 차고는 남자의 물렁한 배를 그대로 밟고 지나갔다. 갈비뼈가 부러지든 말든 알 바가 아니었다. 술에 취해 뻗은 남자는 잠꼬대 같은 소리를 내뱉으며 몸을 옆으로 돌려 누웠다. 저러다 순찰을 돌던 경찰이 발견하거나, 누군가 신고를 넣을 것이다. 그것을 끝으로 이반은 신경을 껐다.

 

"왔어? 누가 너 찾더라. 기다리고 있어."

 

펍에 들어서자마자 저를 찾는 이가 있다는 말에 이반이 의아한 눈빛을 해 보인다. 저를 찾아와 기다릴 사람이 있던가.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이반의 인간관계는 기본적으로 썩 건강한 편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미국에서의 인간관계는 좁다 못해 극도로 협소한 수준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저를 기다린다는 사람을 짐작할 수 없었다. 거기다 이반과 약을 거래하는 이들은 애초에 이반과 펍의 상관관계를 몰랐으므로 펍에 와 이반을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 날 기다릴만한 사람이 없는데. 중얼거리듯 내뱉자 바텐더 헨리가 저기 있다며 턱짓으로 자리 하나를 가리킨다.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뒤통수가 보여 이반은 깨달음의 외마디를 짧게 토해냈다. 어젯밤의 일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샌다. 넬리 그린이었다. 이른 시간부터 찾아와 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어젯밤의 일을 모른척하기 위함은 아니리라.

 

"이렇게 이른 시간에 어쩐 일이에요? 넬리. 나 기다렸다던데."

"아, 이반 씨."

 

넬리의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이반은 그녀의 용건을 짐작하면서도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듯한 얼굴을 했다. 그냥 보기에도 약간의 미안한 기색이 비쳐 보이는 듯했다. 그녀가 딱히 사과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던 어제의 기분은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고, 이반은 그래서 정말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지만 우선은 넬리가 운을 뗄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이렇게 찾아왔는데 말을 들어주긴 해야 하리라.

 

"어제 일 때문에 왔어요. 그렇게 함부로 이야기해서 정말 죄송했어요, 이반 씨."

"어제 일이요?"

 "네. 그리고 제가 해드릴 만한 게 없어서… 어제 보드카 마시던 거 보면 술 마시는 걸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 쬐끔 더 비싼 거라도 사드리려구요. 그리고 이반 씨도 저한테 마음에 안 드셨던 것들 있으면 다 이야기해요."

 

이반이 웃음을 터트렸다. 늘 그랬듯 길게 지속되는 웃음은 아니었으나, 이반은 진심으로 제법 즐거웠다. 속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표면적으로 펍에서 일을 하고 있는 저에게 술을 사겠다 하는 것도 재미있었고, 술김에 했을 말을 이렇게까지 진심으로 사과하는 사람은 처음 봤기 때문이다. 그냥 기억나지 않는 척을 하고 넘겼어도 이반은 그녀를 탓하거나 딱히 마음에 담아둘 생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기분 상의 이유와 더불어 이반과 넬리 그린은 서로에게 그 정도로 이렇다 할 영향력을 끼치는 관계가 아니었다. 그저 펍의 직원과 펍을 찾은 손님일 뿐일진대 그녀는 마치 커다란 말실수라도 한 것처럼 보였다. 이반은 제 웃음에 의아한 빛을 띠고 있는 넬리에게 어깨를 으쓱였다.

 

"이렇게까지 사과하지 않아도 될 일인데. 사람이 좋네요, 넬리."

"그렇지만 말실수를 한 건 사실이고 듣는 입장에선 충분히 기분이 나빴을 말인걸요."

"음, 글쎄요. 다 사실이어서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어요. 오히려 주정 구경하는 게 재미있고 신선했다고 하면 내가 사과해야 하는 걸까요?"

"어, 글쎄요? 저도 기분이 안 나쁘니까 사과하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닐까요?"

 

의문문에 의문문으로 끝난 대화의 짧은 침묵 사이로 가게의 텔레비전이 뱉어내는 경쾌한 광고음악이 지나쳤다. 그럼 서로 사과하지 않아도 되는 거죠? 그러니까 넬리도 굳이 사과할 필요 없어요. 가볍게 내뱉은 이반이 몸을 일으켰다. 넬리의 의아한 눈빛이 따라붙었다.

 

"시간 있죠? 온 김에 맥주나 마시고 가요. 내가 대접하는 걸로 하고."

"술은 제가 사려고 온 건데요, 이반 씨."

"누가 사는 게 중요한가요? 술인데."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술을 사겠다는 넬리의 지갑을 지켜주며 돌아선 이반은 이내 양 손에 각각 두 병씩, 네 병의 맥주를 쥐고서 나타났다. 맥주 좋아하는 것 같아서요. 넬리가 머쓱한 얼굴로 씩 웃었다. 이반이 맥주만 가져온 데에는 어젯밤의 작은 해프닝이 영향을 끼쳤을 거라 생각하는 눈치였다. 아주 틀린 짐작은 아니었다. 이반은 남에게 굳이 억지로 과한 술을 들이키게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저 마실 술도 모자란 마당에 마시기 싫어하는 혹은 맞지 않는 사람에게 술을 권하는 것만큼 쓸데없는 짓이 어디 있겠는가. 맥주와 함께 챙겨 온 오프너로 두 병의 뚜껑을 따낸 이반이 한 병을 넬리에게 내밀고 제 몫을 들었다.

 

"오늘이 오프라고 했었죠?"

"네. 오늘은 하루 쉬어요."

"쉬는 날인데 사과하러 먼길 오게 만들었으니까 내가 사는 거라고 하면 되겠어요."

 

사과와 함께 사과의 선물을 하러 온 넬리가 못내 찝찝해하는 것처럼 보여서, 이반은 그녀를 위해(어쩌면 술을 빨리 마시기 위해) 적당한 구실을 찾아 들먹였다. 조금은 억지가 아닌가 싶은 구실이었으나 넬리는 이반의 의도를 적당히 이해한 듯 좀 더 편해진 웃음과 함께 내밀어진 맥주병을 들어 병 목끼리 가볍게 부딪혔다.

 

"너무 사양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니까 감사히 마실게요."

"다행이에요. 계속 거절하면 또 어떤 이유를 만들면 좋을까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말투에 약간의 과장을 섞어 대꾸한 이반이 맥주를 입으로 가져갔다. 산뜻하고 가벼운 맛의 맥주가 입안을 채운다. 러시아에서 마시던 발티카를 생각나게 하는 맛이었다. 이반은 러시아에서 청량음료로 취급받는 맥주가 미국에서는 술로 분류되고 있다는 것이 아직까지도 재미있었으며, 한편으로는 미국인들은 역시 알콜에 약하다는 생각―이반 저 스스로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어쨌든 러시안의 피가 흐르는 이반은 은연중에 미국인보다 러시아 인이 앞서고 있다는 것에 묘한 자부심을 가지는 중이었다―을 재차 가지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반은 그런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입 밖으로 내기엔 괜한 승부욕을 가진 것처럼 보였고, 따지고 보면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제가 미국인 운운하는 것이 우습고 유치하다 싶었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내가 사는 거니까 마음껏 마셔도 돼요."

물론 맥주에 대한 값을 지불할 것이냐 묻는다면 이반의 대답은 당연히 아니오였다. 알렉세이가 일도 설렁설렁 하면서 술도 축낸다 잔소리를 하는 게 귓가에 선했으나, 알게 뭔가. 펍은 이반의 가게도 아니었다. 알렉세이는 이쪽저쪽에서 장사도 잘 되고 있으니 좀 떼먹는다 해서 망할 위인도 아니었다. 이반은 귓가에 알렉세이의 음성이 에코로 들리는 것 같다 생각하며 맥주병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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