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 쉬는 시간_3 (ver. SAD)
sk 연인드림 IF
천사님 리퀘, 쉬는 시간 새드엔딩 버전...
주의 : 피폐함! 우울함! 과몰입 하시는 분들은 휴식을 권장드립니다.
쉬는 시간 3편과 같은 상황에서 시작합니다. 차이점 두 가지가 시작부터 보이실 건데
샌즈가 * 여기 있어. 라고 말하지 않고
k가 "같이 갈래요?"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 대사 몇 마디 좀 달라진 게 헤어짐으로 이어졌구나~ 라는 식으로 이해하시지는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적습니다. 헤어짐이란 서로에 대한 믿음보다 불안이 더 깊을 때 생겨나는 법이겠죠...? 불안이 깊었던 만큼 망설였고, 저 차이점들은 그 표현 중 하나일 뿐이에요. 헤어짐을 선택한다면 그게 더 낫다고 판단한 거겠죠. 관계에 정답은 없으니.
그리고, 제가 이번 편의 엔딩을 새드엔딩으로 정한 이상 둘이 어떤 선택을 했어도 새드로 이어지겠죠 :D 그러니 저 두 가지의 차이점에 너무 집중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그냥 저 둘은 서로에게 곁에 있어 달라, 같이 가 달라 라는 말을 할 수 없는 상태구나... 정도로 이해해주세요.
IF의 의미는 "만약"! 즐겁게 감상해주세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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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는 빗속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지금 눈을 마주치면 안될 것 같았다.
* 넌 늘 그랬지.
* 네가 우리를 힘들어하는 게 죄인 것처럼 굴었어.
"같은 말 반복하지 말아요."
* 그랬나? 너무 까마득해서 기억이 안 나네.
피로가 올라온다. 쉬고 싶어졌다.
"이만 돌아가는 게-"
* 가려고?
빗소리에 갇힌 기분이다. 약해질 줄 모르는 빗줄기가 야속하다. 얼마든지 뚫고 간다면 갈 수 있을 텐데, 그럴 기운이 나지 않는다. 그냥... 피곤했다.
샌즈는 후드 위로 차가운 손을 올렸다. k의 손이 있는 위치였다. 천 밑의 옅은 온기에서 잔떨림이 느껴진다. 그는 뭔가 더 말하려다가, 삼켜냈다. 기다려주어야 한다. 아직도 갈등하고 있는 걸 알았다. 샌즈는 고마웠다. 그를 쳐내지도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미련함이 원망스러우면서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k는 의식적으로 숨을 내쉬었다. 기껏 정리했던 말들이 다시 제어를 잃고 날뛸 것 같았다. 다른 실수를 저지르기 전에 끝내야 한다. 여기까지가 저에게 허락된 마지막 여유일 것이었다. k는 깨트러진 의지를 그러모았다.
딱 한 번 밀어내기만 하면 된다. k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빠르게 말했다.
"저희 이제 그만하죠."
* 뭐?
생각을 거치지 않고 반문한다. 여기서 그 얘기가 나올 줄은 몰랐다. 진심이야? 샌즈의 물음에 k는 시려오는 심장을 느꼈다. 당황과 슬픔이 섞인 그의 목소리가 아팠다. 괴로웠다. 그렇기 때문에 해야만 한다. 우리는 서로를 아프게 하니까. 말투에 억지로 웃음기를 섞는다.
"두 번 말할 필요는 없죠?"
그의 손 밑에서 제 손을 빼낸다. 남자를 등지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얼굴을 보이지 않도록. 제 두려움이 읽히는 순간 끝이다.
...계속 같이 있기에도 뭐하니까 이만 나가야겠지.
떠나려는 기색이 보였는지, 남자가 급히 여자의 손목을 잡았다. 남자는 그 짧은 순간 동안 충격과 실망을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 자신이 제대로 이해한 건가, 설마 농담일 리는, 아니, 이게 당연한 거겠지...
그래, 그게 네 선택이라면.
결정과 달리 남자는 힘주어 여자를 붙들었다. 그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들이 있었다. 남자는 여자의 말을, 여자의 상황을 믿을 수 없다. 물어볼 것은 많았다. 너무 많아서 하나로 뭉쳐지니 어리석음만 드러난다. 그래도 해야 했다. 네가 소중하니까.
* 대답해. 네가 여길 떠나면...
* 넌 그걸로, 행복해질까?
남자의 질문은 모호했지만 바라는 것이 명확했다. 여자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 대답은 예전부터 정해져 있었다.
마주 봐야 한다. 여자는 숨을 한 번 깊게 들이마신 후, 남자를 깊이 끌어안았다. 적당한 속도의 맥박이 전해진다. 가까운 곳에서 느리게 뱉어내는 호흡, 따스한 온도, 저를 감싼 팔, 뭉클한 감정, 곁을 지켜주던 행복감...
이제는 잃게 될 것들. 둘은 함께 상실을 느꼈다.
나는 행복할 거야. 당신을 사랑하니까.
용기를 얻은 k는 천천히 몸을 물렸다. 두 손을 잡고 제 연인에게 환한 미소를 보였다. 사랑이 가득했다.
"당신이 원하는 만큼은 아니겠죠, 함께 있지 못할 테니."
"그래도 난 행복할 거예요."
"당신이 그렇게 만들어줬으니까."
"그리고, 당신은 날 보지 못해도 난 당신을 볼 수 있거든."
"플레이어의 특혜죠. 부럽죠?"
말을 이어 나갈수록 장난기가 가득해졌다.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갈 뿐이다. 달라지는 것은 없다. 여전히, 영원히 당신을 사랑할 것이다. 당신이 날 그렇게 만들었으니. 나의 미래에는 늘 당신이 있을 거야.
샌즈는 연인의 작별 인사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만족스러워 보였다. 어떤 그림자도 찾을 수 없다. 오직 그를 향한 믿음만이 행복의 이유였다. 너머에서도 절 찾을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게 미련하고, 우습고, 안심이 되고 또 한심하게도 좋아서... 그는 마주 웃을 수밖에 없었다. 바보 같았다. 누가 바보 같은 건지 모르겠지만 정말 바보 같았다.
여자가 남자를 일으킨다. 이제 돌아가요.
남자는 여자의 손을 놓고 우산을 챙겼다. 자, 네가 들어.
당연하다는 듯 우산을 건네는 손이 귀여워서 여자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남자를 안아 들었다.
* 우산을 들라니까.
"뭐 어때요, 마지막인데."
* 내일 파티는 참석해야지.
"그러니까 우산 잘 들어요. 나 감기 걸리면 당신 탓."
둘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수다 떨었다. 우산이 무겁다느니, 당신이 약하다느니, 헤어진 연인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즐거워 보였다. 마음 한구석은 따가울지라도 당장의 행복을 잃는 건 더 큰 손실이다. 여자가 놀러 나가듯 신이 난 발걸음으로 빗길을 걷는다. 그러곤 남자의 미래를 물었다.
나 가면 또 누구랑 사귈 거예요? 뭐? 샌즈 씨의 다음 상대가 궁금한데~ 내가 그 정도로 부지런할 리가.
"흐음... 나랑 있을 땐 부지런하게 굴었잖아?"
의미심장한 미소로 남자를 놀린다. 여자의 코를 톡, 약하게 때린 남자는 되려 물었다.
그러는 너야말로, 누구랑 사귀려고? 일단 키가 크면 좋겠네요. 허? 하하하~! 나보다 좋은 사람 찾기 힘들걸. 엄청난 자신감이네, 일단은 인정해줄게요. 나도 안 만날 테니 너도 만나지마. 어이가 없네, 그것도 일단 알겠다고 해드리죠.
* 건강하게 오래 살고.
"그건 지금도 못하고 있는데..."
* 약 좀 잘 챙겨 먹고.
"바라는 게 많으시네..."
우스갯소리와 지켜지지 못할 약속을 나누면서 k와 샌즈는 빗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웃었다. 이제는 영원히 서로의 웃음소리를 듣지 못할 테니까, 아쉽지 않도록.
***
슬슬 팔 아프다며 칭얼거린 k는 샌즈를 내려주었다. 그러자 샌즈도 우산을 돌려준다. 둘은 서로의 손을 잡으려다가, 미소를 지으며 그만두었다. 더 닿으면 미련만 생길 것 같았다. 하나의 우산 아래, 스치는 온기보다 비에 젖은 한기가 더 선명하게 느껴져도 샌즈와 k는 묵묵히 받아들였다. 이 정도의 거리, 이 정도의 관계가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좋은 마무리다. 서로를 보지 않고 정면을 바라본다.
* 어차피 다 왔었네.
그런가? k는 앞을 보았다. 거센 빗줄기와 안개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다. 다 온 건가...?
흘끗, 샌즈를 확인한다. 시선이 정확히 어떤 하나에 꽂혀 있다. 무엇을 보는 건지 모르겠다. 이런 곳에 뭔가가 있다면 아마 박사의 집일 것이나 k에겐 빛 한 줄기 조차 보이지 않았다. 조용히 지나온 길의 거리를 계산한다. 대화하느라 몰랐는데 조금... 길지 않았나?
한 번 의심하고 나니 분위기가 낯설어진다. 비 내리는 숲, 짙은 물안개, 질척한 흙바닥... k는 무심코 시선을 내렸다. 물웅덩이에 자신이 비치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마. 착각 일수도 있잖아? 일단 떨어져야 해.
k는 속도를 조금 늦춰 걸었다. 쿵, 쿵... 심장 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비가 쏟아지는 길을 내려다본다. 입꼬리가 올라간다.
"샌즈, 먼저 들어갈래요? 난 조금 더 빗소리 듣고 싶은데."
* 안에서도 들을 수 있잖아.
"밖에서 듣는 거랑 안에서 듣는 건 다르거든요?"
* 안돼. 누가 감기 걸리면 내 탓 이랬거든.
그 말에 k는 걸치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그대로 쪼그려 앉아 샌즈를 뒤에서 껴안는다. 어린아이 대하듯 후드 자락을 천천히 목에다 둘러준 k는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벌써 들어가면 아쉽잖아. 마지막 데이트인데. 내일은 애들 때문에 둘만 있기 힘들 거고."
* 허, 마지막이라는 걸로 다 허락해줄 줄 알았다면-
"안에서 담요 좀 가져와요. 아, 신발도. 여기 있을 테니까. 그다음엔, 흠, 당신 집에 갈까?"
* 정답이지.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부려 먹히는구만...
내 팔자야... 안은 김에 또 좋다고 볼을 비비며 재촉하는 게 고양이나 다름 없다. 웬일로 애교인가.
샌즈는 닿은 피부가 예상보다 차가워서 내심 당황했다. 들어갈 생각은 없어 보이니 빨리 뭐라도 가져다주긴 해야겠다. 담요 말고도 뭔가 따뜻한 것이 필요하다. 지름길로 가면 금방이고, 여차하면 박사를 부르면 되니까. 생각을 마친 해골은 k의 얼굴을 밀어내며 마지못해 알겠다고 답했다. 그제야 안았던 팔을 풀어준다.
k는 피식거렸다. 저를 이기지 못하는 연인이 귀여웠다. 빨리 와야 해.
"잘 다녀와요."
...됐다.
시야에서 샌즈가 사라졌다. 그 자리를 바라보던 k는 조심히 우산을 내려놓았다. 한 발, 두 발... 뒷걸음질 치다가 그대로 방향을 돌린다. 물 먹은 바닥은 찰박거리는 소리와 함께 경쾌한 물결이 인다. 발자국마다 거세져 파도가 칠 만큼 더 빠르게, 더 높게. 웃음이 난다. 제가 원하는 대로 되었다. 그게 슬펐다. 비가 그칠 줄 모른다. 다행이다. k는 고개를 숙였다. 볼을 타고 흐르는 빗물에는 소금 냄새가 났다. 어떤 비에는 바닷물이 섞여있나보다. 이것이 자신의 마지막 바다일 것이다. k는 안도했다. 제 바다가 연인을 덮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처음인 것 같다. 당신 앞에서 거짓말이 성공한 것은. 우스웠다. 성공한 거짓말 마저 당신을 바라는 말이라는 게.
종장이다. k는 막혀오는 호흡 속에서 닫히는 책장을 느꼈다. 꽉 욱여넣은 숨만큼 가슴 속에서 가쁘게 차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여겼다.
이것이 자신의 사랑이다. 조금은 버거웠고, 너무나 애달파서 두려웠던 마음. 당신들을 향한, 당신을 향한 삶. 나의 사랑. 나의 당신.
안개가 짙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하얀 어둠 속에서는 제 손도 아스라이 흩어지는 듯했다. 남는 것은 작별 인사 뿐이다. 그래봤자, 하고 싶은 말은 늘 똑같다.
"행복해야 해."
사랑해서, 사랑해줘서, 나는 괜찮아.
***
파스스... 샌즈는 뭔가가 스러지는 감각을 느꼈다. 그는 갑작스럽게 허해진 몸을 되짚었다. 영혼 깊은 곳에 구멍이 뚫린 것 같았다. 학습된 위기감이 그를 집어삼킨다. 설마. 되돌아간 건가? 재앙인가? 악마인가?배신인가?누가?언제?어디서부터?왜?왜?왜?
토독, 톡...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린다. 불 괴물이 들고 있던 담요를 버리고 휘청이는 그를 붙잡아 지탱한다.
* ...아니야.
샌즈는 바깥을 확인했다. 거세게 빗발치던 비가 사그라들고 있다. 조금 진정한 그는 즉시 흐름을 점검했다. 긴장으로 굳은 몸 대신 눈이 굴러다닌다. 약해지긴 했지만 끊기지 않는 빗소리, 늦은 밤공기, 마음껏 움직여지는 몸뚱아리, 숨죽인 호흡, 막힘없이 흘러가는 시간, 덧씌워지지 않고 헷갈리지 않는 기억들... 역시 아니다. 시간 축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세계는 안전하다.
...그런데, 왜?
뭔가, 뭔가... 이상했다. 잡을 수 없는 공허가 있었다. 붕 떠 있는 기분은 그에게 어떤 해결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의 일상에, "샌즈"에게 무언가가 빠졌다. 아니, 빠지고 있다. 계속해서... 그게 무엇일까? 대체 무엇이었을까? 시간이 거꾸로 돌아갔던 때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불안이 그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것은 더욱 강해졌다. 힘겹게 일어선 샌즈는 무심코 시간을 멈추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멍청하게도.
확인해야 해. 무엇을? 이변을. 누구에게? 일단은, 먼저...
"...샌즈."
프리스크의 표정에서 혼란과 슬픔이 읽힌다. 그는 없는 심장이 덜컥거리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나타난 심판자를 보자마자, 아이의 눈에서 소리 없이 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받아들일 수 없는 감정 변화가 천사를 갉아먹고 있었다. 아이는 오랜 습관으로 표정을 갈무리했다. 눈을 감고 입을 다문다. 새어 나오는 물줄기는 멈추지 않았지만, 샌즈가 저를 찾아왔다는 것 만으로 상황을 인지하기에 충분하다. 이겨내야 한다. 프리스크는 의지를 다졌다.
문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다가온다. 쾅! 나타난 것은 적갈색 눈동자. 식은땀을 흘리며 웃고 있는 입꼬리가 떨린다. 차라는 자신 조차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프리스크, 아니란 거 알아. 아는데, 그래도 물어봐야 해."
너, 죽었어?
프리스크는 고개를 저었다. 의지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건 그들이 절대로 원하지 않는 일이다. 시간은 돌아가지 않았다. 그들은 되돌아가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다. 아무 일도 없었다. 그들의 삶은 무사함이 확실했다...
그런데 왜?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왜... 자꾸만 뭔가가 사라지는 것 같을까.
프리스크의 눈물을 지켜보던 차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감정이 전염되는 것일까, 그건 우리가 영혼이 이어졌던 천사들이기 때문인가? 차오르는 고통에 시야가 흐려진다. 두 아이가 침묵 속에서 흐느낀다. 참는 것이 익숙한 아이들은 심장께를 짓누르며 쏟아지는 물 속에서 헤엄쳤다. 혼란스럽다. 이유는 몰라도 깨달을 수밖에 없다. 셋이 동시에 이변을 느꼈으니 확실하다. 지금, 이 순간, 그들은 뭔가가 잘못됐다.
차게 굳어가는 감정을 못 본 체 한 샌즈는 곧바로 다음 행선지를 정했다. 따라와.
***
아스리엘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뛰쳐나간 차라를 걱정했다. 동시에 거대한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건 설명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묵직했다. 마치, 아주 오래 전에... 소중한 친구를 잃을 때, 또는 자신을 잃을 때와 비슷했다. 차라가 죽을 뻔하던 순간, 우리가 함께 사라지던 순간, 복슬복슬한 몸이 꽃으로 변하던 순간...
왕자는 깊은 곳에서 일렁이는 쓸쓸함의 원인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방금 차라의 표정이 사라지던 순간부터 그랬으니 어쩌면... 차라가 걱정되기 때문이 아닐까? 아니면, 차라가... 차라에게 무슨 일이 있을까 봐? 차라가 제 곁에 없기 때문에...? 차라는 어디로 간 걸까? 아스리엘은 자르고 있던 색종이를 바라보았다. 내일 있을 파티를 꾸밀 장식품이다. 하트 모양, 별 모양, 강아지 모양... 모두가 모여 추억의 파티를 열 예정이었으니까. 파티의 주인공은...
...
음, 프리스크가 주최한 파티니까... 프리스크가 될 것이다. 아스리엘은 정보의 공백을 느꼈다. 어째서인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프리스크가 주인공인 게 맞나?
하지만 프리스크일 수밖에 없다. 대사로서 바쁜 만큼 모두를 보기 힘드니까, 일부러 이런 자리를 만들어서... 마침내 얻은 평화를 되새길 겸. 차라도 그렇다고 했고, 샌즈는 게을러서 올지 안 올지 모른다고 했었고, 왕실과학자의 집에서 파티를 열 예정이니 가스터 박사는 참석할 것이나 파티의 주인공이 될 자는 아니다. 역시 프리스크밖에 없다. 이 파티는 특별한 송별회니까... 송별회? 프리스크가 떠나기로 했던가? 아니, 과거를 떠나보낸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가?
뭔가가 애매했다. 아스리엘은 분명 프리스크와 차라를 만나 함께 이 파티를 기획했다. 그렇다면 이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왜 기획하게 되었는지 명확하게 생각나지 않았다. 헷갈리기 시작한다. 게다가 아까부터 자꾸 치고 올라오는 이 우울감은 무엇이지? 나는 왜... 뭘 위해서...
아이는 제 감정을 털어놓기 위해 최고의 친구를 찾았다. 차라는 프리스크가 있는 방으로 갔을 테고, 프리스크는 아마 토리엘의 방에 있을 것이다.
* 차라...?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스리엘은 시선을 내렸다. 나무 바닥에 물방울들이 점점이 떨어져 있었다. 아이는 어째서인지 그것들이 매우 슬프게 느껴졌다.
***
가스터는 시계를 보고 있었다. 초침이 한 바퀴를 돌고, 두 바퀴를 돌고, 세 바퀴 째에도 그는 미동 없이 시계를 노려보았다. 심기가 불편했다. 가스터는 분명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누굴 기다리고 있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성립되지 않는다. 상황을 인지한 박사는 그 즉시 온 집안을 돌아다니며 막연한 존재를 찾았다. 발견한 것은 많았으나 흔적 뿐이었다. 읽다가 만 만화책, 구겨진 종이와 비어있는 물잔, 냉장고를 가득 채운 블루키 함박스테이크, 블루키 인형, 블루키 음반... 가스터는 현실을 의심했다. 누군지 모를 자가 제집에서 자신과 함께 살고 있었다. 심지어 제가 방까지 내어주었는지, 생활감이 가득한 방이 하나 있다. 그는 장롱을 열었다. 흰 셔츠와 정장, 여름임에도 따뜻한 옷들이 가득 들어있다. 가스터가 입기엔 사이즈가 작다. 형태로 볼 때 인간의 옷이다. 아마도 여성, 키는 큰 편이고 몸은 마른 편... 정리되지 않은 침구와 책상으로 볼 때 정리 정돈에 서툴거나 샌즈만큼 게으른 성향. 사생활을 지키고 싶었는지 수첩이나 종이에 메모를 휘갈겨놓고 다시 덧그려 남이 읽을 수 없도록 지운 것들이 많다. 가스터는 간신히 한 줄을 읽었다. 물 자국이 있는 걸로 볼 때 울면서 쓴 내용 같았다.
'해야 한다. 아니, 하고 싶다. 난 하고 싶은 거야.'
...이것만으로는 알 수 없다. 가스터는 단서를 찾기 위해 방 안에 흩어져 있는 종이들을 모았다. 메모의 주인은 뭐가 그리 숨기고 싶었는지 온통 빗금과 먹칠로 지워져 읽을 수 있는 문장이 많지 않았다. 최대한 많은 글을 읽은 박사는 정보를 취합했다.
가스터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황상 자신과 함께 사는 인간 여성일 것이다. 그 사람은 무언가 불안하고 힘든 일을 겪고 있고, 이곳을 떠날지 말지 고민 중인 것 같다. 자신이 그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으니 그 사람은 이곳으로 돌아오기로 약속이 되어있었다. 하지만 오지 않았다. 제 짐을 들고 가지 않았다는 건 짐을 챙기지 못할 만큼 급박한 상황이었을 확률이 높지만 짐이 필요 없었을지도 모른다. 방 안에는 딱히 각별히 여기는 물건이 보이지 않았으니까. 제 성격상 함께 살 정도라면 꽤 친한 친구 관계... 아니면 그가 모셔야 할 윗사람 정도겠으나 인간 중에서 가스터가 윗사람으로 대할 자는 없다. 그러니 친구... 또는 그 이상. 그런데도 기억나지 않는다. 정상적이지 않다. 시간 축이 움직였다고 해도 존재가 기억나지 않는다는 건... 기억에서 비워졌다면, 그건, 죽음보다 더한...
가스터는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발밑이 푹 꺼지는 착각이 든다. 평화가 깨지고 악몽이 인사하는 감각이었다. 그는 무언가가 "존재를 잃었다"고 판단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허무한, 익숙하고 끔찍한 감정이 스멀스멀 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은 제게 무엇이었기에 이런 갑갑함을 선물하는가? 왜 이 세계에서 사라지게 된 걸까? 어쩌면 그 자신처럼...
* 가스터.
"박사님."
무거운 목소리들이 박사를 과거에서 끄집어낸다. 가스터는 지친 몸짓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울고 있는 천사들과 길을 잃은 심판자가 메마른 표정을 짓고 있다. 참 오랜만에 보는 표정들이었다. 그는 알아낸 것을 공유했다.
"그러면... 떠난 거예요?"
* 가장 좋은 쪽으로 생각한다면 그렇겠지.
"이름도, 모르고...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데..."
우리는 무엇을 슬퍼해야 하는 거예요?
가스터는 애매해진 기억을 더듬어나갔다. 한 번 존재한 이상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다. 뭐라도 남기 마련이다. 하지만... 존재를 잃는 것이 그의 전문 분야라고 해도 이번은 그때와 다르다. 그가 지워졌을 땐 그의 자리를 대체하는 것이 생겨났었다. 이번엔... 그저 지워졌을 뿐이다. 왜? 왜 대체하지 못하는 걸까? 아니면, 대체할 수 없는 건가?
기억에서 사라진 이는 안개처럼 덧없어서 알아차리기 어렵다. 가스터는 감각에 집중했다. 빈 자리. 버려진 방. 지워진 관계. 투명한 이름. 공백... 한참 같은 장면을 복기하던 그는 뒤늦게 이상함을 감지했다. 기억의 공백을 받아들이게 된다. 원래 그래야 한다는 듯이. 이게 당연하다는 것처럼. 천사들에게도 물어보니 같은 반응이 돌아왔다. 누군가와 함께 다닌 적이 있었다. 근데 그게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아졌다. 더 오랜 과거를 떠올리니 해방되기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놀랍게도 그 시절까지 함께한 사람이다. 그런데도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 사람은 분명 우리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뭐? 그런 사람이 있었나? 있었는데... 음, 그게 말이 되나? 그거 사람이야? 모르겠어. 괴물인가? 모르겠어. 아이들은 혼란에 빠졌다.
샌즈의 경우는 더 심했다. 불과 몇 십 분 전까지 그 사람과 같이 있었던 것 같다. 장소도 기억이 난다. 하지만 누구인지는 모르겠다.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 괴리감이 불편했다. 뭔지 모를 것이 제 생각을 안개 속에 흩어놓고 있다. 꼭 감정을 빼앗기는 것 같다. 무언가가 생겨나려 하면 금방 거품처럼 터져버린다. 더럽게 불쾌한 기분이다.
따르릉, 따르릉... 차라의 전화벨이 울렸다.
"...아스리엘. 미안한데, 나 지금-"
* 차라, k가 뭐야?
"뭐?"
* 우리가 준비하던 색종이들 중에... k라는 스펠링이 있어.
"아, 그거. 그거잖아. 악마가 게임할 때 쓰던 내 이름."
* ...아! 그렇구나. 근데 이걸 왜 만든 거야?
"...어? 그야..."
내 이름이니까... 아니, 내 이름은...
차라는 미간을 좁혔다. k... k...
"...아니면 혹시 Fris'k'인 거 아니야?"
* 어... 근데 프리스크 거는 이미 따로 있는데. 게다가 색깔이 달라.
"그럼 실수로 두 개 만든..."
...상황을 끼워맞추려는 입을 다문다. 악마, k, 사라진 사람... 천사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악마의 짓이라면 가능성이 있다. 가스터는 생각해볼 테니 우선 아이들에게 잠에 들 것을 요청했다. 천사들은 악마가 살던 곳으로 추정되는 방 앞에서 망설였다. 달칵... 어느새 사라졌던 샌즈가 비에 젖은 꼴로 커다란 우산을 들고서 현관에 서 있다. 그의 시선 끝에는 누군가의 신발이 있었다.
***
사라진 이에 대한 의문은 의외의 곳에서 해결되었다. 증거가 헛웃음이 나올 만큼 명확했다. 그들의 핸드폰에 동일한 사람의 사진이 잔뜩 찍혀있었던 것이다. 결정적으로 박사의 집을 배경으로 한 사진이 채팅방에 올라와 있었다. 채팅에서 각자 별명으로 저장해놓은 이름도 비슷했다. 겨우 한 글자라서 그게 진짜 이름인지는 모르겠지만. 채팅 기록도 남아있었다. 악마와 그들은 서로의 건강을 염려하고 이상한 농담까지 주고받을 만큼 친한 듯했다.
덕분에 정체도 알 수 있었다. 종종 그자를 놀릴 때 언급되는 "게임"과 관련된 말, 차라가 저장한 그 사람의 별명이 "파트너"인 것까지. 그들은 채팅방에 오간 내용을 통해 서로 겹치는 기억을 공유했다. 얼마 안 가서 가설이 세워졌다.
악마는 이 세계를 떠났다. 게임에 존재하지 않는 자이기에 자연스럽게 지워졌고, 그가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 건 당연하기 때문에 우리들 역시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존재가 지워지며 관계와 감정 역시 초기화가 되었고, 그 과정에서 다들 아픔을 느꼈다...
다른 친구들에게도 물어보니 같은 시각에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고 한다. 그 감정의 종류나 농도는 각자 달랐지만 모두가 서글프게 비가 잦아드는 순간을 기억하고 있었다.
샌즈는 제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들을 보았다. 어째선지 죄다 조금 멀리서 찍은 사진들이다. 얼음을 닮은 눈동자가 먼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는 사진들. 미소를 띄고 있는데도 묘하게 차가운 인상이다. 이따금 카메라를 본 사진들도 있었다. 놀라거나 행복하게 웃는 표정. 그 표정에선 애정이 묻어났다. 친구보다는 조금 더 짙고, 따뜻한.
어쩌라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기억만 없는 게 아니라 감정을 잃었다는 게 묘하게 짜증 난다. k라는 인간에 대해 남은 감정이라고는 어제 잦아드는 비를 보며 불안과 고통에 힘겨워했던 때의 슬픔 뿐이었다. 샌즈는 악마와 대화한 기록을 읽어나갔다. 연인들이 나눌 법한 얘기가 가득했다. 정말 이런 문장들을 자신이 쓴 게 맞을까, 싶을 정도로 사랑이 넘쳤다. 그리고 상대방은 자신보다 더 사랑이 넘치시는 듯했다. 대화를 끝낼 때마다 사랑해요, 좋아해요...
기괴하고 부담스럽게... 느껴진다면 잘못된 것일까? 악마가 하는 말인데 무슨 내용인들 기꺼울 리 없다. 어차피 이미 떠난 사람이다. 이 세계의 인간도 아닌데 뭐. 샌즈는 여기까지만 하기로 하고 핸드폰을 손에서 놓았다. 아, 몇 시인지 안 봤네. 시간이...
...언제부터 내가 시간을 신경 썼다고?
그는 찝찝함을 미루고 눈을 감았다. 자꾸만 속이 답답해진다. 해골이라 텅 비어있는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
"이해가 안 가요. 분명 괜찮다고 했는데."
눈을 감았는데, 왜 눈이 뜨여있지.
샌즈는 제 앞을 보았다. 티테이블과 비어있는 의자 두 개. 그 주변에서 종종걸음으로 서성이는 소녀는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한 눈에도 보편적인 외모는 아니다. 겉모양새는 인간이지만 피부에 비늘이 돋아있으니 괴물일지도.
"왜죠? 왜 이렇게 된 거예요? 당신이 포기한 건가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샌즈는 게으른 태도로 상대를 바라봤다. 습관적으로 표정을 읽는다. 슬픔... 그리고 갈 곳 잃은 분노. 뭔가를 기대했다가 실패한 모양인데.
탁! 소녀가 두 손으로 책상을 내려친다.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아요? 소중한 사람이잖아요!"
어째서인지 화가 그를 향한다. 샌즈는 꿈결에서도 생각했다. 소중한 사람. 소중한 사람... 음, 파피루스라면 지금쯤...
"...맙소사. 당신... 잊었군요."
충격을 받은 것 같다. 잊었다면, 역시 그 악마... 아니, 인간을 말하는 건가. 근데 이 아이는 무슨 상관이지?
소녀의 눈이 안타까움으로 물든다. 그렁그렁해진 눈으로 들고 있던 찻주전자를 기울인다. 쪼르륵, 예쁜 찻잔에 투명한 물이 채워진다. 액체에서는 몽환적인 향이 났다. 샌즈가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아이가 어서 마셔보라 권한다. 샌즈는 거절했다.
"잊은 사람에 대해 알고 싶지 않나요?"
* 이미 대충 알고 있어.
시큰둥하게 어깨를 으쓱인다. 낯선 사람이 주는 걸 마실 만큼 안일하지 않다. 무엇보다 이 아이는 침입자였다. 보여준 모습들로 볼 때 위협이 될 것 같지는 않지만 반가워할 이유도 없었다.
* 꼬맹이, 왜 이곳에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럼 이대로 휘둘려도 좋다는 거군요. 당신은 자신의 의지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네요."
소녀의 표정이 얼어붙는다. 차가운 눈으로 방관자를 평가한다. 어려 보이는 외관과 다르게 어투가 어른스럽다.
"그건 분명 그녀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었을 거예요. 당신은 기회가 있었어요. 어쩌면 지금도요. 하지만 당신은 절망을 원하지 않아요. 아마 그녀도 그렇겠죠..."
침입자가 울음을 터트린다. 방관자는 굳이 달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찻잔에 담긴 물에 그가 비친다. 샌즈는 수면을 들여다보았다. 해골의 표정은 무감해 보였다. 어느새 눈물을 그친 소녀는 그의 버석한 미소를 보며 설득했다.
"이 차에는 그녀의 마지막 기억이 담겨있어요. 당신에게는 그녀를 찾거나 추억할 수 있는... 유일한 정보가 될 거예요. 그래도 알고 싶지 않다면, 물러나겠습니다."
선택이다. 알고 지나갈 것인가, 모르고 지나갈 것인가. 어차피 지나가는 것은 똑같다. 이곳에 남아있다면 또 모를까, 이미 떠난 이다. 더 알아서 뭘 하란 말인가. 샌즈로서는 할 수 있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다.
...그럼에도 굳이, 그것을 "정보"라고 표현한다면...
샌즈는 정보의 필요성에 대해서 일단 제쳐두었다. 소녀는 이제 웃지도 울지도 않는다.
* 그 녀석과 무슨 관계인지 물어봐도 될까?
"그것 역시, 차를 마시면 알려드리죠."
소녀는 반드시 샌즈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기억이라... 어떤 방식으로 보여주는 걸까. 작은 호기심을 핑계로 그는 잔을 들었다. 한 모금 머금는 순간, 불편하게 일그러지던 마음이 수그러든다. 동시에 차의 수면에 일어난 파동이 찻잔을 벗어난다. 사방으로 퍼져나간 물결은 기이한 울림과 함께 겹겹이 원을 그리며 세상에 환상을 덧입혔다.
이후 그가 겪은 것은 빈말로라도 좋은 경험이 아니었다.
***
이른 새벽, 잠에서 깬 샌즈는 손으로 제 두 눈을 덮었다. 장갑이 축축해진다. 악몽 때문에 울다니, 절대 "샌즈"다운 행동은 아니었다. 하지만 미칠 것 같았다. 숨이 막혔다. 큽... 헛웃음이 났다. 고통스럽다.
이게 무슨 짓이야?
"전 이런 일을 막기 위해서 이계의 일부가 되었어요. 실패한 시프터로서, 또 다른 희생자를 만들고 싶지 않았어요."
"미리 경고할 수는 없지만 살아남는다면 이렇게 만날 수 있어요. 이계의 영향력이 끝나가는 틈에 그녀를 만났죠."
환상 속에서 샌즈는 다정한 연인을 보았다. 스며드는 기억엔 감정이 포함되어 있었다. 포근한 행복 위에 덮인 잔잔한 슬픔. 느껴지는 감정들이 k의 것임을 깨닫는 순간, 그는 정신이 아찔할 만큼 거대한 두려움에 떨었다. 머릿속에서 여자의 생각으로 추정되는 목소리가 들린다. 아무것도 하지 마. 착각 일수도 있잖아? 일단 떨어져야 해. 두 번은 안돼. 싫어. 싫어. 샌즈는 우산 손잡이를 쥔 여자의 손이 떨리는 것을 보았다. 곧 보폭을 좁힌다. 옆 사람과 조금이나마 거리를 두기 위함이다. 남자는 여자의 움직임을 눈치챘다. 모르지 않았다.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는데, 막지 못했다. 막지 않았다. 샌즈는 k를 막지 않았다. k가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그러면 괜찮아질 줄 알았다. 빌어먹을, 탓할 사람이 자신 아니면 k뿐이다. 이제 아무도 없는데. 영원히 없는데. 이런 결말을 원한 건 아니었을 텐데. 절대로 아닐 텐데.
"그녀에게 그녀를 찾아줄 이가 있는지 묻자, 많은 이들의 이름이 나왔어요. 당신은 그 중 첫 번째였죠."
"그래서 안심했어요. 그녀는 안전할 줄 알았어요. 근데... 오늘 추출한 [이야기]에 그녀가 있었어요."
"그걸... 당신이 마신 거예요."
...여자의 눈에 그림자가 드리워졌을 때, 아, 샌즈는 표정을 잃었다. 모든 걸 포기한 사람의 미소는 웃는 얼굴로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속에서 들끓던 것들이 빠르게 흩어지고, 묵직한 돌이 영혼을 찍어누른다. 제 감정과 남의 감정을 구분 짓지 못한 샌즈는 일단 버텼다. 몰아치는 절망을 외면했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쓰라림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건 k의 사랑이었다. 너무나 애달파서 두려웠던 마음. 그들을 위한, 그를 위한 끝맺음. k의 먹먹한 사랑. 넌 사랑을 위해 삶을 단념했다. 그건 "너의 샌즈"가 가장 두려워했던 일이었을 텐데.
"아, 우리는 같은 선택을 했네요..."
그가 목격한 것을 전하자 소녀는 아프게 웃었다. 샌즈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건지. 왜 그런 선택을 하는 건지. 도움을 요청하면 될 텐데, 도와달라는 말 한 마디면, 곁에 있어 달라고만 하면... 샌즈는 그의 "연인이었던 사람"에 대해 생각하려 애썼다. 어리석은 짓이다. 그래도 울어주기는 해야 하지 않나? 제 연인이 영영 사라졌다는데. 저를 기억하지도 못하고 사랑해주지도 못하는 괴물을 위해서.
사라진 기억과 감정은 돌아오지 않지만 네가 악마가 될 위인이 아니란 건 알겠다. 넌 그저 거짓말쟁이에 겁쟁이인 거지. 미련하고 이기적인 거야. 그래, 넌 그런 사람인 거군. 워... 내가 정말 잔인한 녀석을 좋아했네.
샌즈는 힘 없이 키득거렸다. 그래봤자 이 눈물은 꿈의 여파일 뿐이다. 연민마저 곧 지나가리라. k에 대해 그들이 기억할 것은 상실 뿐이다.
이게, 네가 바라던 거였을까?
엔딩곡 추천 "넌 나에게 좋은 사람이었어."
Jeremy Zucker & Chelsea Cutler - You were good to me
https://youtu.be/mVeGnninj68?feature=sha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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