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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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로그

캄캄한 어둠이 내렸어야 하는 밤이었다. 물론 뉴욕이라는 대도시의 밤은 모국의 변두리에 내리는 어둠과 사뭇 달랐지만 어쨌든 밤은 밤이었다. 내리는 눈에 주홍빛으로 물든 밤하늘이 희끄무레하다. 눈은 쉽게도 더러워지는 주제에 쉽게도 빛을 반사했다. 검던 밤하늘의 존재를 지웠다. 허드슨강과 맞닿은 리버사이드 공원의 돌담에 걸터앉은 이의 하얀 얼굴이 찬바람에 붉게 물들어 있었다. 습기를 가득 먹은 이끼 색을 띤 탁한 녹안이 고요한 강을 하릴없이 눈에 담았다. 귓가에 바람소리를 남기고 스쳐가는 바람은 매서웠지만 남자는 그자리에 못 박힌 듯 움직일 줄을 몰랐다. 검은 신발코가 하얀 눈에 파묻혀 있었다. 몇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오래도록 냉기를 맞은 코 끝이 아린 것도 같았다. 그럼에도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낯선 땅의 겨울내가 진하게 코 끝을 스친다. 익숙하게 맞던, 칼날처럼 살을 에는 바람은 없다. 남자를 감싼 모든 것이 멀었다. 눈을 감으면 성긴 바람이 토해내는 소리가 얼핏 닮은 것도 같았다. 이곳의 저는 없는 존재였다. 아마, 지금쯤이면 모국에서도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을 터였다. 마치 선명한 형체만을 가진 유령이 된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멀어진 지금 남자의 안에서 가장 선명한 감정은 권태였다. 어울리지 않았다. 권태가 아니라 분노나 허무함을 느껴야 하는 게 아닌지 남자는 잠시 고민했다. 물론 분노나 허무를 느끼긴 했었다. 그러나 남자는 지금 분명 권태로웠다. 동상처럼 한자리에 걸터앉아 가만히 호흡하는 것이 해낼 수 있는 최대한이었다. 고작 일주일 전이다. 낯선 땅으로 걸음 했고 사방에서 쏟아지는 낯선 것들을 받아들여야 했다. 주변을 낯선 것들이 가득 채우고 있음에도 권염할 수 있다는 것을 남자는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잔잔한 강 위로 몸을 뉘여도 될 것만 같이, 다시는 떠오르지 않도록 깊이 가라앉아도 될 것만 같이 피로했다. 내려뜬 속눈썹 위로 눈송이가 사붓하게 올라앉는다. 눈앞이 흰색으로 어룽어룽했다. 어쩌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쓴 이 권태의 뿌리가 평생 딛고 산 세계에서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의 전부였던 세계는 한발 물러서 다시 보니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공간처럼 보였다. 넓다고 생각한 좁은 세계에 갇혀 모르는 사이에 지쳐가고 있던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넌지시 의식의 수면으로 떠올랐다. 그렇다면 그 끝은 어디에 닿아있을까. 남자의 눈에 어둠으로 넘실대는 강물이 출렁인다. 지치고 지쳐 감당할 수 없게 되면 수면 아래로 깊게 가라앉는 건지도 몰랐다. 

 

여덟 살, 죽음을 처음 마주한 그날 이후 남자의 이십 년은 몸부림이고 발악이었다. 이제서야 이십 년 전 처음 마주했던 죽음의 이유가 궁금해졌다. 그러나 녹슨 기억에서 건져올릴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심심찮게 남자의 발목에 끈적하게 달라붙던 과거의 기억을 떼어내는 일은 앞으로도 요원할 듯싶었다. 과거에 붙잡혀 또다시 일 년, 이 년을 쌓아올려 갈 터였다. 그런 식으로 해결되지 않는 과거들만이 옆에 남는다. 남자 역시 죽은 이름을 안고 과거에 남는다. 그리고 그대로 시간의 틈에 영영 멈춰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사와는 상관없이 살아질 것을 안다. 앞으로 꾸역꾸역 밀고 나가야 할 이유가 없는 세계는 남자가 평생을 살아온 곳과 몹시도 거리가 멀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길을 잃은 것 같았다. 발악하지 않는 삶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궁리할수록 출구 없는 미로를 뱅뱅 도는 기분이었다. 남자가 살아온 곳에서 몸부림치지 않아도 되는 삶은 도태고 낙오였다. 

 

이전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강박이 남자의 뒷덜미를 움켜쥔다. 내쫓긴 곳으로 다시 돌아가야만 했다. 놓친 것을 다시 움켜쥐어 제 것으로 삼아야 했다. 그리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지금의 이 권태에 안주하고 싶었다. 돌아가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뱀의 혀처럼 교활하게 날름인다. 몸을 뒤덮은 피로에 잠식당하고 싶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깊은 곳으로, 설령 누군가를 향해 도와달라 외치게 되어도 닿지 않을 정도의 깊은 곳으로 가라앉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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