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상]Repositioning 5

유학이후프로 X 고졸 얼리프로

안내사항

*본 창작물은 네이버 웹툰 가비지타임 의 2차 팬 창작으로 원작과는 무관합니다.

*본 창작물에서 나오는 프로 농구 및 구단 설정은 현실과 상이합니다. 단 참고 자료로 각 구단 채널 / KBL 채널을 참조하여 작성하였습니다

포스타입에 게재된 게시물을 재 업로드 한것입니다.

20xx년 7월 10일 서울 LC 전지훈련 첫날

 

 

최종수는 유스캠프시절을 떠올렸다. 코치나 감독님이 쉬는 짬을 내서 고민거리를 듣고 답해주는 프로그램을 했었는데 누군가 '동계 훈련이 힘들어요.'라고 했지. 답은 뭐였냐고? 코치가 위 레벨로 올라가면 더 힘든 일이 있으니 지금부터 익숙해져야 한다고 했다. 그래, 그 말이 맞다.

왜 이런 생각을 갑자기 하냐고?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힘드니까. 사실 일종의 주마등이나 마찬가지인 셈이었다.

하루하루가 운동으로 점칠 된 운동선수라 해도 어떤 힘든 일정도 소화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러니까 해마다 있는 ‘훈련’이라 불리는 연례행사는 매우, 매우 힘든 일정이었다.

오전에는 무슨 어디 시골길을 뛰어다니면서 작은 산에 올라가서 사진 한 장 찍었는데 등산하는 내내 훈련코스 짠 거 누구냐고 다들 한마음 한뜻으로 기획자를 욕했다. 점심 먹고 나서 오후에는 쉬게 해준다면서 계곡에 가서 물놀이를 했는데 애초에 몸을 움직이는 것부터가 체력이 소모되는 일 아니었나? 남들 따라 계곡에 몸을 담가 더위라도 가시게 할 참이었는데 멍하니 서 있다가 물살에 휩쓸릴 뻔해서 모두의 웃음 포인트가 되었지. 지금 저녁 먹고 나면 야간 훈련이 있지. 운동부에 소속된 순간부터 매년 한계를 끌어올리는 고강도 체력훈련을 하는 연례행사가 있었지만 영 익숙해지기 힘들었다. 아니 익숙해졌다면 그건 인간이 아니지. 연속되는 생각의 흐름. 선배들은 불쌍한 신입의 모습을 안쓰럽게 볼 뿐이었다.

“얘들아 봐봐. 최종수 밥 먹다 말고 멍때린다.”

“우리 신입들 전지훈련 많이 힘들지?”

최종수는 밥을 먹다 말고 한숨을 푹 쉬었다. 너무 힘들면 입맛도 없다던데 그런 것인지. 평소보다 일찍 수저를 내려놓는 최종수의 모습을 보며 주변에 있는 선배들이 키득거리며 그의 어깨를 도닥여주었다. 야 우리도 매년 올 때마다 힘들어 죽어. 그래도 어쩌겠냐. 야간에도 훈련이 있는데 먹어야 힘내지.

네. 최종수는 짧게 대답하고는 마저 밥을 먹었다. 이러나저러나 피하지 못할 일정. 즐기지는 못한다 해도 그냥 받아들이면서 식사가 제공해주는 에너지라도 채워야 했다. 야간에는 포지션별로 다른 훈련메뉴를 진행했었는데 포지션별로 기술이라던가 스텝 연습을 하는 쪽이긴 했다.

평소의 훈련메뉴나 다름없긴 한데 누구 하나 쉬는 것 없이 다들 열심히 하고 땀을 뺀 상태에서 한 번 더 빼니까 끝나갈 시간에는 다들 넉다운 상태가 되어있었다.

“자자, 마지막으로 힘내고 스트레칭을 하자.”

기합 넘치는 주장의 한마디로 공식적으로 전지훈련의 첫날의 끝이 고해진다. 스트레칭을 하면서 쿨다운이후, 최종수는 막내의 의무인 뒷정리를 다 마친 후 숙소 방으로 들어왔다. 이대로 뻗고 싶었는데 웬 방에 안 보이던 물건이 하나 놓여져 있어 뒤이어 들어온 룸메이트 이휘성에게 물었다.

“이거 뭔데?”

“이번에 번갈아 가면서 훈련 브이로그 찍기로 했잖아.”

내일이 우리 차례라 놓은 거 아닐까. 진짜 전지훈련만으로도 힘든데 별걸 다 한다. 하지만 싫은 일도 어떻게든 해야 하는 것이 프로인 법. 최종수는 제 침대에 앉아 침대와 침대 사이에 놓인 캠코더를 빤히 바라보았다.

“…근데 이거 뭐부터 해야 하냐?”

“그냥 훈련 어떻게 하는지 말이라도 해보라는데.”

맞은편에 앉은 이휘성이 캠코더를 들어 보여 작동방법을 찾는 새, 최종수는 구단 유튜브 영상목록을 보았다. 작년 이맘때쯤 선배들이 찍은 게 있지 않을까. 해서 보면 작년에는 구단 유튜브 PD가 전지훈련 영상을 찍어서 편집한 게 전부였다.

이번에도 이렇게 하면 될 텐데. 왜 갑자기 선수들에게 영상을 찍으라 시키는지. 어찌 되었든 시키는 건 하는 수밖에 없으니 혹시 타 구단도 이런 걸 했었나. 최종수는 염탐하는 기분으로 알고리즘을 따라 타 구단의 전지훈련 영상들을 찾아보았다.

'2년째 막내 기상호의 전지훈련 V-로그'

수원 ST 구단 유튜브의 영상. 1년전이라 적힌 영상은 작년에 찍어서 업로드 한 것이었다. 기상호는 작년에 이런 것도 찍어뒀었나? 최종수는 홀린 듯이 그 영상을 클릭했다.

“안녕하세요. 수원 ST 팬 여러분들…. 에?”

버스를 배경으로 한 화면. 기상호는 인사부터 하는 것으로 시작했으나 화면에서 안 보이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호야 너 아직도 우리 팬네임 안 외웠나? 아, 이거 진짜로 그거 말해야 했어요? MZ세대니까 한번 해봐라. 키득거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화면이 암전. 다시 기상호의 얼굴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실피 여러분들. 2년 차 막내인 기상호입니다.”

날씨때문인지 아니면 부끄러움 때문인지 붉어진 표정, 고정되지 못한 시선. 카메라를 마주하지 못하는 시선이 이제 우예합니까. 옆에 있는 사람에게 SOS를 쳤지만 키득거리는 웃음소리만 가득했다.

“그럼 저희 수원 ST에서는 이번 주부터 전지훈련에 들어서게 되는데요. 강릉에 왔습니다. 이제 막 도착해서 짐을 풀건데요.”

짠 여기가 저희 숙소에요. 아무 말을 하다 보니 이제는 좀 익숙해졌는지 이젠 눈치도 안 보고 얼굴 한번 비추었다가 카메라로 숙소를 비추었다. 저는 이번에 두 번째로 오게 되는 건데 시설이 좋더라고요. 딱 들어봐도 영혼이 없는 목소리. 건조한 어투로 시설 구조를 소개하고 있었다.

“근디 이거 숙소가 어디에 있는 어느 리조트인지 알려주면 구단 기밀유출인가요. 아니면 간접홍보가 되는 건가요?”

아, 이건 순수하게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기밀유출인지 간접홍보인지 수원 ST의 선수들에게 물어가면서 숙소에 가는 길 동안 열띤 토론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물론 결론은 안 나고 자막으로 ‘시청자 여러분들의 의견은?’이라는 말만 띄워줬지만. 이후에는 숙소 안, 기상호의 방을 보여주었다. 2인실로 된 숙소는 지금 최종수가 자는 곳과 비슷하게 1인용 침대 두 개와 미니 냉장고, 그리고 TV가 있었다. 숙소 쪽으로 비추던 화면은 창문 너머의 풍경을 보여주었다.

“저 봐요. 산이 보이죠? 이제 저희가 올라갈 산입니다.”

산 타는 건 어디나 다 똑같은가보다. 최종수는 풋 웃고는 계속 기상호가 숙소를 소개하는 화면을 봤다. 옆에 있는 룸메이트가 인사를 한 후 화면은 짐가방으로 바뀌었다.

“어 이제 또 뭐하지…. 맞다. 이제 짐을 풀건데요. 저희 저번에 전지훈련 때 뭐 들고 가는지 물어보는 콘텐츠가 있었죠? 그래서 진짜로 뭘 들고 왔는지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건 저 갈아입을 옷이고요. 휴대용 샤워 용품이랑. 또 발 아플 때 쓸려고 올리브영에서 사 온 거. 그리고 고속충전기랑 지갑. 기상호는 짐가방에 있던 걸 하나하나 풀면서 보여주다 무언가 빠트린 깨달았는지 짐을 다 빼낸 가방을 뒤집어보고 가방에 있는 작은 주머니도 뒤져가며 어떤 물건을 찾아보는 모습을 비추어주었다. 어. 칫솔이랑 치약 없네요.

“상호야 너 작년에는 샤워 용품 빼먹었더니 이번에는 칫솔이랑 치약 빼먹었냐?”

“아이, 저 챙긴 줄 알았는데. 어디로 간 거지?”

웅성거리는 소리, 그리고 기상호를 놀리는 소리와 함께 화면은 다시 암전되었다.

“네, 제가 칫솔이랑 치약을 빼먹어서 여기 편의점에 왔습니다.”

여러분은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짐 한번 확인하세요. 저처럼 치약이랑 칫솔 사러 가지 말고. 화면은 숙소에서 편의점의 풍경으로 바뀌면서 기상호는 어색한 미소를 짓고는 편의점에서 살 물건을 소개하고 있었다. 일단 치약이랑 칫솔을 사고요. 오늘 오후부터 산을 올라갈 건데 저번에 갔을 때 진짜 현기증 나서 중간에 초코바 하나 먹으려고요. 그렇게 초코바 하나랑 치약과 칫솔을 계산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다시 만나는 선배들과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사실 이야기라고 해봐야 강릉에 전지훈련을 온 소감이라던가 어떤 걸 집중적으로 단련할지. 그런 이야기뿐이었지만. 그리고 훈련을 하러 들어가는 모습을 끝으로 영상은 끝이 났다. 정말로 별거 없긴 한데. 칫솔 빼먹은 기상호만이 기억에 남았다. 저번에 부산 여행 갔을 때 뭐 1박 2일 여행 가자고 체크리스트를 만드냐고 종수햄 J티 난다고 뭘 했던 게 떠올랐는데, 거봐 저런 거 안 만드니까 꼭 뭐 하나 빼먹지.

“뭐 찾아봤어?”

“그냥 다른 구단 영상 좀.”

그냥 숙소 보여주고 선배들이랑 이야기 나누면서 훈련하러 가는 거 찍는 게 전부던데? 최종수가 별거 아닌 것처럼 말하니 안심이 되었던지 이휘성은 한번 시험 삼아서 촬영 한번 해보자 하였다. 캠코더 LCD 패널을 돌려서 버튼을 누르고 촬영을 시작.

“안녕하세요·서울 LC의 막내 최종수입니다.”

“마찬가지로 막내 이휘성입니다.”

그리고 잠깐의 정적. 딱 한 마디만 했을 뿐인데 너무 어색해서 서로 카메라를 못 보고 고개를 휙 돌렸다. 야 진짜로 어떻게 하냐? 그러게. 서로 카메라 앞에 서야 할 책임을 떠넘겼다.

“그리고 종수, 네가 인터뷰 많이 했었잖아.”

인터뷰 많이 해본 네가 어떻든 할 수 있다는 신뢰 섞인 말. 하지만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매번 사람들에게 해명한 이야기지만 인터뷰와 이렇게 콘텐츠를 잡고 찍는 건 좀 달랐다. 그런데도 이휘성이 굽히지 않고 말하기를. 그래도 카메라에 익숙한 사람이 해야 하지 않겠냐. 다들 네 얼굴 보려고 V 로그를 볼지도 모른다. 본인은 원중고 모 연예인 소리를 들었으면서. 속으로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나마 카메라에 익숙한 건 맞는 사실이라 최종수는 심호흡 한번 하고 나서 입을 열었다.

“여기가 저희가 자는 숙소 방입니다. 이제 카메라를 받아서.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촬영을 하겠습니다.”

멘트 하나 쳐내는 것도 왜 이리 어려운지. 최종수는 자기 전 마무리 멘트를 한마디 하는 것으로 캠코더의 정지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다시 침묵. 침묵 속에 앞으로 우리 촬영 어쩌지. 서로 걱정스러운, 그리고 곤란함이 담긴 눈빛을 교환하였다.

“편집자가 보고 알아서 잘 자르겠지?”

“어.”

일단 촬영을 어떻게 할지는 씻고 나서 고민해보자. 서로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각자 짐에 있던 세면도구를 꺼냈다.

다음 날 아침.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리고 아침의 찬 공기가 창가 너머로 들어오는 시간. 막내들만이 모인 숙소에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자. 이제 킨다.? 응. 마치 중요한 스위치를 누르는 것처럼 이휘성은 캠코더의 전원 버튼을 누른 후 녹화 버튼을 눌러보았다.

“네, 지금은 오전 8시입니다. 아침 식사를 한 다음 오전 훈련을 하러 갈 거고요. 이제 이휘성 선수와 함께 밥을 먹으러 가겠습니다.”

역시 한마디 할 때마다 어색해 죽겠지만 이 또한 익숙해지면 괜찮아지리라. 최종수는 한마디 멘트를 친 후 이휘성과 함께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고는 렌즈 방향을 바꾸어 숙소에서 식당으로 가는 길을 찍었다.

“오늘이 너희들 차례였어?”

“네.”

“그럼 이제 선배들 인터뷰를 해봐야지.”

“근데 인호 형. 진짜 이거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요.”

이휘성이 캠코더를 들며 SOS를 치자 어휴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형 아니면 누가 이런 거 해주겠냐. 잘 보고 배우라면서 김인호가 이휘성이 든 캠코더를 잠깐 가져갔다.

“자 서울 LC의 김인호입니다. 잠깐 진행을 위해 마이크 바꿨습니다. 우리 신규들에게 인터뷰를 해볼건데요.”

자 신규들 이번 전지훈련 둘째 날인데 어떻습니까. 역시 경험자는 달라도 뭐가 다르다고. 억양부터 무언가를 끌어내는 듯했다.

“일단, 힘드네요.”

“동감입니다.”

그럼 어제 첫날에 가장 힘든 훈련메뉴는 뭐였나요? 역시 산 오른 거겠죠? 인호가 물으면 이휘성이 답하고 최종수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기를 몇 번. 캠코더는 다시 이휘성에게 넘겨졌다.

“자 이렇게 그냥 간단한 질문 하면서 시간 보내면 되니까. 촬영 힘내라.”

서글서글한 미소를 짓곤 김인호는 손을 흔들며 자리를 떴다. 훅 지나간 시간. 물 흐르듯 진행된 대화들. 말이야 쉬운데. 정작 카메라 앞에서 입을 열려고 하면 멘트도 생각이 안 나는 데다가 인터뷰 대상들이 다 선배들이다 보니 말 걸기 어려운 게 있었다.

“일단 밥 먹으러 갈래?”

“어.”

둘은 머리를 긁적이면서 캠코더로 촬영을 하며 식당으로 향하였다. 리조트에서 제공되는 아침을 먹는 장면이라던가.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러 가는 장면. 농구코트가 있는 훈련용 체육관으로 가는 장면 등. 오늘 하루의 장면이란 장면은 다 찍었다. 용기를 내서 선배들에게 인터뷰하기도 하고. 사실 인터뷰라 할 것도 없어 모두의 곡소리가 담긴 영상이 된 것 같았지만.

둘째 날도 첫날과 마찬가지로 고강도 트레이닝이 진행되었으나 익숙해진 탓인지. 아니면 브이로그 찍는다는 또 다른 미션이 주어진 탓인지 어제처럼 저녁 식사시간 때 넋이 나갈 정도로 진이 빠지지는 않았다. 야간 훈련도 둘째 날이 되니 좀 괜찮은 것 같기도 했다.

“그럼 둘째 날 훈련은 이것으로 마무리되었고요. 다음 타자에게 넘기도록 하겠습니다.”

이 오늘 하루 동안 진을 빼게 할 촬영이 끝난다는 사실 때문에 더 괜찮은 것 같기도? 하루를 마무리하는 야간 훈련을 끝으로 신규들의 촬영 임무도 마무리되었다. 캠코더의 화면이 꺼지자마자 둘은 안도의 한숨을 푹 쉬었다. 과연 이 촬영 장면 중 온전히 쓰일 장면들이 몇 분이나 될까 싶었지만 일단 끝난 건 끝난 거고. 어제처럼 체육관의 뒷정리를 끝낸 후 숙소로 돌아와 씻고 침대에 누우면 핸드폰이 잠깐 빛나고는 알람이 떴다.

기상호

【햄 전지훈련이었죠?】

【영월은 어떻습니까ㅎ】

 

연락 한번 참 빠르다. 최종수는 핸드폰을 들어 자판을 두드렸다.

【힘들어. 오늘 브이로그까지 찍었다.】

기상호

【ㄷㅂ.】

【햄네도 브이로그 찍어요?】

【전 작년에 찍었는데 진짜 헛소리 퍼레이드였음.】

 

【ㅇㅇ 봤어.】

 

기상호

【잉? 어쩌다가요?】

 

【참고할 영상 보다가.】

【그래서 이번에는 전지훈련 갈 때 뭐 빼먹을 거냐?】

 

기상호

【아 다 챙기고 갈거라구요ㅠ】

 

과연 다 챙기고 갈지. 최종수는 픽 웃으며 엎드려 누운 채로 계속 메신저로 대화를 나눴다. 훈련메뉴라던가 어떤 연습을 했는지. 그런 이야기보다는 그냥 밥이 어떻고 주변에 뭐가 있고 숙소가 어떤지.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들. 힘들었던 기억을 제하고 남은 것들로만 이야기를 나누면 곡소리만 나오는 감상은 사라지고 그냥 어떤 추억에 대한 감상이 되었다. 딱히 즐겁지 않다고 해도 나쁜 것을 뺀 기분은 그럭저럭 괜찮았으니까.

기상호

【전 이젠 자볼게요 ㅂ2】

 

【ㅇㅇ 잘자.】

 

별거 아닌 이야기로 메시지를 나누다 굿나잇 인사를 한 시간을 보니 새벽 1시였다. 아. 늦게 자면 안 되는데. 잠깐 후회가 몰려왔지만 그래도 이렇게나마 대화를 나눈 시간은 괜찮았으니까. 내일 좀 고생하자. 그런 생각으로 최종수는 핸드폰을 엎어놓고 눈을 붙였다.

 

 

흔히들 말하길 체력을 증진하려면 즉, 유지가 아닌 향상으로 가려면 반복을 하되 익숙해지면 안 된다고. 그러니까 좀 익숙해지려고 하면 훈련코스는 새로운 죽을 맛을 선사한다는 뜻이었다. 어 이제 좀 괜찮은데? 에서 아니다 죽을 것 같다를 여러 번 반복. 야외 러닝 코스는 매번 루트 짠 사람을 욕하고 싶었고, 휴식 프로그램도 휴식이라기보다는 앞으로 굴려지기 위해 잠깐 몸과 뇌를 속이는 기분이 들었다.

유일하게 익숙해질 것이 웨이트 트레이닝이지만, 다들, 이 고강도에 익숙해진 만큼 몸을 편히 쉬게 놔두지 않았다. 즉 무게가 익숙해지거나 힘들지 않다 느껴지면 알아서 무게를 올리는 자신을 발견하고 말았으니. 어찌 되었든 이런 일정을 반복하다 보면 전지훈련의 마지막 날이 되었다. 마지막 야간 훈련은 연습경기. 그 끝을 알리는 건 휘슬이 울린 다음 전원이 수고하셨습니다. 한마디.

최종수에게 이 훈련을 통해 얻은 성과가 있다면 그냥 다 같이 죽을 정도로 훈련해서 힘든 경험을 같이한 동지애가 생겼다는 정도? 전지훈련 전 매일 함께하는 훈련 루틴에서 팀원과 합 맞추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문제점은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그래도 24시간 중 취침시간과 휴식시간을 제한 시간 동안 다 같이 부대끼는 생활을 하면 친밀감도 생기게 되는 거고. 서로 어색한 사이였던 선후배 관계가 그나마 나아진 것 같았다. 사실 몇 달 뒤면 새 시즌이 돌아오는데 그동안 어색한 사이이면 곤란한 건 맞지만.

“맞다 마지막 날이니까 야식이랑 주류를 로비에 놔뒀으니까 방마다 가져가고 싶을 만큼 가져가고.”

수고했다는 보상으로 구단에서 야식과 술을 제공했지만 순수하게 기뻐할 수는 없었다. 마무리 회식이나 다름없는 자리가 숙소에서 만들어진 것과 다름없었으니까. 물론 팀워크를 다지는 의미에서 의도는 좋았다. 회식마다 술자리가 괴로웠던 최종수로서는 좀. 업무의 연장선과 비슷한 느낌이었지만.

“종수, 다 씻으면 음식이랑 술 들고 310호로 오래.”

“어.”

이휘성과 함께 마지막 전지훈련의 뒷정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샤워를 마친 최종수를 반긴 건 주장의 방에 모이라는 공지. 둘은 대충 머리를 말린 후 310의 문을 두드렸다. 직후 문이 열리고 그 방안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선배 선수들의 얼굴이 보였다. 이휘성과 함께 썼던 방과는 다르게 널찍한 마루. 제아무리 마루가 넓다고 해도 열댓 명 되는 선수들이 넓게 앉기에는 좀 무리인 공간이라 다들 껴 앉고 있었지만.

“자자, 이제 막내도 왔으니까 마시자.”

짠, 다들 맥주를 한 캔 까면서 건배하는 시늉. 그리고 시작된 전지훈련의 뒤풀이 겸 회식. 최종수는 선배들 사이에 끼어 앉아 술을 마시며 가만히 그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후담을 묻는 일이야 답은 정해진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 최종수에게 지금의 이 시간은 그냥 적당히 대답하면서 야식 먹고, 술 마시는 시간이긴 했다.

시간이 지나 하나둘 취기가 올라가기 시작하면 회포를 풀기 시작한다. 2주간 힘든 상황의 연속이기에 선배들만의 오해가 있기도 했고. 날이 선 태도로 대한 적도 있었고. 서로 뭐 미안했다. 사실은 이랬다. 하는 말들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거지만. 막내라 그냥 YES맨 모드인 둘에게는 해당하는 일은 별로 없어서 둘은 얌전히 술이나 음료를 홀짝이면서 저런 일이 있었구나. 사실은 저랬구나. 하고 듣는 것이 전부였지만.

“근데 종수야. 너는 기상호랑 언제 그렇게 친해진 거야?”

“...네?”

“저번의 부산이라던가 대학리그 관람도 같이 보러 가고. 아직 올라오지 않았는데 협회 유튜브에서 뭐 하나 같이 촬영했다면서.”

그리고 이 회포를 풀 대상에 포함될 줄 몰랐던 최종수는 눈을 깜빡 뜨며 멍하니 저에게 말을 풀어내는 민호 선배의 말을 들었다. 그런 거 볼 때마다 좀 아쉬워. 우리 종수가 정말 정말 열심히 해줘서 잘 대해주고 싶은데, 선배한테는 거리 두고 있잖아. 평소에는 얌전히 같이 운동하고 훈련 때는 투맨게임 하면서 합을 맞췄던지라 서운한 게 있어도 그냥 합이 잘 안 맞는 부분에 대해서 말할 줄 알았는데. 이런 사적인 부분에서 푸념을 들을 줄 잘 몰랐다.

맞아. 종수야, 이번 시즌 진짜 미안한 게 많아서 잘 해주고 싶은데 친목 다지려고 하면 묘하게 벽이 느껴져서 다가가기 힘든 줄 알았는데, 두 달 새에 다른 놈이랑 부쩍 친해진 모습 보여주고. 너 원래 그런 애였어? 그런 애라는 건 대체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해명은 해야 했으니. 그 지긋지긋한 사적 친분에 대한 설명을 선배들에게도 해주었다.

“그러니까…. 기상호 걔랑은 그냥, 자주 마주친 것도 있는데. 걔도 얼리라 대학 동문 없어서 비슷한 처지인 저랑 같이 놀게 된 거니까요.”

“대학이 대수야? 우리 팀에서 대학 같은 사람 얼마나 된다고.”

“그건 맞는데….”

최종수는 제 손에 들려진 맥주 캔을 보았다. 아무래도 다들 취기에 얹는 한마디 말들은 충동적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마음에 없는 소리는 아니고, 속에 담아두긴 했지만 여태 이런 걸 말하기에는 시시콜콜해서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들? 물론 이렇게 회포를 풀어나가고 팀워크 다지는 게 맞다. 맞는데…. 사적인 친분으로 말이 얹히니 기분이 이상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기상호는 그냥 개인적으로 친해지고 싶었던 상대였고. 선배들은, 같은 팀원으로서의 친분을 다지면 좋은데. 그렇지만 친분을 다지지 못한건 서로의 쌍방 과실 아니야? 잔잔히 흐르던 생각은 울컥 치솟아 흘렀다.

“저도 선배들한테 거리감 느껴서 힘들었다고요.”

에라 모르겠다. 최종수는 맥주 한 캔을 단번에 마시면서 쌓아둔 이야기를 뱉어냈다. 상대방도 취기에 서운한 말 뱉어내는데 그냥 참기에는 억울한 것도 있었다.

술 마시기 전에 진작 말하면 안되나? 그런 기분도 들었지만 자신도 술김에 푸념하다가 문제를 해결한 전적이 있었으니. 그냥 이왕 말한 것 쭉 말하기로 했다. 제가 뭐 미국 다녀왔다고 해서 사람 아닌 게 아닌데. 경기 때도, 훈련 때도 선배들이 저 어려워했잖아요. 농구코트 위에 있으면 다 똑같은 선수인데, 제가 뭐 특별한 사람 되는 것처럼 대하고. 물론 제가 잘해서 에이스 롤인 거 알아요. 그렇지만 에이스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도 아니라고요. 저 선배들이랑 같이 농구경기를 해서 다음 시즌 우승까지 하고 싶었는데. 자꾸 선배들이랑 손발 잘 안 맞아서 저도 속상하다고요 홧김에 시작한 말은 그간 쌓인 게 많았던지 평소에 말 없던 최종수의 입에서 수도꼭지 열린 마냥 말이 줄줄 나왔다.

그리고 친목 다지는 것도 저한테 먼저 주말에 뭐하냐고 어디 같이 가겠느냐고 물어본 적도 없고. 막내가 선배들한테 뭐 제안할 수 있겠어요? 그렇게 감정을 다 토로하고 나니 뭐 별별 소리가 나왔다. 다 같이 취기가 올라온 상태였던지라 어어 그랬냐? 하면서 서로 위로도 해주고 의기투합도 하고. 누군가가 이 현장을 보며 꼴불견이라며 한숨 쉴 법도 했지만 다 취한 상태였기에 그냥 잘 넘어갈 수 있었다. 앞으로 잘 해보자. 나중에 종수도 우리가 부르면 거절하지 않기다? 네. 그렇게 할게요.

비시즌 중반부까지 느꼈던 거리감은 서로 쌓아둔 감정을 폭발시켜 해소하고 나서야 조금, 가까워질 계기를 얻었고 섭섭함을 떠나보낸 술자리는 자정이 되어 파할 수 있었다. 뭔가 이게 맞나 싶어도 나름 겉으로는 잘 끝났고 봉합되었으니까. 그래 좋아진 게 맞겠지. 최종수는 파한 자리에서 일어나 제 방으로 갔다.

 

신연우PD님

【기상호 선수님 먼저 보시라고 영상 보내요.】

 

기상호 최종수 그 둘의 만남이란?.avi

 

【내일 업로드 될 거에요.】

 

 

【종수햄 지금 전지 훈련 중이라 영상 못 볼 텐데】

【저라도 먼저 보고 피드백 드려야지.】

 

신연우PD님

【저희 최종수 선수님 이미지 지키려고 진짜로 노력했어요ㅠ】

 

야간자율훈련과 뒷정리까지 끝난 시간. 라커룸에 있던 기상호는 PD의 우는 이모티콘을 보곤 픽 웃고는 채팅방에 있는 동영상 파일을 다운받았다. 협회 유튜브 PD가 최종수 촬영 하나 해서 조회 수 뽑아먹을 영상 만들겠다고 벼르던 건 이전부터 알던 사실이었다. 촬영하러 가는 경기마다 최종수 보이면 꼭 찍어서 몇 마디 말이라도 뽑아내려 했던데. 사실 이건 SNS를 잘 안하는 최종수의 탓도 있었다. 다들 근황은 궁금해하는데 근황을 알 방법이 구단 유튜브를 보거나 아니면 협회 유튜브 영상에 깜짝 출연 하는 걸 챙겨 보는 수 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그 유튜브 조회수를 뽑기 위해 촬영할 콘텐츠를 찾는 것도 일이었다. 농구선수가 게임을 하는 걸 스트리밍 하기에는 촬영시간도 길어지고, 분량을 재미있게 뽑을 수도 없을 테고. 그렇다고 가장 무난한 먹방? 이건 더 재미있게 찍을 수 있는 선수들이 있다. 일상 같은 걸 찍자니 이미 구단에서 브이로그를 찍기 시작할 테니. 그렇게 여러 방면으로 찾다 첫 만남이었던 ‘쌍용기 결승전’이 눈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다시 보면서 그때의 만남을 회상하면서 대화를 나누는 그런 영상. 회상한다고 해도 옛날 일이라 서로의 흑역사 방출이지만. 그래도 이야깃거리를 뽑아낸다면 옛날 일을 안주 삼는 것만큼 적당한 것도 없으니까.

다 내려받은 영상이 재생되면 서로 화면을 보고 인사를 하면서 PD가 오늘의 콘텐츠를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4년 전 쌍용기 영상이 재생되면서 경기 시작 전 서로 인사하는 장면이 비추어졌다.

“그래서 이때 서로 인사를 했는데 첫인상 어땠나요?”

“처음에 완전 연예인 보는 줄 알았죠.”

“그냥 아 쟤가 기상호구나. 그것뿐이죠.”

“아 맞아요. 제가 먼저 손 내밀면서 잘 부탁드린다고 했는데”

“야야!”

그리고 암전된 화면. 최종수의 ‘비켜 뒤지기 싫으면’은 그 장소에 있는 사람만 아는 비밀이 되었구나. 이 영상으로 슈퍼루키의 인성 논란이 생겨선 안 되니까. 기상호는 키득거리면서 영상을 계속 보았다. 그때는 정말 치열했고 여러 감정이 교차했던 경기였는데 다시 보았을 때는 아 저땐 저랬지. 그런 감상만이 남게 된 결승 영상이 다 끝났다.

“그래서 지금은 서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요?”

“음. 종수 햄이요? 알고 보면 좋은 형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답하자 영상 속 최종수가 저를 노려보았다. 정말로 그것뿐이냐고 표정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거기서 뭘 더 바라는 것인지. 그럼 최종수 선수님은요?

“뭐. 가끔 이상한 소리를 하면서 사람 열 받게 하는데 그래도 착한 동생이라고 생각해요.”

거봐 종수햄도 나한테 저렇게 말하면서. 영상은 다음 시즌 두 선수의 활약을 기대한다는 자막으로 끝이 났다. 딱히 피드백할 것도 없어서 이대로 괜찮을 것 같다고 말하려던 차. 옆에서 불쑥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보냐?”

“헉, 세형햄. 아직 안 가셨어요?”

“준수량 얘기 좀 하다가. 그래서 뭔데?”

“PD님이 저번에 촬영한 거 먼저 보내주셔서. 피드백 줄려고 보고 있었어요.”

“아, 최종수랑 같이 찍었던 거?”

“네. 다 나오지는 않고 편집 좀 됐는데 그래도 재미있게 잘 된거 같아요.”

한번 보실래요? 선배에게 제 핸드폰을 쥐여주고 영상을 다시 재생시켜주자 세형은 가만히 보다 풋 하고 웃었다.

“니들 진짜 웃기네.”

“한국 농구의 부흥을 위해 저와 PD님이 힘을 썼다고요.”

“나중에 성준수 촬영할 때도 그렇게 힘 써줘.”

“준수햄은 고등학생 때 인터뷰한 거 보면 아실 텐데. 말하는 것만으로도 포인트 몇 개 나온다고요.”

그 말을 들었는지 한 칸 건너 샤워룸에서 머리를 말리던 성준수의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기상호 너 뭐라 했냐? 아입니다! 준수햄 촬영하면 구단 팬 늘어난다고 했습니다. 답은 없었지만, 나중에 아니꼬운 눈빛으로 노려볼 것이라고. 기상호는 나름의 예측을 했다. 뭐 어떤가 결론적으로는 비슷한 소리일 텐데.

“그래서 너희 둘 어떻게 친해진 건데?”

“그야, 동네 사람이라…”

“정말로?”

네. 기상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냥 같은 동네서 마주쳐서 어쩌다 하룻밤 자고. (사전적 의미) 서로 술 취한 민낯(사실 이건 기상호가 더 취했었지만) 보고. 뭐 그러다 주말에 시간 남는 사람끼리 만나다 친해진 것뿐인데. 다들 반응이 영 시원치 않았다. 정말로 그런걸로 너희가 친해지냐? 그런 반응 말이다.

“특이하긴 하네. 우린 너한테 술 사주는데 1년 이상 걸렸는데.”

“아 근데 햄. 그건 제가 빠른년생인 탓 아니었습니까.”

기상호는 억울함 가득한 표정을 지어보았다. 1년 차 시절. 선배들이 저녁 사준다고 나오라 하면 정말 밥만 사주고 상호에게 우리 막내는 아직 미성년자라 안 되겠네. 놀린 다음 먼저 집에 보냈으면서. 물론 기상호 내면 I의 자아는 ‘완전 개꿀. 집 가서 게임을 해야지.’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대화에 잘 끼지 못하는 것과 스스로 거리를 두 눈 건 좀 다른 이야기였다.

“그것도 있긴 한데. 예전도 그렇고 구단 일 아니면 사석에서 볼 일이 별로 없잖아.”

“친한 사람 있는 건 좋은데. 연습 게을리하지 말고.”

“아이, 안 그래도 저 공사 구분은 잘한답니다.”

“그건 알지. 근데 요새 빠져서.”

전에는 30분 일찍 와서 아침 유산소로 워밍업 하던 놈이. 이젠 우리랑 비슷한 시간대에 출근하잖아. 요새 좀 늦게 일어나긴 했죠? 기상호는헤실 웃어 보였다.

“게다가 3년 차잖아. 계약종료 금방 온다? 마지막까지 잘해야지.”

그래도 다른 사람들보단 잘하긴 하지만 마지막에 풀어져서 삐끗하면 안 돼. 너는 좀 오래 우리 구단에 있어줘야지. 오랫동안 프로 생활을 해서 주장 자리까지 올라간 선배의 걱정 어린 조언이었으니 수긍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집은? 다음 시즌에 새집 알아본다며.”

“그, 일단 수원 쪽 알아보는데 정 안되면 구단 숙소에서 생활해야죠.”

“그래. 잘 생각해봐. 솔직히 출퇴근 하는 것도 일이다.”

너 서울서 여기까지 출퇴근하면서 먼저 와서 유산소 하는 거 보고 안쓰럽기까지 했다. 나중에 도움 필요하면 말해. 진세형은 기상호의 어깨를 두드리며 먼저 라커룸에서 빠져나왔다. 요새 이사 얘기라던가 최종수와의 관계에 대해 여러 소리를 듣는 거 보면 저 자신이 구단 내의 뜨거운 감자가 된 것 같은데. 다들 영 긍정적인 반응이 아니라 여러모로 불안했다. 꼭 로미오와 줄리엣. 아, 이건 너무 나갔나? 태업을 걱정하는 거면 견우와 직녀가 비슷한데 이것도 연인 이야기라 낯부끄럽고. 꼭, 친해지지 말아야 할 사람끼리 친해진다는 반응이라. 기상호는 한숨을 푹 쉬며 라커룸에서 빠져나왔다.

신연우PD님

【기상호 선수님 영상 어떤가요?】

 

【이대로 업로드 해도 될 것 같아요】

 

영상 올라가면 올라간 대로 또 무슨 소리 나오는 거 아닌가. 그런 걱정도 들었지만 이미 촬영한 거 어쩔 수 없지. 문제가 있다면 선배들이 진지하게 얘기를 할 테니까. 그 시간을 받아들이자. 기상호는 그리 생각하며 퇴근길에 올라섰다.

야간 훈련이 끝난 후 집에 도착하면 10시 즈음, 그리고 잠깐 딴짓을 하다 보면 오후 10시 30분 정도. 보통이라면 이 시간에 눈을 붙인 후, 아침 6시에 기상을 하여 아침 운동을 하는 게 루틴이었지만 최근 최종수와 전지훈련 관련으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새벽 1시에 자다 보니 평소 일어나는 기상 시간을 못 지켰다.

서울 출근. 막내라는 위치. (이제는 3년째) 이 두 가지 사유로 인하여 출근도 그만큼 일찍 했었는데. 크게 지적받은 건 아니지만 오늘 해이해지면 안 된다는 소리도 들었고. 가끔은 이럴 때도 있지 않나? 좀 억울한 마음이 있긴 했지만 이런 루틴이 정상적이지 않은 건 알고 있었다. 그냥 최종수와 이야기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라서. 생활 리듬이 잠깐 깨졌고 이제는 복구해야 하는 위기감을 가지고 있으니.

기상호는 최종수에게서 메시지가 안 오는 것을 확인하고 눈을 감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전지훈련 마지막 날이라 하던가. 백퍼 술 마시겠네. 과거의 데이터를 통해 마지막 날에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는 바였다. 오늘은 늦게까지 술 마시느라 평소처럼 대화할 시간도, 정신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생활방식을 돌리려면 지금 이때가 딱 적절했다. 좀 있으면 내도 전지훈련이 있을 테니까. 기상호는 그리 생각하며 눈을 꾹 감고 잠을 청했다.

“야 기상호. 전화 받아라.”

“으응?”

문이 벌컥 열리며 들려오는 신경질적인 목소리. 그리고 흔들리는 몸. 대체 뉘길래 이 새벽에 전화고? 기상호는 벨 소리가 울리는 제 옆의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뭐야. 이 시간에 무슨 전화래. 발신인 이름을 보니 백퍼 어떤 프로세스로 전화를 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종수햄. 이 시간에 웬 전화에요.”

“그냥.”

역시나. 평소의 신경질적이거나 무뚝뚝한 목소리가 아니라 한결 풀린 목소리는 어떤 취기를 느낄 수 있었다.

“무슨 일이에요. 뭐 힘든 일이라도 있나.”

그래도 팀 얘기하면 안 들어줄 거지만. 기상호는 전화를 끊을 각을 재고자 비몽사몽 한 정신 속에서도 최종수가 하는 말을 유심히 들었다.

“별일 없어. 그냥 다 같이 술 마시고 이야기했어.”

“그거 저희 사이에 팀원 험담은 안 받기로 했잖아요.”

“그런 거 아냐. 그냥, 다들 우리보고 친하다고 뭐라 해.”

오늘 무슨 날인지. 안 그래도 오늘 너희 그런 거로 친해졌냐고 의심받았는데. 최종수 쪽은 사적인 친분 가지고 이야기를 했단다. 그렇지만 기상호도 이렇게 말 나올 거 알고 있었다. 이제 유튜브 영상 업로드되면 첫 만남도 이랬는데 어떻게 친해졌나. 그런 얘기 백퍼 나오겠지. 딱히 머리가 아파져 오는 화제는 아니지만 여러 번 듣다 보면 신경 쓰여서.

기상호는 최종수가 취기에 느릿하게 두서없이 내뱉는 말들을 들었다. 다들 연습 때도 그렇고, 평소에도 내가 뭐 사람 아닌 것처럼 굴더니 이젠 자기네들은 친해지기 어려운데 너랑은 쉽게 친해진다고 너 원래 그런 애였냐고 그런 소릴 한다? 그래서 나도 울컥해서….

저번에 푸념했을 때처럼 정신은 멀쩡한 줄 알았는데 그때보다 더 취한 듯했다. 저 구단 선배들은 얼마나 먹인 것인지. 이어지는 최종수의 말을 들으려다 더 듣기 힘들어져서 한마디 했다.

“네 알았어요. 근데 저 진짜 졸리거든요? 요새 햄이랑 대화 나누다가 기상 시간 늦어졌다고요.”

다음부터는 이런 심야에 본심을 말하는 대화 이벤트 같은 거 없을 거니까 그런 줄 알아요. 기상호는 상대방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전화를 끄고 말똥해진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분명 취기에 전화를 걸긴 했는데 목소리를 들었을 때 축 처진다거나 힘들어하는 그런 톤은 아니었다. 저 술판에 끼질 않아서 정확히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친목 관련으로 이야기가 나왔을 테고. 그 과정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지만 뭐 잘 해결되었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심야에 멋대로 전화해서 잠을 깨운 최종수가 얄미웠지만 어쩌겠냐. 저 상태에서는 술 취한 게 벼슬이지. 기상호는 한숨을 푹 쉬곤 다시 눈을 붙였다.

그리고 잠을 청하기를 10분. 밤에 생각이 많은 편은 아니었는데, 최근의 일들이 일들인지라 쉬이 잠이 오질 않았다. 동거 관련해서 들었던 소리라던가. 그리고 최근의 태도에 대해서도. 다들 자신과 최종수의 관계에 대해 한마디씩 얹는 데다 최종수 쪽에서도 한마디씩 하는걸 알게 되었으니. 종수햄은 술 마시고 얘기 들었다는데 잘 풀었을까? 잘 풀었다면 어떤 방향일지. 그리고 만약에 내 쪽에서도 그냥 흘려서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지하게 이야기한다면 어떻게 될지.

신인이라 팀과 농구에 집중해야 할 상황에서 다른 곳에서 눈을 돌리니 걱정하는 마음에서 하는 발언인 건 알고 있다. 그렇지만.

타인의 마음을 이해해보려 노력하고 스스로 반문하기를 반복. 기상호는 다시 한숨을 푹 쉬며 핸드폰에 수면 음악을 틀어놓았다. 어쨌든 선배 조언 들어봐야 손해인 것 없으니까. 사실 분위기상 그렇게 하는 게 맞겠지. 조금씩, 거리를 두는 게 맞겠지. 제 마음을 부정하며 괜히 눈을 꾹 감아보았다.

 

서울 LC의 전지훈련 이후, 선수들에게 짧은 휴식이 주어졌다. 사실 소집이 있기 전에 잠깐 쉬어가는 시간이었지만. 전지훈련 이후로는 기상호가 전지훈련 장소인 강릉으로 가서 서로 일정이 교차하다보니 주말에 보질 못한 것도 한 한 달쯤 되어갔다. 이전에 최종수가 전지훈련 할 때는 새벽 1시까지 이야기를 나누다 잠들었는데, 기상호가 전지훈련 할 때 최종수가 어떻냐고 물어보면 기상호는 그냥 힘들어요. 한마디만 남겼다. 그 한마디만 남길 만큼 바쁜 것인지. 최종수가 더 이어서 말을 하려고 해도 답은 없었고.

하지만 예전과 같지 않은 기상호를 신경 쓸 수 없을 정도로 재소집 이후에는 더 바빠졌다. 일과는 예전과 비슷하게 흘러갔는데 구단 사람들이 그 광란의 술 파티 이후로 거리를 두지 않게 되어서, 사회성을 발휘해야 할 부분이 많아졌다. 같은 동기나 다름없던 이휘성도 최근 말을 붙이는 빈도가 높아졌다.

“너도 날 어려워했었어?”

“뭐 어려워한 것까진 아니고. 그냥 고등학생 때 좀 말 걸기 힘든 이미지 정도?”

그냥 그때 생각해서 서로 용건만 말하는 게 편할 거라 생각했으니까. 야간 훈련 전 저녁 식사시간. 이휘성은 비빔밥을 한 입 먹어서 삼킨 후 말을 마저 이어나갔다.

“모임 외에 약속 잡은 적이 별로 없었다고 들어서. 사적 친분은 잘 안 쌓는 쪽이라고 생각한 거지.”

“누가 나보고 모임 외에 약속 잡은 적이 별로 없대?”

“이규가.”

“그건 이규가 자기 일정 채우다가 남는 날 모임으로 잡으니까 겸사겸사 나온 거고.”

애초에 모임 외에 약속 잡은 적이 별로 없었다면 그 기상호랑 같이 매 주말을 보냈겠냐. 속으로 투덜거리며 최종수는 제 앞에 있는 김치찌개를 한입 먹었다. 어쨋든 타인의 거리감에 관한 오해는 풀렸으니 잘 지내게 된 것도 괜찮았고, 그 덕분인지 이전보다 팀 분위기가 좋아진 것도 여러모로 긍정적인 방향이긴 했다.

“종수, 이번 주말에는 어디 갈래?”

그렇다고 다 좋은 건 아니지만.

구단 사람들이 최종수의 주말은 약속 잡을 일이 없어서 기상호와 지내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빈 주말은 평일에도 본 구단 사람들과 보내게 되었다. 농구 외에 별 취미가 없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더더욱 자기 취미 영업하려고 한 것도 있고. 사실 취미 아니어도 밥 먹자, 술 마시자 하면서 이리저리 여러 자리에 끌려가기를 한 달 정도. 남들 주말에 여름휴가라고 놀러 갈 때가 되어서야 사회와 구단이 원하는 친목 다듬기에 해방될 수 있었다.

그래서 엇갈린 전지훈련 일정과 가족 일정 때문에 오랫동안 못 만난 기상호와의 약속을 잡은 것이 8월의 끝자락. 장소는 최종수의 집. 계획이야 별거 없었다. 그냥 집에서 게임을 하고. 식사는 배달음식 시켜서 밥 먹거나 동네에서 외식하기. 기상호가 보던 그 오타쿠 애니메이션에서 소중한 건 잃어봐야 깨닫는다고 했던데 딱 그말이 맞았다. 한 달 동안 서로 못 보고 지낸 탓에 이렇게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소중했구나 깨닫게 되었다. 오래간만에 본 얼굴이 반가운 건 덤이고.

“완전 살 쫙 빠지고 왔네.”

“전지훈련 되면 다 빠지고 오잖아요.”

약 한달 만에 본 기상호는 어째 몸집이 전보다 빠져 보여서 한마디 했더니 기상호는 투덜거리면서 손으로 부채질을 해대었다. 안 그래도 더위 먹어서 죽는 줄 알았다고요. 힘들어 죽겠다더니 더위 때문에 답할 기운도 없었나 보다.

“에어컨 더 세게 틀어줘?”

“아뇨. 그냥 지금 막 집에 도착해서 더운 거니까. 좀 있으면 괜찮겠죠.”

“그래서 오늘은 뭐 하려고?”

“뭐 종수햄 하고 싶은 거? 오랜만에 만나서 햄 게임 조작법 다 까먹었을 것 같은데.”

“어. 근데 하던 것도 많아서 뭐 했는지도 까먹었어.”

그럼 간단하게 2인용 게임 합시다. 기상호는 마리오 카트를 선택하곤 최종수에게 컨트롤러를 쥐여주었다. 야야 너 또 비겁하게 하지. 게임화면 속 기상호가 이리저리 최종수의 진로를 방해하며 얄밉게 구니 어쭈? 싶어서 슬쩍 팔꿈치로 기상호의 옆구리를 꾹 눌렀다. 아 햄햄 현실에서 응징하기 있습니까? 매너 빵점입니다. 그렇게 몇 판 하다 게임을 하다 열 받은 것인지. 아니면 손에 땀을 쥐는 경기를 몇 판 했던 탓인지. 기상호가 더워하며 다시 손부채질을 시작하며 얼굴에 맺힌 땀을 한두 번 닦았다. 이리 더웠던가.

“빙수라도 시켜?”

“빙수 말고 요거트 아이스크림요.”

그래. 최종수는 군말 없이 배달 앱을 켠 핸드폰을 기상호에게 들려줬다. 요거트 아이스크림에 뭐 별별 토핑을 얹어가는 걸 시키는 걸 본 다음 다시 게임기를 손에 쥐었다. 잠깐 쉬는 타임이나 다름없어서 둘 다 게임에 집중하다 말고 잡담이나 했다.

기상호 너넨 강릉 간 거 어땠냐? 말했잖아요. 죽을 맛이었다고. 연우 PD님이 비시즌 구단 근황 콘텐츠 촬영하러 왔다가 내년에는 안 오겠다고 선언했다니까요. 전지훈련 일정이 엇갈리면서 못 만났던지라 최종수는 기상호가 전지훈련 관련으로 이야기하는 걸 들었다. 당연 훈련 얘기보다는 누가 힘들어서 뭘 했네. 극한의 훈련때문에 제정신이 아니게 된 제 선배들이 어떤 사고를 쳤는지. 그런 이야깃거리들뿐이었지만.

전지훈련 화제로 더 얘기할 게 없을 즘 기상호가 시킨 요거트 아이스크림이 집에 도착하였다. 잠깐 게임을 멈추고 TV 앞에 작은 테이블을 펼쳐 수저를 세팅. 이제 곧 가을이 온다지만 늦더위도 무시하지 못해서 아이스크림은 금세 녹기 시작하였다. 흐물흐물해져 가는 아이스크림과 과일을 섞어 먹으며 둘이서 아이스크림 320G를 해치운 다음 소파에 앉아 늘어져 기상호가 바빠서 못 봤던 애니메이션을 틀어 보았다.

이대로 낮잠 자면 딱 좋을 텐데.

최종수는 제집에서 주말을 보내기에 느낄 수 있는 시간에 만족해하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역시 사람들과 친목을 다진다며 이리저리 불러주는 건 누군가의 바운더리에 속하게 되어 좋긴 했지만. 그래도 최종수는 이 시간이 더 편하고 좋았다. 기상호가 우스갯소리로 말한 인도어니 내향인 이니 하는 그런 단어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것보단…. 최종수는 제 옆에서 애니메이션을 보는 기상호를 봤다.

“요새 이리저리 불러대서 피곤했어.”

“와요. 햄 구단 사람들이랑 잘 풀리면 좋은 거 아닌가?”

“그건 그거고.”

그냥 너랑 이렇게 주말 보내는 게 편해. 그런 말은 낯간러워서 못 꺼내고. 쉬어야 하는 주말에 나와서 돌아다니니 피곤하다고. 그리 얼버무렸다.

“이제 9월 되면 추석 올 텐데 집 어떻게 할 거야? ”

그리고 한번 떠보기. 전에 지나가는 말로 기상호에게 동거제안을 했었는데 슬슬 답을 들어도 될 것 같아서 슬쩍 말을 얹어놨다. 어디까지나 제안이었지만, 긍정적인 답을 얻기에 힘든 상황이지만. 그래도 사람 마음이란 거 부정적인 답이 나올 걸 알아도 상자를 까기 전에는 만에 하나 라는 확률을 기대하는 게 보통이었던 지라. 그래서 최종수는 침을 목젖으로 넘기곤 기상호의 답을 기다렸다.

“저, 그냥 구단 숙소에 머물기로 했어요.”

“그래?”

그래. 집 구하기 힘들면 숙소에서 지내는 방법도 있었으니까. 그럴 거라 염두에 두긴 했는데 직접 들으니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 종수햄이 야숨 깨는 건 봐야 했는데.”

“시간 날 때마다 오면 되잖아.”

“그럼 좋기야 한데….”

기상호가 제 목덜미를 긁적이며 머뭇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꼭 숙소에 있으면 여기에 못 올 것처럼. 물론 서로 바빠서 전처럼 주말마다 만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정규리그 개막하면 주말에 경기 뛰는 게 흔한 데다 어디 쉬는 날 맞춰서 만나려고 하는 것도 일이었으니까. 그렇지만 그런 단순한 일정상의 어려움보다는 꼭 뭔가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왜. 꼭 무슨 일 있는 것처럼 말한다?”

“아뇨 뭐, 일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여러모로 말 들어서. ”

저번에 저희 촬영한 거 업로드된 이후로 너무 친해진 거 아니냐. 물론 공사 구분 잘하는 건 알지만 너 선배들한테는 낯가림이 심했으면서. 하고 햄이랑 자기네들 비교하더라고요. 물론 농담처럼 말 하는 건 알지만…. 더해서 뭐 노는 건 좋은데 곧 시즌이고 저도 계약종료 생각하면서 잘하라는 소리도 들었고요. 어 이러니까 뭔가 그거 같다 견우와 직녀. 이거 너무 나갔나? 저희 그래도 태업은 안 하고 잘하고 있었는데. 머뭇거리던 기상호는 정말 별거 아닌 듯 이야기했으나 그 말들은 최종수도 들었던 거라 가슴 한켠이 좀 불편했었다. 어차피 다들 원클럽맨. 될 것도 아니면서 막내가 다른 팀원끼리 친한 거 가지고. 따지고 보면 대학 동문 있는 애들은 동기끼리 친한답시고 교류했는데. 기상호의 말은 더 이어졌다.

“솔직히 말 들었을 때 억울하긴 한데 좀 이상하긴 하더라고요. 같은 팀도 아니고, 끽해봐야 만난 건 고등학생 경기 한 번이었을 텐데.”

기상호는 여태 짚어 넘기지 않았던 만남의 근간에 대해 의문을 표했다. 그냥 가볍게 동네 사람이라 그랬다고 모두에게 해명 아닌 해명을 해댔지만, 고작 그런 거로 친해질 개연성을 말하기에는 힘든 부분도 있었다.

“그냥 겉도는 사람끼리 놀았던 거라 구단 사람들이랑 오해 풀렸으면 이제 저희는 자주 있을 필요도 없잖아요.”

그리고 그 근간에 내포된 둘의 상황을 짚어간다. 고졸 얼리. 유학파. 사람들과 친해질 대화거리가 부족했던 시작. 그렇다고 다른 누구처럼 쉽게 친해지려고 이리저리 말 붙이지도 못한 성격. 여러 가지가 맞물려 겉돌았고 그런 사람끼리 거리를 좁혀간 거라 근본적인 원인이 해결되었다면 이 개연성 없는 만남도 굳이 지속할 필요도 없을 거라고. 기상호는 그리 말했다.

“뭐 대회나 경기 때 만나면 인사는 하고 근황은 묻겠지만. 이렇게 자주 오기에는 좀, 그럴 것 같아요. 종수햄도 그렇잖아요?”

기상호는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간 좁혀가며 가까워졌던 거리. 이건 잘못되었으니 다시 다른 거리에서 보자고? 최종수는 입술을 꾹 다문 채로 기상호를 쳐다보았다.

정말로 우리가 겉도는 사람끼리 외로워서 동질감 드는 사람끼리 친해졌던 게 맞아?

최종수는 기상호와 거리감을 좁혔던, 그리고 거리를 좁히고 싶었던 이유를 떠올렸다. 적어도 자기는 기상호를 그리 여기지 않았다. 타인과 쉽게 친해질 수 없던 상황 속에서 어떤 외로움을 해결할 대상으로 보진 않았는데…. 그런데 기상호는? 기상호가 저를 관계의 대체품으로 썼던 거라면? 애초에 나는 얘와 무엇을 하고 싶었던 건지. 그냥 거리감을 좁히고 싶고 이렇게 함께 있는 시간이 소중하면서 그 관계도 그러길 내심 바라고 있었는데.

“나는….”

“그래도 너랑 이렇게 있던 게 나름 좋았어.”

최종수는 저의 본심을 꾹꾹 누르고 기상호가 어색해하지 않게 이 시간이 잘못된 시작이라 해도 좋았다고 고했다.

“저도요.”

지금 말하긴 타이밍이 어색하지만 그래도 같이 시간 보내줘서 고마워요. 기상호는 꼭 오늘 이후로 헤어질 사람처럼 말했다. 둘은 가만히 서로를 보았다. 침묵. 둘이 살기에 적당한 공간에는 TV 화면에서 나오는 애니메이션의 대사만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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