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렵제

동토의 세계

개인로그


죽음에게 물으면 생이 답한다. 생이 움직이면 죽음이 따른다.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죽음을 피해 살아남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밑바닥에 깔려있는 본능이다. 비단 인간 뿐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살고자 하는 본능을 가졌다. 살고자 몸부림을 쳐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모두가 살기 위한 야만스러움을 드러내는 가운데 얌전을 떨어서는 목숨줄을 이어붙이고 있을 수 없다. 작고 힘없는 어린 것이 가장 밑바닥이나 다름없는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택할 수 있는 길이라곤 발 딛고 선 자리의 순리대로 짐승의 거죽을 뒤집어쓰는 것이 유일했다. 배운 것이 짧아 물드는 것은 되려 빨랐다. 단박에 숨을 끊어놓는 법, 배를 주리지 않는 법,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법 따위를 집어삼켜 제 피와 살로 삼았다. 그렇게 밥그릇 하나쯤은 지켜낼 줄 알게 되었다. 마침내 완벽히 짐승의 거죽을 뒤집어쓰자 마주한 것은 기갈이 든 아귀들이었다. 시커멓고 더러운 아가리를 벌린 아귀들은 좀처럼 만족할 줄을 몰랐고, 갖고 싶은 것은 빼앗아 가지는 것이 곧 소유권을 인정받는 법이었다. 이반 블라디미로비치 아이스토프가 꾸역꾸역 살아온 동토의 세계는 그러했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어미도, 아비도 기억 속의 흐릿한 잔상에 불과했다. 다만 남은 것이라곤 제 이름 '블라디미로비치'에 남은 아비의 이름과 그들이 파리 같은 목숨 부지하지 못하고 쉽게도 죽었다는 것뿐. 그보다 선명히 남은 것이라곤 다락의 나무 바닥 틈으로 훔쳐볼 수밖에 없었던, 번지는 피와 파르락대는 손끝이 다였다. 이유 없는 죽음이 많은 때였다. 이유를 찾는 것은 신발 바닥을 핥는 것보다 멍청한 짓이었다. 다락 아래로 내려서며 파리 같은 목숨은 되지 말아야지, 생각했다. 당장이라도 벌떡 일어설 것처럼 눈을 부릅뜬 시체와 살 용기는 없어 죽은 집을 뛰쳐나왔다. 거리엔 같거나 비슷한 처지의 또래가 많았다. 스러져 가는 빈 집의 잔재 사이에 서로의 몸을 붙이고 옹송크린 어린 것들은 하나같이 고아원이 아닌 거리에 버려진 것이 나은 일이라 생각했다. 고아원은 허구한 날 매질을 한다더라, 밥도 주지 않고 부려먹는다더라, 괴담 같은 소문이 여러 입을 돌고 돌았으므로. 꼬질꼬질 때 낀 어린 것들은 자유로운 저들이 나은 삶을 살고 있다 믿었다. 체온을 나누느라 옹송크리고 붙어있던 밤이 지나고 낮이 오면 여기저기로 흩어져 먹을 것을 훔치거나, 신문 따위를 훔쳐 팔고 돈을 챙겨 받아 모였다. 어느 누구든 덜떨어진 멍청이의 지갑이라도 훔쳐 온 날이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되지 않겠다 생각했던 파리보다 못한 하루살이의 삶을 저도 모르는 사이 그렇게 살았다.

거리의 삶에는 필연적으로 상실이 뒤따랐다. 흩어졌다 돌아오지 않는 얼굴들이 종종 생겨나곤 했다. 늦은 밤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은 곧 절반 이상의 확률로, 사람들의 발에 채여 길거리를 나뒹굴다 개미 떼의 밥이 되는 쥐의 사체처럼 쓰레기가 되었다는 뜻이었기에. 운이 좋아 마음씨 좋은 어른의 손을 잡고 좋은 집으로 가 새 삶을 살게 될 가능성은 희박했다. 거리의 어린 것들은 돌아오지 않는 것을 기다리지 않았다.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은 곧 낙오와 같은 의미였다. 열다섯의 이반은 낙오되지 않기 위해 매일매일을 전투하듯 치열히 살았다. 거리의 삶에서 열다섯은 다 큰 취급을 받곤 했다. 실제로도 열다섯 이상의 아이들은 많지 않았다. 거리로 뛰쳐나왔던 여덟의 이반은 어느덧 열다섯이 되어 저보다 작고 어린아이들을 감싸고 지켜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아이들은 쉽게도 죽었다. 가까운 죽음 혹은 상실을 맞이할 적마다 이반은 얼굴도 떠오르지 않는 부모의 죽음을 그 위에 덧씌웠다. 죽음의 이유를 찾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거리에서 애도는 값이 싸다. 하루를 살아가는데 도움도 되지 않았다. 거리의 아이들은 필연적으로 죽음과 상실에 무감해져 갔다. 거리의 생활은 몸집이 작은 어린아이들에게 유독 가혹했지만, 한편으론 가혹한 만큼 유리하기도 했다. 몸집이 작다는 것은 무언가를 훔칠 때 눈에 잘 띄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었고, 달아나다 몸을 숨기기에 좋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열다섯의 겨울, 여러 건의 절도죄가 겹친 끝에 이반은 난생처음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그곳은 거칠고 난폭한 또래들의 온상이었다. 이제 막 발을 디딘 낯선 곳에서 이반의 나이는 어린 축에 들었고 당연한 수순처럼 먹이사슬의 최하층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반은 모든 순간 날을 세운 채 주변을 경계했다. 깊게 잠에 들 수도 없었다. 마음을 놓는 순간 무언가의 해코지를 당해도 당할 것만 같았다. 수감된 첫날 신고식이라며 쩍 벌리고 선 다리 사이로 지나가게 하려던 놈만 봐도 빤했다. 입에 거품을 물 정도로 가운데를 잘근잘근 밟아주어 다리 사이를 지나는 일은 피했으나, 이반은 교도관에게 호되게 뺨을 맞은 다음 독방에 일주일을 갇혀있어야 했다. 이후의 생활은 빈말로라도 좋다고 할 수 없었다. 교도관들은 청소년 수감자들을 짐승 정도로 취급했다.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소란을 피우면 주먹질이며 매질이 뒤따랐다. 교도소의 아이들은 그들만의 위계질서를 갖추고 지키면서 교도관들에게 거슬리지 않기 위해 더욱 교활해지고, 영악해져 갔다. 그러니 수감되자마자 사고를 친 이반이 교도관은 물론 아이들에게도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교도소 안에서 고립되는 아이들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은 그리 많지 않았다. 잔뜩 몸을 낮추고 숨죽이며 살거나, 아양과 아부를 떨며 주류의 꼬리가 되거나. 물론 그 어느 선택도 하지 않으려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이 맞는 대부분의 결말은 엉덩이에 눈을 새기는 일¹이었다. 다른 아이들이 덜 날뛰게 된다는 이유로 교도관들조차 쉬쉬하며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존재들이었다. 혹은 그들 역시 이용했거나. 이반은 결코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타인의 자존심을 짓밟고 서열의 고저를 가름 지으려는 십 대의 남자아이들이 선택하는 방법은 늘 같았다. 강제로 취해 성적 우월감을 느끼며 상대를 찍어누르는 것. 단순한 만큼 악질적이었다. 쪼그린 채 선잠이 들었던 이반은 침대가 기우는 느낌에 눈을 떴다. 어둠이 내린 가운데 희끗한 불빛에 떠오른 얼굴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이반에게 다리 사이를 짓밟혔던 그 얼굴이었다. 마주친 얼굴이 섬뜩했다. 다리를 잡아당기는 느낌에 정신을 차린 이반이 다급하게 베개 밑을 더듬었다. 붙잡힌 발목이 끊어질 것처럼 욱씬거리고, 씨근거리는 숨소리가 몸 위로 내려앉는다. 딱딱하고 기다란 것이 베개 밑을 더듬던 손에 걸리기가 무섭게 이반은 손을 치켜들어 내려찍었다. 푹, 살을 파고드는 감각이 선뜩하게 손에 감겨든다. 온몸으로 소름이 내달렸다. 세면 시간에 훔쳤던 남의 칫솔 끝을 몰래 날카롭게 갈아둔 것이었다. 잔뜩 힘을 줘 끝까지 찔러 넣은 손 위로 뜨겁고 축축한 것이 쏟아져내린다. 덮쳐내리던 몸이 힘없이 이반의 몸 위로 털썩 떨어진다. 깔린 몸을 빼내 침대 구석으로 도망쳐 잔뜩 옹송크렸다. 손도, 옷도 피투성이였다. 어두운 가운데 시뻘겋게 물들고 있는 침대가 선명하다. 꼼짝도 앉는 얼굴의 한쪽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엔 칫솔 머리가 비죽이 튀어나와 있었다. 이반은 쿵쾅거리는 심장과 터져 나오려는 울음 탓에 이를 악물었다. 처음으로 죽음이라는 것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짙은 쇳내가 숨통을 조이는 것만 같다. 그렇게 눈을 부릅뜨고 밤을 새웠다. 

이윽고 다가온 기상시간에 터져 나온 비명과 고함, 이유를 알 수 없는 야유와 환호가 한데 뒤섞인 혼란 속에서 이반은 교도관의 손에 복도로 끌려나가 흠씬 두들겨맞았다. 갈색으로 버석하게 말라붙은 손의 핏자국이 조각조각 바닥으로 떨어져 내린다. 코에서 뚝뚝 떨어진 피가 그 위로 떨어져 구분도 없이 뒤섞였다. 이를 악문다. 눈앞이 핑핑 돌았다. 이렇게 죽고 싶지 않았다. 이반이 두들겨 맞을수록 소리는 커졌고, 엉망으로 두들겨 맞은 몸이 잘게 경련할 즘에야 일방적인 구타는 끝을 맺었다. 마치 콜로세움의 한복판에 버려져 뭇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된 것 같았다. 예의 독방에 던져지듯 옮겨진 이반이 그제야 눈을 감는다. 살아남았다. 이유를 모르고 죽은 부모와 달리. 일말의 안도가 의식을 수면 아래로 끌어내린다. 가늘고 긴 호흡이 싸늘한 시멘트 바닥 위로 낮게 깔려 들었다. 

이듬해 초여름, 이반은 세르기예프 포사트의 교도소에서 성인들과 극소수의 소년들이 함께 수감되어 있는 모스크바의 교도소로 이감되었다. 고의 혹은 사고의 여부와 관계없이 감옥 안에서 살인을 저지른 이반을 교도소에 두고 있는 것이 찝찝한 교도소장의 로비가 이루어낸 결과였다. 교도소장은 수감된 소년들이 남다른 사고를 친 이반을 앞세워 폭동이라도 일으킬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물론 폭동 따위엔 관심도 없는 이반이었지만, 교도소장의 연줄로 징역살이를 10년이나 더 때려 맞고 나니 없던 관심도 절로 생겨날 정도였다. 재수가 없으면 지은 죄의 경중에 상관없이 일괄적으로 같은 형을 때려맞곤 하는 게 일반적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이반은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억울했으나, 천애 고아에 비빌 데도 없는 이반으로선 벗어날 수 없는 굴레였다. 

옮겨온 모스크바의 교도소는 세르기예프 포사트의 교도소와 같이 소비에트 연방의 잔재인 굴라크²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곳이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시설의 규모 정도일까. 고작 몇 개월간 교도소살이를 했다고 익숙한 듯 다른 점이 확 피부로 와닿아, 교도관을 따라 배정받은 방으로 향하며 이반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곳에서 살아남으려면 더 악착같이 굴어야 한다는 생각이 밧줄처럼 목을 휘감는다. 성인들이 수감된 모스크바의 교도소는 일견 세르기예프 포사트보다 평화롭고 점잖았다. 그러나 이반은 출렁이는 물보다 잔잔한 늪이 더 위험함을 모르지 않았다. 교도소 안의 서열은 모르려야 모를 수 없을 정도로 노골적이었고, 교도관들 역시 서열의 계단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교도소의 꼭대기를 차지하고 앉은 것은 교도소장이 아니었다. 교도소를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는 것은 라스칼로프 브라츠바³의 볼코프로 그의 입김이면 교도관조차 며칠 안에 잘려나갈 정도였다. 그가 교도소에 들어앉아 있는 것은 교도소를 조직의 손에 쥐고 있기 위한 스스로의 선택이라는 것이 교도소 안을 알음알음 도는 이야기였다. 때문에 이반은 볼코프의 앞으로 끌려가 얼굴을 마주했을 때, 망설임 없이 그가 내미는 구명줄을 붙들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등에 업을 방패가 필요했다. 갱들의 세계에 문외한인 이반조차 들어본 적 있는 라스칼로프 브라츠바는 등에 업기에 나쁜 이름이 아니었다. 

볼코프가 내민 손을 잡고 열흘 사이에 해골⁴과 성모마리아⁵를 차례로 몸에 새겼다. 러시안 마피아에게 있어 문신은 낙인이고 훈장이었다. 길거리를 전전하던 삶에서 벗어나 어딘가에 몸을 담았다는 소속감이 일말의 안도감을 안겨주는 듯했다. 완성된 성모 마리아를 내려다보는 이반에게 성이나 못⁶도 새겨줄 수 있다며 교도소 안의 타투이스트가 누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복역기간을 몸에 새겨 자랑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이반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부끄러운 일은 아니었으나 마찬가지로 딱히 자랑스러운 일도 아니란 생각이었다. 라스칼로프의 이름을 등에 업은 이후 이반의 교도소 생활은 한결 편해졌다. 때때로 죄수들은 할 수 없는 수준의 식사를 했으며 시비를 걸거나 폭력적으로 대하는 교도관도 없었다. 똑같은 시궁창이라 해도 윗물과 아랫물의 차이는 분명했다. 라스칼로프 브라츠바의 일원이 된 이후 이반의 형량은 10년에서 5년으로, 5년에서 1년으로. 최종적으론 4개월까지 줄어들었다. 아킴 니콜라비치 라스칼로프가 이반을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4개월이 지나고 마주한 아킴 니콜라비치 라스칼로프는 풍채가 좋은 남자였다. 이미 이반의 출신부터 거쳐온 일까지 모두 알고 있다는 듯한 태도로 퍽 반갑게 이반을 맞이했다. 라스칼로프는 캄캄한 늪의 악어 같은 사람이었다. 웃는 얼굴에도 뒤통수가 서늘히 식어내렸다. 열여섯의 이반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라스칼로프 브라츠바에 몸담은 이상 그를 거슬러서도 안되고, 마음대로 발을 빼낼 수도 없다는 것을. 교도소에서 사람을 죽인 것을 두고 라스칼로프는 ‘싹이 괜찮은 물건을 거뒀다’고 평가하며 잘만 키우면 좋은 재목이 되겠다 칭찬과 함께 입을 쭉 찢어 웃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 당연한 일인 듯 말하는 태도에 이반은 제 부모의 죽음을 떠올렸다. 이유를 찾는 것이 멍청한 죽음. 그들은 누구를 강간하려 들지도 않았고, 무언가를 훔치려 들지도 않았다. 이유를 찾는 것이 정말 멍청한 일일까. 단지 그들도 같은 사람의 손에 죽는 게 당연해서 그렇게 죽임당했던 것일까. 또렷했던 부모의 시체가 기억 속에서 흐리게 퇴색한다. 이반에게 죽음은 더 이상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열여섯에서 스물이 될 때까지, 이반이 조직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조직의 행동반경을 넓히기 위한 준비과정이라는 명목으로 별로 알고 싶지도 않은 영어를 배워야 했다. 마약의 운반을 돕거나 거리에서 시시껄렁한 불량배들을 상대로 푼돈에 싸구려 마약을 거래했다.(그들은 장기적으로 봤을 때 약간의 손해를 볼 가치가 있는 잠재 고객이었다.) 그리고 편의상 간부라 불리는 이들을 대신해 그들의 범죄 혐의를 대신 뒤집어쓰고 교도소를 밥 먹듯 들락날락했다. 보스인 아킴 니콜라비치 라스칼로프를 제외하고, 조직원들은 모두 평행한 위치에 있었다. 다만 조직을 위해 큰 건을 잡고 움직이는 이들은 간부라 부르며 일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우선적으로 보호하곤 했다. 그들을 대신해 감옥에 들어가는 것은 대체로 이반과 같이 조직에 갓 몸을 담은 이들이었다. 라스칼로프 브라츠바 내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해에 해를 더할수록 이반의 범죄기록은 늘어갔다. 사기, 폭행, 살인 미수, 인신매매 등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지도 못하는 것들이 제가 벌인 일이 되었다. 들어갈 적마다 쌓이는 범죄기록처럼, 이반의 몸에는 새로운 문신이 남았다. 갖고 있는 기록에 비하면 마약상을 뜻하는 거미나 감옥에 간 적이 있음을 나타내는 종, 감옥에서 성년을 맞이했음을 말하는 장미는 어린애 장난 같은 의미를 지닌 문신들이었다. 이반은 간부들을 대신해 교도소를 들락거리는 것에 대해 큰 불만이 없었다. 일단 형을 받고 들어가 있으면 어떤 방법을 쓰는지, 형을 절반 이상으로 줄여 금세 나올 수 있도록 해주었기에 조바심을 낼 필요도 없었고 불안해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기다리면 됐다. 그렇게 교도소를 들어갔다 나오면 그 시간에 대한 보상으로 원하는 것을 한 가지 가질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것은 교도소를 들락거리는 이들이 반발하지 않게끔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대안이었다.  

 

스물하나가 된 이후 이반은 더 이상 교도소에 들어가지 않았다. 교도소를 들락거리는 것은 이제 다른 이들의 몫이었다. 이반은 간부 일리야의 일을 도와 탈세에 손을 뻗었다. 라스칼로프 브라츠바는 주류 수입에 대한 정부의 어마어마한 세금을 피하기 위해, 에탄올에 색소를 타 세척액으로 둔갑시켜 국내로 들여왔다. 애초에 질이 좋지 않은 산업용 에탄올에 색소와 꿀, 약간의 싸구려 양주를 섞어 위스키나 브랜디 따위로 속여 판 수익은 예상외로 그 금액의 규모가 제법 대단했다. 라스칼로프 브라츠바는 다양한 분야에 손을 뻗치고 있었고, 가짜 주류를 판매하는 사업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도 같았다. 일리야라는 좋은 줄을 잡은 덕분에 이반은 라스칼로프에게 확실히 눈도장을 찍을 수 있었다. 그는 좋은 재목이 되겠다 칭찬했던 이반이 간부를 도와 조직에 보탬이 된 것을 크게 만족하는 눈치였다. 유능하게 일을 해내면 그에 걸맞은 보상이 따른다. 쉽고 간결한 규칙이었다. 그렇지 못하면 이용당한 다음 버려지는 일회용품이 될 뿐이다. 거리를 전전하던 삶과는 정반대의 다른 삶을 살고 있었으나 이반은 여전히 낙오되지 않기 위해 매일매일을 전투하듯 치열히 살아가야만 했다. 때때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때면 턱 아래까지 늪에 잠긴 것처럼 숨이 가빠 왔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이반은 무서운 속도로 제 앞에 떨어지는 일을 갈아치웠다. 간부급 조직원의 일을 돕던 수준에서 어느새 자신의 일을 만들어 다른 조직원들에게 일을 주었다. 잠시라도 숨을 돌리고 멈춰 서면 머리끝까지 늪에 잠겨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때문에 이반은 교도소 안에서와 마찬가지로 깊게 잠들지 못했다. 베개 아래엔 항상 총이며 칼이 드림캐쳐마냥 잠자리를 지켰다. 이반은 숨을 쉬는 모든 순간 항상 무형의 어떤 것에 뒤를 바짝 쫓기는 것만 같았다. 멈추면 안 된다는 강박이 다른 것으로 시선을 돌릴 틈을 주지 않았다. 스물다섯이 되며 이반은 무기 밀매로 손을 뻗었다. 비리가 판을 치는 러시아 정부와 마찬가지로, 구소련 연방의 일부였던 국가들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소련이 붕괴하며 각 공화국의 경제적 유대 관계는 붕괴되었다. 그 여파로 동구권을 비롯한 구소련 국가의 생활 수준은 바닥으로 처박혔다. 빈곤이 심해질수록 경제적 불평등 또한 심화되어, 가진 놈들은 더욱 그 배를 불리지 못해 안달이었다. 국가보다 제 잇속을 중요시하는 관료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이반은 그 검게 썩은 자리를 찾아 은근하게 파고들었다. 저급의 무기를 거래해 국가의 예산으로부터 생기는 차액을 나누어 가진다. 부패한 정치인들은 배를 한번 불려주기만 하면 더 큰 먹이를 위해 알아서 움직여 주었다. 이반은 그들이 꼭 기갈이 든 아귀 같았다. 그들을 상대할 적마다 독한 악취가 숨통을 조였다. 

 

이반은 거래 상대를 가리지 않았다. 구소련 연방의 국가들부터 쿠데타를 준비하는 무장단체, 타국의 갱단 등 제3세계의 이들까지 접촉해 오는 이들이라면 누구든 만났다. 목이 마른 이들에겐 애매하게 비싼 값으로 완전히 돌아서지도, 쉽게 결정하지도 못하게끔 만들어 애를 태우곤 조금씩 값을 깎아 원하는 선에서 거래를 마무리 지었다. 반대로 배가 부른 이들에겐 조금씩 더 군침 도는 조건을 제안하며 살살 꼬드겼다. 담을 타넘는 능구렁이처럼, 때로는 간계를 속삭이는 여우처럼 사람들을 꾀어냈다. 라스칼로프의 만족스러운 얼굴을 마주하고도 이반은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그의 얼굴에서 저를 멀리하려는 묘한 위화감을 느낄 뿐이었다. 큰돈을 만져 즐거워하는 간부나 조직원을 봐도 그저 그랬다. 무엇이 즐겁고 무엇에서 성취감을 느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반은 그저 도태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일을 해치워야 한다는 강박으로 움직일 뿐이었다. 성공적으로 끝낸 일이 쌓일수록 이반은 보다 윤택한 하루를 살았다. 습관처럼 배를 곯고 거리를 전전하던 어린 시절이 무색할 정도였다. 부족함 없는 생활과는 사뭇 다르게 이반은 마음의 여유를 쉽사리 찾을 수 없었다. 마치 끊임없이 쳇바퀴를 도는 라스칼로프의 애완동물이라도 된 것 같았다. 

어느 틈엔가 언제쯤이면 멈춰 서도 낙오되지 않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되었다. 조금 더 큰일을 해결해내면 여유를 찾을 수 있을까. 이반은 점점 더 큰 규모로 눈을 돌렸다. 쉽게 잡을 수 없는 큰일을 잡으면 뱅뱅 도는 쳇바퀴에서 잠시 내려올 수 있지 않을까. 때문에 이반은 러시아 군부와의 일에 온갖 정성을 쏟았다. 이제껏 간부들 중 누구도 해치운 적 없는 규모의 일이었다. 이반은 그렇게 조직 내의 신임을 쌓아갔다. 가라앉지 않으려 발버둥을 치는 만큼 매서운 속도로 성장했다. 그거면 될 거라 생각했다. 순진하고 안일한 생각이었다. 그 일에만 신경을 쓰느라 라스칼로프에게서 느꼈던 위화감에 대해 되짚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누구든 제 바로 아래까지 매섭게 치고 올라오는 존재를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몰랐다. 러시아 연방군과의 거래는 스스로 절벽 끝으로 걸어가는 모양새였다. 스물일곱의 겨울,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면서도 이반은 제가 쥔 구명줄이 줄곧 튼튼하리라 생각했다. 새카맣게 부패해 썩은내가 나는 줄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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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덩이의 별 : 러시안 마피아 사이에서 교도소 내 성노예를 뜻하는 문신.
굴라크 ГУЛаг : 소련의 강제수용소. 1956년 대부분 해체되고 일부는 사법체제에 의한 제도(교도소)로 바뀌어 사용되었다.
브라츠바 братва : 러시안 마피아를 부르는 호칭의 하나.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수준의 규모를 가진 조직을 일컫는다.
해골 : 러시안 마피아 사이에서 살인을 했음을 뜻하는 문신
성모 마리아 : 러시안 마피아 사이에서 어릴 적부터 범죄에 가담했음을 뜻하는 문신
성, 못 : 개수에 따라 복역기간을 의미한다. (각각 하나에 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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