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_관계로그
with. 가넷
차가운 공기에 벌써 싸늘히 식은 열쇠를 주머니에 집어넣은 이반이 겉옷의 후드를 뒤집어썼다. 모스크바에 비하면 따뜻하다 싶은 겨울의 냉기에도 입김은 희게 공기 중으로 스며든다. 습기를 머금은 이끼색 녹안이 흐릿한 하늘을 눈에 담는다. 일기예보대로라면 오후에 진눈깨비가 조금 내릴 터였다. 스노우 스톰이 불어 뉴욕의 이곳저곳을 하얗게 만들던 게 작년 이맘쯤의 일이었다. 잠시 새삼스러운 얼굴을 해 보인 이반이 걸음을 뗐다. 벌써 미국에 온 지 일 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97년 11월, 이반은 러시아 연방군의 총참모장과의 마지막 만남을 예정에 두고 있었다. 일 년여를 공들여 총참모장에게 접근했고, 그와의 거래를 통해 러시아 연방군에게 정상적으로 지급될 무기 대신 부실한 싸구려 무기를 들여오고 군에 편성된 예산의 30%를 나눠 갖기로 담합했다. 소련의 붕괴 이후 소비에트 군을 승계한 러시아 연방군은 주춧돌부터 부실하게 다져진 탑이었고 그 부실한 틈을 파고들기 위해 움직이는 것은 이반이 몸담은 조직만이 아니었다. 그림자 아래로 여러 조직에서 치열하게 군의 고위급 간부들에게 줄을 댔다. 군부는 모두가 쉬쉬할 뿐 온갖 로비와 비리가 가득했다. 이반이 파고든 러시아 연방군의 총참모장 역시 뒤로는 돈과 이익을 향해 손을 뻗으며 앞으로는 청렴한 척 구는 위선자였다. 썩을 대로 썩은 그의 탐욕이 한심했으나 한편으론 파고들기에 딱 좋은 먹잇감이었다.
총참모장과의 마지막 만남은 무기를 들여올 정확한 날과 시간을 확정 짓기 위한 약속이었다. 디데이를 일주일 정도 앞둔 때, 돌연 국방장관으로부터 총참모장의 해임 명령이 군부로 하달되었다. 총참모장은 군부의 예산을 빼돌리려 한 죄로 구속되었고, 그와의 담합을 위해 주로 움직인 이반의 목마저 시시각각 위태로워져갔다. 그런 이반에게 일보다 제 사람을 지키는 것이 우선이라며, 손수 브로커를 붙여주고 모든 이동 비용을 대 주는 보스를 믿었더랬다.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톡까지, 블라디보스톡에서 캐나다를 거쳐 미국 시애틀 땅을 밟고 뉴욕까지 위장 여권과 신분을 갖고 탈 없이 도착할 수 있음에 보스를 향한 약간의 감사를 품기도 했다. 이반은 아직까지도 당시의 스스로를 생각하면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혈혈단신 몸뚱이 비빌 곳을 찾았다고, 신뢰를 받는 듯하다고 저가 밑바닥부터 기어올라온 세계가 어떤 곳인지를 잊었다는 게 말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가장 욕지기가 치솟는 부분은 보스였던 죽일 놈이 목숨을 붙여둔 채 러시아 밖으로 쫓아내는 같잖은 마지막 선심을 썼다는 점이었다. 그 말은 곧, 러시아로 돌아가면 죽는다는 뜻과 같았다.
러시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른 채 바보같이 삼 개월을 기다린 다음에야 소식을 수소문했다. 알렉세이의 도움을 받아 알아낸 정보로는, 이반이 총참모장과의 마지막 회동을 앞두고 있을 때 이반의 보스가 국방장관을 만나 총참모장의 비리를 고발했다. 세 치 혀를 놀려 교묘하게 조직의 허물보다 총참모장의 허물을 더욱 크게 만들었고, 국방장관에게 새로운 거래를 제안한 것이었다. 국방장관으로선 거절할 이유가 없는 구미 당기는 거래였던 것을 기억한다. 이반은 자신이 군부와의 거래를 성사시키는 것을 보스가 내심 불편해했다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앞으로는 제 어깨를 투덕이며 이번 일만 성사시키면 간부 자리에 앉는 것은 일도 아니라 호탕하게 웃어젖히고, 뒤로는 빠르게 치고 올라오는 저에 대한 불안과 못마땅함을 키우고 있었던 거였다.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이반은 웃었다. 그가 자신을 살려두는 선심을 베풀었다는 것에 욕지기와 웃음이 동시에 일렁였다. 마지막 선심인 동시에 경고일 것이다. 자신이 마냥 소식을 기다리기만 하지는 않을 거라는 것을 그도 알았으리라. 러시아 땅을 밟지만 않으면, 허튼짓만 않는다면 살려두겠다는 무언의 경고. 그래서 이반이 다시는 모국의 땅에 발을 딛지 않을 것인가를 묻는다면, 답은 그렇지 않다였다. 이미 4개월 전 그에게 경고의 의미로 선물을 보냈더랬다. 제 선물에 그가 산산조각 나 준다면 좋았을 뻔했으나 그의 저택 일부와 조직의 다른 이들이 터졌을 뿐 이반의 목표물은 멀쩡했다. 이후 두어 번쯤 제 목을 따려던 놈들을 마주했다. 이반이 보냈던 폭발물처럼 목을 따려던 놈들 역시 딱히 효과적이진 않았다. 어릴 적부터 죽음을 곁에 두고 자라온 저에게 그가 드러내는 경고는 아무 감흥도 주지 못했다. 살고자 하는 본능이 하나라도 더 죽이고 죽겠다는 악으로 치환된 지가 이미 오래였으므로. 이반은 다시 러시아의 땅을 밟을 것이고, 자신을 엿먹인 보스의 멱을 제 손으로 딸 것이다. 좋은 때가 올 때까지 그가 바라는 대로 몸을 낮추고 다 죽은 척 조용히 살아 줄 예정이었다.
해가 짧은 겨울답게 다섯 시를 지나자 밤이 찾아오듯 사위가 조금씩 어둑해져 간다. 사흘 전 내린 눈이 가장자리로 하얗게 얼어붙은 골목을 가로지른 이반이 일 년이란 시간에 익숙해진 펍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바깥의 찬 공기와는 사뭇 다른 온기가 훅 끼쳐온다. 덮어쓰고 있던 후드를 젖히자 걸어오는 동안 찬 공기에 노출돼 엷게 붉어진 코 끝과 뺨이 드러났다. 펍으로 출근하면 으레 가장 먼저 들리곤 하던 알렉세이의 사무실로 곧장 시선이 향한다. 손님이라도 온 듯, 마침 닫히는 문 사이로 어두운 색의 붉은 머리칼이 짧지만 선명히 이반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지난 일 년간 알렉세이의 사무실을 드나든 사람 가운데 붉은 머리칼은 없었기에 머리의 색만으로도 낯선 인물이 알렉세이를 찾아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새로운 딜러인가. 이반은 밟고 선 웰컴 매트에 성의 없이 워커를 툭툭 털고는 목적지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검게 칠한 나무 문을 가볍게 노크한 이반이 알렉세이. 하고 나지막이 펍의 사장을 불렀다. 들어와. 오랜 흡연에 탁해진 목소리가 안에서 이반을 불러들인다. 안에 손님이 있음에도 자신을 들이는 것은 분명 붉은 머리칼의 주인이 새로운 딜러이거나, 마약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와 일맥상통했다. 알렉세이가 손님으로 들인 사람이 과연 딜러일지, 마약 제조를 돕게 될 인물일지 호기심을 품으며 이반은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구색을 갖추기 위해 놓아둔 응접용 소파에 마주 앉은 노란 탈색 머리의 알렉세이와 붉은 머리칼의 청년―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느낌이 묘했으나, 이반은 그의 분위기가 앳되어 보이는 탓이겠거니 대충 넘겨짚었다―에게 차례로 시선을 준 이반의 녹안이 가장 마지막에 닿은 곳은 두 사람 사이의 낮은 티 테이블 위에 올려진 아타셰케이스였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타셰케이스의 겉을 닮은 다른 용도의 가방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저 낯선 청년은 운반책이거나, 심부름꾼이리라. 아주 조금의 실망을 품은 이반이 소파의 남은 자리에 푹 기대앉으며, 알렉세이에게 가방 가득 차있을 마약의 행선지가 어디인지를 묻는 눈빛을 해 보였다.
"스태튼 아일랜드 쪽으로 가는 물건이야. 내 사람 보내는 것보다 심부름꾼을 보내는 게 효율적일 것 같아서. 한동안 물건 때문에 드나들 거니까 서로 인사나 해 둬. 이 친구 이름은 G야. 이쪽에선 일 잘 하기로 유명해. G, 이쪽은 이반. 나랑 일 같이 하는 친구지."
이반의 시선이 G이라 불린 청년의 붉은 머리칼에 가닿았다. 색까지 선명한데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으니 시선이 안 갈래야 안 갈 수가 없었다. 몸담은 조직이 있는 마피아나 갱이 아닌, 용병처럼 일을 하는 이들은 대체로 본명을 감추었다. 러시아에서도 익히 있어왔던 일이다. 반가워요. 툭하니 건넨 인사말에 그의 고개가 작게 까딱였다. 딱히 깊은 의미를 두고 한 인사가 아니었기에, 이반은 말없이 행동으로만 돌아온 인사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았다. 단지 그가 유능하다는 것에 호기심을 내비치며 노골적으로 조목조목 뜯어보는 게 다였다.
"사람을 너무 물건 보듯 보는데."
이반의 노골적인 시선이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을까. 불쑥 새어 나오는 목소리는 묘하게 중성적인 데가 있었다. 이반은 머리칼에 가려져 흐릿하게 비치는 눈을 마주하다 여상히 웃어 보였다.
"일 잘 하기로 유명하다는 사람의 비결이 뭘까 살펴보고 있었어요. 불쾌했어요?"
"그럼 사람을 물건 보듯 보는데 안 불편할 수 있나?"
"유명인이라면 호기심 어린 시선도 어느 정도 감당할 줄 알아야죠."
이반, 적당히 해. 일을 맡길 사람이라고. 한숨처럼 터지는 알렉세이의 만류에 이반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을 해 보이며 어깨를 으쓱였다. 달리 시비―사람에 따라 시비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는 건 이반의 고려 사항에 들어있지 않았다―를 건 것도 아닌데 유난이다 싶었다. 몇 마디 더 오고 가는 알렉세이와 이반의 대화를 잠시 듣고 있던 G가 몸을 일으키며 아타셰케이스를 들었다.
"더 할 이야기 없으면 출발해보지. 다음 약은 2주 뒤에 운반한다고?"
"그렇지. 2주 뒤에 오늘과 같은 시간에 펍으로 찾아와. 잘 부탁한다는 말은 굳이 안 해도 되겠지?"
"받은 대가만큼은 일하니까 필요 없는 소리야."
가방을 챙겨든 채 떠나는 뒷모습이 열렸다 닫히는 문에 가려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이반의 시선이 붉은 머리칼을 좇았다. 몸을 움직이는 모습만 봐도 명성대로 일을 잘 할 것 같긴 했다. 그것과 별개로 그의 인간성이 좋아 보이냐면 그건 그렇지 않았다. 이유는 몰라도 한껏 날을 세우고 경계하는 느낌이 들었다. 조금 흥미가 돋는다. 알렉세이에게로 눈길을 돌린 이반이 낮은 티 테이블 위에 다리를 올리고 좀 더 편히 기대앉았다.
"스태튼으로는 물건 안 보낼 거라더니."
"그랬지. 그런데 굵직한 딜러들 몇이 자꾸 내 약을 공급받고 싶다길래 보내보기로 했어."
"영역 확장이야?"
"그게 그렇게 되나."
"아무리 생각해도 마약에서 손 씻고 살겠다던 알렉세이는 미국으로 건너오는 길에 뒤졌나 봐."
"너 이 새끼, 걸핏하면 그 소리지. 빨리 밖으로 꺼지기나 해."
빨리 밖으로 나가버리라는 알렉세이의 닦달을, 방금 편한 자세를 잡았다는 것으로 응수하며 이반은 그러고도 30분을 더 버티다 사무실을 벗어났다. 이후 정확히 2주가 지난 뒤 이반은 다시 한 번 G를 마주쳤다. 이반이 가게에 도착했을 때 그는 알렉세이의 사무실에서 나오고 있었는데, 반가운 척 인사를 건네는 이반의 얼굴을 흘긋 보기만 하고서 가게를 떠났다. 이반은 그 반응이 재미있어 떠나는 뒤통수에 대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다음의 배달 기일에 이반은 일찍부터 알렉세이의 사무실에서 술병을 비우고 죽치며 G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이윽고 나타난 G를 향해 첫 만남에서와 비슷한 식의 말―시비에 가까운―을 걸었고, G의 반응은 이전과 비슷하게 날카로웠으며, 알렉세이는 똥 씹은 표정을 하고 앉아있다 G가 떠난 후 이반을 닦달했다. 이반은 G가 이런 문제에도 받은 대가만큼 확실히 일을 하는지 궁금했다―사실은 그가 무엇에 그렇게 날을 세우고 있는지 궁금해 부러 부딪혀본 것이었다―는 답으로 알렉세이의 복장을 뒤집어놓았다. 어차피 얼굴을 볼 일도 이번 2주 뒤뿐인데 몇 번 찔러보는 게 대수일까. 이반은 가볍게 생각했다.
"오늘이 마지막이네요, G."
"네가 시비 거는 걸 더는 보지 않아도 돼서 속이 시원하네."
"시비라니 섭하네요. 나름의 친목 다지기였는데."
"웃기는 소리."
웃기는 소리가 맞았다. 친목을 위한 게 아니라 그저 호기심에 기반한 행동일 뿐이었으므로. 이반은 마지막으로 가방을 들고 펍을 떠나는 뒷모습에서 저를 다시 보지 않을 수 있어 후련해 하는 걸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아 웃음 지었다. 건드리는 반응이 재미있었는데. 어차피 비슷한 세계에 발을 담그고 사는 사람들이니 굳이 만들려 하지 않아도 마주칠 일이 한 번쯤은 있을 터였다. 다음에 또 찔러보면 그때는 반응이 다르려나. 시시껄렁한 생각을 하며 이반은 때마침 주문으로 들어온 코스모폴리탄을 만들기 위해 보드카 병을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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