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렵제

이반_관계로그

with. 넬리

아무래도 펍에 새로운 단골이 하나 더 늘어난 것 같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직 단골이라고 부를 정도는 아니지만 조만간 이반의 머릿속 단골 리스트에 올라갈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 생겼다는 뜻이다. 단골 리스트에 올라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밤새 펍에서 자리를 지키다 나가는 정도는 아니었으나 맥주를 음료수처럼 마셔대는 사람이라면 전자의 단골들과는 다른 의미로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반의 생각에 맥주는 탄산음료에 불과한 술―솔직히 술이라 이름을 붙이는 건 술을 무시하는 것과 다름없지만―이었기에 술이라고 취급하는 것도 우스웠고 그런 맥주를 술로 보는 미국인들 또한 우습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반은 넓게 생각하기로 했다. 탄산음료 같은 맥주도 알콜의 도수를 가진 술이긴 하니 취할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분명 미국인 중에서도 술이 센 사람이 있을 터이니 맥주를 음료수처럼 들이킨다 해서 이상할 것은 없었다. 

  

예비 단골로 분류된 그녀를 또렷하게 기억하는 데에는 그것 말고도 더 있었다. 가게를 찾을 때면 항상 혼자 펍을 찾아와 싸구려 안주―사실 펍은 애초에 몇 종류의 술을 제외하고 그렇게 고가의 메뉴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와 맥주를 주문하는 사람이었다. 와서는 맥주를 음료수처럼 마셔대다 두어 시간이 지나면 가게를 나서곤 했는데, 홀을 오가곤 하는 이반과 직원들에게 말을 많이도 붙였다. 다른 직원들이 펍의 예비 단골에게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는 굳이 알고 싶지 않았다. 그야 이반은 자꾸만 말을 걸어오는 게 조금 귀찮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덕분에 제 이름을 알려주고 예비 단골의 이름이 넬리 그린이라는 것을 알았고, 지하철 청소부로 일하고 있으며 남자로 오해받는 일이 잦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취해서 차라리 혼잣말을 해대는 거라면 별생각 없이 내버려 둘 수 있을 텐데, 그동안의 넬리 그린은 사람 좋게도 이반을 포함한 펍의 직원들과 친근하게 말을 주고받았다. 귀찮긴 했어도 가끔은 참 넉살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반은 흘긋 손목의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열한 시를 지나고 있었다. 예비 단골 넬리 그린은 아직 자리를 털고 일어날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온 지 두어 시간이 지났으니 슬슬 자리를 털고 일어날 때가 되었는데. 짧은 순간 흥미가 스쳐 지나간 녹안이 바 안쪽에 진열된 스트레이트 잔에 가 닿는다. 설핏 입매가 삐뚤게 올라가나 싶더니, 이반이 넬리 그린의 테이블로 향했다. 한 손에는 보드카 한 병과 스트레이트 잔 두 개가 쥐여있었다. 테이블에 다다른 이반이 잔과 술병을 툭 내려놓았다. 황갈색 눈동자가 의문을 갖고 도르륵 굴러 이반에게로 향한다.  

 

 "늘 맥주만 주문하길래 한 잔 정도 대접할까 해서요. 괜찮죠?" 

"네? 어, 어…" 

 

확실한 대답도 듣지 않고 짐짓 사람 좋은 척 앞자리에 앉은 이반이 가져온 잔에 보드카를 아슬아슬 찰랑이도록 따랐다. 자, 마셔요. 가득 따른 잔이 넘치지 않게끔 요령 좋게 넬리의 앞으로 밀어준 이반이 제 몫으로 가져온 잔을 한 번에 입안에 털어 넣는다. 마치 대접이 아니라 본인이 마시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처럼 보였다. 식도를 덥히듯 타고 내려가는 보드카의 향이 반갑다. 물론 불과 하루 전에도 이반의 식도는 보드카와의 만남을 가졌지만, 알게 뭔가. 술은 매일 마셔도 나쁘지 않다는 게 이반의 헛된 지론이었다.

  

"한 잔 그대로 쭉 들이켜 봐요, 넬리. 술이 약한 편은 아닌 것 같은데."

  

술이 아주 센 편이면 더 환영이고. 이반은 뒷말을 삼키며 손짓으로 마더 러시아의 바이칼 호 물처럼 맑게 찰랑이는 잔을 재차 권했다. 이반은 미국에 온 뒤로 저와 술잔을 맞댈만한 사람이 없음에 가장 크게 실망했다. 러시아인이라고 모두가 술을 잘 마시는 것은 아니었지만 미국은 러시아만큼 술을 잘 마시는 사람이 흔치 않은 것처럼 보였다. 혹은 주변에 잘 못 마시는 사람만 가득하거나. 그나마 제 주변에서 비슷하게 술을 마실만한 사람이라고는 알렉세이가 다였고, 알렉세이와 마시는 술은 더럽게도 맛이 없었다. 이반은 제 주량에 대해서는 생각도 않고 지금 막 술을 들이켜는 넬리 그린의 주량이 저와 비슷하기를 바라는 헛된 희망을 품었다. 

  

“으... 역시 보드카는 목을 확 긁고 내려가는 게 엄청... 쓰네요.” 

“그 맛에 마시는 거죠. 아무 느낌도 없이 내려가면 술이라고 부르기에 모자라 보이잖아요.” 

“그런 겁니까?” 

“그런 거죠.” 

 

이반은 곧장 빈 잔에 술을 또 가득 채우고 병을 내려놓았다. 보드카 베이스의 칵테일을 만들 때 사용하던 것이라 가져올 때부터 삼분의 일은 비어있는 병이었다. 혼자서도 세 병을 거뜬히 비워대는 이반의 입장에선 두 사람이 나눠 마시기엔 턱도 없는 양이긴 했다. 하지만 펍의 직원으로 일을 하는 중이니 적당히, 조금만 마시기로 한다. 근무 중인 사람이 술을 마시는 것부터 문제라는 의식은 딱히 존재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오늘은 어쩐 일로 안 가고 있어요? 와서 두어 시간만 앉아있다 가는 편이었잖아요.”

“눈썰미 좋게 그런 걸 다 알고 계시네요, 이반 씨. 내일이 오프라서 좀 더 마시다 가려고 그랬죠.” 

“맥주를 음료수처럼 마시는 사람이 이 펍에 흔하진 않거든요.”    

  

그런 걸 다 알고 있냐는 듯 어색하게 웃어 보이는 얼굴이 수더분해 보였다. 사람 좋은 '척'을 하는 저와는 달리 실제로도 좋은 사람의 부류일 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좋은 사람'으로 사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에 대해 문득 의문을 품는 사이, 잔을 비운 넬리가 오늘의 안주로 주문했던 감자튀김을 하나 입에 무는 것이 보였다. 이반 역시 제 잔을 비워내고 두 잔에 새로이 술을 채웠다. 

  

"이반 씨는 무슨 일로 미국에 오게 됐어요? 저번에 러시아 사람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요."  

"아…. 미국에 온 이유요. 별것 없어요. 다른 나라 구경이 하고 싶었는데 마침 미국에 알렉세이…삼촌이 있어서 이리로 온 거죠." 

  

자신의 원함과는 관계없이 오게 된 미국임에도 거짓을 술술 내뱉는 입엔 일말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펍의 직원들도 저를 사장의 친척쯤으로 여기고 있으니 대놓고 친족인 척을 하기 위해 알렉세이를 삼촌이라고 칭하는 데에는 생각보다 많은 노력이 필요하긴 했지만 말이다. 이후 두 사람 사이의 대화는 주로 넬리가 주도하는 식으로 이어져갔다. 그녀의 소소한 일상 얘기―지하철 청소의 고달픔이라거나, 허구한 날 마주치는 쥐와 바퀴벌레 등등의―를 반은 듣고 반은 흘려내고, 그와 더불어 중간중간 예고 없이 훅 치고 들어오는 자신을 신변잡기 성 질문에 진실과 거짓이 반반으로 이루어진 대답을 내놓았다. 보드카 병을 다 비울 때까지 이어진 대화를 통해 이반은 자신이 외향적인 인간인지, 내향적 인간인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넬리 그린이 외향적 인간이라는 데에 자신이 매일 밤 베개 아래에 깔고 자는 나이프와 총을 걸 수도 있겠다는 쓸모없는 확신을 얻었다. 

  

이반은 간에 기별도 가지 않은 음주량이 아쉬운 자신과 달리 취기가 오른 듯한 넬리 그린의 모습에 제멋대로 약간의 실망을 품었다. 술이 아주 센 사람이길 바랐는데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이다. 물론 그녀는 보드카를 마시기 전부터 맥주를 음료 마시듯 마셔댔으니 공정한 비교가 될 수 없긴 했지만, 아쉬움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제 저와 비슷한 주량을 가진 사람을 만나게 되나 싶었더니. 

 

 "아, 맞아. 이반 씨. 그거 알아요?" 

"뭘요?"

"처음에 이 펍 와서 이반 씨 봤을 때 무슨 사람이 저렇게 무뚝뚝해 보일 수 있나 싶었거든요?"

"그랬어요?" 

"그랬다니까? 말 걸어도 단답이지, 거의 웃지도 않지, 재미도 없지. 저 사람은 진짜 인생 재미없게 살겠다 했었는데. 오늘 이야기해 보니까 생각했던 것보다는 덜 한 것 같아서 재미는 있네요."

"음. 이런 솔직한 평가는 오랜만이네요." 

"그거 다 다른 사람들이 이반 씨를 무서워해서 그렇다니까요?"

  

넬리 그린은 확실하게 취했다. 테이블에 팔꿈치를 얹고 손에 턱을 괸 이반이 거짓이라곤 한 줌도 보이지 않는 것 같은 넬리의 평가에 흥미로운 표정을 해 보였다. 자신이 무뚝뚝해 보일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웃음이 헤프지 않은 것도, 재미가 없는 것도 사실이었으므로 딱히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다. 다만 내일 맨정신으로 잠에서 깰 넬리 그린이 오늘 밤의 일을 꼭 토씨 하나 빠트리지 않고 기억하길 바랐다. 간밤의 기억을 모두 떠올린 그녀가 어떤 행동을 취하게 될지 궁금했다. 그녀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대충 세 개 정도이리라. 가게에 발길을 끊거나, 나타나서 모르는 척을 하거나 혹은 주정에 대해 사과를 하거나. 솔직하게 이반은 재미있었고 신선했으므로 넬리 그린이 딱히 사과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어, 벌써 한 시가 한참 지났네. 저기요, 이반 씨. 이만 집에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술 친구 해줘서 고마웠어요." 

"벌써 가요? 뭐… 그러고 보니 술을 더 마실 상태는 아닌 것 같으니 집에 들어가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네요. "

 

의외로 재미있는 시간을 선사해 준 넬리 그린에게 아주 약간의 친절을 베풀기로 한 이반이 취한 그녀를 대신해 문을 열어주며 가게 밖까지 나와 배웅했다.

 

"혼자서 집에 갈 수 있죠? 일하는 중이라 집까지 데려다주는 건 곤란하거든요."

"당연하죠. 술 마셔도 집에는 잘 들어가니까 걱정 말고 들어가세요."

 

일하는 중에 자리까지 잡고 앉아 술을 마신 주제에 내뱉는 것은 꼭 열심히 일만 한 사람의 말이었다. 넬리 그린이 시원하게 웃으며 돌아섰다. 머리 위로 손을 휘적휘적 흔드는 인사까지 남기고선 걸음을 옮긴다. 딱히 걱정을 품고 한 말은 아니었으나, 그녀가 착각하도록 내버려 두며 이반은 다시 펍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일교차가 큰 어느 서늘한 초여름 밤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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