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렵제

업과 안배

M00

 

 

열린 창을 통해 고스란히 떠밀려 오는 바깥의 소란에 침대 위 이불 더미가 꿈틀, 움직임을 보인다. 세상의 종말이 가져오는 각종 불행한 것들에 대해 토로하는 목소리에는 광기가 어려있다 느껴질 만큼 맹목적이고 절박한 데가 있었다. 할렘가와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니 미친놈처럼 종말을 떠들어대는 치들이 이 골목으로 넘어오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눈도 채 뜨지 못한 채 이불 더미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반의 얼굴이 퍽 험악하다. 인류의 멸망은 우리가 불러온 재앙이니 뭐니 떠들어대는 꼴이 우습다. 누군지 모를 저 멍청이는 과연 진실이 어떤 것인지 알고나 있을까. 한쪽 눈만을 밀어 뜬 이반의 손이 침대 옆 작은 협탁 위 볼품없이 우그러진 캔을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창밖을 향해 내던지며 모국의 언어로 욕설을 내뱉는다. 아무렇게나 내던진 것이 어딘가에 맞긴 맞은 듯 깡하고 날카로운 소리가 골목을 울리고, 미친놈의 목소리가 한풀 수그러드는 듯싶었다. 잠을 방해받았는데, 멸망이 대수인가? 멸망이든 뭐든 할 테면 하라지. 짜증 섞인 한숨과 함께 얼굴을 쓸어내린 이반의 시선이 벽에 걸린 시계로 가 닿는다. 자신이 살기 전부터 걸려있던 낡아빠진 시계는 당장 초침이 거꾸로 돌아간다 해도 그러려니 할 정도로 볼품없는 꼴이었으나, 1년여가 지나도록 신기하게도 멀쩡했다. 그 덕에 언제쯤 고장이 나려나 기대까지 되곤 하는 시계가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반은 다시 침대 위로 털썩 몸을 뉘었다. 11시라니. 아직 제게는 밤이나 다름없는 시간이었다. 물론 압도적인 다수에겐 정오를 바라보는 오전일 테지만. 

 

 

다시 잠이 들듯 말듯, 마치 얕은 물이 살랑이는 것과 같은 감각에 희멀건한 눈꺼풀이 느릿하게 팔락였다. 흐릿하게 초점이 풀어진 눈으로 천장의 무늬를 더듬는다. '당신은 여기서 이런 일로 잡혀들어갈 사람이 아닙니다. 당신에게는 이보다 더 중요한 업이 안배되어 있어요.' 문득 그날 밤의 독특한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코카인을 사겠다며 벌벌 떠는 손으로 나타난 약쟁이가 꼬리를 달고 나타나는 덕에 골목골목으로 괜한 힘을 빼고 있을 때였다. 좁은 건물 틈바구니에서 불쑥 튀어나온 하얀 손이 달리는 몸을 끌어당겨 그대로 딸려 들어갔다. 솜털 당겨지듯 끌려들어 간 것도 어처구니가 없었는데, 그 좁은 건물 틈에서 중요한 업이니 그를 위한 힘이니 알 수 없는 말들을 잔뜩 듣고 그것으로 모자라 직접 보고도 믿을 수 없는 능력을 떠안기듯 얻기까지 했더랬다. 그게 불과 한 달쯤 전이었다. 모국에서 쫓겨나 다시 시궁쥐 같은 처지로 마약이나 팔아치우는 것보다 중요한 업이 안배되어 있다고. 업이니 안배니 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 이반은 조소했다. 이런 일로 잡혀들어갈 사람이 아니라면 애초에 왜 제 삶은 밑바닥을 벗어날 수 없는지를 추궁했다. 그 역시 처음부터 안배되어 있던 일이란다. 그런 대답이라면 길바닥에 주저앉아 구걸하는 거지도 갖다 댈 수 있을 법한 구실이었다. 

 

 

1999년 5월. 하얀 손의 존재가 말하던 지구의 멸망을 고작 두 달여 남겨두고 있다. 듣고, 보았음에도 이반은 지구의 멸망이라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없었다. 물론 1999년의 해에 인류의 멸망이 있으리라 했던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은 익히 알고 있었다. 믿지 않았을 뿐. 미국 땅에 처음 발을 들이던 이반에게 지구의 멸망은 그저 밀레니엄을 앞둔 음모론자들의 허황된 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이반의 관심사는 지구의 멸망 따위가 아니었다. 다 만들어놓은 판을 내버리고 러시아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와야 했다는 사실이 뱃속을 시커멓게 썩히는 중이었다. 일의 규모가 규모이니 제보가 들어간 이상 정부에서도 움직이지 않을 수 없을 거라며, 몸의 빈자리에 철창을 새기고 싶은 게 아니라면 밀고자를 잡아낼 때까지만 떠나있으라던 늙은 사내의 말이 여즉까지도 선명했다. 영어를 지껄일 줄 안다는 이유로 떠밀린 미국의 뉴욕에서 아무 소식도 모른 채 삼 개월을 기다렸다. 다음 삼 개월은 모스크바의 소식을 수소문했다. 그렇게 육 개월 여를 지내고서야 이반은 제 두발 딛고 섰던 곳이 어느 것도, 어떤 것도 믿어서는 안 되는 시궁창이었다는 것을 새삼 다시 되새길 수 있었다.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 정책의 틈을 비집고 그 그늘에서 몸집을 불린 짐승들이 있었다. 이후 줄줄이 일어난 소련의 붕괴와 각각의 독립국으로 갈라선 영토들, 국영기업의 사유화를 비롯해 다양한 혼란이자 기회를 틈타 짐승들은 무기 및 마약 암거래, 매춘 따위에 그치지 않고 욕심을 내 기업 인수와 경영으로 손을 뻗쳤다. 종이에 스미는 물처럼 정치권의 고위관료와 경찰 간부들에게 스며들어 손을 맞잡았다. 움직이는 것은 머리들뿐이 아니었다. 그늘진 시궁창의 정점에 선 이들을 끌어내리기 위한 반역 또한 횡행했다. 집어삼키려는 자와 잡아먹히지 않으려는 이들 사이의 으르렁거림이 거리를 휘젓는 것이 일상이었다. 어제의 동료가 오늘은 고깃덩이가 되어 하수구를 굴러다니는 꼴이 빈번했다. 그 난리통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비벼댈 곳을 눈치 빠르게 잡아내는 협잡꾼들이나 제 몸 하나 의탁할 뒷배가 있는 놈, 탄탄한 결속을 자랑하는 무리 정도가 다였다. 이반 블라디미로비치 아이스토프는 협잡꾼이었던가, 뒷배를 잡은 놈이었던가. 

 

 

―그런데 이제는 다가올 멸망을 위해 싸워달라? 누구를 슈퍼맨 나부랭이로 아나. 허공에 손을 뻗어 뚜둑 뚜둑 뼛소리가 나도록 주먹을 쥐었다 펴 본다. 저를 옆에 세워두고 괜찮은 물건을 거뒀다, 입을 쭉 찢어 웃던 얼굴을 기억한다. 세월의 흔적을 담아 굵직한 그 손가락에 자랑인 양 끼워진 두툼한 반지를 탐내본 일이 한번쯤은 있었다. 그의 아래에서 그것을 단 한 번이라도 탐욕의 눈으로 보지 않은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어느새 천장의 무늬가 또렷하다. Ебать. 욕을 뇌까린 이반은 결국 몸을 일으켰다. 생각의 방향을 잘못 잡았다. 이딴 생각을 하면서 다시 잠에 들 수 있을 리가 있나. 의자에 걸쳐놓았던 바지와 티를 대충 끌어당겨 팔다리를 집어넣는다. 등 뒤로 축 늘어진 후드를 푹 뒤집어쓴다. 

 

 

애초에 저를 찔러넣은 밀고자 같은 건 없었다. 빠른 속도로 점점 더 큰 판을 깔아가며 몸집을 불리는 아랫놈을 두고 보기가 싫은 대가리가 하나 있었을 뿐. 지금 제게 있는 능력이라면 그 늙은 새끼를 엿먹이고도 남을텐데. 7월이 오기 전 모스크바를 다녀오는 것이 그리 큰 무리는 아니지 않을까. 마치 옆집에 놀러 갈 고민을 하듯 잠시 생각에 잠기나 싶던 이반이 고개를 저었다. 모스크바가 중요한 게 아니다. 대충 꼽아도 일 년 반이 되어가는 시간 동안 숨통이 끊기지 않았다는 것이 신기하지만 앞으로도 끊어질 일 없도록 잘 보전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우선인 것은, 분명 버릇대로 가게에서 돈에 침 발라가며 지난밤 매상을 꼽아보고 있을 알렉세이에게 찾아가 보드카나 한 병 뜯어내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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