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렵제

Mirage

개인로그


"바냐? 오늘은 어쩐 일로 나보다 더 자네."

 

낯선 듯 익숙한 목소리에 이반이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깜빡, 깜빡 느릿하게 깜빡이는 시야에 낯선 천장이 선명히 자리한다. 흠칫 몸을 굳인 이반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바냐, 왜 그래. 안 좋은 꿈이라도 꿨어?"

 

어깨 위로 사뿐히 와 닿는 온기, 다정한 걱정이 담긴 말.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그곳엔 염려스러운 표정의……

 

"알료나?"

 

이반의 사고회로가 일순 정지했다.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광경이다. 알료나는 제가 죽음으로 떠민 사람이다. 죽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는데. 어째서? 드물게 상당히 당혹스러운 낯빛을 한 이반이 침대 밖으로 나오며 실내를 둘러보았다. 따스한 목재로 만들어진 바닥과 부드러운 크림 빛의 벽과 천장, 두 사람이 누울 수 있는 넓은 침대, 그 위에 앉아 걱정이 가득한 얼굴을 한 나이트가운 차림의 알료나. 없던 두통까지 생길 것 같았다. 좀처럼 지금 자신의 상황이 정리되지 않았다. 분명 자신은 평소처럼 집에 돌아와 잠을 청했을 뿐인데. 평소처럼? 갑작스런 위화감이 발끝에서부터 차올랐다. 평소에 무엇을 했더라. 지금껏 살면서 한 일이라곤 약을…. 낯선 단어. 약을 어쨌단 말인가. 이반은 자신의 삶에서 약과 가까웠던 적이 많지 않음을 기억해냈다.

 

"바냐. 괜찮은 거야? 무슨 일인데. 응?"

 

침대에서 내려선 알료나가 이반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올려다보는 파란 눈 가득 걱정과 애정만이 차있을 뿐이다. 알료나가 조심스럽게 허리를 감싸오는 것을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내버려 두었다기보다, 몸이 그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몸과 머리가 알료나에게 익숙해져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반은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애썼다. 머릿속에서 파편으로 남아 돌아다니는 기억들 가운데 어느 것이 자신의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약을 팔고 돈을 걷어 들이는 마약상의 기억이, 주름 없는 제복을 입고 경례를 하는 군인의 기억이 엉망으로 뒤섞인다. 스스로가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알료나. 내가 무슨 일을 하지…?"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뭘 하던 사람이고 우리가 무슨 사이인지… 분명 너는 내가…."

"악몽 꿨구나, 내 사랑. 이것 봐요, 러시아 연방육군 아이스토프 대위님. 악몽을 꿨다고 날 까먹으면 서운하잖아."

"아……. 미안해. 꿈… 때문에 정신이 없나봐."

 

이반은 여전히 넋이 나간 얼굴을 하고 이마를 짚었다. 이제야 어렴풋이 기억들이 떠오는 것 같았다. 러시아 연방육군 총사령관 휘하 방공부대 대위. 약 2년 정도 몸담았던 소련군의 붕괴를 두 눈으로 지켜보고, 새롭게 창설된 러시아 연방군으로 전군해 복무해오다 우연히 방공부대에 몸담고 있는 대령의 눈에 들어 뒷배를 자처한 대령의 힘을 업고 나이에 비해 빠르게 진급 중이었다. 그리 엄격하게 지켜지지 않는 군율과 기강 탓에 이반은 평소에도 나이가 많은 부하계급의 군인들로부터 눈총 아닌 눈총을 공공연히 받아오고 있었는데, 이틀 전 군부대 밖에서 술에 취한 채 마주친 부하의 하극상으로 가벼운 부상을 입고 특별 휴가를 명받은 참이었다. 며칠 쉬고 오라 어깨를 투덕이며 같이 주먹질을 하지 않아 다행이라고 했던 대령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고 사라졌다. 이반이 팔을 들어 허리를 끌어안고 있던 알료나를 마주 감싸 안았다. 혼란스러웠던 머릿속이 조금씩 차분히 가라앉고 있었다. 알료나가 이반의 가슴팍에 턱을 댄 채 올려다보았다.

 

"많이 나쁜 꿈이었어?"

"아니, 이제 괜찮아. 그냥 개꿈이었어."

"며칠 씩 쉬려니까 답답하다고 하더니… 악몽까지 꿀 정도였어?"

"그러게. 늦잠까지 다 자고."

"필랴보다도 더 늦게 일어났어. 알아?"

"오늘은 당신도 필랴도 일찍 일어났네."

"당신이 늦게 일어난 거라니까. 씻고 내려와. 먼저 내려가 있을게."

 

가볍게 발돋움해 이반의 턱에 짧게 입을 맞춘 알료나가 이반을 욕실로 떠밀었다. 고분고분 욕실로 들어선 이반이 세면대를 짚고 거울을 마주했다. 짧게 수염이 돋은 탁한 녹안의 남자가 이반을 마주했다. 분명 익숙한 자신의 모습인데 어딘가 낯설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꼭 맞지 않는 거죽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 같달까. 정체를 알 수 없는 불편함에 잠시 미간을 찌푸린 이반이 이내 고개를 젓고 수도꼭지를 돌렸다.

 

"바냐, 왔어?"

"아빠! 왜 이렇게 늦게 내려왔어요?"

 

옷을 갈아입고 아래층 주방으로 내려오던 이반이 품으로 달려드는 작은 인영을 다치지 않게 안아 올렸다. 목을 끌어안고 매달리는 아이에게서 특유의 젖내와 보드라운 온기가 느껴졌다. 이반은 한 팔로 아이의 엉덩이를 받쳐 안고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아이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많이 기다렸어, 필랴?"

"오늘 왜 이렇게 늦게 깼어요, 아빠. 배고파서 우유 하나 먼저 먹었어요."

"그럴 땐 한 컵이라고 해야지."

"으응, 한 컵이요."

 

이반은 아이를 안은 채 알료나에게로 다가가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어깨 너머로 내려다 본 도마 위엔 작은 큐브로 썰어놓은 야채들과 햄 따위가 색색별로 모여 있었다. 이반이 입매를 끌어올렸다.

 

"올해 첫 아크로쉬카네."

"오늘은 아침부터 조금 더운 것 같아서 만들어 봤어. 필랴는 올리브예 먹이려고."

“엄마 당근 빼주세요."

"조금만 넣을게. 알았지?"

 

아크로쉬카는 이반이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였다. 여름이 다가오면 항상 빠트리지 않고 먹곤 했는데, 알료나가 맞추는 스메타나와 크바스의 비율이 이반의 입맛에 항상 꼭 맞았다. 준비가 다 되어가는 식사에 이반이 품에 안고 있던 아이를 내려주고 알료나를 도와 식탁으로 그릇과 음식을 날랐다. 그사이 아이는 이미 제 자리에 얌전히 앉아 제 부모가 빨리 자리에 앉기를 바라는 눈을 빛내고 있었다. 아침식사는 언제나와 같이 평화롭고, 포근했다. 이반과 알료나는 종알대는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웃었다.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에 대해 서로 하고 싶은 것들을 하나하나 꼽았다. 함께 마켓을 가는 것, 산책을 나가는 것, 오후엔 좋은 곳에서 외식을 하는 것, 옷을 사러 가는 것 등 사소한 것들이 목록의 대부분이었다. 욕실에서 거울을 쳐다봤을 때 느꼈던, 맞지 않는 거죽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 같다는 불편함은 어느 틈엔가 자취를 감춘 뒤였다.

 

직업군인은 하루의 일과가 규칙적이긴 하지만, 그것이 꼭 여가시간이 많다는 이야기와 일맥상통하지는 않았다. 이반은 대령을 뒷배로 둔만큼 맡아 처리하는 일의 양이 마냥 가볍지만은 않았다. 대가 없는 혜택은 없었으므로. 당연히 해내야 할 일들이었다. 때문에 이번의 특별 휴가는 가족들과 시간을 충분히 보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이반과 알료나는 아이에게 관람차를 태워주자는 데에 생각을 모았다. 올해로 다섯 살이 된 아이는 아직 관람차를 타본 적이 없었다. 이반은 자신이 여유가 있을 때 알료나와 함께 아이에게 관람차를 태워주고 싶었다.

 

이즈마일롭스키 공원은 모스크바의 이즈말로보 구 내에 자리한 공원으로 제법 규모가 큰 공원답게 내부에는 관람차를 비롯해 몇 가지의 어트랙션이 설치되어 있었고, 요트를 탈 수 있는 호수와 카페테리아며 식당까지 갖출 것은 얼추 다 갖춘 그런 곳이었다. 집에서 공원까지의 거리는 20분 정도를 걸어야 하는 거리였는데, 집 2층에서 공원의 일부가 내다보이는 것을 감안하면 무척이나 가까운 위치이긴 했다. 아이는 함께 놀러가는 일이 잘 없던 이반이 있다는 것에 못내 신난 눈치였다. 세 사람은 나란히 손을 잡고 공원을 향해 걸었다. 얼마 못 가 아이는 다리가 아프다며 이반에게 안겨들었고, 이반은 다정한 낯빛으로 웃음 지으며 아침식사 때와 같이 아이를 달랑 안아 올렸다.

 

"필랴, 이제 제법 무거워졌는데?"

"그럼 이제 못 안겨요…?"

"그렇지는 않아. 하지만 필랴가 키도 크고 튼튼하게 자라려면 스스로 걷는 일에 익숙해 져야해."

"엄마가 그랬지? 걷기 열심히 해야 한다고."

 

아이는 잠시 시무룩해지는 듯 했으나, 이내 털어내고 씩씩하게 품에서 내려 다시 걷기 시작했다. 또래에 비해 조금 마르고 작은 아이였다. 스스로도 그것을 알고 있으니 튼튼하게, 키 크게 라는 말에 귀를 세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반은 알료나와 제 손을 한 쪽씩 붙잡고 걸음을 옮기는 아이의 머리꼭지를 내려다보았다. 아이를 생각하자 마음이 따뜻하게 차오르는 한편 그 기저에선 위화감이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었다. 이반은 아이도, 알료나도 알아채지 못하리만치 미미하게 불편한 얼굴을 했다.

자취를 감추었던 불편함이 다시 이반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계속 뭔가 어긋나 있는 것 같았는데, 그것이 도저히 뭔지 알 수 없었다. 알료나가 알게 된다면 아침의 일까지 더해 신경을 쓸까봐 이반은 그 불편함을 덮어 무시했다. 이반의 불편함은 아이의 웃음에 손쉽게 묻혀갔다. 처음 타보는 관람차가 무서울 법도 한데 그저 신난 얼굴로 온 사방을 두리번두리번 돌아보기에 바빴다. 이반은 마음속에 따스함이 뿌듯하게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눈 색을 닮아간 아이가 반짝이는 눈을 곱게 접으며 웃는다. 알료나의 머리색을 닮아간 아이의 금발이 햇볕을 받아 빛났다.

 

"참, 바냐. 당신 아버지가 전화했었는데, 대령님께 군수품 이야기 좀 잘 해 달래."

"그게 이야기 한다고 내가 말한 대로 되는 것도 아닌데…."

 

이반은 짐짓 얼굴을 찌푸리며 곤란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로부터 이런 부탁을 받는 것이 한두 번이 아닌 탓이다. 알료나 역시 이반의 곤란하다는 반응을 보며 애매하게 웃어보였다. 이반의 아버지는 군수품을 제작하고 수입 및 수출을 하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각종 군수품들을 보고 자란 이반에게 군대란 곳은 남들이 말하는 만큼 낯설거나, 거리가 멀게 느껴지지 않는 곳이었다. 이반 스스로의 원함도 있긴 했으나 직업군인을 선택하게 된 것은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그에게는 직업군인인 아들이 있다면 군수사업을 하는데에 뭐든 도움이 되리란 생각이 있었다. 그래서 실제로 이반이 직업군인이 된 이후 사업에 도움이 되었는가를 따져본다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당장은 큰 의미가 있진 않았다. 하지만 이야기를 꺼낸다면 한 번씩 고려는 해볼 것이다. 이반은 다음부턴 그런 부탁은 하지 말라 전화라도 해야겠다 생각했다.

 

관람차에서 내려선 뒤로 아이는 신이 나 이곳저곳을 마구 다녔다. 별 것 없는 놀이기구에도 신이 나 꼭대기에 올라간 모습을 자랑하고, 회전목마를 타며 한 바퀴를 돌 때마다 손을 흔들었다. 보트를 타고 싶다 졸라대는 통에 결국 호수 위를 부유하는 보트에 올랐고 노를 젓는 것은 고스란히 이반의 차지였다. 내리쬐는 햇빛을 고스란히 맞으며 웃는 아이와 알료나의 모습은 그림 같았다. 노를 저으며 이반은 문득 이것이 자기가 가져도 되는 행복이 맞는지를 고민했다. 너무 행복하면 되레 불안하다고 하던가. 지금의 이반이 딱 그 짝이었다. 아이와 알료나에게 마주 웃어주면서도, 이반은 이 행복이 언젠가는 반드시 깨질 것만 같아 노를 젓는 내내 밑도 끝도 없는 불안감과 싸워야 했다.

 

"바냐, 필립 잠들었어."

"그러네. 아까 놀던 걸 생각하면 지칠 만도 하지."

 

보트에서 내린 후 들린 카페테리아에서, 아이는 제 몫의 간식을 채 다 먹지 못하고 의자에 기대 선잠에 들었다. 평소에 아빠와 놀 시간이 거의 없다보니 오늘은 더 신이 나서 그런 것 같다며 알료나가 아이의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었다. 이반은 그런 아이에게 미안한 한편, 항상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아이가 예뻤다. 이반과 알료나는 모처럼 데이트를 나온 커플처럼 조곤조곤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두 사람의 왼 손 약지에서 서로의 신뢰와 애정을 증명하는 약속의 반지가 빛났다. 한참의 이야기 끝에 몸을 일으킨 이반이 알료나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곯아떨어진 아이를 조심스럽게 안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푸르렀고 고요했다. 미약한 온기를 가진 바람이 잠든 아이의 가느란 머리칼을 짓궂게 흩트리고 지나갔다.

 

저녁식사 메뉴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집 앞에 거의 다다랐을 즘이었다. 집 쪽을 쳐다보는 알료나의 표정 변화를 본 이반이 눈길을 돌렸고, 휴가 기간 동안은 그다지 보고 싶지 않았던 익숙한 색의 군용 지프가 집 앞에 서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반은 잠든 아이를 알료나에게 안겨주고 지프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집이 빈 것을 알고 돌아오길 기다렸던 듯, 이반이 걸어오자 지프에 기대어 서 있던 중위 견장을 단 두 군인이 절도 있게 경례를 올려붙였다. 쉬어. 마주 경례한 이반의 짧은 구령에 두 군인이 편한 자세를 취했다. 제복으로 미뤄봤을 때 그들은 헌병대였다. 헌병대가 집까지 찾아올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아이 앞에서 누그러졌던 이반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다름이 아니라 포포프 소위가 영창으로 가기 전에 무슨 일이 있어도 대위님께 사과를 하고 가야 한다고 무리하게 떼를 써서…."

"그래서 떼쓰는 걸 곧이곧대로 들어 줬다는 건가?"

"…….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됐어."

 

이반은 따져 물으려던 게 아니었다는 듯 손을 저었다. 굳이 그런 것까지 따져 물을 필요는 없다 싶었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아이를 안은 채 서 있는 알료나를 먼저 집 안으로 들여보내고, 이반은 두 군인을 향해 지프의 뒷문을 향해 열어보라는 의미로 가볍게 턱짓했다. 손목에 수갑을 찬 채 차에서 내려서는 소위는 꼭 배가 아픈 사람처럼 자세가 구부정했다. 이반은 그의 한쪽 팔을 잡고 있는 중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혹 자신이 오기 전 가혹행위가 있었는지를 의심했으나 헌병대의 중위들이 그럴 이유가 없다 싶었다. 중위 역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보였을 뿐이다.

 

"소위."

"…소위 포포프."

"어디가 안 좋은 것 같은데."

"배… 배가 조금 아픕니다."

"그런데 굳이 사과를 하겠다고 기다렸다고?"

"예… 죄송해서… 사과를 꼭 드려야겠다고 생각을…"

 

소위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이반이 옆에 선 헌병대의 허리춤으로 손을 뻗었다. 홀스터에 얌전히 들어있는 권총을 빼내 장전, 조준하여 발사하는 데에는 채 20초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큰 발포음이 주변의 공기를 찢었다. 채 20초도 되지 않는 시간은 누군가에게는 눈 깜짝할 순간이겠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예컨대 달려들어 사람을 찌르기에는 말이다. 이반은 지프로 피를 흩뿌리며 앞으로 쓰러지는 포포프 소위의 몸을 발로 밀어냈다. 그 반동으로 뒷걸음질 치는 이반의 앞으로 핏방울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시선을 내리자 배 가운데에 칼 손잡이만이 비죽 나와 있는 것이 또렷했다. 한 발 늦었다. 고개를 숙인 채 눈을 치뜨고 쳐다보는 시선을 조금만 더 빨리 잡아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까. 불덩이라도 박힌 듯 뜨겁다. 절로 욕이 흐른다. 비틀거린 이반이 무릎을 꿇으며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목구멍을 타고 뜨거운 쇠비린내가 울컥 쏟아진다. 찔려도 단단히 잘못 찔린 게 틀림없었다.

 

"대위님!"

 

사색이 된 중위가 미끄러지듯 옆으로 와 무릎을 꿇으며 상처를 살피려 했다. 이반은 귀찮은 듯 손을 내저었다. 기침 한 번에 길바닥으로 한 움큼의 피가 튀었다. 지프에 딸린 무전기로 긴급 무전을 치는 소리가 멀게 들려왔다.

 

"바냐, 총 소리가… 바냐!"

 

한달음에 달려온 알료나가 이반의 몸을 끌어안았다. 이반이 목구멍으로 역류하는 핏물을 애써 삼키며 알료나의 파란 눈을 마주했다. 하늘을 닮은 파란 눈에 눈물이 가득이었다. 이반은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지금 벌어진 상황이 어처구니없었다. 행복이 깨질 것 같다던 불안감은 이 일이 벌어질 예정이었기 때문인 걸까. 구급차를 불렀으니 조금만 버티시라 외치는 중위의 목소리가 다급했다. 피 묻은 손이 하얀 손을 잡는다. 이반은 알료나에게 사과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어버린 것에 대해, 무서운 일을 겪게 만든 것에 대해, 이런 꼴을 보여준 것에 대해. 지나치게 상처부위가 아팠다. 이반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갑작스런 탈력감이 사지를 옭아맸기 때문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한다는 중위의 말도 귀찮았다. 불과 몇 분 전까지 보냈던 평화로운 일상이 마치 꿈만 같았다. 이반은 애타게 자신을 부르는 알료나의 목소리를 끝으로 눈을 감았다.

 

어슴푸레 파란 빛에 온 사위가 잠겨있는 시간. 창백한 어둠 속에서 이반이 눈을 떴다. 낡은 천장의 벽지, 벽시계 , 물건이 없다시피 한 집안까지. 모든 게 원래대로였다. 이쪽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부모의 이름은커녕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고, 살아온 흔적이라곤 밑바닥을 기며 아등바등 버텨온 게 전부인 삶. 대체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건지. 스스로의 얼빠진 꼴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기억 속에 있는 것들이 온통 뒤섞여 나타난 꿈이었다. 몸을 일으킨 이반이 명치께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선뜩한 고통의 잔재가 벌레처럼 기어 다니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직까지 정신을 못 차린 모양이다. 침대 옆 협탁에 놓인 보드카 병을 집어 드는 이반의 입술 새로 한숨을 닮은 헛웃음이 새었다. 길고 긴 꿈의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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