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렵제

방관하거나, 관여하거나.

M01

인구 과밀의 도시가 달아오른 정점, 세 시. 길거리를 누비는 자동차며 사람이 뿜어낸 열기가 한낮의 온도와 뒤섞여 빽빽한 건물 사이사이를 쉽게도 달군다. 유월의 뉴욕은 확실히 지난달보다 조금 더 뜨거웠다. 이맘때쯤의 모스크바는 뉴욕보다는 조금 시원했으므로, 이반은 식사를 위해 들른 가게의 창가에 앉아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이른 더위를 느끼는 중이었다. 가게 안쪽으로 자리가 있었다면 절대 창가에 앉지 않았으리라. 하필이면 테이블마저 하얀 필름지로 마감되어있어 햇빛이 반사되자 눈이 부셨다. 본의 아니게 짜증스러운 얼굴을 하고 앉아있길 수 분, 뜨겁다는 것을 온몸으로 증명하듯 김이 올라오는 아메리카노 한 잔―테이블에 놓인 빈 잔 위로 커피가 채워질 때 이반은 차가운 것을 주문하지 않음을 후회했다―과 그 옆으로 흰 원형의 접시가 놓였다.

접시 위엔 팬케이크 두 장과 바짝 구워진 베이컨 세 장, 파슬리 가루가 올라간 서니 사이드 업 둘이 가득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가장자리에 빈약하게 자리를 차지한 베이크드 빈스와 치커리 몇 조각이 채소의 구색을 갖추고 있었다. 비록 채소의 비율이 몹시 안쓰러울 정도이긴 했으나 저렴한 가격을 감안했을 때 풍성한 구성임은 틀림없었다. 서버를 향해 짧은 눈인사를 건넨 이반이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햇빛에 눈이 멀기 전에 얼른 먹어치우고 그늘진 골목으로 사라지는 것이 이로울 것만 같았다. 빛은 어떤 의미로든 제게 불편했고, 어울리지 않았다. 

  

달리 마주 앉아 대화를 할 상대도 없으니 식사의 속도는 빨랐다. 입에 든 것을 씹어 삼키는 동안 이반의 시선은 반사적으로 창밖을 향했다. 눈이 부시니 어쩌니 해도 창가에 앉으면 창밖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 사람의 심리인지도 몰랐다. 미국에서 가장 인구가 많다는 대도시인 만큼 뉴욕이 한가로운 시간은 썩 많지 않았다. 각각 다른 시간의 흐름을 가진 사람들이 매시 매분 거리를 채운다. 내리쬐는 햇볕에 한껏 작아진 검은 동공이 오가는 면면들을 훑는다. 의미는 없었다. 믿음의 여하와는 관계없이 멸망을 앞둔 이들을 관찰하는 무기질적 눈빛일 뿐이다. 거리를 오가는 저 사람들의 다수는 멸망이 다가오는 순간에도 그날의 할 일을 하고 있지 않을까. 어쩌면 멸망을 반기는 사람도 있을 터였다. 마치……그래, 길 건너의 저 미친놈들처럼 말이다. 이반의 눈에 한심함과 일말의 경멸이 스쳤다. 

  

작은 성당 앞이었다. 남자 둘과 여자 둘이 각각 피켓을 들고 신경도 쓰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고래고래 고함을 치고 있었다. 너희들의 신이 너희를 버렸다며 멸망이 코앞으로 다가왔다고, 멸망을 믿지 않는 너희들은 불타 없어질 거라고 깔깔거리며 웃었다. 성당 앞에서 외치는 말이라기엔 상당히 불경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이반의 머리 구석에서 자라다 흩어졌다. 몸에 성모마리아를 새겼다곤 하나, 이반은 종교를 믿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니 불경하든 말든 저와는 관계없는 일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남은 강낭콩 몇 알을 포크로 한 번에 떠먹었다. '너희들은'이라니, 지구가 멸망하면 자신들은 멀쩡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냥 멍청이 집단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저 치들은 정신이 나가도 단단히 나간 듯 보였다. 혹은 저처럼 뭔가를 만난 뒤에 저런 짓을 하고 다니는 중이거나. 접시를 비운 이반은 시간을 확인한 후 남은 커피까지 비우고 일어났다. 세 시 사십 분이었다. 멸망은 멸망이고, 일은 일이었다. 

  

반지하라고 부르기에 애매한 계단을 내려가자 펍은 오픈 준비를 거의 마친 상태였다. 마지막 준비를 하며 인사를 건네오는 얼굴들에게 인사를 되돌린 이반의 걸음이 곧장 알렉세이의 사무실로 향한다. 직원들은 이반이 알렉세이의 사무실을 밥 먹듯 드나들어도, 출근일이 종종 들쭉날쭉이어도 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알렉세이가 처음 이반을 소개할 때 '앞으로 자주 보게 될 사람' 정도로 소개한 탓인지도 몰랐다. 따지자면 이반은 직원의 경계 어디쯤에 반쯤 몸을 걸친 것과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펍 Holyoke에서 이반의 역할은 딱히 정해져있지 않았다. 술에 취해 진상을 부리거나 소란을 피우는 손님을 정리하기도 했고, 바 안에서 주문을 받고 술을 내어주거나, 서빙을 맡기도 했다. 저들끼리 은밀히 하는 이야기로는 이반을 알렉세이의 친척 정도로 짐작하고 있는 듯싶었다. 그 덕분에 직원들 사이에 문제없이 스며들 수 있었으니 이반으로서는 굳이 바로잡을 이유가 없는 오해였다. 

 


"알렉세이, 오늘은 안 나가. 잠복 돈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뉴욕 경찰은 요즘 일 없대냐?" 

"여기서 계산기만 두드리는 당신보다야 바쁘겠지."

"이게 다 네 수입을 정확히 분배해주려고 고생하는 건데?"

"고생은 계산기가 하는 거고."

"그 계산기를 누르는 손가락은 내 거야."

"계산기를 두드릴 수 있게 벌어다 주는 사람은 나고."

"유치하게 이럴래? 확 찔러버린다." 

"난 모국의 동지를 외롭게 밖에 남겨두진 않을 거니까 잘 해봐."  

   

얄미워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미간을 꾹꾹 눌러대는 알렉세이의 모습을 보며 이반은 킬킬 짤막하게 웃었다. 어찌 보면 알렉세이와는 친척보다 가까운 사이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십 대 초반, 수감 중에 알게 된 교도소 동지 가운데 하나가 알렉세이였다. 비록 같은 보스 아래의 사람은 아니었으나 교도소 안에서 가까운 편에 속하는 이였고, 출소 후 마약상 일에서 손을 털고 미국으로 떠날 거라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이반이 미국으로 내쫓겨 온 뒤로 알렉세이를 만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이반의 출소 전 그가 편지를 보내 제 연락처를 남겨놓았던 덕분이었다. (이반은 그가 자신을 그 정도로 친근하게 생각하고 있는 줄은 몰랐기에, 편지를 받고 상당한 얼떨떨함을 느껴야 했다) 그렇게 러시아의 교도소가 아닌 낯선 미국 땅에서 만난 알렉세이는 평범하게 펍을 운영하며 사는 듯했으나, 제 버릇 남 못 준다는 옛말을 착실하게 따르며 살고 있었다. 펍의 사장이라는 신분 아래에서 마약을 제조해 알음알음 내다 팔고 있던 차에 딜러이기도 했던 이반의 등장은 모르긴 몰라도 알렉세이에게 퍽 반가운 일이었으리라.  

 

알렉세이는 큰 경계 없이 이반에게 마약을 제조하는 시설 따위를 데리고 다니며 내보이곤 판매책의 자리를 제안했다. 이반은 긴 고민 없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술에 취했던 약에 취했던 제정신이 아닌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좀 더 익숙한 일이라는 게 첫 번째 이유였고, 알렉세이가 자신을 상당히 신뢰하고 있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신뢰해주는 이를 곁에 두는 것은 비교적 안전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믿음이 상호 간에 작용하는 것인가 하면, 물론 그렇지는 않았다. 이반은 알렉세이를 믿지 않는다. 타인과 두고 비교했을 때 알렉세이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것은 단지 믿음에 대한 방증이 될 수도 있다 뿐 근거는 아니었다. 

 

 "사장 놀려먹지 말고 나가서 일이나 해." 

"사실은 즐기는 거 다 알고 있어."  

"내가 변태냐?"  

"아니었어?"  

 

이반은 제 뒤통수에 대고 모국의 언어로 싹수 노란 놈이 어쩌고저쩌고 떠들어대는 것을 깔끔히 무시하며 사장실을 나섰다. 알렉세이와 떠드는 사이 오픈한 펍 안으로 눈에 익은 얼굴 몇몇이 기다렸다는 듯 들어오고 있었다. 영업을 하는 가게라면 으레 존재하는 단골 카테고리에 들어갈 이들이었다. 그들은 가게 밖 네온사인에 불이 켜지면 하나 둘 들어와, 맥주 한 잔을 시켜놓고 밤새 텔레비전을 쳐다보다 폐점 시간인 새벽 다섯 시가 가까워지면 그제야 털레털레 자리를 뜨곤 했다. 영업시간 내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못마땅히 여기는 직원도 있긴 했으나 그들은 딱히 소란을 일으키지도 않았거니와 사장인 알렉세이가 별다른 언급을 않았으므로 반쯤은 가게의 장식품 같은 취급을 받고 있었다. 

 

 펍의 위치는 번화가와는 거리가 멀었다. 할렘가와 가까운 데다 골목 안쪽에 있으니 펍을 찾는 손님들의 부류도 대부분 거기서 거기였고, 가끔 눈에 띄는 사람들이 손님으로 와 앉아있다 가는 정도가 다였다. 바 안쪽에서 적당히 복작대는 가게 안을 둘러보던 이반의 시선이 텔레비전으로 향했다. 하루 전 발생했던 뉴욕대학교 테러 사건에 대한 후속 정보가 뉴스로 방송되는 중이었다. 화제가 일어난 장면, 하늘로 솟는 연기, 대피하는 사람들이 차례로 화면에 짧게 비쳤다 사라진다. 누군가 쯧쯧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대학교에 테러라니 애먼 젊은 것들만 고생하는 구만. 거 소문으로는 이번에 공개되는 성유물도 훔치려고 한다던데. 그뿐인가? 브루클린 교에다 불을 지르겠다는 미친놈도 있다는데… 정말 말세야 말세.

   

아무래도 사람은 늙으면 목소리를 줄이는 법을 까먹는 것 같다. 텔레비전에 향해 있던 이반의 시선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노인 둘에게 향했을 때였다. 테이블이 둔탁하게 덜컹이는 소리와 바닥에 떨어져 박살 나는 유리잔의 파열음이 가게 안을 순식간에 정적 속으로 잡아던졌다. 가게 안 모든 시선이 약속이라도 한 듯 소음의 근원지로 향했다. 삼십 대로 보이는 커플이 하나, 가게의 장식품 취급을 받던 단골이 하나. 장식품이 커플 중 남자의 멱살을 쥐고 있었다. 상황을 대충 파악한 직원들의 시선이 우르르 제게로 와닿는 것―마치 그들은 한 무리의 미어캣 같았다―을 느낀 이반이 속으로 웃음을 참으며 세 사람에게로 다가가 단골이 움켜쥔 멱살을 손쉽게 풀어냈다. 별 힘도 없는 손으로 멱살을 틀어쥐고 뭘 어쩌겠다는 건지.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되죠. 자, 손 놓으시고. 무슨 일인데 그러세요?" 

"저 여자가 발을 걸어서 넘어질 뻔 했다고!" 

"발을 건 게 아니라 지나가면서 그쪽이 걸린 거잖아요! 사과도 했는데 멱살을 잡는 건 무슨 경우에요?" 

"그게 무슨 사과야! 올려다보면서 비웃는 거 다 봤어! 젊은 연놈들이…"

"뭐라고? 이봐요, 말 조심 안 해요?"  

  

술에 취하면 일어날 수 있는 그냥 그렇고 그런 시시한 상황이었다. 좀 신선한 싸움이 일어날 수는 없을까. 이반은 무료한 눈빛을 감추며 발끈한 남자가 가슴팍을 내밀어 앞으로 나서는 것을 한 손으로 막고, 달려들 테면 달려들어 보란 얼굴로 씩씩대는 단골의 몸을 가벼이 뒤로 밀어냈다. 사이에 끼어들어 거리를 벌린 다음 두 사람에게 번갈아 시선을 주었다. 싸우는 건 말리지 않겠다만, 싸움판이 가게 안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뒷정리가 세 배는 귀찮아지기 때문이었다. 

  

 "좀 많이 취하신 것 같은데, 사과도 했고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라고 하니까 한 번쯤 그러려니 넘어가세요. 가게 안에서 싸움은 안 돼요." 

"뭐? 술은 나만 마셨어? 왜 나한테만 지랄이야!?" 

"…손님. 많이 취하셨다고요. 이만 댁으로 돌아가시는 게 좋겠네요."  

   

평소엔 맥주 한두 잔으로 밤을 새우던 사람이 오늘은 어쩐 일로 술을 잔뜩 들이켠 건지. 옆에 서 있기만 해도 술 냄새가 진동하는데 그런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다니 양심도 없다 싶었다. 돌아가는 게 좋겠다는 말에 힘을 싣는 이반의 눈매에 금세 싸늘함이 맺혔다. 취객이나 진상을 상대로 사람 좋은 척 말리는 가식의 유지 시간은 짧았다. 같은 말을 반복하는 데에는 취미가 없다. 얌전히 나가지 않고 버틴다면 밖으로 친히 모셔다 줄밖에. 

 

 "됐어요. 우리가 나갈 거예요. 술도 마음대로 못 마시겠네." 

"다시 말하는데, 우린 비웃지도 않았고 고의로 그런 것도 아니에요. 아시겠어요?"

  

술에 취한 단골―이제는 진상 딱지를 붙여도 좋을―에게 떠날 것을 재차 요구하려는데 문제의 커플이 먼저 떠나겠다며 핸드백이며 겉옷을 챙긴다. 이반으로서는 상황이 종료될 수만 있다면 누가 먼저 떠나든 좋았다. 단골이 무어라 반박하려 입을 열기도 전에 커플은 테이블에 돈을 올려두고 가게 밖으로 사라졌다. 떠나는 뒷모습의 분위기로 미뤄 보건대 그들이 다시 이 펍에 걸음하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커플이 떠나자 단골은 화장실을 갈 테니 비키라며 이반에게 빽 성질을 부렸고, 이반은 뒤통수를 갈겨버리고 싶은 소소한 충동을 누르며 갈 길 가보라는 듯 길을 열어주었다. 고생했다는 눈으로 쳐다봐오는 직원들에게 별일 아니었다는 의미로 어깨를 으쓱인 이반은 커플이 떠난 테이블 위의 것들을 정리해 들고 바 안쪽으로 돌아갔다. 깨진 술잔은 다른 누군가 빗자루를 들고 나와 쓸어 담겠지. 

 

 "평소에 시키지도 않던 술을 잔뜩 시킨다 싶더니 사고를 치네." 

"오늘 많이 마셨어요 저 사람?"

"평소처럼 맥주 한 잔만 시켰다가 금방 럼이며 위스키를 스트레이트로 내리 열 잔은 족히 마셨을걸." 

  

이반은 작게 휘파람을 불어 조금은 놀랐다는 티를 냈다. 안 좋은 일이 있다고 술을 잔뜩 마실 수 있는 형편은 아닌 듯 보였는데. 어디서 횡재라도 했나. 대수롭지 않게 대충 넘겨 짚으며 잔은 자신이 씻겠다는 헨리에게 가져온 잔을 건네는 사이 등 뒤에서 문이 거칠게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저 인간이 끝까지…. 못마땅한 어투로 중얼거리는 헨리의 말에 방금 가게를 떠난 것이 조금 전의 그 단골임을 알았다. 문에 달아둔 종은 쉽게 잠잠해지지 않고 날카로운 소리를 뱉어댄다. 그 소음이 불길한 까마귀의 울음처럼 이반의 신경을 잡아끌었다. 귀로는 서서히 작아지는 종소리를 듣고, 눈으로는 문제의 단골이 앉았던 자리를 빤히 쳐다보던 이반이 불현듯 문가로 향했다.

 

 "헨리, 나 잠깐 나갔다 와요."

"뭐? 어, 뭐, 그래." 

 

펍이 자리한 골목에서 갈라지는 길은 많지 않았다. 가게를 나서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골목을 나가는 방향으로 걷던 이반의 시선 끝에 핸드백이 걸렸다. 바닥에 널브러진 핸드백은 아까 가게 안에서 본 물건과 똑같이 생긴 것이었다. 똑같이 생겼지만 주인이 다른 백이 떨어져 있을 우연의 일치보다는 같은 핸드백일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을 것이다. 이반은 핸드백이 떨어져 있는 곳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길이 이어진 다른 골목 안에서 무언가 지익, 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에 반응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어둠 속으로 끌려들어 가는 발끝을 보았고, 그와 동시에 이반의 모습이 주변과 동화되듯 서서히 사라졌다. 

 


몇 차례 능력을 써먹어 봤으니 익숙해질 법도 한데,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의 감각은 여전히 어딘가 이질적이고 기이했다. 이반은 마치 제가 공기 중에 반쯤 녹아 사라진 것처럼 몸이 가벼워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당연히 실제로 몸의 무게가 가벼워진 것은 아니었다. 제게는 뻔히 내려다보이는 손을 이리저리 뒤집어 본 이반이 발을 뗀다. 골목 안으로 걸어들어가는 발걸음에는 사뿐한 조심스러움이 없었다. 그간 능력을 사용해보며 깨달은 것은 자신의 능력이 모습만 감춰지는 것이 아니라, 걸음 소리까지 가려진다는 점이었다. 고함을 쳐 본 적은 없지만 (코앞에서 저를 쫓던 형사가 지나가는데 고함을 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다) 평소의 목소리 정도는 감출 수 있을 것 같다는, 직감에 가까운 생각이 들었다. 그야말로 마약 딜러가 갖고 있기에 적절한 능력이 아닌가. 경찰을 엿먹일 수 있는 도주에 참으로 용이하다는 게 이반은 제법 마음에 들었다. 

  

몇 걸음 걸어들어 와 보니 골목이라기보다는 건물과 건물 사이의 틈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았다. 쓰레기통과 그 옆에 버려진 뚱뚱한 쓰레기 봉지들이 썩어가는 시큼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살짝 콧등에 주름을 잡나 싶던 이반이 조금 전 보았던 발끝의 주인을 발견하고 멈춰 섰다. 머리채를 잡혀 아직도 질질 끌려들어 가는 여자는 역시 가게를 먼저 떠났던 커플 중 하나였다. 머리를 맞은 듯 얼굴선을 따라 흐르는 피의 양이 많았다. 너무 늦었나. 조금 더 빨리 따라나설 것을. 여자의 머리채를 틀어쥐고 있는 것은 당연스럽게도 가게를 뒤늦게 빠져나간 단골이다. 어쩌면 이렇게까지 시시할 수가.

이반은 제 눈으로 보고 있는 상황이 너무나 진부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픽, 바람 새는 소리를 내뱉었다. 삼류 드라마도 아니고, 가게에서 그 소란을 겪고 뛰쳐나온 저 단골이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정말 이것뿐이었나? 이반은 여자와 단골을 지나쳐 골목의 안쪽으로 좀 더 걸어들어갔다. 겨울이면 꼬맹이들이 환장하는 산타클로스의 배처럼 거대한 쓰레기 봉지에 남자가 기댄 모습으로 앉혀져 있었다. 남자는 이미 숨이 끊어진 듯 보였다. 여자의 눈 역시 초점을 거의 잃고 있었으니 살릴 수 없을 게 뻔했다. 여자를 질질 끌고 들어와 마침내 남자의 옆에 툭 내려놓은 단골이 제 손을 바지에 슥슥 문질러 닦는다. 아무리 가벼워도 축 늘어진 사람을 옮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를 증명하듯 단골은 숨을 얕게 헐떡이며 잠시 두 사람을 내려다본다. 그리고는 남자의 품을 뒤져 지갑을 꺼내들고는 허둥지둥 달아나는 게 아닌가. 발소리가 멀어져 가자 이반은 스르륵 능력을 풀었다. 

   

[하다못해 삼 분이라도 일찍 나와보지 그랬습니까.]

"재수 없게 뒤에서 나타나는 건 안 하면 안 되겠어요?"

   

능력을 사용한 데에 대한 부작용으로 귓구멍 가득 물이 들어찬 것마냥 소리가 멀어진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머릿속으로 직접 대화를 걸어오는 듯한 목소리―라고 봐도 좋을지 모르겠으나―에 이반이 빈정거림이 묻은 얼굴을 하고 돌아섰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영적인 존재, 어쨌든 이반에게 능력을 떠안긴 장본인이 반대편 건물의 벽에 기대 서 있었다. 이반은 영적 존재와 시선을 마주하며 귀에 들어가지도 않은 물을 빼듯 고개를 기울여 귀를 툭툭 두드렸다. 

  

"삼 분이라도 일찍 나왔으면 재미있는 구경이라도 했을 텐데 안타깝네요, 퍽이나." 

[…당신도 귀가 있으니 요즘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해서 듣고 있겠죠. 이유 없이 일어나는 일들이 아닙니다. 당신에게 힘을 빌려준 것 또한 이유 없는 일이 아니죠.] 

"물론 그러시겠죠. 업이니 안배니 거창하게 떠들었으니까요."

[관여하세요. 방관이라는 선택지도 있겠지만 나는 당신이 좀 더 적극적이면 좋겠군요. 오늘 당신이 한 일은 내 기준에 아주 아쉬웠습니다만…존재만으로도 조금의 몫은 하고 있는 셈 치도록 하죠.]

"그렇게 위에서 내려다보고 평가하듯 구는 거 집어치우면 생각해 볼게요. 그럼 귀가 잘 안 들려서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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