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kmn] 글

Afterglow

underneath by 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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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된 일인지 별로 사람들이 찾지 않는 말리에 정원에 언덕이 하나 생겼다.

어찌된 일인지 한번은 우르르 몰려왔다가 파도처럼 빠져나가고 다시는 그곳을 찾지 않았다.

어찌된 일인지 그 작은 언덕은 평화로움을 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어쨌든 그것을 무덤이라 불렀다.

구즈마는 불꺼진 포 파출소 앞에 한참동안 비를 맞으며 삐딱하게 서있었다. 아무리 풀과 나무를 보아도 여기는 비오는 풍경뿐이라 전혀 아름다울 것이 없다. 애초에 꽃같은 것에 관심없는 성격인 것도 그렇지만, 그 사람은 이런 곳에서 어떤 매력을 느꼈을까.

망가진 문을 밀고 파출소 안으로 들어가면 먼지냄새와 비냄새가 섞여 퀴퀴하고 썩은 내가 났다. 머리칼과 옷에서 빗방울이 뚝뚝 떨어져 바닥에 흔적을 만들어간다. 잠시동안 죽은 곳이 주는 어떤 고요함에 집중한 뒤 그곳을 떠난다. 말리에 정원 한 쪽에 외로이 있는 무덤을 찾아간다.

저번에 왔을 때 병에 꽂아둔 꽃이 거의 다 죽어있다. 죽은 꽃을 들어 아무데나 휙 던지며 그 사람과 같은 처지라고 생각한다. 다음에 올 때 새로운 꽃을 들고오겠다 결심한 구즈마는 어느새 돋아난 잡초들을 제거한다. 없애도 없애도 계속 무덤에 생기는 잡초가 꼭 마음 속에 자리한 자신의 미련같이 느껴지자 약간은 웃음이 나온다.

비에 젖었던 옷에 흙과 잡초가 묻자 툭툭 털어낸다. 미련을 털어내는 거라 생각하고, 어차피 잡초가 또 돋아날 것을 떠올리자 결국 또 미련을 버리지 못함을 깨닫는다. 나누는 이미 떠난 지 오래인데 혼자서만 그 자리에 서서 앞으로 나아가질 못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한발짝이라도 멀어지면 돌아올 수 없을 것 같다.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는, 밝힐 수 없는 마음.

"버팀목이 될 사람을 찾는 건 어때? 라고 하기엔 이미 나이도 나이니까..."

예순을 훌쩍 넘었지만 실제 나이보다 더 젊어보이는 쿠쿠이 박사가 말을 끝맺지 못한다. 당연히 구즈마도 어리광피울 나이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정신적인 멘토를 잃음과 동시에 나아갈 길도 잃어버려 방황하는 상태에서 어떻게 해야할지.

"나누님이 지금의 널 보시면 얼마나 웃으시겠어."

쾌활한 성격답게 농담조로 위로해보아도 구즈마의 우울한 무표정이 풀리지 않는다. 나누가 노화와 지병으로 세상을 떴을 때 누구보다 곁에서 그를 위로하고 슬픔을 함께한 박사는 한가지 떠오르는 게 있었다.

"너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찾아. 그리고 나누님이 하셨던 것처럼, 너도 누군가의 버팀목이 되는 거야."

에테르 하우스를 찾은 에테르의 간부들이 다녀간 뒤 청소를 하던 아세로라는 문 열리는 소리에 깜짝 놀란다.

"구즈마님..."

"우리 사이에 무슨. 예전처럼 편하게 불러."

문을 닫고 들어오는 구즈마는 마지막에 봤을 때보다 살이 더 빠진 건지, 까만 머리칼마저 창백해보였다. 오랫동안 교류가 끊겼던 탓에 둘 사이가 멀어진 것은 어쩔 수 없다. 아세로라는 동작을 멈추고 어쩐 일로 찾아왔는지를 물으며, 구즈마와 함께 접대용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의자에 앉는다. 아세로라가 차를 권유하자 거절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꺼낸다.

"아세로라, 너도 섬의 여왕이니 잘 알거야. 네가 어릴 때부터 돌봐준 아이들... 그 아이들이 널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리고 지금은 섬 사람들이 널 어떻게 생각하는지."

"네?"

"너는 그때 그 아이들에게 있어서 살아갈 힘이었지 않았을까."

잠시 생각에 잠긴 아세로라는 고개를 끄덕인다.

"저도 어렸지만, 저보다 더 어렸던 그 아이들은 제가 돌봤으니까요."

가라앉아 떠오를 생각 않는 슬픔을 헤아린 그녀는 나누의 이름이 나오지 않도록 조심한다.

"지금 섬 사람들도 마찬가지겠지."

아세로라는 구즈마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어 일단 수긍한다.

"아세로라. 그... 이런 나라도 누군가에게 살아갈 힘을 줄 수 있을까?"

잠시 둘은 말을 하지 않는다. 아세로라는 자신과 구즈마 사이에 놓인 테이블을 내려다보며 생각을 정리한다.

"구즈마님은 이미 충분해요. 스컬단의 단원들을 떠올려보세요."

굉장히 오랜만에 듣는 이름에 구즈마의 눈이 조금 커진다. 그는 지나오며 잊었던 얼굴들을 떠올린다. 조직을 해산시켰음에도 뒤따라오던 단원들, 그들은 끝내 제 갈길을 찾아 모두 떠나버렸지만 그때는 구즈마가 스컬단의 중심이자 버팀목이었다. 아세로라의 말에 구즈마가 살짝 미소짓는다.

"내가 스컬단을 해산한다고 했을 때, 지금같은 마음이었을까."

믿고 의지하던 사람이 사라진다는 마음. 또다시 둘은 아무말도 않는다. 하지만 서로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이미 이해하고 있다. 그제서야 구즈마의 의도를 파악한 아세로라는 앞으로 에테르 하우스에 올 아이들을 같이 돌봐주기를 부탁한다. 당연히 구즈마는 그러겠다고 승낙한다.

구즈마는 생각한다. 나누에게도 의지했던 사람이 있었고 잃어버렸을 거라고. 그리고 어쩌다가 그 사람을 잃었는진 알 수 없지만, 분명 그 후에 생긴 버팀목은 구즈마 자기자신이었을 것이라고.

2018.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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