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kmn] 글

000 x 836 = 0

underneath by 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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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랑히 비가 세차게 내리던 날, 핸섬은 쫄딱 젖은 채 걸어간다. 목적지에 도착한 후엔 흙이 묻은 구둣발을 바닥에 탁탁 털고 들어가기 전 경비에게 경찰수첩을 보여준 뒤 안으로 들어간다.

본부 건물로 들어온 그는 머리칼과 옷의 물기를 대충 털어낸 뒤 먼저 수사과 사무실 쪽으로 터벅터벅 걷는다. 계단을 오르고, 수사과 앞에 선 핸섬은 작은 한숨을 쉰 뒤 태연하게 문을 연다. 역시나, 그가 있다. 그는 무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컴퓨터 화면을 보다가 들어온 핸섬을 보고는 인상을 찡그린다. 동기이지만 결코 친하지 않은 둘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지만, 핸섬이 먼저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아무 소득 없었어."

빗방울이 창문을 때리는 소리만 들리는 고요한 실내에서 코웃음치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틀림없이 비웃을 거라 생각하고 각오했지만 정말 비웃으니 면목이 없다.

"잉어킹도 팔딱거리기만 하다가 갸라도스가 되는데, 넌 발전이라곤 없네."

상대의 말에 발끈하지만 핸섬은 화를 억누른다. 넘버 000은 숫자코드에 걸맞게 능력과 실력 모두를 갖춘 요원이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서기까지 얼마나 많은 이들을 짓누르고 제쳐왔을지, 저 성격으론 불보듯 뻔했다.

"과장님은 어디 계시지?"

핸섬이 넘버 000을 노려보며 물었다. 샤워실로 가기 전에 보고가 먼저였기에 수사과로 온 것이었다. 재수없게도 넘버 000 혼자만 있지만.

"과장님은 외근 나가셨어."

그의 대답에 핸섬을 바로 등을 돌리고 샤워실로 향한다.

넘버 000-나누는 인터폴의 총애를 받는 요원이었다. 처음엔 다른 숫자코드로 시작했던 그였으나, 훌륭한 실력에 최고의 엘리트에게만 주어지는 '000'이라는 숫자코드를 부여받았다. 동기인 핸섬은 그런 그를 동경하며 노력했다. 하지만 잔정많고 단호하지 못한 성격의 그는 현장에서 우물쭈물거리다가 실수하기 일쑤였다.

나누와 함께 업무를 하며 알게 되었는데, 나누는 굉장히 성격이 까칠했다. 게다가 남을 깔보고 비웃고 비아냥대기까지 했다. 핸섬은 점점 그런 나누에게서 혐오감만이 자라났다. 나누 역시 미덥지 못한 핸섬과 같은 팀인 것이 불만임을 티내고 다녔다. 수사과의 가디와 나옹. 그것이 핸섬과 나누의 관계였다.

샤워실에서 샤워를 마친 뒤 옷까지 세탁하고, 개인 락커에 두고다니는 여분의 제복으로 갈아입은 핸섬은 다시 수사과 사무실로 돌아간다. 외근나갔던 과장님이 돌아와있었기에 별 소득 없었던 수사임무 보고를 올린다. 과장이 혀를 찬다. 등 뒤에서 나누가 비웃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손이 떨려왔다. 과장은 다시 급한 호출이 들어와서 사무실을 나간다. 또다시 나누와 핸섬 둘만 남게 되었다. 핸섬이 자리에 앉자마자 뒷자리에 앉는 나누의 목소리가 파티션 너머로 들려온다.

"836 너, 교통순경이나 하는 게 어때? 아니, 안 되겠네. 봐달라고 하면 다 봐줄 것 같아서."

핸섬은 업무에 집중하려고 애썼다. 형사과에서 요청한 건에 대해 수사했지만 소득없이 돌아온 것에 대해 작성하는 데에 신경을 기울인다. 보고서에 과장님의 결재 서명을 받고 형사과에 전달 후, 요청한 건을 수사하려면 인력이 더 충당되어야 함을 설명하자. 그러나 나누의 말이 자꾸만 그를 건드린다.

"메타몽을 너로 변신시키고 일 시켜도 너보단 잘하지 않을까."

더이상 참을 수 없어진 핸섬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뒷자리의 나누에게로 다가갔다. 업무 중이던 나누가 그를 올려다보며 귀찮다는 표정을 짓는다. 핸섬은 나누의 멱살을 잡고 억지로 일으킨다. 여태까지 참아만 왔던 핸섬의 행동에 놀란 나누는 살짝 눈을 크게 떠보인다.

"왜, 사실만 말하니까 화났어?"

"함부로 입 놀리지 마."

멱살잡은 핸섬의 왼손에 힘이 더 들어간다. 그러자 나누가 갑자기 정색하며 말한다.

"야 836. 넌 인터폴의 수치야."

여전한, 그러나 크나큰 도발에 결국 핸섬이 주먹을 치켜들고, 차마 얼굴은 때릴 수 없어서 그의 가슴팍을 세게 친다. 한대 맞은 나누가 컥, 하고 신음하더니 이내 똑같이 주먹으로 핸섬의 배를 때린다. 핸섬보다 키와 덩치가 작아도 힘이 꽤 있었다. 언제 돌아온 건지, 뭐하는 거냐는 과장님의 불호령이 사무실에 떨어진다. 둘은 당장 자세를 바로 잡고 고개숙인다.

"나누! 또 이상한 소리나 했겠지. 제발 성질 좀 죽이라고 몇번 말했어!"

나누가 분에 못 이겨 코로 숨을 크게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핸섬, 감정에 휘둘리면 아무것도 못해!"

과장의 꾸지람을 들은 핸섬은 자신의 행동을 후회한다.

"서로서로 보고 배우라고 같은 팀에 넣어놨더니..."

자리로 돌아가서 앉는 과장이 혀를 찬다. 나누는 제자리에 앉고 핸섬도 제자리로 돌아가서 업무를 계속 한다.

저 녀석의 뭘 보고 배우라는 거지? 둘은 속으로만 생각한다.

2018. 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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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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