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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der Control

underneath by 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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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der Control

지배되는

요즘들어 재미난 일이 생겼다. 생겼다기보단 알았다는 것도 좋은 표현일 것이다. 소속을 잃은 인간은 다시 속하고 싶은 곳을 찾으러 방황한다. 내 경우엔 내가 그 속하고 싶은 곳이다. 누군가를 품는 곳.

"수행하고 왔어. 힘들어…."

업무를 보다가 배고프다고 칭얼대는 녀석을 한번 쳐다본다. 내 옆에 털썩 앉으며 허리며 다리가 아프다고 야단이다. 나는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포켓콩을 하나 내민다. 무슨 장난이냐며 화를 내길래 실실 웃었다.

"재미없거든!"

"냉장고에 먹을 것 좀 있으니 먹고 빨래 좀 해줘."

나는 다시 업무로 돌아가며 명령했다. 예전과 달리 이젠 투덜대지도 않고 척척 일을 해낸다. 공짜로 재워주고 먹여주는 것이 보통 은혜가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갈 곳이 있어도 갈 수 없는, 가지 않는 구즈마에겐. 구즈마는 집이 있어서 좋고 나는 부려먹을 사람이 있어서 좋다. 청소, 빨래, 나옹들 뒤치다꺼리, 무거운 거 들기, 섬 주민들 도와주기 등등. 사람들은 얌전한 구즈마를 보고 놀라다가, 그 뒤에 서있는 나를 보고 납득한다. 지위를 이용하는 건 아니다. 우리는 협력관계다. 반쯤은 그렇다.

"오지 마, 오지 말라니까!"

무슨 일인지 궁금해 고개를 돌려보면 나옹들이 구즈마의 손에 들린 음식을 탐내는 것이 보였다. 구즈마는 포크를 휘두르며 쉬쉬, 하는 소리를 내고 있다. 나옹들이 꼬리를 흔들며 공격 타이밍을 재는 것 같길래 나는 나옹들을 불렀다. 한마리는 무릎 위에, 한마리는 왼쪽에, 한마리는 발치에 각자 좋아하는 위치에 모였다.

"이제야 살 것 같네."

구즈마가 콧노래를 흥얼거린다.

"나옹들이 너를 자기들보다 아래로 보는 것 같네."

"내가 만만하다고? 애초에 아저씨가 너무 봐줘서 그런 거야. 걔넨 원래 자존심빼면 시체잖아. 아님 내가 사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겠지. 갑주무사를 꺼내면 벌벌 떨면서 구석으로 숨을걸."

"한 번 보여줘봐."

서류를 읽으며 한마디 툭 던진다. 그런데 구즈마가 말이 없다. 내 말이 진심인지 농담인지 헤아리는 모양이다. 이럴 때마다 우스워 죽겠다. 말 하나하나에 의미를 담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녀석이 귀여우면서도 가소로웠다.

"파출소 좁아터져서 안 돼."

그 말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구즈마는 당황한다.

"뭐야 왜 웃어."

"맞는 말이라서."

정리 끝난 서류를 철해놓으며 웃어보였다. 구즈마는 앞니로 포크를 깨문다.

"아저씨."

"응."

"여기 언제까지 있어야 돼?"

먹을 거 더 없냐는 질문일 줄 알았는데 생각도 못한 질문을 듣고 동작이 멈춰진다. 파출소에서 구즈마와 사는 것이 영원할 리가 없다. 내가 늙어 죽는 것보다 아마 저 녀석이 먼저 이곳을 떠나지 않을까. 이런 단조로운 생활에 질릴 것이다. 아무런 발전도 없이 주어지는 것만 받아먹고 있을 성격이 아니기 때문이다.

"왜 그래, 무섭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정신 차린다. 말없이 생각에 잠긴 얼굴이 무서웠나보다.

"언제까지 있든 마음대로 해. 질리면 나가도 된다. 대신 돌아올 곳은 여기뿐인 거 기억해."

그냥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말해봤다. 나는 구즈마가 자기 마음 내키는대로 행동하길 바랐다. 아직 앞날이 밝은 젊은이가 이런 늙은이에게 발목이나 잡혀 사는 건 억울하기 때문이다. 많은 일을 겪고 자존감과 자신감 둘 다 잃어버린 청년이 다시 속하고 싶은 곳을 찾아떠나길 바랐다.

그렇게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성장하는 걸 지켜보면 얼마나 대견할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먼훗날 나중에 다시 돌아오는 건 결국 떠날 결심을 시작했던 이곳일 것이다.

그래, 그렇다. 나는 구즈마에게 있어서 속하고 싶은 곳이지만 구즈마 역시 내가 속하고 싶은 곳이다. 그곳이 누추한 곳일지라도 서로에게 의지하며 손길을 더듬는다. 그러자 서로 상처를 매만진다. 그러나 아프지 않다.

"내가 돌아올 곳이 여기뿐인 거 알잖아."

나는 원하던 대답을 듣고 기분좋아서 장난삼아 포켓콩을 던졌다. 빠른 몸놀림으로 그것을 받아내고 가까이 있던 나옹에게 먹여준다.

"떠났다가 언제든지 돌아와."

"아저씨 더 늙어있겠네."

"이미 죽어있을 수도 있어."

"그땐 내가 섬의 왕이야."

나누는 구즈마를 아들보듯이, 구즈마는 나누를 아버지보듯이 정을 가지지 않을까

2018. 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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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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