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y & Silly
Sly & Silly
교활한 & 어리석은
난 착한 사람이지만 좋은 사람은 아니다. 착함은 나쁜짓을 하기 좋은 구실일 뿐이다. 앞에서 웃기만 해도 뒤에서 뭘하는지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기 때문이다. 위장, 속임수, 배신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내가 누누이 말했지."
몬스터볼을 모두 빼앗긴 가엾은 청년에게 말했다.
"아저씨는 착한 사람이지만 좋은 사람은 아니라고."
90킬로가 넘는 악비아르의 무게에 짓눌린 청년이 고통에 신음한다. 이런 짓을 시키는데도 내게 도움을 요청하는 건지 손을 뻗길래, 그 손가락을 슬리퍼 앞부분으로 꾸욱 누른다.
"왜 말을 안 들어서…."
쭈그리고 앉자 청년의 손가락이 내 몸무게에 짓눌린다. 청년은 또다른 고통에 인상을 찌푸린다. 왼손으로 머리채를 잡고 억지로 고개를 들게 한다.
"아저씨 악타입이거든."
악비아르에 깔린 몸, 나에게 눌리고 있는 손가락, 세게 잡힌 머리칼, 억지로 들어올려져 빳빳한 목. 청년은 눈을 꼬옥 감아버린다. 나는 머리를 놓아주고 일어선다.
"그러니까 아저씨 말 좀 들어라. 악비아르, 놔줘."
내 말에 악비아르가 천천히 청년의 몸에서 비켜선다. 갖고 있던 청년의 몬스터볼들을 그의 코 앞에 살짝 내려둔다. 청년은 엎드린 채 나를 바라보고 있다.
"좋은 사람 아니니까 더 이상 다가오지 마."
뒤도 안 돌아보고 걸어 나갔다.
초대 챔피언의 탄생 이후 구즈마는, 섬순례를 모두 달성하고 자신이 도움받은 알로라의 구세주가 어린아이였다는 것에 수치심을 느끼고 무언가를 깨달은 건지 스컬단을 해체시켜 버렸다. 본디 스컬단은 그 옛날 섬의 왕을 중심으로 한 집단이었다가 망한 집단이라 다시 일으켜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안 모양이다. 나는 가장 귀찮은 일이 해결되어 좋았다. 더 이상 스컬단을 감시하지 않아도 되었고 사고친 것도 수습할 필요가 없었으니 말이다.
스컬단 조무래기들은 섬을 떠나거나 일자리를 얻어 새로운 시작을 맞이했다. 구즈마는 그러지 못했다. 멜레멜레섬에 본가가 있었지만 굳이 찾아가지 않았다. 그나마 그를 걱정해주는 할머니를 위해 가끔은 얼굴이나 보이러 가는 듯했다.
혼자가 된 구즈마는 나에게 기대어왔다. 있는듯 없는듯 굴며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없어서, 구즈마에게 그런 나는 애증의 상대였던 셈이다. 가정폭력과 애정결핍이 낳은 자기학대, 폭력성으로 표독스러웠던 구즈마는 눈길도 주지 않는 나의 관심을 원했다. 그 누구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행적을 지켜보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
나는 구즈마에게 별 흥미가 없었다. 사람들과 포켓몬을 괴롭히고 섬순례 도전자들을 방해하고 알로라를 위험에 처하게 할 뻔한 일 등등 전과가 많은 주요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저 충동적인고 철없는 어리숙한 청년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챔피언 탄생 후 구즈마가 변한 걸 보고 약간은 재밌다고 생각했다. 어린 사고방식에 갇혀있던 구즈마가 드디어 성장한 것이다. 나는 구즈마에게 먹잇감을 던져봤다. 수행을 하고 있으면 잘 되어가냐며 배틀도 한 판 붙고 나무열매나 포켓콩도 좀 나눠주었다. 난폭했던 구즈마는 어딜 갔는지 거기엔 순해빠진 청년이 있었다.
먹이를 덥썩 문 것을 확인했다. 더 이상 들러붙으면 귀찮아져서 다시 예전처럼 대했다. 별 신경쓰지 않고 인사만 해주고 업무에 열중하는 척을 하자 예상대로 먼저 다가오지 못했다. 사랑받는 게 익숙하지 않으니 주는 것 또한 익숙하지 않을 터. 난 착한 사람이지만 좋은 사람은 아니다. 착함은 나쁜짓을 하기 좋은 구실일 뿐이다. 있는 정 없는 정 다 긁어모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구즈마를 굴리는 건 재밌었지만 약간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났다. 친분을 애정으로 착각하고 내가 좋다고 한 것이다. 나는 일이 더 커지기 전에 구즈마에게 경고하기로 했다. 악비아르를 꺼내 구즈마의 몸을 거칠게 쓰러뜨렸다. 그리고 주머니를 뒤져 몬스터볼을 모두 꺼냈다. 나에게 다가오지 말라는 식으로 경고했다. 어린애가 아니니 알아들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구즈마는 파출소로 나를 찾아왔다. 나는 파출소 입구에 기대서서 담배를 입에 물었다.
"여긴 미아보호소가 아니라고."
장난친 벌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것을 실감했다.
"아저씨가 좋은 사람 아닌 건 알지만 나쁜 사람이 아닌 것도 알아."
그거야 뭐, 일부러 그렇게 행동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느끼는 게 당연하다.
"난 이제 돌아갈 곳이 없어."
구즈마의 눈빛은 강렬했다. 나는 실실 웃었다. 별 흥미없던 구즈마의 성장이 재밌어서 밀고 당기는 식으로 장난쳐본 건데 제대로 걸려들 줄이야. 나는 재빠르게 구즈마의 금 목걸이를 꽉 쥐고 내쪽으로 세게 잡아당겼다.
"아저씨 악타입이거든."
내 말에 구즈마가 도발하듯 씨익 웃더니 악Z를 단 내 목걸이를 자기쪽으로 잡아당겨 이번엔 내가 구즈마 쪽으로 끌려갔다.
"난 벌레타입이거든."
그 말에 웃어버렸다.
2018. 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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