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포마을 파출소
오래된 관습이 있다면, 모두들 그것을 당연시하고 따를 것이다.
관습을 거스르는 자는 집단에서 떨어지고 만다.
관습을 파괴하는 자는 공포감을 조성한다.
어김없이 가랑비가 내리는 포마을의 우중충한 풍경을 바라보며 창가에서 커피를 마시던 나누는 멍하니 옛추억에 잠긴다.
비는 오지 않고 흐리기만 하던 날의 오후. 파출소 입구에 쭈그리고 앉아 나옹을 쓰다듬고 있던 그는 낯선이와 눈을 마주쳤다. 얼마 전부터 포마을에 멋대로 눌러앉은 어린 방랑자였다. 차림새가 남루해 보이던 소년은 나누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조금 당황한 얼굴로 눈치를 살폈다. 뭐지, 하고 생각하다가 장난기가 발동한 나누는 소년 쪽을 향해 손바닥을 내보인다.
"어이, 소년. 새로 이사왔으면 주민세를 내야지."
"네?"
그의 거짓말에 소년이 놀란 얼굴을 하곤 열심히 주머니를 뒤진다. 나누는 얼떨결에 소리내며 웃을 뻔 했다.
"장난이야 장난. 언제 비가 올지 모르니 우산은 필수다."
나누는 피식 웃고 계속해서 나옹을 어루만진다. 소년은 한방 먹었다는 얼굴로 다시 제 갈 길을 간다. 고작 어린애다. 나누는 어딘가 불안정하고 약해보이는 소년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할 뿐이었다.
고작 어린애라고 얕본 탓일까, 지금은 상황이 역전되었다. 소년은 아픔을 먹이로 삼고 성장해갔다. 동시에 먹은 아픔도 성장해갔다. 나누는 소년이 무언가를 갈구하는 걸 알고 있었다. 소년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했다. 그러나 인정받기란 간단한 게 아니었다. 그래서 소년은 다른 쪽으로 인정받기로 결정한 것이다.
"구즈마."
이미 눈꼬리 부분이 벌개진 구즈마가 고개를 들고 나누를 올려다본다. 17번 도로의 빗소리에 묻혀있지만 나누는 구즈마가 파출소 문앞에 앉아있음을 느꼈다. 그래서 그 아이가 좋아하는 에나코코아를 준비하기 위해 주전자에 물을 올리고나서 문을 연 것이다.
"어서 들어와."
나옹들의 시선을 받으며 구즈마가 파출소로 들어온다. 또 어디선가 배틀을 하고 져서, 분한 마음에 얼굴을 감싸고 눈꼬리 부분을 긁고 잡아당기고 꼬집었을 것이다. 자해하는 걸 말리고 싶어도 말릴 수가 없다. 구즈마는 낮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 이렇게 밤에만 찾아왔다. 가끔은 찾아오지 않을 때도 있었다. 꾀죄죄하고 핼쑥한 상태로 배틀만 하러 다니는 모양이었다. 나누는 구즈마에게 빗물을 닦으라고 수건을 건네주었다. 구즈마는 고개를 숙인 채 서서 조용히 몸의 물기를 닦는다.
구즈마가 포마을에 온 그날과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폐허가 되어있던 포마을, 대저택, 비, 카푸. 과거 일때문에 이젠 남에게 신경쓰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랬는데도 살아남으려고 악쓰며 홀로 아픔을 견디는 소년은 내버려둘 수 없었다. 나누는 오히려 과거 일이 다시 일어날까봐 두려웠다. 그럼에도 적극적으로 소년을 보호하려 하지 않았다. 구즈마는 그것을 거부했고 나누는 그것을 중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
따뜻한 에나코코아가 담긴 컵을 내밀자 살짝 받는다. 구즈마는 소파에 소리없이 앉고 그것을 마신다. 나누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지만 사실 궁금하긴 했다. 언제 가출했는지. 왜 배틀에 미쳐서 돌아다니는지. 누구와 행동을 하긴 하는지. 어디서 무얼 어떻게 하고 다니는지. 인생상담이라면 충분히 해줄 수 있는 부분인데.
"아저씨."
구즈마가 작게 나누를 불렀다. 구즈마 앞에 내내 서있던 나누는 대답하지 않는다.
"오늘만 여기서 자고 가도 되죠?"
"귀찮게만 안 하면."
나누는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시간이 지나고 스르르 잠이 든 구즈마의 몸에 모포를 덮어준다. 항상 저녁무렵에 찾아오긴 해도 자고 간 적은 없었다. 그만큼 한계였던 걸지도 모른다. 나누는 쭈그리고 앉아 잠에 빠진 구즈마의 얼굴을 바라본다. 이 작은 몸은 무엇을 짊어지고 살아갈까. 무엇에 기대고 무엇을 기대하는 걸까.
지금까지 나누가 봐 온 구즈마는 굉장한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최고가 아니면 쓰레기 취급하는 비난에 질려서 도망쳐 나왔을까? 그렇지만 최고가 되지 못해도 끊임없는 수행으로 단련하는 건 알로라 지방의 마음가짐이다. 모험을 좋아하고 느긋한 알로라 사람들은 좌절한다 해서 그리 쉽게 무릎꿇지 않는다. 설령 무릎을 꿇는다 해도 곧바로 일어선다. 구즈마는 무릎은 꿇었지만 일어설 방법을 모르는 아이인 것 같았다.
머리가 꽤 길었군, 하고 생각하며 머리칼을 쓸어넘기자 구즈마가 퍼뜩 눈을 떴다. 깜짝 놀란 나누는 재빨리 손을 뗀다. 피곤한 건지 눈에 핏발이 선 아이는 크게 눈을 뜬 상태로 허리를 일으킨다.
"깨워서 미안하다. 머리가 길어서…."
"얼굴에 뭐가 붙었든 머리에 나뭇잎이 붙었든 손대지 마세요."
나누를 향한 목소리는 작지만 또렷했다. 나누는 멈췄던 손으로 뒷머리를 긁어댔다. 구즈마는 무릎을 안고 거기에 고개를 푹 숙인다.
"아빠라고 부르기도 싫은 사람때문이에요."
그 말을 들은 나누는 왼쪽 눈썹을 올렸다. 더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기에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이제 좀 뭔가 알 것 같다.
그런 일이 있은 후에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나누는 업무를 보고 나옹들을 돌보며 노후를 보내고 있었다. 딱 하나, 구즈마가 또다시 오랫동안 사라진 것말곤.
어느날, 산책나갔던 나옹 한 마리가 심하게 다친 레트라를 데리고 파출소로 들어왔다. 자존심 세기로 유명한 리전폼의 나옹이 사냥이라도 한 건가, 하고 다가가 상태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레트라는 독에 중독된 상태였다. 나누는 황급히 레트라를 소파에 뉘이고 해독제를 찾기 위해 모든 서랍을 뒤졌다. 그 때, 인기척이 느껴져 파출소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후드를 뒤집어쓴 구즈마가 삐딱하게 서있었다. 옷의 물기를 손으로 툭툭 털며 파출소로 들어오는 모습은 영락없이 불량배였다.
파출소의 형광등 불빛을 받자 구즈마의 모습이 더 잘 보였다. 복실복실한 머리칼, 커다란 선글라스, 까만 복장, 금 목걸이, 껄렁껄렁한 태도, 팔의 타투. 나누는 입을 살짝 벌렸다. 잠시동안 사라졌던 소년이 그동안 몸도 마음도 성장시켜 돌아온 것이다. 안 좋은 방향인 것이 뻔해 할 말을 잊어버린다. 대충 물기를 털어낸 뒤 후드를 벗은 구즈마가 나누를 보며 씩 웃는다.
"못 본 사이 잘 지낸 것 같네."
나누도 살짝 웃어보인다.
"아아 뭐야. 그 레트라는 우리 앞길을 방해해서 두들겨 패준 거라구. 죽든 말든 내버려두지 그래."
나누가 알던 소년 구즈마는 이런 말과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구즈마의 말에 나누는 빠른 걸음으로 구즈마의 앞에 선다. 어느새 키가 이렇게 큰 건지, 눈높이가 비슷했다. 갑자기 나누는 발목이 간지러운 것을 느끼고 화들짝 놀란다. 구즈마에게서 한걸음 물러나 보면 페이검이 있었다. 나누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페이검은 멜레멜레섬의 1번 도로에서 출몰한다.
"오랜만에 집에 다녀왔거든."
나누의 생각을 읽은 건지 구즈마가 대답한다.
"아빠라고 부르기도 싫은 사람이 또 골프채를 들고 덤벼들길래, 완전히 박살내고 왔지."
긴장한 상황에서도 나누는 구즈마의 또다른 변화를 알아챘다. 눈꼬리 쪽의 흉터를 가리기 위해 보랏빛을 칠했다. 그 옛날, 어린시절 패배에 자신을 학대한 자국을 감췄다는 것은 분명한 의미를 안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이 페이검도 그 때 잡은 거고… 귀엽지 않아?"
나누는 구즈마와 페이검을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아저씨."
구즈마는 턱을 살짝 올리고 나누를 내려다본며 그를 불렀다. 문득 나누는 구즈마의 어깨 너머로 파출소 밖에 사람이 몇명 더 있는 것을 보았다. 어두워서 잘은 보이지 않았다.
"포마을은 우리가 접수했으니 그런줄 아쇼."
그렇게 말하고는 바로 몸을 돌려 파출소를 나간다. 구즈마와 일행들은 빗물 내리는 밤 속으로 사라져간다. 나누는 주먹을 꽉 쥐었다.
"큰 시련이군."
포 파출소에는 빗소리와 레트라의 고통스러워하는 숨소리가 뒤섞이고 있었다.
* 분하면 눈꼬리 부분을 잡아뜯는 버릇이 있어서 흉터 감추려고 아이섀도 칠하게 된 구즈마 라는 뇌피셜
2017. 1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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