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타냐와 나

자기 혐오와 파괴에 대한 축하

피타냐와 나

; 자기 혐오와 파괴에 대한 축하 세례


그래, 나는, 그저, 버스에 앉아 졸고 있었어,
기분만 내기 위해서 산 케이크를 안고서.
그래, 나와 달리, 열심히 사는 놈들 목소릴
묻으려 듣고 있던 노래의 볼륨을 높혔어.

나는 버스에 앉아 졸고 있다. 케이크를 안고 있다는 것으로 보아 집으로 돌아가는 중인 것 같다. 그리고 여기서 케이크는 기분만 내기 위해 샀을 뿐이다. 이로 보아 화자는 현실에 대해 상당히 피로감을 느끼고 있는 중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에 반해 화자는 버스 속에서 열심히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하면서도 동시에 무시하려 애를 쓴다. 그렇게 그들의 목소리를 묻으려 노래의 볼륨을 높였다. 누군가는 치열하게 살아가고 누군가는 그렇지 못해 마지 못해 살아간다. 버스는 이런 사람들을 태우고 이동한다는 점에서 삶의 공간이다. 그렇게 화자를 중심으로 한 배경 묘사에는 기묘한 대조가 보인다.

이 지점에서 케이크는 어떤 의미일까. 통상적으로 케이크는 맛있긴 하지만 비싼 물건으로 보통 축하하는 용도로 사용된다. 그리고 보통 그 대표적인 예는 생일이다. 하지만 기분만 내기 위해 산 케이크는 생일과 축하라는, 삶의 가치를 실현시키지 못한다. 그런 지점에서 케이크는 화자의 삶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노력도 능력도 체력도 부족한 정말 못써먹을 어른이야!
다만 이대로도 사랑받을 수 있길 원해…….
집안도 지병도 제명도 고를 수 없는 것을 삶이라 한다면,
차라리 이 손으로 모든 걸 엎어버리겠어!

이런 몰가치함은 화자의 독백에서도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노력도 능력도 체력도 부족한 삶은 어떻게 본다면 앞으로 나아갈 줄 모른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화자의 현실을 반영한다고 하면 어떨까. 그럼에도 사랑받고 싶어한다는 욕구는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욕구의 발로다. 사람은 그대로 사랑받는 존재라고 한다. 그러나 그 사랑에 대한 전제는 사회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 기반에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한 채 사랑받고자 하는 것은, 전제와 현실이 충돌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역설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화자가 이렇게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이유를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 걸까. 화자는 그 것을 사회 자체로 돌리고 있다. 집안도, 지병도, 제명도, 어떤 것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삶은 화자의 부적응이 스스로에 대한 선택이 아님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차라리 모든 걸 엎어버린다고 하는 것은, 스스로의 주체성을 회복하여 무언가를 시도하려는 노력이다.

그런데 이 무언가는 다음 맥락에서 섬뜩하게 발현된다.


나는 막대를 치켜들고 인형의 머리를 내려치겠어.
눈 앞엔 무수한 콘패티가 흩날려 내리네.

나는 안대를 벗어두고 인형의 최후를 지켜보겠어.
널브러진 사탕,
-이걸로 영영 이별이라니…….
-믿고 싶지 않아?

피타냐와 나라는 제목에 맞게 화자는 피타냐를 무참하게 망가뜨리고자 한다. 그 것은 아주 성공적으로 수행한 듯 보인다. 그렇기에 콘패티가 흩날리고 사탕이 널브러져 있다. 그런데 영영 이별이라고 한다.

믿고 싶지 않은 이별이라니, 무엇과의 이별을 말하는 걸까.


그래, 나는, 그저, 이상한 꿈을 꾸는 중이야,
피곤할 때면 자주 꿔 온 늘 같은 내용의 꿈,
그래, 나의 관을, 많은 사람이 둘러싸고선,
나의 장례식을 축하하는 노래를 부르는.

다음 맥락에서 화자는 자신의 장례식에 축하 노래를 부른다고 이야기한다. 우리나라의 정서에서 장례식은 애도이자 슬픔의 공간이다. 이런 공간에서 축하하는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일종의 조롱이나 비난을 내포하는 것같은, 역설적인 느낌을 강하게 부여한다. 그런데 이런 꿈을 피곤할 때면 자주 꿔왔다고 이야기한다. 꿈이라는 것은 주인공의 무의식의 발현이다. 그렇기에 이 장면은 사회에 대한 거부감, 그리고 무기력한 패배감을 앞선 버스라는 공간에 이어 확장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존엄도 존함도 조리도 될대로 되라 버려버린 어른이야.
다만 그대로도 사람으로서 뵈길 원해?
"기쁘고 아프고 슬프고 하는 것들엔 오래 전에 질렸다"니,
차라리 이 기회에 모두 들어엎어주겠어!

여기서는 될대로 되라 버려버린이란 표현에 주목해보자. 어른이 되고 나면 자신의 일은 모두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이런 책임을 모두 방기한 어른이 되었다면 그 것은 일종의 사회에 대한 부적응적 맥락을 짚어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대로도 사람으로서 보이길 원한다는 것은, 이미 스스로가 사람답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반어법과 다르지 않다. 그런 지점에서 화자는 스스로에 대한 자기혐오와 불신이 팽배해 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기쁘고 아프고 슬프고 하는 것들엔 질렸다는 것은 결국 감정을 숨기고자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감정에 대해 솔직하지 못하다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불신으로의 영향이 큰 탓일 터다. 그렇기 때문에 화자는 반전을 노린다. 모두 들어엎어버리겠다고.


나는 막대를 치켜들고 인형의 머리를 내려치겠어.
눈 앞엔 무수한 도자기 조각이 떨어지네.

나는 안대를 벗어두고 인형의 최후를 지켜보겠어.
조각난 초콜릿,
-이걸로 정녕 만족할 거야?

다시한번 화자는 피타냐를 부숴서 도자기 조각이 떨어지는 것을 바라본다. 초콜릿은 충격에 부서졌고, 이걸로 정녕 만족할 거냐는 독백이 이어진다.

왜?

-Requiem aeternam dona eis, Domine,

-et lux perpetua luceat eis.

-생일 축하 노래 소리가 계속 들려오는 걸.

-(한 번 더…….)

-(그 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이 곡에서 장르적 특징이 가장 강렬하게 발현되는 부분이다. 한 번 더, 돌아갈 수만 있다면 이라는 말은 이미 돌아간 적이 있다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이 루프적으로 작동한다고 전제할 때 다음의 문구와 앞선 위령미사곡과의 관계를 짐작해본다면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을것이다.

피타냐는 바로 자신이었고 그 것이 반복되어온 것은 루프 속에서 자신을 여러차례 살해했다고.


나는 막대를 치켜들고 글러먹은 나를 내려치겠어.
눈 앞에는 줄곧 도망쳐온 선택이 보이네.


나는 안대를 벗어두고 살아온 순간을 마주보겠어.
-이제 눈을 떠 봐, 어제의 네가 그토록 바란 오늘이 밝았어.

안대를 벗어두고 살아온 순간을 마주보겠다는 것은 외면해왔던 현실을 바라보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자기혐오 속에서 자기 파괴를 반복해오면서 마주한 것은 무엇일까. 줄곧 도망쳐온 선택들은 이미 산산히 부서져서 콘패티와 도자기 조각으로 분쇄됐다. 그렇게 루프 속에서 살해당한 내가 바란 오늘이 밝았다.

이 루프로서 완성되는 기묘한 자기 파괴와 자기 혐오에 대한 맥락 사이, 피타냐를 파괴하는 묘사는 자신과 겹쳐지며 묘한 섬뜩함을 내포한다. 그리고 피타냐가 보통 파티로써 진행된다는 점에서는 이 것이 축하 세례와 뭐가 다르냐는 인상이 남는다.

화자는 직설적으로 이야기한다. 글러먹은 자신을 내려치겠다고. 그 것은 일종의 축하 세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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