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리 칸나(Airi Kanna) - 최종화(the Last Flower) 분석

파국이어도 괜찮을 것들에 대하여

최종화(the Last Flower) 분석

; 파국이어도 괜찮을 것들에 대하여


움츠러든 어깨를 따라서 다시 저물어가는 오늘의 끝
밤이 조용히 나를 안으면 무너져가는 날 잊어버릴 수 있어
색 바랜 오늘은 희망 위에 내일의 구름을 드리우고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어, 그날을 위한 연습인 것처럼


화자의 현실은 녹록찮아 보인다. 움츠러든 채로 하루의 끝을 바라보는 것은 현실이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았다기보단 뿌리 깊은 고통이 자신에게 자리잡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은 화자를 감싸안는다. 무너져가는 현실을 잊어버릴 수 있도록. 하지만 그 것은 구원일까 외면일까.

색이 바랜 무채색의 하루는 생기를 잃은 채다. 희망이라는 말로 치장해보지만 내일의 구름을 드리운다는 것은, 그 위에 그림자가 드리워진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게 그날을 위한 연습인 것처럼 깊은 잠에 빠져드는 것은 죽음에 대한 예행 연습인 것 같다. 그 것이 화자의 자의든 타의든, 힘겹기만 한 하루다.



질리지도 않고 나를 처방하는 만약이라는 말
항상 똑같은 매일은 내성이 되어 내일을 어지러이 무너뜨려

만약이라는 말은 과거로 향한다. 과거의 실수를 수정하고 새로운 결과를 기대하고자 하는 마음은 분명 현재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일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이라는 말은 마치 마약처럼 나에게 처방된다. 하지만 그 약은 스스로를 상하게 만드는 약이지 치료하는 말이 아니다. 한 번, 두 번 오용된 만약은 결국 내성이 생겨 그 말에 매몰되게 만든다. 과거에 붙잡힌 이는 내일로 나아갈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내일은 어지러이 무너진다.



쓰라린 날에 쓰라린 나를 삼키지 못해 뱉어내고 싶었던 밤
의미도 없이 건넨 위선의 말, 추락을 향해 올라가는 날 만들어
그리운 날에 드리운 맘이 아름다웠던 날들을 덧칠할까 봐

잊어버릴게, 눈을 감고

쓰라린 현실은 자신과 현실에 교차되며 화자는 받아들이지 못한다. 의미도 없이 위선처럼 건낸 말은 현실을 되새기게 만든다. 추락을 향해 올라간다는 말은 상하의 속성이 교차되며 역설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그 것은 결국 파국으로 나아가려는 화자의 절망을 의미할 것이다. 그리웠던 이야기들에 이런 서글픈 마음이 덧칠되면 아름다움은 퇴색되고 비참한 현실만 남을 터다. 그렇기에 화자는 잊어버린다고 말한다. 눈을 감으면서.



흩어져 사라질 듯한 그댄 허무하고 애달픈 꽃망울
모질게 내린 눈물에 잠겨 피지 못하고 멈춰있지만
차디찬 철길 위에 놓여 나아갈 방향을 모를 뿐이야
내가 그댈 두 손에 그러모아 레일에 꽃 핀 내일을 비추게 해줘

이 지점에서 최종화 가사의 특징 중 하나는 두 명의 화자가 교차한다는 데에 있다. 1절의 화자는 힘겨운 삶의 현실을 노래하며 점진적으로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는 두려움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2연에서는 그런 화자를 바라보는 또 다른 화자의 관찰을 보여준다.

꽃망울은 피어나기 전 꽃잎을 오므린 상태를 의미한다. 그런 꽃망울이 흩어져 사라진다는 것은 결국 결실을 맺지 못해 끝을 맺게 되는 허무하면서도 가련한 생명을 의미한다. 모질게 내린다는 것은 모질고 독하게 흐르는 눈물이라는 뜻으로, 1연의 화자가 처한 현실을 의미한다. 그런 현실로 인해 피치 못하고 멈춰있다는 꽃망울은 결국 1연의 화자를 의미하는 객관적 상관물로 기능한다.

이 꽃망울이 핀 차디찬 철길은 길목이라는 속성으로써 나아가야할 앞 날을 상징한다. 이를 다른 말로 치환하자면 차디찬 현실일 것이다. 그러나 2연의 화자는 당신을 두 손을 그러모으게 해달라고, 내일을 비추게 해달라고 이야기한다. 그 것은 고통스러운 당신을 버리지 않고 함께 있겠다고 하는 위로의 선언이다. 그렇기에 방향을 모르는 당신이 방향을 찾게 될 때 나아갈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의지의 발로이기도 하다. 그러나 2연의 화자는 방향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방향을 지정해주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또다른 폭력이다. 길이라는 것은 스스로 찾아야하는 일이지 누군가가 정해준 길을 따라가는 것으로는 자신을 증명할 수 없다.


메마른 꽃잎이 읽지 못한 오늘에 갈피를 꽂아서
더 이상 그댈 읽지 못하는 나는 그저 오늘의 끝에 매달릴 뿐

메마른 꽃잎은 생기를 잃어 오늘을 읽지 못한다. 그렇지만 갈피를 꽂아서 잠시 멈추는 것도 좋을 것이다. 책을 읽다가 멈추고 다시 읽을 준비를 하는 것처럼. 그렇지만 1연의 화자는 아직 절망한 채다.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은 오늘을 읽지 못한다. 나아갈 용기도 없이 오늘의 끝에 매달릴 뿐이다.

읽는다는 것은 흐름이다. 어느 지점에서 또 다른 지점으로 켜켜이 쌓인 서사를 발굴하는 일이다. 그렇지만 읽지 못한다는 것은 그 서사의 단절을 의미한다. 이 단절은 결국 파국이다. 1연의 화자는 고통스러운 현실로 인하여 현재도 자신도 읽지 못한다. 2연의 화자는 1연의 화자의 파국을 조용히 예감한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끝은 파국이자 이 이야기의 종착점으로 기능하며 다음의 연으로 추동한다.




찬란한 날에 찬란한 그댈 차마 비추지 못하고 스러져갔던 낯
심장을 끄집어내 힘껏 소리쳐도 결말을 향해 추락하는 우리가 있어
그리운 날에 드리운 맘이 내일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해도
잊지 않을게, 두 눈 감는 날까지

찬란한 날에 찬란한 그대는 이 지점에서 다양한 함의를 지닌다. 1연의 화자가 2연의 화자를 자신과 비교하며 찬란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앞선 연에서 2연의 화자는 1연의 화자의 내일을 비추고자 하는 의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 찬란한 그대가 2연의 화자가 바라보는 1연의 화자라고 상정하면 어떨까. 2연의 화자가 1연의 화자를 비춰보려하지만, 그의 얼굴은 쓸쓸하게 스러져간다. 그렇게 심장을 끄집어내 힘껏 소리쳐보지만, 둘은 파국을 향해 추락할 뿐이다. 혹은 행 그대로 해석해보면 어떨까. 1연의 화자는 2연의 찬란함에 위로받지만, 그 위로가 와닿지 않는다. 그렇게 그의 상냥한 얼굴은 점점 스려져간다. 그렇게 한껏 절망스러운 말들을 목놓아 울어 조금이나마 해소하려고 해도, 해소되지 않는 슬픔은 화자를 절망으로 이끈다. 아름답다고 생각한 날에는 어느덧 슬픔이 가득 드리워져 내일은 오지 않을 것 같다.

이 양가적인 화자의 존재는 작품의 긴장감을 형성하며 다음을 준비한다.



피어나고 피어나도 시들어버리는 슬픔이란 꽃
짙어져만 가는 그대의 아픔이 마지막을 향해 꽃을 피워내고 있어
고마웠어, 미안했어, 양손에 가득 품은 꽃다발과
너를 떠나가는 걸

슬픔이라는 꽃은 피어나고 피어나도 시들어버린다. 이는 분명 생기를 잃어버린 현실을 뜻할 것이다. 하지만 앞서 틔우지 못한 꽃망울이 피어났다고 하면 어떨까. 비록 시들어버릴지라도 피어남을 반복하는 꽃은 애처로우면서도 강인하다. 시든다는 것은 위태로움을 뜻하지만 죽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단지 기력이 쇠했을 뿐. 그런 면에서 슬픔이라는 꽃은 감정을 내재화 한 자신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짙어져만 가는 그대의 아픔을 양분 삼아 마지막을 향해 꽃을 피워내고 있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파국으로의 돌입인 것만 같다. 하지만 마지막이라는 말은 무언가 끝맺는다는 이야기기도 하며, 무언가로 나아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것이 비록 파국일지라도 괜찮다. 고마웠다고, 미안했다고 교차되는 인사와 함께 가득 품은 꽃다발은 화자를 축하하는 것 같다. 그 가득 품은 꽃다발은 분명 슬픔이라는 꽃으로 채워져 있을 것이다. 그런 슬픔을 품고 떠나가는 것은, 파국이라고 해도 괜찮다.


사실은 나도 있잖아, 살아가고 싶어, 밀려드는 절망에 묻혀 사라지던
아픈 오늘과 두려운 내일 그 사이에 어느새 네가 들어왔어
쓰라린 날에 찬란한 네가 내게 살아있어줘서 그저 고맙다고
잊지 않을게 영원히

그렇게 화자는 자신의 속마음을 고백한다. 살아가고 싶다. 절망에 묻혀서 아픈 오늘과 두려운 내일이 있어도 살아가고 싶다고. 그 것은 오늘과 내일 사이 네가 들어와서 그렇다고. 쓰라린 자신에게 찬란했던 네가 어떤 요청도 요구도 없이 살아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고맙다고 해줘서. 그래서 살아가고 싶다. 그 말을 영원히 잊지 않으며 너를 떠나가는 것은 분명 파국임어도 괜찮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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