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렵제

Firework

M02

멸망이 한걸음 더 성큼 다가왔다. 칠월이었다. 이반은 여즉 멸망을 또렷이 실감하지 못했다. 뉴욕은 지난달 몇 가지의 큰 사건들로 말미암은 슬픔에서 겨우 벗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멸망이 도래했음을 외치거나 울부짖는 목소리는 한층 더 힘을 얻고 하늘 높은 줄을 몰랐다. 사람들의 옷차림이 가볍고 짧아졌다. 더운 날의 연속이었다. 이반은 마치 여행객이나 대학생인 양 무채색의 백팩을 한쪽 어깨에 비끄러 메고 다니기 시작했다. 백팩 안에는 각종 약과 총 한 자루, 위장용으로 필요할지 모를 얇은 책 세 권이 함께 들어있었다. 이반은 여름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여름은 첫째로 뜨겁고, 둘째로 약을 거래하기에 번거로웠다. 겨울이었다면 겉옷 주머니를 활용할 수 있었으나 여름은 그렇지 못했다.

이반은 마르쿠스 가비 공원의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 앉아 책을 꺼내 들고 내용을 읽지도 않은 채 책장을 하나하나 넘겼다.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차림으로 서있는 사람 형태의 것을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오후 네 시의 내리쬐는 햇볕 밑에서 트렌치코트라니, 아무리 영체라 해도 계절감은 맞춰야 하는 게 아닌가. 보는 사람이 더 숨이 막혔다. 미동도 없는 표정을 흘긋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사이 터벅터벅 늙수그레한 남자 하나가 걸어와 벤치 끝에 엉덩이를 걸쳤다. 이반은 남자에게 시선도 주지 않았다. 잠시 가만히 앉아 정면을 쳐다보던 남자가 꾸깃하게 접은 지폐를 벤치에 놓고는 슥 밀었다. 익숙한 듯 지폐를 걷어간 이반이 한 손으로 지폐를 셌다.


"진. 모자라네요. 지난번엔 같은 값에 줬지만 이젠 어렵다고 했잖아요."
"하지만 더 내놓을 수는 없어. 하, 한끼 때울 돈은 갖고 있어야 할 것 아냐."
"진, 진. 나는 당신이 밥을 먹든 흙을 먹든 신경 안 써요. 그건 내 알 바가 아니라서. 무슨 말인지 알아 들어요?"


약을 갖고 싶으면 돈을 제대로 가져와요. 그 전까지 우리가 이야길 더 할 일은 없을 거예요. 이반이 벤치 위로 지폐를 툭 내던졌다. 이반은 몇몇 마약상이 하는 것처럼 제 고객들에게 점점 독하고 비싼 약을 권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대신 약을 원해 찾아오는 이에게 싼 값으로 약을 내놓는다. 그리고 이반을 좀 더 자주 찾을수록 그 값은 조금씩 올랐다. 당연한 일이었다. 자선사업을 하는 게 아니었으므로. 조금 다른 종류의 악을 고른 것뿐이다.

이반에게 무엇이 덜 나쁜지를 가름 짓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는데 이제 와 덜 악하거나 선한 길을 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 지금 같은 상황에서도 굳이 착하게 굴 필요가 없는 것이다. 탁한 녹안이 옆구리로 들이밀어진 칼을 무심히 내려다보았다. 어디서 굴러다니던 걸 대충 주워 주머니에 넣은듯한 과도였다. 무력이면 벌벌 떨며 약을 내놓기라도 할 거라고 생각하는 멍청이들은 의외로 많았다. 수염이 꺼끌하게 돋은 남자의 얼굴을 마주했다. 


"지금 뭐해요? 진."
"내, 내놔. 약 내놓으라고. 안 그럼 찔러버릴 거야."
"…찔러요."


들고 있던 책을 탁 덮은 이반이 먼산을 쳐다보며 지루하다는 어조로 내뱉었다. 


"미쳤어?" 
"찔러 보던가, 돈을 더 가져와서 약을 사가던가. 선택은 당신 몫이니까 고르라고요."


후덥지근한 바람이 불어 이반이 눈을 가늘게 떴다. 역시 여름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뉴욕의 여름은 특히나 더더욱. 이반의 도발에 남자는 칼을 좀 더 꾸욱 옆구리로 내리누른다. 칼 끝을 갖다 댄 위치도 허접하기 그지없었다. 지루했다. 


"아니면, 그 허접한 걸로도 찌를 용기가 없어요? 걱정하지 마요. 그 정도로 사람은 잘 안 죽으니까."


볼래요? 이반이 왼손을 뻗어 날을 꾸욱 움켜쥔다. 남자가 손을 움찔 떠는 것이 칼을 통해 전해졌다. 칼을 거둬가지 못하도록 칼날 끝에 손가락을 걸고는 태연하게 남자와 시선을 마주했다. 무뎌 보이는 칼도 날붙이는 날붙이라, 움켜쥐는 힘에 살을 파고들어 피를 낸다. 벤치 위로 핏방울이 뚝뚝 느리게 떨어졌다. 표정의 변화도 없이, 그 어떤 말도 없이 가만히 쳐다볼 뿐인 시선에 남자는 결국 질린 얼굴로 먼저 손을 뗐다. 그제야 칼을 잔디 위로 떨군 이반이 태연하게 손의 상처를 내려다본다. 손수건을 하나쯤 챙겨 다니기라도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찰나 간 머리를 스치고 사그라든다. 손을 한번 털어낸 이반이 남자를 내버려두고 일어났다. 상황을 가만히 좌시할 뿐인 영체와 눈이 마주친다. 이반은 그가 없는 양 아무렇지 않게 시선을 돌렸다.


"나한테 살 생각이 없나 본데 다른 딜러 찾아가 봐요. 그런다고 당신이 약을 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잠시만. 이반. 잠깐만!"


아니면 다음번까지 버텨보던가요. 남자가 애타게 부르거나 말거나, 태평하게 한마디를 덧댄 이반은 멀쩡한 손에 책을 말아 쥐고 걸음을 옮겼다. 오늘의 장사는 공친 셈이다. 질척거리며 쫓아오면 걷어차버릴까 했더니 남자는 애끓는 목소리로 이반을 부를 뿐 뒤를 따라오진 않았다. 날씨가 가져오는 불쾌감이며 예기치 못한 상황 전개에 약간의 짜증이 치솟았다. 어느새 나란히 걸음을 옮기고 있는 영체가 손을 내려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쓸데없는 짓을. 오늘은 꼭 움직여야 하는 일이 있는 날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알고 있어요. 그렇게 지겹게 옆에서 떠들어대는데 잊어버렸을 리가."
[자해나 다름없는 짓을 한 덕분에 마침 병원에 갈 일이 생겼군요.]
"농담이겠죠. 치료받으러 병원을 왜 가요."


치료를 위해 병원을 가라니, 질 나쁜 농담이나 매한가지였다. 불법 체류자의 꼬리표를 달고 병원에 갈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영체는 일주일쯤 전부터 지겹도록 예언의 마지막 문장에 대해, 사흘쯤 전부터는 콜럼비아 대학병원에 대해 떠들었다. 병원에서 무언가 일이 벌어질 것이다, 그러니 가야 한다, 방관하지 말고 관여하라 하지 않았냐 등등의 귀찮은 소리가 끝도 없었다. 제가 준 능력을 잘 써먹고 있으니 그 값을 하라는 말도 했다. 떠안겨 놓고는 대가를 바라는 게 순 도둑놈 심보가 아닌가. 하지만 영체의 말대로 그가 준 능력을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니 이반은 기꺼움을 애써 끌어모아 움직여 줄 생각이 있긴 했다. 그래서 병원에 가지 않겠다는 뜻이냐 신경질적으로 되묻는 소리에 해가 진 후에 갈 것이라 딱 잘라 대꾸한 이반은 바람에 날려 시야 가장자리를 거슬리게 만드는 트렌치코트를 무시하려 애썼다. 


펍으로 향한 이반은 손의 상처를 보고 놀라는 직원들에게 깨진 유리병에 손을 베였다 천연덕스레 거짓말을 하며 얌전히 손을 내밀고 붕대를 감았다. 손가락 위를 일직선으로 가로지르는 상처가 붕대에 감춰진다. 상처는 생각만큼 깊지 않아, 펍으로 오는 사이 피가 검붉게 뭉쳐 말라가고 있었다. 소독약을 들이붓는 일에는 이반보다 치료를 자처한 헨리의 표정이 심각하게 구겨졌더랬다. 붕대 감긴 손가락을 눈높이만큼 들어 올려 살짝씩 굽혔다 펴 본다. 손 너머로 펍의 입구 옆 벽에 기대선 영체가 보였다. 중간에 모습을 감추지도 않고 펍까지 함께 온 영체는 여전히 이반을 가만히 쳐다보고 서 있었다.

오늘을 그렇게 강조하더니 아예 갈 때까지 옆에 지키고 서 있을 모양이었다. 상처 입은 환자라는 뻔뻔스러운 명목으로 일 대신 바의 스툴에 앉은 이반은 휴대전화를 열어 너댓명의 수신인에게 짧은 문자를 보냈다. Gene. Hazelnut eyes. Hooked nose. 얼핏 보면 단어의 나열일 뿐인 문자였으나, 받은 모두가 뜻하는 바를 알 터였다. 문자의 수신인들은 이반이 주로 다니는 구역들과 인접한 곳에서 움직이는 딜러들이었다. 이반은 가볍게 휴대전화의 플립을 닫았다. 당분간 그 누구도 진이라 불리던 남자와 약을 거래하지 않을 것이다. 


딜러들 사이에는 암묵적인 룰이 있었다. 딜러를 협박하거나, 해를 가한 사람과는 거래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스갯소리로 말해 일종의 버릇 고치기였다. 누군가 특정 딜러와의 거래에서 불미스러운 일을 일으키면 활동반경이 겹치는 딜러들은 그 문제의 누군가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그를 투명인간 취급했다. 말을 들어주지도, 약을 팔지도 않았다. 그런 경우 중독자들이 밟는 수순은 거의 항상 같았다. 화를 냈다가, 살살 달랬다가, 이내 구걸한다. 다시는 그러지 않을 테니 제발 약을 사게 해 달라 빈다. 이반은 정키들이 밑바닥을 드러내고 설설 기며 비는 광경을 내려다보는 것이 조금쯤 유쾌했다. 그들이 하는 짓이 꼭 우스운 일인극을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조만간 그 꼴을 또 한 번 보게 되리라. 


이반은 여덟 시 삼십 분이 될 때까지 펍에서 자리를 잡고 앉아 시간을 때웠다. 해가 다 떨어지고 느지막이 출근한 알렉세이의 사무실에 쳐들어가 그와 포커를 두고, 두어 잔의 보드카를 마셨으며, 바를 담당하는 헨리와 쓰잘데 없는 가벼운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슬슬 바를 나서려 몸을 움직일 때쯤 출입구 옆을 지키고 서있던 영체는 온데간데없었다. 언제는 끝까지 지키고 있을 듯한 얼굴로 빤히 주시하고 있더니. 이반은 그러려니 크게 신경 쓰지 않고 펍을 나섰다. 영체에 대해서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많았으나, 몇 가지 알아낸 것이 있다면 상당히 제멋대로라는 점이었다. 저 내키는 대로 불쑥 모습을 드러내 이반을 빤히 관찰하다 이내 사라지곤 했다.

이반은 제아무리 영체라 할지라도 누군가에게 관찰당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고, 아무런 말도 없이 쳐다보기만 하는 그 얼굴을 보면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발 밑에 엎드리다시피 하며 약을 구걸하는 정키를 내려다보는 제 눈빛이 딱 저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타인을 그렇게 보는 것도 문제라는 사실은 이반의 고려사항 밖이었다.) 대놓고 관찰하는 그를 향해 비아냥댄 적도 있었다. 물론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두어 번의 비아냥 끝에 이반은 똑같이 그를 무시하기로 했고 그것은 얼추 평화로운 해결책이 된 듯도 같았다. 











콜롬비아 대학병원은 규모가 제법 대단한 곳이었다. 러시아에서도 병원과는 큰 연이 없는 이반이었으므로 (조직에는 조직원들을 치료하기 위한 주치의가 따로 고용되어 있었다.) 여러 건물이 한데 모여 단지 같은 구성을 하고 있는 병원은 상당히 낯설었다. 큰 규모의 병원은 더더욱 인연이 없는 공간 중 하나였다. 이런 병원에서 소란을 일으킨다니. 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생각인지 몰라도 본격적이다 싶었다. 태어날 세 아이가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종말이 성큼 다가올 수도, 멀어질 수도 있다는 게 허황된 이야기 같았다.

그럼에도 영체의 말을 듣고 움직이는 이유에 대해 이반은 스스로를 납득시킬 정도로 확고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영체는 이반이 이곳에서 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상황을 맞닥뜨리면 알게 될 거라는 말 뿐이었다.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병원의 산모들에게 모종의 해를 가할 수 있다는 것 정도였다. 큰 병원일수록 많은 수의 산모가 입원한 상태일 테고, 이 곳에서 무언가 문제를 일으킨다면 그건 상당한 피해를 유발할 게 틀림없지 않은가. 길 건너편에 자리한 노숙인 쉼터를 잠시 쳐다보던 이반이 병원 안으로 들어선다. 때마침 지나던 간호사 하나를 불러 세웠다. 


"실례합니다. 산부인과 병동은 어디로 가야 하죠?"
"여기서 왼쪽으로 쭉 가서 연결통로를 지나면 안내판이 보일 거예요. 거기서 다시 한번 물어보세요."


바쁜 듯, 차트 하나를 붙들곤 고개도 들지 않은 채 펜 끝으로 한쪽 통로를 가리킨 다음 간호사는 잰걸음으로 멀어졌다. 넓다 했더니 들어오길 다른 입구로 들어온 모양이었다. 간호사가 가리킨 방향으로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며 이반은 병원 이곳저곳을 훑었다. 어수선한 듯하면서도, 늦은 시간인 탓인지 병원은 조용했다. 복도를 가로지르는 조용한 발소리가 희미하게 공간을 울렸다. 알려준 대로 쭉 걸어오니 간호사가 말했던 듯한 안내판을 마주할 수 있었다. 이반은 홀처럼 트인 공간을 둘러보았다. 묘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것이 영체가 말하던 어떠한 일 때문인지, 병원이라는 공간이 주는 낯섦 때문인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산부인과 병동은 안내판을 보기만 한다면 굳이 누군가에게 다시 묻지 않고도 충분히 찾아갈 수 있었다. 이반이 도착한 산부인과 병동의 복도는 늦은 시간 산모들을 배려해 조도를 낮춘 상태였다. 병실들만 위치한 층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벽에 걸린 시계를 흘긋 확인한 이반이 잠시 멈춰 서서 어디를 먼저 둘러봐야 할지 고민했다.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질 줄 알고 어디를 뒤진단 말인가. 좌우로 뻗은 복도를 번갈아 살피는 눈빛에 성가심이 가득이었다. 짧은 고민 끝에 이반의 발이 오른쪽으로 향한다. 한쪽 끝에서부터 쭉 걸어오다 보면 뭐든 병원에 있어선 안 되는 물건이나 사람을 발견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일견 무식한 방법이었으나 현재로선 그보다 나은 다른 방법이 없었다. 


발소리가 작은 특유의 걸음으로 사람 없는 복도를 쭉 걸었다. 대부분 병실의 문은 닫혀있었고, 두어 곳의 문을 열어보았지만 이미 병실 안은 캄캄한 어둠이 내려 있었다. 이반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혀를 찼다. 이래서는 찾아야 하는 것이 뭐든 간에 찾을 수가 없었다. 전등 스위치를 찾아 복도의 모든 불부터 켜야 하나 따위의 생각을 하며 복도의 모퉁이를 돌았을 때였다. 큰 유리창으로부터 바깥의 불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복도였다. 이반이 여지껏 걸어온 복도와 같이 고요했고, 다른 점이라고는 두 명의 사람이 서 있었다는 것뿐이었다. 이반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보며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간호사의 복장을 한 중년의 여성이 하나, 추레한 복장을 한 중년의 남성이 하나. 두 사람이 병원 복도에서 갑자기 눈이 맞아 달밤에 왈츠를 추고 있는 게 아니라면 저렇게 몸 씨름을 하며 같이 있기엔 어색한 조합이었다. 더불어 간호사의 배에 칼이 꽂혀 시뻘건 물이 들 리도 없었고. 이게 영체가 말하던 '어떠한 일'의 일부인가? 이반이 스스로의 의문에 고개를 기울인다. 어느 모로 보나 노숙인으로 보이는 남자는 그사이 간호사가 붙잡은 손을 뿌리치고 한차례 더 그녀의 배를 찌르고 있었다. 비슷한 색채의 녹안이 마주친다. 도와…. 물 밖으로 내던져진 생선처럼, 간호사가 소리없이 입을 뻐끔거렸다. 

"뭐, 뭐야!"

간호사의 시선이 제 어깨너머를 향하고 있음을 알아챈 노숙자가 몸을 돌려 이반을 발견했다. 한 손에 든 칼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뒤에서 바닥에 쓰러진 간호사는 조금이라도 노숙자에게서 멀어지려 바닥을 긴다. 부스스한 곱슬머리가 바닥에 퍼진 피에 물들어 붉게 젖어드는 것을 빤히 내려다보던 이반이 도톰한 입술을 비틀었다. 

"지나가던 사람인데... 뭔가 봐선 안될 걸 봐 버린 느낌이네."

주춤대던 남자가 손에 쥔 칼을 앞으로 뻗었다. 낮과 비슷한 상황의 반복에 이반은 검지로 뺨을 긁적였다. 오늘이 무슨 날이긴 한가보다. 하루에 두 번이나 칼을 마주하다니. 혀를 찬 이반이 바지 주머니에서 접힌 발리송 나이프를 꺼내 손목의 움직임으로 차르륵 펼쳐 쥐었다. 한 번은 심심하니 어울려줄 수 있다 쳐도 두 번은 사양이다. 이반이 갑자기 나이프를 꺼내들자 노숙인의 얼굴에 당황이 서린다. 그것은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마주한 당황일 뿐 상황을 그리 무서워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사람을 찌르고 난 고양감에 취해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으리라. 이반은 그 느낌을 잘 알았다.


"너 뭐하는 놈이야?"
"지나가던 사람이라니까요. 당신 병원 앞 쉼터에서 온 사람이에요? 왜 뜬금없이 여기서 엄한 간호사를 쑤시고 있었을까. 난 그게 궁금한데." 
“네가 그걸 알아서 뭐하게? 죽기 싫으면 입 닥치고 꺼져.”
“꺼지긴 어디로 꺼져요. 다시 돌아가라고? 난 그쪽으로 가야  하는데요. 좀 비키시죠?”

일을 저질렀으니 빨리 자리를 뜨고 싶어 하는 눈치의 남자가 칼을 든 채 이반에게로 달려들었다. 이반은 몸을 옆으로 빗겨 남자가 저를 스쳐 지나도록 하며 어깻죽지에 나이프를 찍어 넣었다. 남자가 악, 외마디 소리를 내지른다. 바닥을 기는 간호사에게로 달리듯 다가간 이반이 그녀의 어깨를 잡는 순간 두 사람의 형체가 스르륵 녹아 사라졌다. 흉흉한 눈빛을 하고 어깨를 붙잡은 채 돌아선 남자가 아무도 없는 복도의 광경에 당황한 듯 눈을 꿈뻑였다. 이반은 간호사의 어깨를 누르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움직이지 말고 조금만 참아요. 그녀가 흘린 핏자국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그러니 발버둥이라도 쳐 핏자국 위로 흔적을 남긴다면 모습을 감춘 게 말짱 꽝인 셈이었다.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다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이반을 올려다보던 간호사의 입술이 열린다. 그녀가 무얼 질문하든 대답해줄 의향이 없던 이반은 제 입술에 검지를 갖다 대어 그녀의 말문을 막았다. 

핏자국만을 남겨두고 감쪽같이 사라진 간호사와 이반을 찾듯 당황한 얼굴로 두어 걸음 움직이던 남자가 이내 주춤주춤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이반은 남자를 쫓지 않았다. 대신 능력을 풀고 바닥을 기던 간호사를 일으켜 세웠다. 다리에 제대로 힘을 줄 수 없는 것처럼 무릎을 반쯤 굽힌 채 간호사는 이반이 팔 아래로 손을 넣어 일으킨 그대로 기대서 있다시피 했다. 배를 감싼 손이 온통 붉었다. 쇳내가 흐리게 코끝을 맴돈다. 힘든 거 아는데 다리에 힘주고 조금만 걸어봐요. 가까이에 빈 병실 같은 거 있어요? 걱정 어린 듯한 목소리로 이반이 물었다. 간호사는 바들거리는 손을 들어 어느 한 곳을 가리켰고, 이반은 축 늘어지는 몸을 반쯤 끌고 가 빈 병실의 침대 위에 그녀를 눕힐 수 있었다. 식은땀을 비 오듯 흘리는 간호사의 눈이 벌써 반쯤 풀린 채였다. 그녀의 뺨을 톡톡 건드려 주의를 억지로 제게 끌어왔다. 

“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줄 수 있어요?”
“상자, 상자가…세 개, 동물…의 시체가 든, 상자가, 있어요. 폭탄같이 생긴… 생긴 게, 담겨서… 알려야 해요. 상자가 여러 개에요. 병원에 수, 상한 사람이…알리려다가, 그랬는데."

  

잠깐 사용한 능력의 반작용으로 귀가 꽉 막힌 듯 해 이반은 그녀의 말을 알아듣기 위해 귀를 갖다 대어야 했다. 드문드문 끊길 듯 말 듯 간신히 이어지는 음성이 뜻하는 바는 얼핏 난해했으나 말인즉슨 병원에 동물의 시체나 폭탄이 든 상자가 여럿 있다는 뜻 같았다. 이반은 상황을 맞닥뜨리면 할 일을 알 수 있게 될 거라던 영체의 말을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영체가 원하고 있는 것은 노골적이고 분명했다. 잠시 저만의 생각에 잠겨있던 이반의 손이 다정함을 띄고 간호사의 흐트러진 적발을 쓸어 넘겼다. 

 

"이름이 뭐예요?"

"주, 줄리안."  

"줄리안. 사람들에게 알려야한다고 했죠. 걱정 말아요, 내가 알릴게요."

"…상자들도, 찾…아내야, 해, 해요."

"Shh, 그것도 내가 알아서 할게요. 사람을 불러올 테니까 조금 쉬고 있어요."

  

사람은 위험에 빠진 순간 제 앞에 나타나는 것이 무엇이든 믿는다. 숨이 경각에 달린 때라면 더더욱. 이반은 고맙다며 속삭이고 눈을 감는 줄리안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어슴푸레한 빛 아래에서도 그녀의 얼굴을 수놓은 주근깨가 또렷이 보였다. 그녀는 살지 못한다. 파리한 안색과 색이 빠진 입술이 이미 죽음의 경계에 성큼 다가 선 기색이었다. 사람들에게 알리려 나섰기 때문에 그녀는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줄리안의 이 죽음이 그녀에게 안배되어 있었던 일인지, 자신으로 인한 예기치 못한 변수인지 문득 궁금했다. 어쩌면 애초에 저까지도 포함되어있던 안배였을지도. 그러나 이것이 그녀에게 안배된 것이냐 물을 존재는 여전히 온데간데없다. 안배의 여부는 사실 이미 상관없는 일이다. 이반은 그녀의 호흡이 침묵에 잦아들 때까지 자리에 앉아있었다. 병실에 내린 어둠을 묻어온 탁한 녹안이 검정에 가까웠다. 

  

이반은 병실에 딸린 화장실로 가 손과 팔의 핏자국을 씻어냈다. 아무리 밤이라지만 병원에서 손에 피 칠을 하고 다닐 생각은 없었다. 검은 옷을 입은 덕분에 혹시 묻었을지 모를 핏자국이 가려진다는 것은 요행이었다. 이반은 세면대 위에 붙은 거울을 빤히 쳐다보며 영체가 이곳에서 제게 바랬을 역할에 대해 생각을 정리했다. 우선은 여러 개라 말했던 상자들을 찾아야 했다. 병동의 규모를 생각하면 그 개수는 결코 적지 않을 게 뻔하다. 그러니 어쩌면 의외로 쉽게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동물의 시체가 들어있다는 상자들과 폭탄같이 생긴 물건―아마도 진짜 폭탄이었으리라―이 담긴 상자들로 산모와 아기들을 해친다고 생각했을 때, 어느 곳에 두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지에 대해 떠올려본다. 병실이 가장 효과적이긴 할 테지만, 아무리 노숙인들이라 해도 완전히 비게 될 일이 잘 없는 병실을 함부로 들어갈 수는 없으리라. 만약 병원 내부에서 누군가 노숙인들을 도왔다고 가정한다면 아주 불가능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이반은 줄리안을 눕힌 침대 아래를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옮기기에 적당해 보이는 사이즈의 상자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꺼낸 상자를 열어본 이반의 얼굴에 모호한 빛이 어렸다. 상자 속 내용물과 줄리안을 번갈아 보았다. 동물의 꼬리로 보이는 것과 밀랍처럼 새하얀 사람의 손가락이 조잡한 것과 함께 뒤섞여있었다. 이반은 상자에 물건을 담고 포장―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한 것이 누구일지 궁금했다. 상자 안에 손가락을 위시한 것들을 넣으며 뿌듯해했을까, 만족했을까. 어쨌든 정상은 아닌 사람이리란 것에 이반은 제 힙 플라스크를 걸 수 있었다. 상자를 그대로 다시 덮어둔 이반이 병실을 나선다. 바로 옆 병실이 비어있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그 옆의 병실로 향하고 있을 때였다. 

 "이반?" 

 

제 이름을 부른 목소리에 시선을 돌리자 마주한 것은 데미안이었다. 이반은 의외의 인물에 잠시 놀란 얼굴을 해 보였다. 함께 작당해 야바위로 순진한 사람들의 지갑을 야금야금 갉아먹던. 그가 왜 병원에, 저런 차림으로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사이 마술사에서 간호사로 직업을 바꿨을 리는 전무했다. 그의 병약해 보이는 이미지와 병원을 엮는다면 간호사가 아니라 환자라는 답이 나와야 하는 게 아닌가. 여기서 뭘 하는 거지? 데미안의 질문에 이반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 질문을 진심으로 데미안 자신이 해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묻는다면 간호사 복장을 하고 있는 그를 향해 자신이 물어야 할 말이 아닐는지. 

 

"아니 됐어, 오히려 잘 됐지. 댁 같은 '전문가'의 의견을 물어볼 일이 있는데."

 

아. 이반의 한쪽 눈썹 끝이 미세하게 움칫 튀었다. 그는 저와 같은 것을 옆에 둔 사람이다. 이반은 그가 동조자라는 것에 상당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아마 그 역시 그 사실을 짐작하고서 제게 운을 뗀 것이리라. 이반은 데미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상자 찾으러 왔지? 이건 어떻게 생각해?"

  

곧은 손가락이 가리킨 상자 안을 내려다본 이반의 입매가 뚜렷한 일자로 다물렸다. 우스운 에그 타이머를 연결해 조잡하게 만든 파이프 폭탄이었다. '전문가' 운운하며 이것을 내밀었다는 것은 그 역시 이것이 폭탄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의미나 다름없었다. 이반은 고개를 좀 더 숙여 상자 안을 살폈다. 보통의 파이프 폭탄은 그 위력이 그리 강한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폭발물을 감싼 파이프가 배관용 파이프라면 그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단단하고 충분한 강도를 가진 파이프가 압력을 높여 보다 강하게 터지도록 만들기 때문이었다. 아마 저 배관용 파이프 속에는 화약과 함께 파편 역할을 할 조악한 것들이 함께 들어있을 거였다. 탁한 녹안이 파이프 폭탄에 부착된 에그 타이머로 향했다. 에그 타이머의 눈금은 최대가 한 시간이다. 하지만 그것이 이 폭탄의 최대 시간 설정이 한 시간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이 타이머만으로는 언제 터지게 될지 알 수 없다. 그야말로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인 것이다. 

  

"파이프 폭탄이네요. 만들기 쉬운 거예요. 타이머가 설정된 것 같긴 한데, 언제 터지도록 설정이 되어있는지는 알 수 없어요. 나도 해체 방법까지는 몰라요." 

  

이제껏 폭탄을 해체할 이유가 없었어서요. 와중에 가벼운 어조로 농담이랍시고 뇌까린 이반이 숙였던 몸을 일으켰다. 이런 식의 폭발물들이 이 병동 이곳저곳에, 과연 몇 개가 감춰져 있을지 짐작이 쉬이 가지 않았다. 어린애들 장난 같은 숫자는 애저녁에 뛰어넘었을 듯싶었다. 

  

"그럼 이건―"

"일단은 큰 충격이 가지 않도록 조심히 들고 어디론가 옮겨놔야겠죠. 다른 상자도 찾았어요, 혹시?" 

"아니. 댁은 찾았어?"

"아뇨. 저쪽에서부터 훑으면서 왔는데, 동물 시체가 든 상자밖에 없었어요. 폭탄을 찾는 게 먼저일 것 같아서 한데 모아두기만 했고." 

  

이반은 병동 복도에서 말라붙어가고 있을 줄리안의 핏자국을 떠올렸다. 괜한 광경을 보여줄 필요가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데미안은 저를 믿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반 역시 데미안을 믿지 않았다. 그런 이에게 줄리안의 일을 설명한다? 노숙인의 존재를 이야기한다 해도 의심을 받는 것은 십중팔구 저일 게 뻔했다. 괜한 의심과 그것을 위한 해명의 과정이 너무나도 번거로웠다. 그렇기 때문에 이반은 차라리 속이는 쪽을 택했다. 후에 발견한다면 모르는 일이라 선을 그으면 될 일이었다. 이반은 데미안이 발견한 상자를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따라와요. 다른 층도 한 번 둘러봐야죠. 이반은 데미안이 저와 떨어져 따로 움직이지 않도록 이끌었다. 

  

이반과 데미안은 병동의 다른 층에서 또 다른 상자들을 찾았다. 빈 상자와 동물의 시체가 든 상자, 시한폭탄과 그냥 일반 폭탄이 각각 든 상자 등이었다. 달걀 타이머 대신 조그만 액정이 붙은 시한폭탄을 발견하며 두 사람은 시한폭탄의 타이머가 새벽 세 시, 그러니까 다음날 오전 세 시에 맞춰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폭탄을 대하는 데미안의 반응을 살핀 이반은 시한폭탄들을 먼저 1층 로비로 옮겨놓을 것을 제안했다. 시한폭탄들이 터지지 않는다면 타이머가 장착되지 않은 폭탄은 멀쩡할 거라는 이유를 내세웠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타이머가 장착되지 않은 폭탄은 화기와 접촉하지 않으면, 과한 충격을 받지 않으면 터지지 않으리라. 이반은 데미안과 함께 시한폭탄을 두어 박스씩 나눠 들고 1층 로비로 향했다. 

  

로비로 내려와 올라가기 전 봐 두었던 굵직한 기둥 아래 상자를 내려놓은 다음에야 이반은 폭탄을 효과적으로 옮기기 위해선 갈라지는 게 좋겠다 새롭게 제안했다. 그와 함께 움직여 일종의 알리바이를 만들어 두었으니 이제 핏자국을 발견한다 해도 상관이 없었다. 핏자국과 줄리안을 발견하고 그것에 정신이 팔려준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데미안과 함께 다른 층으로 올라가 엘리베이터를 기점으로 갈라지기로 한다. 데미안의 모습이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이반이 머릿속으로 1층 로비의 자판기에서 음료를 몇 개 뽑아야 상자의 무게와 비슷할까를 생각하며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시한폭탄이 하나쯤 필요했다.  

 

 

 


  

 

이반은 매끄러운 재규어가 정체불명의 남자와 폭탄을 실은 관이 되어 수장되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저를 내리게 한 아르망이 차와 함께 강물로 뛰어들 줄은 몰랐어서, 조금쯤 놀란 눈으로 잠잠해지는 물을 주시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 수십 초의 시간이 지나고 차와 함께 제 한 몸 던져 자살이라도 하나 싶던 아르망의 얼굴이 불쑥 물 위로 솟구쳤다. 이반은 손을 뻗어 그를 끌어올리다시피 해 물 밖으로 올라오게끔 도왔다. 애초에 푹 젖어 그 수명을 다한 상태였던 실크 정장은 또 한 번의 죽음을 맞이했다. 물기를 머금고 반질거리는 정장이 물을 뚝뚝 떨어뜨려 바닥에 점을 그린다. 의류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실크와 물이 상극이라는 것쯤은 알았다. 물기를 머금고 쳐진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넘기는 아르망을 두어 걸음 떨어져 주시하던 이반이 입을 열었다. 

 

"그대로 자살하려는 줄 알았는데. 나왔네요?"

"자살 특공대는 취향이 아닌데? 됐고, 빨리 병원으로 돌아가기나 하자고."

 

차가 다니는 도로변으로 올라온 이반과 아르망은 운 좋게도 금세 택시를 잡을 수 있었다. 배와 핸들이 닿아서 제대로 운전이 되긴 할까 걱정되는 기사가 운전하는 택시였다. 뒷문을 연 이반이 아르망을 먼저 택시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렇게 푹 젖어서 타면 시트가 엉망이 되잖아요. 물이 뚝뚝 떨어지는 아르망을 향해 기사가 투덜거리자, 아르망이 품에서 총을 꺼내 든다. 말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들이밀어진 총구에 뭐라 말도 못하고 얼어붙은 택시기사를 위해 총구를 잡아 내리며 이반은 짐짓 사람 좋은 척을 했다. 

  

"콜럼비아 대학병원이요. 사실 온전치 않은 사람인데 병원에서 탈출해서 데리고 돌아가는 거니까 잔말 말고 빨리 가주세요. 저도 이 사람 빨리 병원에 갖다 넣고 싶거든요."

  

이반은 기사의 뒤를 이어 제게로 겨눠지는 총과 아르망의 얼굴을 번갈아보았다. 그사이 기사는 서둘러 차를 출발시켰다. 이반은 울그락불그락한 아르망의 손에서 스르륵 총을 뺏들어 자연스럽게 탄창을 차곡차곡 비워냈다. 탄환 속 화약이 물에 젖었다면 격발되지 않을 수 있겠지만 요즘의 총알은 옛날의 탄환처럼 밀봉이 덜 되어있다거나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손안에 구르는 탄창의 잘그락거림이 반갑다. 탄창을 텅텅 비운 총을 다시 손에 쥐여주자 아르망의 얼굴이 한층 더 험악해진다. 이반은 어쩌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차를 몰고 물에 뛰어들기 전까지 잘만 떠들던 입이 잠잠해진 것이 이상하다면 이상했다. 오래 보지 않았지만 벌써 무슨 말을 해도 했을 인사인 것 같은데. 물에서 나오기 위해 능력을 썼나? 그렇다면 갑자기 극단적으로 말수가 줄어든 것이 설명된다. 능력을 사용하면 말과 관련된 모종의 부작용이 있는 걸지도 몰랐다. 이반은 굳이 그 점을 입 밖으로 꺼내 짚지 않았다. 

 

"왜요. 마음에 안 들어요? 그러게 누가 그렇게 무식하게 총부터 들이밀랬어요. 지성인답게 말로 해요."

  

마지막 사족은 아르망이 자극받을 것을 알고도 그의 신경을 긁기 위해 일부러 덧붙인 말이었다. 울그락불그락한 험악한 얼굴이 어디까지 더 구겨질 수 있는지에 대한 호기심도 한몫했다. 총탄은 병원에 도착하면 돌려줄 수도 있어요. 룸미러를 통해 흘긋 뒤를 쳐다보는 기사와 눈이 마주쳤다. 의문이 담긴 눈이 마치 온전치 않은 사람이라고 해놓고, 탄환을 돌려준다고? 하고 말하는 듯 해 이반은 룸미러에서 시선을 거뒀다. 아르망의 총에서 빼낸 총탄을 손 안에서 굴려본다. 자르륵대는 금속성의 소리가 듣기 좋았다. 또다시 룸미러를 통한 시선이 느껴졌다. 적어도 그가 총을 맞을 일은 없을 테니 얌전히 앞만 보고 운전이나 해줬으면 좋겠다 싶었다. 그런 이반의 마음을 알아챈 건지 어쩐 건지,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택시 기사와 눈을 마주치는 일도, 입을 여는 일도 없었다. 다 왔다며 한껏 기가 죽은 목소리로 말하는 기사에게 짧게 웃어준 이반이 아르망의 어깨를 툭툭 치고 내렸다. 돈 많죠? 택시비는 그쪽이 계산해요. 그 말에 아르망이 어떤 생각을 했을지는 이반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씨발, 총알 안 내놔?"

  택시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내던지는 험악한 말에 이반은 짐짓 놀란 척을 해보였다. 이제 능력에 대한 부작용이 모두 해소된 모양이었다. 

  

"씨발? 입이 험하네요. 주고 싶던 마음도 없어지는데."

"주기 싫으면 네 머리통에 박던가."

"지금도 든 게 많아서요. 그쪽이 한 번 박아볼래요? 구경 좀 하게."

"머리통에 박힌 총알이 많아서 주둥이가 그따윈가?"

"남말 할 때에요? '그따위' 주둥이를 갖고 있는 건 그쪽 아닌가? 꼭 지옥에서 올라온 주둥이 같은데요."

  

알렉세이를 엿먹이는 것 다음으로 재미있는 일을 찾은 것 같다는 생각이 일순 떠오른다. 이반은 척 봐도 속이 잔뜩 부글부글 들끓고 있음직한 아르망을 향해 총탄을 하나 툭 튕겨 보냈다. 뭐하는 짓거리냐는 눈으로 쳐다보는 그에게 천연덕스럽게 총알을 돌려주는 중이라 말한 이반이 총알 하나를 더 튕겼다. 

  

"병원 안에서 마구잡이로 총을 쏴대면 곤란하지 않겠어요? 물론 그쪽 말고 병원이요." 

  

그러니까 총알은 두 개만 돌려줄게요. 뭐, 세 시 이후에도 멀쩡하면 총알 찾으러 오던가. 끝까지 아르망이 약오를 만한 말만 내뱉은 이반이 몸을 돌려 병원 안으로 먼저 들어선다. 그럼 남은 폭탄이나 더 찾아봐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인사랍시고 총알 쥔 손을 흔들어 보였다. 보지 않아도 잘 깎아놓은 조각같은 얼굴이 얼마나 험악해져 있을지 알 것 같았다. 이반은 시한폭탄이 남은 병원으로 다시 걸어 들어가고 있는 지금 이 상황에서, 오늘 처음 만난 아르망 크리스토퍼를 엿먹이는데 유쾌함을 느끼고 있다는 걸 인정하기로 했다. 얽힐 일이라곤 영영 없을 것 같은 부류의 사람이 알렉세이를 엿먹일 때와 비슷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 조금 아쉬운 것도 같았다. 자주 마주친다면 더 자주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을 것 아닌가. 

  

이반은 지금 느끼는 아쉬움을 펍에 돌아가 풀기로 하며 산부인과 병동에서 가보지 않았던 구역으로 가기 위해 아델하이드가 어떻게 구해온 건지 모를 도면을 꺼내 들었다. 열두 시 경 데미안과 동시에 폭탄을 들고 나타난 아델하이드는 점잖고 교양 있는 사람이었다(적어도 그 시점에 보기엔 그러했다는 뜻이다). 부드럽고 순한 빛을 담은 연녹색 눈을 하고 이반에게 참으로 정중하게도 이름을 묻고 인사를 나눴더랬다. 이반이 주로 마주하는 세계에서 교양 있고 정중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가뭄에 콩 나듯 어려운 일이었다. 거기다 대학교수 씩이나 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더욱 흔치 않은 일이었으므로. 이반은 그와의 만남 자체가 상당히 낯설었다. 이반에게 병원만큼이나 연이 없는 대학교의 교수란 사람이니, 건물의 도면을 구해오는 알 수 없는 재주가 있는지도 몰랐다. 혹은 그것이 그가 동조자로서 가진 능력이거나. (이반은 데미안이 저와 같은 동조자일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듯 아델하이드와 아르망에게도 동일한 확신을 가졌다. 그러지 않고서는 모일 수 없는 조합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거둔 폭탄들을 버리러 가기 전 나눴던 대화에서 다른 이들이 주로 수색했다던 공간은 분만실이나 휴게실, 비품실 등 매일같이 많은 사람의 발길이 닿는 곳들이었다. 그렇다면 사람의 발길이 매일같이 닿지는 않는 곳들은 어떨까. 도면을 살피던 이반의 시선이 종이의 구석에서 멎었다. 구석에 자리한 공간들을 살펴보지 않았다. 효과적인 피해를 입히기 위해서라면 사람의 발길이 매일같이 닿는 곳이 최적의 장소일지 모르나, 물건을 숨기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가 발길이 뜸한 곳이라는 것은 조금만 생각해보면 누구든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아르망과 자신이 걷은 폭탄을 버리러 간 사이에 남은 두 사람이 이미 살펴봤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나, 이반은 살펴볼 목적으로만 구석진 공간을 찾는 것이 아니었다. 창고와 같은 공간에 대용량의 폭탄이 숨겨져 있을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반은 몇 시간 전 병동의 곳곳을 수색할 때 본 빈 상자가 있던 위치들을 되새기며 도면에서 봐둔 곳으로 향했다. 

  

"예, 제가 했습니다." 

  

세탁물을 모아둔 창고에서 허탕을 치고 다른 공간을 찾기 위해 복도를 걷던 중이었다. 어느 한 문틈을 타고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릴 듯 말 듯 귓가를 스친다. 이반은 옮기려던 걸음을 우뚝 멈췄다. 가만히 숨을 내쉬며 귀를 기울였다.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작게 들려온다. 이반이 가까운 문들을 훑었다. 어째서 주인 모를 목소리가 귀에 익은 것인지를 고민한다. 기억을 되짚다 목소리의 주인이 아델하이드 벤펠이라는 것과 소리가 흘러나오는 문을 찾은 것은 동시였다. 걸음소리를 죽인 이반이 문가로 다가갔다. 제가, 당신의 아이를 죽였습니다. 엿듣기에 꽤나 은밀하고 자극적인 문장이었다. 울음소리가 조금 더 크게 들렸다. 이반이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점잖던 그 아델하이드 벤펠이 누군가의 아이를 죽였다는 건가? 혹은 뭔가를 이용하기 위해 꾸며낸 말인지도 몰랐다. 

  

"신께 물어보겠습니다. 우리의 시험은, 이것으로 끝난 것인지."

  

도무지 대화의 흐름을 종잡을 수 없는 말들의 나열이었다. 대화 내용을 짐작키 위해 좀 더 귀 기울여 엿들으려던 찰나, 드르륵드르륵 밀리는 바퀴소리가 그것을 방해했다. 이반은 당황하지 않고 바퀴소리가 들려오는 방향과 반대되는 곳으로 걸었다. 대화를 끝까지 듣지 못한데서 온 궁금증이 그림자를 뒤로 잡아당기는 듯했다. 혹여나 차후에 아델하이드 벤펠을 만났을 때 물어볼 수 있을 내용의 이야기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은 듯했으므로, 이반은 달라붙는 궁금증을 매정하게 끊어냈다. 

   

아르망 크리스토퍼와 함께, 충격에 덜 예민해 옮길 수 있는 시한폭탄들과 사람 하나를 얹어 허드슨 강에 수장시키고 돌아온 뒤로 이반이 찾은 폭탄의 개수만 세어도 스물세 개였다. 그 가운데 타이머가 붙은 폭탄은 총 아홉 개로, 파이프 폭탄과 더불어 C4가 섞여 있었다. 상당한 양의 폭탄을 쓸어다 버렸으나 병원의 곳곳엔 아직 열어보지 못한 상자가 많았다. 아마 빈 상자와 동물의 시체는 물론 사람의 시신 일부까지 골고루 있을 것이다. 지금껏 열어 본 상자들의 내용물이 그러했으니. 이반은 가장 처음 상자를 확인했을 때부터 의심했던 조력자의 존재를 확신했다. 그와 더불어 노숙인들을 도운 조력자가 한 명 이상일 것이란 결론에 다다랐다. 그렇지 않고서야 노숙인들이 한동안 병원을 들락거렸을 텐데 그걸 가만히 뒀을 리가 없었다. 병원 내부에서 노숙인들을 도운 이가 있다면 적어도 한 명 이상일 것이다. 이반은 산부인과 병동의 구조가 상세히 그려진 도면을 한 손에 들기 좋게 접어 쥐고는 산부인과 병동을 활보했다. 그러던 중 간호사들의 업무 데스크 옆에 세워진 카트 아래칸에서 아무 표식도 없는 상자 두 개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인연이라곤 없는 보물찾기 놀이를 하는 기분이었다. 물론 숨겨진 것들은 보물이라기에 상당히 위험하고, 비위생적이라는 사소한 문제가 있긴 했다. 상자 하나는 사람의 시신 일부임에 틀림없는 살덩이가, 다른 하나에는 폭탄이 들어 있었다. 타이머가 달리진 않은 것으로 미루어보아 시한폭탄들이 터졌을 때 그 위력을 더하기 위함인 듯싶었다. 이반은 폭탄의 처리에 대해 잠시 고민했다. 가까이서 먼저 터지는 폭탄이 없다면 이 폭탄은 터지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갑작스레 스프링클러가 천장에서 물을 뿜었다. 그와 거의 동시에 화재 경보가 온 건물을 시끄럽게 뒤흔들기 시작했다. 천장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으며 이반은 흘긋 손목의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두 시 십 분이었다. 두 시쯤엔 어떻게든 소란을 일으켜 대피하게 만들겠다더니, 어디다 불이라도 지른 모양이었다. 무식하지만 직관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이반은 빠르게 젖어가는 머리칼을 이마 위로 쓸어 넘겼다. 새벽을 찢어놓은 경보음에 잠에서 깬 사람들의 소란이 점차 커지기 시작한다. 이반은 열어보았던 상자를 그대로 덮어 원래 있던 자리에 되돌려 놓았다. 화재경보에 복도로 나온 사람들이 대피하기 위해 움직인다. 어수선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 부분 배를 받친 산모들이 여기저기 섞여 있었다. 당혹과 불안으로 물든 그들의 눈빛에서 이반은 살고자 하는 본능 역시 볼 수 있었다. 가장 밑바닥에 깔려있는 원초적인 본능. 종말이 온다면 그들의 본능도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롭게 흔들리다 꺼져버리는 걸까. 사람들 사이에 우뚝 멈춰 선 채 스쳐가는 사람들의 면면을 훑는 이반의 시선에 사람들과 반대로 걸어가는 남성의 뒤통수가 보였다. 그의 머리통이 주변 사람들보다 더 높기 때문에 눈에 더 띤 걸지도 몰랐다. 이반은 뒤통수만 보이는 남자를 주시했다. 사람들 사이를 요령 좋게 피해가며 거슬러 올라간 남자가 어느 문 너머로 모습을 감췄다. 

  

[현재 울리는 화재경보는 허위 경보이니 동요 없으시길 바랍니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더욱 커졌다. 남자가 사라진 문을 빤히 쳐다보던 녹안이 천장에 매립된 스피커로 향했다. 시끄럽게 쟁쟁대는 화재경보와 대비되는 차분한 음성이었다. 사람들이 동요하며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현재 울리는 화재경보는 허위 경보이니 동요 없으시길 바랍니다. 사람들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화재경보에 따라 대피해야 할지, 방송에 따라 다시 병실 안으로 들어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도면을 내려다보며 남자가 사라진 곳을 짐작한 이반이 성큼 발을 내디뎠다. 조금 전 사라진 남자가 그러했듯 사람들 사이를 피해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우왕좌왕하느라 앞을 가로막는 사람들을 밀쳐버리지 않기 위해 나름의 인내심을 발휘하며 남자가 사라진 문 앞에 다다라 방송실이란 팻말이 붙은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현재 울리는 화재경보는 허위 경보이니 동요 없으시길 바랍니다." 

  

문을 벌컥 열어젖히는 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방송을 마친 남자가 몸을 돌렸다. 시선이 마주친다. 또 간호사 복장이었다. 남자가 진짜 간호사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으나 그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반은 모호한 미소를 입가에 내걸고 한 번 더 해보라는 듯 남자를 향해 손짓했다. 남자가 이반의 반응을 가늠하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방송실 안으로 완전히 들어서며 문을 닫은 이반이 한 차례 더 손짓했다. 가늠 끝에 이반을 제게 우호적인 사람으로 분류한 남자가 마이크의 음성 송출 버튼을 누르며 입을 열었다. 현재 울리는 화재경보는 허위… 이반은 그사이 성큼성큼 다가가 남자의 얼굴을 그대로 방송장비 위로 처박았다. 버둥거리는 팔을 무시하고 머리채를 움켜쥔 채 들어 올렸다, 쾅 소리가 나도록 다시 한번 처박았다. 개인적은 감정은 없어요. 중얼거리듯 내뱉은 이반이 붉게 물든 책상을 내려다보았다. 남자의 코와 입에서 피가 줄줄 흘러 방송장비를 더럽힌다. 아랑곳 않고 세 번째로 처박아버리려 머리통을 들어 올렸을 때 남자의 입에서 살려달라는 곡소리가 튀어나왔다. 이반이 웃었다.

  

"하란다고 진짜 하네. 바보에요?"

"……"

"나 같으면 방송실로 올 바에 비상계단 문을 잠가버렸을 텐데. 쓸데없이 이런 식으로 나서니까 가뜩이나 못생긴 얼굴이 과카몰리처럼 엉망이 되잖아요."

  

애꿎은 과카몰리와 남자의 얼굴을 동시에 깎아내린 이반이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움켜쥐었던 머리채를 놓는다. 그리고는 남자를 처박는 사이 흘러내렸던 머리카락을 다시 쓸어 올렸다. 스프링클러가 뿜어내는 물을 그리 오래 맞은 것 같지도 않았는데 옷이며 머리가 흠뻑 젖어있었다. 이반은 데미안을 생각하며 아주 조금 이를 갈았다. 큰 병원이니 화재경보만 울려도 화재지점을 찾는 데 한참일 텐데. 쓸데없이 철저하게 일을 한다 싶었기 때문이다.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한 이반은 남자의 뒷덜미를 움켜쥐고 문 밖으로 질질 끌고 나와 밀쳤다. 

  

"폭탄이 세 시에 터질지도 몰라요. 사람들은 어쨌든 대피할 거고.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아요?"

"무슨…"

"몰라도 움직여요. 과카몰리 같은 얼굴 쳐들고 멍청하게 서있지 말고."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