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렵제

Something similar

with. 발렌틴


사람의 사회적 지위라는 것은 사회에서 그가 가진 영향력과 돈, 누릴 수 있는 권리 등을 말하는 지표다. 사회적 지위가 어느 높이에 위치 하냐에 따라 삶의 질이 크게 달라졌다. 사회적 지위는 타 구성원들과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하며 살아가는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내세울 수 있는 무기이자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방패였으나, 그것이 세상의 모든 곳에 통용되는 것은 아니었다. 때에 따라서는 그 사회적 지위라는 것이 도리어 방해요소가 되기도 했다. 이를테면 갱의 끄트머리에도 못 들어간 것 같은 시정잡배들에게 갈 길을 막힌 채 무표정으로 서있는 발렌틴 프레메르처럼 말이다. 변호사가 번듯한 차림을 하고 사람을 패는 광경을 보이는 건 분명 좋은 일은 아니리라. 노란기 도는 녹안이 이반의 탁한 녹안과 마주쳤다. 그러고 보면 처음 명함을 건네주었던 때에도 발렌틴은 노숙자들이 상대적으로 모습을 많이 드러내는 장소에서 나타났다. 

이반은 큰 로펌의 변호사씩이나 되는 사람이 자꾸만 치안이 썩 좋지 않은 길에서 발견되는 이유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그가 멀쩡한 두 발로 뉴욕의 어느 곳이든 자유의지로 갈 수 있음을 간과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딱히 도움이 필요할 것 같지 않다는 점 역시 알 수 있었다. 저렇게 선명한 골격과 잘 다져진 듯한 몸을 갖고도 그걸 활용할 수 없다는 것은 거의 죄악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이반은 몇 걸음 떨어진 자리에 멈춰 서서 상황이 돌아가는 꼴을 구경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그른 짓을 하려는 종자들은 제3자의 시선을 달가워하지 않는 법이다. 거 볼일 없으면 그냥 가던 길로 꺼지지? 시비조로 말을 내뱉는 놈을 시큰둥한 표정으로 쳐다본 이반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깨끗이 무시했다.

 

"Могу я вам помочь?"

 도와줄까요?

 

뚝뚝한 얼굴에게 물음을 던지는 음성이 느긋했다. 이반은 제게로 향한 세 쌍의 눈동자들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냈다. 뭐야, 소련 놈이야? 이제 러시아거든 병신아. 저들끼리 수군거리는 말이 멍청하기 그지없어 이반의 입술 새로 바람이 픽 빠졌다. 이반의 의도를 파악하려는 듯 가만히 쳐다보던 발렌틴이 입을 열었다.

 

"Ну, но это раздражает."

 글쎄요, 하지만 성가시긴 하군요.

 

이반의 입매가 잠시 휘었다. 그의 발음을 교정한 것이 아주 효과가 없지는 않은 모양인지, 억양이 조금 어색하긴 해도 발음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혼자서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도움을 거절할 생각은 없다는 뜻을 내포한 한마디에 이반이 잠시 턱을 매만졌다. 속뜻을 감춰 말하는 것이 발렌틴의 화법인지, 변호사들 특유의 화법인지 조금쯤 의문이 생기기 시작한 참이었다. 이반이 사소한 의문을 품는 사이, 발렌틴의 입에서도 러시아어가 흘러나오자 시답잖은 두 강도는 얼떨떨한 얼굴로 이반과 발렌틴을 번갈아 보았다. 두 사람이 아는 사이인지를 가늠하는 눈빛이었다. 짧은 정적 이후 이반과 발렌틴이 아는 사이라는 결론을 내리기로 한 건지 다시 험악한 표정을 지어보인 두 강도가 목표를 바꿔 이반에게로 다가왔다. 

묘하게 위압적이고 위협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정장차림의 발렌틴에 비해 캐주얼한 차림과 더불어 상대적으로 덜 위협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이반을 먼저 어떻게 해보기로 한 모양이었다. 생각이 빤히 들여다보여 이반은 퍽 즐거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는 뭘 쪼개냐며 아르릉대는 한 놈의 복부를 그대로 걷어찼다. 거짓말처럼 이반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진다. 이반은 나머지 한 놈의 머리채를 그러쥐어 무릎에 내려찍었다. 삽시간에 시뻘건 코피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져 내린다. 살아보겠답시고 머리채를 쥔 손목을 움켜잡는 것이 가소로워 바로 옆의 전봇대에 이마를 처박게 만들었다. 수박이 깨지는 것과 비슷한 소리가 진동이 되어 머리통을 울리는 것이 고스란히 손으로 전해졌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당연한 수순으로 머리를 재차 처박으려던 이반이 흘긋 시선을 돌렸다. 질린 표정으로 서 있는 발렌틴과 강도가 보였다. 두 사람의 차이라면 발렌틴의 얼굴엔 불편함이, 강도의 얼굴엔 겁이 서려있다는 것 정도일까. 이반에게 머리채를 내 준 놈은 이미 피며 눈물과 콧물을 여과 없이 뽑는 중이었다. 이러니 갱의 일원이 되지도 못하고 시정잡배가 된 게 뻔하다. 시시했다. 이반은 움켜쥔 머리채를 놓아주었고 두 놈은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그길로 꼬리를 말고 내뺐다. 그 다음 마주한 것은 차갑게 가라앉은 발렌틴의 눈이었다. 그에게 섞인 싸늘하고 너른 땅의 피가 눈빛의 냉기를 통해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 눈에 묻어나는 것이 경멸을 닮은 듯도 했다. 이반이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충분했나요? 이제 막 재미있으려던 참이었는데."

 

발렌틴의 미간이 좀 더 좁혀든다. 그것이 발렌틴을 한층 더 예민하고 지쳐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이반은 발렌틴 프레메르라는 이름보다 익숙한 얼굴을 빤히 마주했다. 일과처럼 반복하는 새벽 조깅에서 저 얼굴을 몇 번이나 지나쳤던지. 새벽 다섯 시는 출근을 하기에도, 퇴근을 하기에도 애매한 시간이었다. 어느 쪽이든 지독한 워커홀릭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생각했고 이반은 종종 스쳐 지나는 얼굴이 항상 불친절한 것에 대해 일말의 호기심을 갖고 있는 상태였다. 때문에 발렌틴이 손님으로 펍을 처음 찾았던 날 바로 그를 알아볼 수 있었는데, 사실 그에게 가진 약간의 호기심과 특유의 표정을 차치하고서라도 발렌틴은 쉽게 잊힐 이목구비는 아니었다.

 

"그런 걸 두고 과잉방어라고 하죠."

"세상에는 인구수만큼 다양한 기준이 있고요."

 

제 기준에서는 과잉방어가 아니었다는 것을 돌려 말한 이반이 손을 털었다. 손가락 사이에 붙어있던 머리카락 몇 가닥이 나풀나풀 떨어졌다. 그래서 신고라도 할 건가요? 마약 거래 현장을 지켜보았던 발렌틴에게 던진 질문을 똑같이 반복하며 이반은 짧게 웃었다. 아, 아까 러시아어 발음 제법 괜찮았어요. 상황에 맞지 않는 칭찬이 짐짓 상냥한 듯도 싶었다. 이반은 그것이 발렌틴의 기분을 좀 더 불편하게 만들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으나 굳이 사리지 않았다. 발렌틴 프레메르가 제게 보이는 일련의 행동(순수한 호의일 리 없다는 데에 100달러쯤 걸 수도 있었다)이 기저에 어떠한 이유를 품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싶었다. 그랬기에 이반은 발렌틴을 자꾸 건드려보는 쪽으로 행동했다. 

단지 그의 아버지와 같은 땅을 밟았고 같은 피를 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정형화하기 애매한 관계가 쭉 이어질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깊은 뜻 없이 아버지의 나라에 대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었다. 다만 발렌틴이 호기심만을 품고 움직일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게 걸렸다. 발렌틴 프레메르에 대해 탐색하려는 이반과 달리 알렉세이는 그를 경계하는 한편 반가워했다. 반가움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발렌틴의 반을 이루는 피가 러시안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법조계에 종사하는 인물이라는 것이었다. 알렉세이는 먼 땅에서 만난 모국의 피를 순수하게 반겼고 한편으론 발렌틴과의 관계를 우호적인 방향으로 가꾸어 혹시 모를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자 했다. 이반은 그 계획에 대해 회의적이었으나 알렉세이가 그 꿈을 제게 들이밀지는 않았으므로 마음대로 굴도록 내버려 두기로 했다.

"어쨌든 도움은 도움이니 빚은 갚겠습니다."

"사소한 것도 남한테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인가 봐요."

 

발렌틴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이반을 잠시 쳐다보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가던 걸음을 다시 내디뎠고, 그 곧고 위압적인 걸음을 눈으로 좇던 이반 역시 몸을 돌려 가던 길을 마저 걸었다. 펍에서 서로에 대한 것들을 눈치 챌 수 있었던 그 순간들만큼이나 가벼운 마주침에 지나지 않는 만남이었다. 이반은 '빚을 졌다'고 표현할 정도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나 발렌틴 본인이 그것을 빚으로 생각한다는데, 굳이 나서서 아니라고 말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말을 덧대야 한다면 발렌틴이 아니라 제게 해야 할 판이었다. 곤경 같지도 않은 곤경을 마주한 발렌틴을 그냥 무시하고 지나칠 수도 있었다. 이반은 자신이 돕지 않았어도 그가 상황을 정리하는 데에 어려움이 전혀 없었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답지 않은 간섭을 한 셈이다. 단지 발렌틴이 제게 보이는 일련의 행동이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를 알기 위해 건드려보는 것과는 달랐다. 얼마간의 생각 끝에 이반은 어쩌면 발렌틴이 반쪽일지언정 저와 같은 러시안의 피를 갖고 있다는 것에 설명할 수 없는 어떠한 친근감을 느끼는 것일 수도 있다는 가설에 다다랐다. 

솔직하게, 쉬이 인정하고 싶은 가설은 아니었다. 미국 땅에서 같은 러시안의 핏줄을 가진 이를 만나는 것은 아무 연관이 없는 미국인을 만나는 것보다 반가울 수 있고, 모국의 향수를 느끼게 만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반은 자신이 그런 알량한 감정을 느낀다는 것에 상당한 거부감을 느꼈다. 고작 그깟 것으로 완전한 타인에게 일말의 호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해되지 않았다. 상대의 무엇을 믿고 또 어떤 점을 알고 호감을 느낀단 말인가. 그 알량한 감정에서 비롯된 가지가 러시아를 향한 묘한 향수에 닿아있다는 점 역시 이반의 기분을 바닥으로 끌어내리고 있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발렌틴으로부터 여느 때와 같은 연락이 왔다. 이반은 발렌틴을 만났던 일전에 느낀 썩 유쾌하지 않은 기분을 다시 느낄지 모른다는 것을 알았으나, 여느 때와 같이 그 어색하고 이상한 부름에 응했다. 사람들이 두런두런 떠드는 적당한 소음과 간간히 들려오는 식기 부딪히는 소리가 거슬리지 않게 테이블 주위를 맴돌았다. 생각했던 것만큼 불유쾌하지는 않았다. 이반은 제 것과 비슷하게 창백한 얼굴을 마주하며 발렌틴이 자신을 식사 자리에 부르는 것이 저를 통해 아버지의 나라를 느끼고 싶어서 이거나, 아버지를 기억하고 싶어서 일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마치 자신이 발렌틴에게 섞인 러시아의 핏줄로 모국에 대한 묘한 향수를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신기하게도 자신이 느끼는 기분 나쁜 향수에 대해 조금은 덜 불쾌해질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지금까지 반복된 몇 차례의 만남에서 그래왔듯 함께 식사를 했고, 자연스러운 수순처럼 발렌틴이 한 권의 책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이반에게로 슥 내미는 것이 그동안과는 달랐다. 읽어달라는 뜻인가요? 의미를 묻는 탁한 녹안이 발렌틴의 얼굴로 향했다. 말하는 것만큼 듣는 것도 중요하니까요. 무덤덤하게 대꾸한 발렌틴이 물을 한 모금 넘긴다. Убить пересмешника, 앵무새 죽이기라고 쓰인 책 표지를 내려다보던 이반이 손을 뻗어 책을 집어 들었다. 갱지로 만들어진 책이 가볍게 손에 감겨왔다. 책 내용을 대충 훑어보던 이반이 짧게 웃었다. 이야기에 변호사가 나오네요, 변호사 씨. 딱히 발렌틴의 반응이 되돌아오길 바라며 던진 말이 아니었기에, 이반은 가볍게 목을 가다듬었다. 조금쯤 읽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줄 생각은 없었으므로 이반은 저 내키는 대로 아무 쪽이나 펼쳐들었다.

 

"……Потом я пошла спать Аттикус не намного больше угля в огонь на мой номер. Он сказал, что термометр в шестнадцать, что самая холодная ночь в его памяти, и что наша снеговик снаружи был полностью превратилась в ледышку."

……잠을 자기 전에 아빠는 내 방의 벽난로에 석탄을 더 넣어주셨다. 아빠는 온도계가 영하 16도를 가리키고 있고, 그의 기억에 가장 추운 밤이며, 우리가 만든 눈사람이 딱딱하게 얼었을 거라고 말씀하셨다.

 

느릿하게 읽어 내린 대목은 이반이 겪어본 적 없는 일을 그리고 있었다. 혹은 여덟 살 그 이전에 언젠가 한번쯤은 있었을 수도 있었다. 물론 부모의 죽음 이전의 기억은 제대로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없었다. 이반의 시선이 조용히 경청 중인 발렌틴에게로 향했다. 그에게는 책 속의 내용과 닮은 추억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발렌틴은 지금 평소와 같은 냉막한 얼굴을 하고 그 언젠가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찔러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것 같은 발렌틴 프레메르도 과거를 추억할지. 이반은 몇 번의 만남이 쌓이는 동안 발렌틴이 저가 가진 것과 비슷한 불신이며 냉소를 품고 있다는 데에 약간의 흥미를 느꼈다. 

분명 지금의 이반과 발렌틴을 만든 지난 시간들은 극과 극일게 분명했다. 각자가 딛고 선 높이나 가진 사회적 지위만 놓고 보아도 그 사실은 명백하다. 변호사 발렌틴 프레메르가 되기까지 풍족한 환경에 깨끗하고 좋은 길만 펼쳐져 있었을 것 같은데 그가 밑바닥에서 구른 저와 같은 감정들로 세상을 보게 된 이유는 어디에 닿아있을까. 물론 그런 부정적인 감정들을 갖게 만드는 '상황'이란 것은 지독히도 상대적인 기준이어서, 어쩌면 학창시절 친구들에게 당한 장난과 사기가 그러한 '상황'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누군가에겐 아무것도 아닌 아주 사소한 일이 이유일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뻗어가려는 생각의 끝을 잘라낸 이반이 다시 책장을 파르륵 넘긴다.

 

"……Я думал, он бы прекрасный сюрприз, но он убил моя радость. Вспышка и страх был из его глаз, но вернулся, когда Дилл и Джем wriggled на свет."

……나는 아빠가 꽤 놀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빠의 얼굴 표정을 보는 순간 기쁨이 금방 사라져버렸다. 아빠의 두 눈에서 분명한 공포의 빛이 반짝이다 딜과 젬이 불빛에 나타나자 사라졌다.

 

몇 줄을 쉼 없이 읽어 내려와도 빈약한 상상력으로는 짐작할 수도 없는 감정선과 그려지지 않는 상황들이 지루하기 그지없어 두어 줄을 더 읽어 내린 이반이 결국 책을 덮었다. 테이블 위의 접시에 줄곧 닿아있던 노란빛 녹안이 이반에게로 향했다. 이반은 먹혀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사람 좋은 척 하는 미소를 입에 걸었다.

 

"이런 지루한 책 말고 다음엔 다른 걸 하는 건 어때요? 책 말고 서로의 이야기라던가.

"왜 그래야 합니까."

"당신은 러시아어가 아니라 아버지의 나라가 궁금하니까."

 

안 그래요, Валя? 러시아 발음으로 불리운 애칭에 발렌틴의 얼굴이 한층 더 냉막해졌다. 이미 충분히 웃음기가 없는 얼굴이었는데, 거기서 더 정색할 수 있다는 것이 묘하게 웃겼다. 가깝지 않은 사이에 애칭을 불리는 것이 그렇게도 불쾌한 모양이었다. 이반은 피식 웃음 지었다. 변호사도 포커페이스가 필요한 직업 아니었어요? 너무 대놓고 그러지 마요. 상처받을 것 같은데. 실제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주제에 상처를 운운한 이반이 테이블에 올려놓은 책을 발렌틴에게로 다시 밀었다. 웃음기 없는 노란빛 녹안이 잠시 찌푸러들었다. 이반의 제안을 못마땅해 하는 것 같았다.

 

"한 번 생각해 봐요. 이쪽이 책 읽는 것보다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요?"

 

오늘의 식사를 계산한 것도 발렌틴이었다. 이반이 계산을 하는 날도 있었으나 대개는 발렌틴이 계산을 하는 편이었다. 이반은 그것을 발렌틴에게 러시아어 발음을 교정해주는 대가인 것처럼 생각했고, 어쩌다 저가 내키는 날이면 불쑥 발렌틴보다 먼저 계산을 해두곤 했다. 식사를 끝내고 가게 밖으로 나서자 몇 차례의 만남이 흐를 동안 한결 더 짧아진 해가 빌딩들 사이로 모습을 감추었고 하늘은 푸르게 어둑해져 있었다. 이제 막 켜지기 시작하는 가로등과 간판의 불빛들 아래에서 이반은 그림자 진 자리를 딛고 선 발렌틴의 창백한 안색이 어둠에 물들어 더욱 창백하고 파르랗게 보인다 생각했다. 사늘한 바람이 두 사람을 쓰다듬고 지나갔다. 다음에는 어릴 적 아버지와의 추억이라도 이야기 해주길 기대할게요. 인사를 대신해 하고 싶은 말을 툭하니 건넨 이반이 대답도 듣지 않은 채 돌아섰다. 어차피 못마땅해 보이는 발렌틴의 입에서 나올만한 대답은 거절이거나, 거절일 게 뻔했으므로. 들을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발렌틴을 향한 이반의 얄팍한 호기심은 일주일을 넘어가면서 흐려졌다. 그러고도 닷새가 지날 동안 발렌틴은 펍을 찾지 않았고, 이반을 달리 불러내는 일 역시 없었다. 이반은 그가 러시아에 대해 흥미를 잃어버렸겠거니 적당히 생각했으며 알렉세이는 그럭저럭 붙잡을만한 줄이 되어줄지 모를 발렌틴이 이대로 영영 발길을 끊을까 전전긍긍했다. 엿새째가 되자 참다못한 알렉세이가 이반에게 연락처를 알지 않느냐던가, 요즘 바쁜지 텍스트를 보내 보라던가, 아는 사람으로부터 펠메니Пельмени를 좀 받았으니 먹으러 오지 않겠냐 물어보라며 마치 첫사랑에 빠진 사람(솔직히 미친놈 같았다)처럼 이반을 달달 볶아댔다. 

거래해야 할 약을 건네받으러 펍에 들렸던 이반은 그런 알렉세이를 향해 진심으로 짜증을 냈다. 애초에 피만 반쯤 섞였을 뿐 미국에서 나고 자란 미국인이 러시아인에게 동질감을 느끼기나 하겠느냔 말이다. 물론 알렉세이가 발렌틴과의 친분을 탐내며 전전긍긍하는 이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최근 할렘을 중심으로 인근까지 술집을 돌며 약을 파는 이들이 있었고(알렉세이는 그들에 대해 조사하며 상도덕도 모르는 후레자식들이라 가차 없이 깎아내렸다), 지나치게 무분별한 거래 탓에 그들을 잡기 위해 순찰이며 잠복이 부쩍 늘었다. 알렉세이가 위장을 위해 시작한 펍 Holyoke는 성공적인 위장을 위해 약과는 무관한 공간으로 운영되고 있었지만 숨바꼭질도 술래가 자꾸만 옆에서 알짱거리면 불안해지는 법이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 같은 것이라면 뭐든 붙잡고 보험을 들어놓고 싶은 게 당연할 터였다.

 

기실 대낮은 약을 거래하기에 좋은 시간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반은 해가 어느 높이에 머무르고 있는지와 관계없이 약을 거래하는 편이었다. 그것은 '이반 아이스토프'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했고,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반은 햇볕을 온 몸으로 받아내느라 번쩍이는 빌딩을 올려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약을 배달하는 일은 잘 하지 않는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돈깨나 만진다는 이들은 하나같이 엉덩이가 무거워 약을 코앞까지 들이밀어 주길 바라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알렉세이는 약을 멀리 보낼 때가 아니고서는 심부름꾼을 잘 쓰지 않았으니, 약을 배달하는 일은 대체로 이반의 차지였다. 빌딩 앞에서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이질적인가를 잠시 생각한 이반이 대수롭지 않은 듯 오가는 사람들 덕분에 쉴 틈 없이 돌고 있는 회전문 안으로 발을 들인다. 

익숙한 건물을 찾아온 것처럼 걷는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주변과 어울리지 않는 복장을 수상하게 여겨 불러 세우는 경비에게 약을 배달받을 고객으로부터 미리 전해 받은 정식 출입카드를 보여준다. 의혹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는 마뜩찮은 눈빛을 향해 있지도 않은 아버지를 팔아넘기며 서류를 전달하러 왔노라 너스레를 떨고 손에 든 눈속임용 서류봉투를 흔들어 보인다. 진짜 물건은 점퍼 속 안주머니에 있었다. 의심스럽긴 해도 정식 출입카드를 소지하고 있으니 경비는 별 다른 제제를 않았고 이반은 무리 없이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통로를 지나친다. 배달은 순조로웠다. 고객의 사무실은 18층에 있었고, 이반은 무사히 약을 전달했으며, 약값의 삼분지 일에 해당하는 잔금을 받아 점퍼의 안주머니에 넣었다.

 

순조롭게 끝나가던 이반의 발걸음을 잡은 것은 엘리베이터 문 옆에 붙은 층별 안내판이었다.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길 기다리며 별 생각 없이 훑던 안내판에서 익숙한 이름을 발견한 것이다. 두 개의 층만 올라가면 클리포드 로펌의 로비였고 이반은 그것이 발렌틴의 명함에 쓰여 있던 회사의 이름이란 것을 기억해냈다. 문득 저를 달달 볶아대던 알렉세이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리는 듯했다. 점점 내려오는 엘리베이터의 층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고민에 빠졌던 이반이 비상계단을 향해 몸을 돌렸다. 징징거리던 알렉세이가 몹시 귀찮고 성가시긴 해도 그가 잘못된다면 이반 역시 뉴욕에서의 삶이 귀찮은 방향으로 꼬일 수 있었다. 그러니 알렉세이가 원하는 대로 작은 보험을 들어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이반은 비상계단을 통해 가뿐하게 두 개의 층을 올랐다. 그리고 맞이한 클리포드 로펌은 상아색 톤으로 정돈되어 있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화려해 마치 대리석으로 만든 고대 유적의 전성기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끔 만들었다. 또각또각 대리석 바닥을 내딛는 단정한 걸음과 종이가 팔랑이는 소리, 전화벨 소리가 바쁘게 돌아가는 공간임을 일깨운다. 각자의 일로 바삐 움직이는 이들을 눈에 담는다. 스물아홉 평생을 법과 상당히 먼 거리에서 살아 온 이반으로서는 난생 처음 디뎌보는 공간이었다. 공기조차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온통 정장차림인 사람들을 탁한 녹안으로 훑으며 이반은 발렌틴 프레메르와 자신이 살아온 세계가 극과 극임을 새삼 다시 깨닫는다. 부지런한 개미들의 성채에 들어서면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이반은 로비의 데스크를 가볍게 똑똑 두드렸다. 안내 및 고객 응대를 위해 앉아있던 헤이즐넛 색 눈이 이반의 얼굴로 와 닿는다. 이반은 그 시선을 향해 도움이 필요한 사람처럼 조금 곤란한 듯 웃었다.

 

"안녕하세요. 수고가 많으시네요. 이민법과 형사사건 쪽을 담당하는 발렌틴 프레메르 씨를 찾아왔는데요. 사무실이 22층이던가요? 기억이 안 나서요."

"잠시만요. …발렌틴 프레메르 씨 사무실은 23층입니다. 약속은 하셨나요?"

"네. 아까 통화했는데 사무실로 오라더군요. 올라가 봐도 되겠죠?"

 

그럼요. 선뜻 권하는 친절에 이반은 천연덕스럽게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안내까지 받아 23층으로 향했다. 로비부터 23층까지 모든 바닥이 매끄러운 대리석이었다. 23층이 찾기 어려운 곳도 아닐진대 굳이 앞장서 안내해준 직원에게 웃는 낯을 내보인 이반이 대리석 바닥을 디뎠다. 평소에도 발소리를 죽인 걸음이 조용하게 복도를 가로지른다. 얼마를 걸었을까, 사무실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유리벽을 통해 발렌틴 프레메르란 명패가 올려진 책상을 발견한 이반이 망설임 없이 사무실의 유리문을 열고 들어선다. 마치 제 사무실이라도 되는 양 퍽 대범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이반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는데, 로펌 내의 모든 이들이 일개미처럼 바삐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의 사무실에 누가 들어서든 신경 쓸 여유가 있어 보이는 이는 없었다.

사무실 안은 서류가 많을지언정 깔끔하고 단정한 공간이었다. 빈 꽃병의 주둥이를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책상 위를 눈으로 훑었다. 발렌틴의 흔적이 남아있는 책상이며 벽 한켠에 걸린 캔버스 그림, 빼곡하게 꽂혀있는 책과 서류들까지 눈으로 훑어 대충 사무실 구경을 끝낸 이반이 응접용으로 마련되어 있는 소파에 앉아 한 장의 유리 밖 광경을 눈에 담는다. 밖에서 안이 고스란히 들여다보이는 유리문과 벽은 오로지 소리를 차단하기 위한 목적만을 갖고 있는 듯했다. 변호사란 족속들은 타인의 시선을 받기를 즐기는 걸까. 혹은 무언가로 격해진 의뢰인이 주먹을 휘두르는 일이 없도록 투명하게 만들었을 지도 몰랐다. 그것도 아니라면 불법 청탁이나 비리가 일어나지는 않는지 서로를 감시하기 위함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이반은 이런 공간에 앉아 일을 하는 것이 맨몸으로 두툼한 지갑을 손에 들고 할렘의 으슥한 골목을 걷는 것과 비슷한 일처럼 느껴졌다. 복도를 바쁜 걸음으로 오가던 정장 차림의 사람들과 벌써 몇 번째 시선을 주고받은 건지 모르겠다. 반은 무관심한 눈빛을, 반은 약간의 호기심을 띈 채 이반을 흘긋 보고는 복도를 이리저리 지나쳐갔다. 바쁜 사람들과 유리벽 하나로 단절되어 느긋하게 있으려니 마치 그들과 저가 있는 곳이 다른 세계인 것만 같았다. 문득 다른 사람들처럼 복도를 지나던 남자 하나가 이반을 발견하고 멈칫, 걸음을 세웠다. 잠시 망설이는 듯 주춤거린 남자가 유리문을 열고 몸을 반만 밀어 넣은 채 호기심과 경계가 뒤섞인 눈으로 소파에 앉은 이반을 살폈다. 남자와 시선을 마주하던 이반이 별다른 말없이 소파에 좀 더 등을 기댔다. 편한 옷차림의 이반은 정장을 차려입은 사람들뿐인 공간에서 이질적이고 어울리지 않는 존재임이 확실했다. 남자의 묘하게 피곤해 보이는 인상과 새하얀 셔츠, 목을 적당히 조인 넥타이가 전형적인 화이트칼라의 이미지를 담고 있었다. 로펌의 직원 혹은 다른 변호사겠거니 생각하며 이반은 남자를 향해 비교적 선한 웃음을 꾸몄다.

 

"발렌틴은 지금 로펌 안에 없는데요. 약속은 하셨나요?"

"발렌틴이 먼저 사무실에 와 있으라고 해서요."

 

제법 친근하게 발렌틴이라는 이름을 발음해낸 이반이 문제될 것이 있냐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남자는 의아한 얼굴로 잠시 갸웃하는 듯 했지만 손목시계를 살피더니 발렌틴이 아마 삼십 분 안에는 돌아올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약속을 만들고 온 것도 아니었으니 발렌틴이 언제 돌아오든 크게 상관은 없었다. 아직 펍이 영업을 시작하려면 제법 시간이 남아있는데다 이반은 딱히 시간에 돈을 매겨야 하는 사람은 아니었고, 기다리는 일에는 익숙했다. 그 대상이 약쟁이냐 변호사냐의 차이가 생겼을 뿐이다. 매끄럽게 잘 관리된 가죽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하릴없이 시간을 죽이던 이반이 한참 만에 개인 사무실의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는 발렌틴을 향해 작위적으로 반갑게 웃어 보인다. 당혹으로 굳어진 얼굴과 노란기 섞인 녹안이 오랜 기다림에 대한 보상인양 퍽 즐겁게 다가왔다.

 

"왔어요? 한참 기다렸어요, 발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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