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렵제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이니

개인로그


이반 블라디미로비치 아이스토프는 멸망을 욕망했다. 멸망을 원한다는 것을 처음 인식한 때는 악마 푸르카스를 마주쳤을 때였다. 세상에 켜켜이 쌓인 신의 안배를 증오할 수 있을 것 같다 느꼈다. 그와 더불어 이반은 멸망을 향한 제 원함이 그보다는 오래되었음 또한 깨달았다. 그러나 그것의 정확한 시작은 알 수 없었다. 부모의 죽음을 목격하고 길거리로 도망쳤을 때? 교도소에서 첫 살인을 저지르고 두들겨 맞았을 때? 라스칼로프의 손아귀에서 아등바등 몸부림칠 때? 계기가 될 만한 시발점은 이반의 인생 곳곳에 놓여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언제부터 멸망을 욕망하기 시작했는지를 아는 것은 썩 중요하지 않았다. 멸망을 원한다는 것만으로 모든 게 충족되었다. 이반이 생각하는 멸망은 마냥 나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멸망의 단어 아래 놓이는 것이 폐허일 뿐이라 해도 이반의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다. 폐허에서 모든 것은 공평해진다. 폐허는 모든 것이 고요하다는 점에서 평화를 닮아있다. 이반이 보기에 멸망은 불균형을 균형으로 돌리는 장치였다. 똑같은 시궁창에서조차 윗물과 아랫물은 다르다. 모든 곳에 불균형은 산재해있었다. 물에 잠긴 진흙도 한 번씩 뒤집어주지 않으면 그 아래가 썩는다. 세상이라는 것 역시 그러하다 생각했다. 물론 이반은 전 지구적 사고를 하는 부류의 인간은 아니었으므로, 그것은 그저 거창한 허울에 가까웠으며 이반에게 멸망은 사욕邪慾 그 자체였고 사욕私慾을 채우기 위한 도구였다.

  

그러나 멸망을 욕망하는 것 치고 이반은 적극적으로 멸망을 위해 움직이지는 않았다. 평소와 같이 정키들에게 약을 팔았고, 많은 것들을 묵인하고 넘겼으며, 방관했다. 선행은 없었으나 뚜렷한 악행 역시 없었다. 묵인과 방관 그리고 약쟁이를 만들어 내는 것은 미약한 행동에 지나지 않는다 했다. 그러나 푸르카스는 이반에게 멸망을 위해 움직이길 딱히 강요하지 않았다. 좀 더 적극적으로 관여하기를 바라기는 했으나 지켜볼 때가 더욱 많았다. 푸르카스는 이반을 자주 관찰했고, 이반은 푸르카스가 자신을 통해서 인간의 행동을 익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종종 받았다. 악마가 인간의 행동양식을 익힐 필요가 무어 있을까 싶었지만 이반 역시 그것을 지켜보는 쪽을 택했다. 제겐 그것을 굳이 저지할 이유가 없었다. 이반과 푸르카스는 멸망이 다가오는 그 날까지 서로를 비슷하게 대했다.

 

 

NY, 1999.07.17. 03 :00 AM  

 

문득 눈을 뜬다. 날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 틈엔가 땅 위에 두 발을 딛고 서 있다. 마치 짧은 잠에 빠졌다 깨어난 것 같았다. 사위는 여전히 환했으나 종전의 광경과는 조금 달랐다. 하늘을 덮어 가린 반구의 결계가 가장자리부터 바스라지고 있었다. 눈발이 나부낀다. 7월의 하얀 밤과 7월의 눈을 보며 이반은 기억에 묻었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하루를 다시 떠올린다. 이반의 낮과 쿠팔라의 밤. 활활 타오르던 주홍빛 불길과 사람들의 웃음과 즉석에서 연주되던 음악이, 가슴 속을 간지럽게 만들던 사람들의 감정이 눈앞에 선연했다. 그리고 이반은 깨닫는다. 십 년 전 그 순간 그들의 웃음소리를 조금쯤 동경했었음을. 보통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평범한 삶에 대한 욕망을 처음으로 가슴에 심은 날이었음을. 그 씨앗이 싹을 틔운 것은 십 년이 지난 뉴욕이었음을. 손을 뻗어 잡을 새도 없이 사라져가는 싹의 잔상을 느끼며 이반은 자신이 사실은 평범한 삶을 갈망했고 질투했으며 욕심냈던 것을 뒤늦게 자각한다. 삶을 향한 희망이, 욕구가 흐려져 간다. 첫 번째 소실이었다. 이반은 저도 모르게 가슴께의 옷을 그러쥐었다. 구멍이 난 것 같았다. 피를 쏟는 대신 시커먼 무저갱이 입을 벌렸다. 그 암흑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휑하니 선득한 바람이 빈자리로 들이친다. 잃는 순간 존재를 깨닫는 것만큼 의미 없는 일이 어디 있을까. 팔랑이며 공중을 나부끼던 눈송이가 사뿐하게 속눈썹 위로 내려앉았다. 이반은 눈을 깜빡인다. 마치 눈물처럼, 눈송이가 뺨 위로 미끄러져 내렸다.

 

미카엘의 결계가 깨어짐과 비슷한 시점에 동조 중이던 이반의 몸에서 튕겨져 나온 푸르카스는 두 귀를 감싼 채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였다. 인간이 느낄 수 없는 무형의 고통에 괴로워하며 입술을 짓씹는 것을 멀겋게 쳐다보았다. 고통을 느끼는 악마는 마치 나약한 인간처럼 보였다. 자신의 허물을 고해하는 고해자처럼, 혹은 자신들의 앞날을 전혀 알지 못했던 뭇 인간들처럼 무력하게만 느껴졌다. 문득 소리가 멀어져간다. 갑작스레 티비의 볼륨을 줄인 것과도 같은 소거가, 귓가를 맴돌던 소리를. 눈은 소리를 잡아먹는다. 나부끼는 눈이 소리를 앗아가던가? 이반의 하얀 손이 오른쪽 귀를 천천히 감쌌다. 귀를 감싸면 으레 들리곤 하던 바닷소리가 잠잠했다. 아. 고요 속으로 가라앉는다. 두 번째 소실이었다. 언젠가의 권태가 느리게 몸을 일으킨다. 이반은 두 가지의 소실로 자연스레 루시퍼의 패배를 알아차렸다. 직감이었다. 결계가 깨진 것은 루시퍼에 의해서가 아니다. 세상은 멸망하지 않는다. 언제나와 같이 굴러갈 것이다. 악마들은, 악마의 동조자들은 패배했다. 멸망을 가져오지 못했다. 소실은 그 대가인 걸까. 이 세상에 반작용이 없는 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반은 멍하니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세상을 두 눈에 담았다. 멈췄던 시계 바늘이 움직인다. 결계 아래에서 망가진 것들이 제자리를 되찾는다. 목전에 들이닥쳤던 멸망의 가능성은 애초에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는 듯 수복되고 있었다. 그 광경을 쳐다보며 이반은 할렘으로 오기 전 병원 앞에서 자신이 목을 꺾은 이들을 떠올렸다. 그들의 어긋난 목뼈가 수복되는 건물처럼 제자리를 찾아갈 것인지를 가늠한다. 알 수 없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앞으로의 일을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누가 말했던가? 살면 살수록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점점 사라져만 간다고.¹ 이반은 상황을 이해하길 포기했다. 이제는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수용하기로 한다. 눈앞에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는 영혼의 형체들부터. 그들은 어느 곳에나 있었다. 산 사람과 그렇지 못한 것이 한데 뒤섞여 눈앞을 어지럽혔다. 사람들 틈에, 건물 사이에, 허공을 맴도는 영혼들을 이제껏 보지 못했던 것은 축복 혹은 배려가 아니었을까. 눈앞을 흐리는 어찔함에 깊이가 얕은 생각이 머릿속에서 찰랑인다.

"…이반."

고개를 들어 허공을 보던 탁한 녹안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선명한 다홍의 눈이 이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렇다 할 감정을 담지 않던 눈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가늘게 떨리고 있다 생각한다. 혹은 착각이거나. 이반은 깊게 가라앉은 눈을 깜빡였다.

"영계가…물질계와 분리됐습니다. 강제로 찢겨나갔어요. 영계와 그곳의 영혼들 모두가 소멸했습니다. 물질계에 남은 모든 영체들은 업의 굴레가 끊겼고 더 이상 돌아갈 곳 또한 존재치 않아요."

"…꼭 버려졌다는 것처럼 들리네요."

 

이반은 조금쯤 혼란스러워 보이는 푸르카스를 내려다보았다. 평소의 신경질적이고 차갑던 모습 사이로 지금 벌어진 상황에 대한 혼란이 들여다보였다. 푸르카스의 말대로라면 지옥이 사라졌다는 뜻이니, 혼란한 기색을 내비칠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석상처럼 굳어있던 주변의 사람들이 멎었던 시간을 깨고 나와 하나둘 움직이기 시작하는 동안에도 이반은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푸르카스를 내려다보았다. 주변의 소리가 가깝고 또 멀었다. 이봐요, 괜찮아요? 왼쪽에서 다가오는 음성에 이반의 눈이 소리 없이 굴렀다. 다쳤느냐 물어오는 얼굴을 말없이 쳐다보았다. 이 사람은 이전과 같이 평범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 멸망이 실제로 코앞에 다가왔었다는 것은 꿈에도 모른 채, 제게 안배된 평범한 삶을. 불쑥 떠올라 이반의 머리를 휘젓고 지나가는 생각이었다. 대답 없는 이반을 이상하게 바라보던 이가 이윽고 주춤주춤 눈치를 살피며 다시 멀어져간다. 이반의 시선이 푸르카스에게로 돌아갔다. 새로운 구원은 루시퍼의 패배와 함께 의미를 잃었다. 의외로 머릿속이 잠잠했다. 그저 수용하기로 한 탓인지 딱히 지금의 상황에 대해 이렇다 할 감정이 생겨나지 않았다. 마치 방관자가 되어 남의 일을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것이 이반을 차분하게 만들었다.

 

"멸망은 없던 일처럼 돼버렸네요. 당신은 돌아갈 곳을 잃었고."

"…자유를 얻은 거라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꽤 긍정적인 악마가 아닌가. 이반이 희미하게 실소했다. 악마에게 긍정적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지를 생각하는 사이 몸을 일으킨 푸르카스가 날개를 갈무리 해 넣었다. 이반은 푸르카스를 나무라지 않았다. 그에게 화를 내지도 않았으며 원망 또한 하지 않았다. 무의미한 일이다. 악마와 손을 잡은 것은 오롯한 자신의 선택이었으며 이반은 실제로 멸망을 욕망했으므로. 어쩌면 떠안아야 하는 것을 당연히 떠안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상황이 반대였다면 천사의 동조자들에게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 돌아갈 곳도 없어졌잖아요."

"계속 동조해 줄 의향은 있습니다. 이반 당신이 약 파는 것을 그만두지 않는 한 그 능력이 필요할 테니까요."

 

이반은 입술을 비틀었다. 푸르카스가 이유도 없이 선심 쓰듯 말할 리가 없었다. 그가 계속 제 옆에 남아있어 줄 것처럼 말하는 이유에 대해 여러 가지 가능성을 꼽아본다. 이반의 생각은 의외로 빨리 그럴듯한 답에 가 닿았다.

 

"푸르카스. 대가를 치른 게 나만이 아니란 뜻이네요, 그거."

"……"

"말해요. 그러지 않으면 당신이 원하는 건 들어줄 생각 없으니까."

"악마의 동조자들이 대가를 치렀듯, 우리도 대가를 치렀습니다."

 

그래서 동조자가 필요하다? 이반이 물었고 푸르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이반은 그 행동이 그를 인간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 같다 생각했다. 사람인 자신은 무감한 와중에 인간처럼 느껴지는 악마라. 웃음이 나지는 않았으나 웃겼다. 상황이 뒤집어진 것만 같아서. 그럼 나는 푸르카스 당신의 새로운 구원인가요? 이반은 새로이 물었고 푸르카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상황을 회피하듯 둘 사이를 지나쳐가는 영혼에게 시선을 주었을 뿐이었다. 이반 역시 움직이는 영혼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저도 모르게 갈망했던 삶의 희망과 욕구를 잃은 자신이 시간의 틈에 멈춰버린 영혼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어느 눈 내리는 밤의 우울과 권태가 선명히 윤곽을 드러낸다. 가느란 호흡이 희미하게 공기 중으로 뒤섞여 사라진다. 선명한 형체만을 가진 유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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¹ 줄리언 반스 -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제목은 빌립보서 1절 28장의 일부를 차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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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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