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전

오렌지 by 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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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귀환 동인지 <겉과 속이 다른데 배보다 배꼽이 크기까지?!> 축전

회지 인포 https://twitter.com/A16071839/status/1746721687700385943

약간 거의 3차 창작처럼 되엇군요... 아이소 R11 많관부입니다

그럼 시작~

 

암존의 폐관이 끝났다.

당가타는 불현듯 등장하여 가문의 장로를 자칭하는 고수의 존재로 난리였다. 가주가 직접 나서 공표하지 않았더라면 상대가 되든 말든 진작에 벌 떼처럼 들고일어나 피켓시위를 해대고도 남았을 터였다. 그가 아무리 공부가 높아도, 당씨 성을 단 그 누구보다 독술에 능통해도, 암기를 수족이래도 모자랄세라 거의 뭐 입속의 혓바닥처럼 놀려도……. 엥? 보다 보니 그냥 당씨 삼는 게 이득일 것 같다. 하, 할아버지……!

순조롭게 자리 잡은 그는 언제부턴가 조금 초조해 보였다. 곧잘 먹던 음식도 내치고, 곧잘 들이켜던 술도 내치고, 담배만 뻑뻑 피우면서 마루에서 먼 산이나 보는 시간이 길어졌다. 어떤 일인가로 조급하다기엔 차라리 무언가 기다리는 것이 있는 듯했다. 마당을 뱅뱅 돌며 혼잣말을 씨근거리는 모습이 목격된 적도 있었다. 가주가 무어 불편하시냐고 물을라치면 그런 거 없다고 손이나 내젓고는 또다시 온 마당을 뭐 마려운 개마냥 발발거리기 일쑤였다. 본디 기이한 인사임에는 틀림이 없었으나 나날이 보이는 이상 행동에 보는 사람들까지 덩달아 불안정해지는 시일이 흘렀다.

그리고 암존 재데뷔 반년 후.

태상장로 가출 이슈가 터졌다.

 

당보의 가출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백 년 전에는 사천은 물론이요 산 넘고 물 건너 섬서까지도 자자하게 퍼진 당연한 사실이었다. 당가가 독문이며, 화산이 도문이고, 섬서제일도문의 장문인이 등 뒤에 달고 다니는 뭔 장로가 종남파를 사파처럼 후드려 팬다더라는 소문만큼이나 유명한 이야기였다. (물론 과장이다. 당가도 체면이 있다. 장로 하나 간수 못 한다는 치부는 서로서로 힘닿는 데까지 감춰 주기로 화산파와 사천당가는 합의를 본 지 오래였다. 두 분 다 그 나이 자시고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뛸 기력은 어디서 나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 우리네 술창고인가…….) 그러나 지금은 이야기가 좀 달랐다. 청명은 장로가 아닌 삼대제자요 나이 어린 후기지수이고, 당보는 사자의 먼지와 낡은 명예를 뒤집어쓴 옛 시대의 망령일 뿐이었다. 망령이 생전에 가출을 하루에 몇 번이나 했는지 살아 숨 쉬는 생자들이 어찌 알랴. 더불어 망령이 생령 되었다고 생전의 습관을 잊을쏘냐.

사천당가의 위대한 망령 암존은 고요하며 또한 화려하게 부활했다. 꼬장꼬장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당씨 노인네 집단이 하늘을 수놓은 꽃비를 마지막으로 기절하여 두 시진 후 의약당에서 눈을 떴다는 사실은 알음알음 퍼져 이제는 사천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오결개도 아는 사실이다. 소문이 퍼진 후로 당가는 여러 손님을 받게 되었다. 축하와 감사, 의심과 불신을 밤낮으로 맞이하다 그마저도 잠잠해진 것이 두어 달 전. 당보가 밤낮없이 다리를 달달 떨며 지내기 시작한 지도 두어 달쯤 되었다. 이유는 별것 아니었다. 아, 진짜 별거 아니라고.

“아니 왜?!”

“무슨 일이십니까 어르신!”

청명이 방문하지 않는다.

폐관이 끝났다는 소식을 분명히 들었을 텐데 마른하늘에 날청명이 떨어지지도, 아닌 밤중에 홍청명이 덮쳐들지도 않았다. 당보는 믿을 수 없었다. 그는 폐관에 들 때 굳은 결심을 하고 들어갔다. 후일 들이닥칠 형님의 압제에도 굴하지 않으리. 폐관을 풀고 나올 때에도 굳은 마음은 변치 않았다. 형님을 놀려 먹은 달콤함에 비하면 그 어떤 풍파도 달게 느껴지리라. 이때까지만 해도 당보는 정말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재데뷔하는 즉시 누구보다 빠르게 청천명력이 몰아치리라고. 또한 그에 결코 굴복하지 않으리라고.

‘아니, 이제 나이도 내가 더 많다고!’

그렇게 두 계절이 지났다. 청명은 코빼기도 비치치 않았다. 그렇다고 화산파 도복 자락 하나 보지 못했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도를 아는 도문 화산은 누구보다 빠르게 축하를 전했다. 암존당보폐관종료겸부활및재데뷔축하사절단에는 사람도 와글와글 선물도 바글바글했다. 심지어 그의 취향과 입맛과 행동거지를 잘 아는 인간이 참견에 참견을 거듭해서 꾸려진 게 빤히 보이는 선물 목록이었다. 여기까지는 당보도 감동을 받을 뻔했다. 그러나 당사자가 보이지 않아 (생략)사절단을 이끄는 화산의 제자에게 물으니 돌아오는 말이 이랬다.

‘그……. 갑자기 배탈이 심해서 불참하였습니다.’

뭐? 배탈? 청명이? 대화산파가 아니라 개방인지 녹림인지에서 태어났어도 오만 잡것 잘 주워 먹고 오천만 무림인 잘 후려 패고 다녔을 그 인간이? 당보는 우선 귀를 의심했다. 그다음으론 걱정했다. 무슨 방이 기승이라던데 아직 무위를 되찾지 못한 형님이 허튼 수에 당했나? 캐물으려던 찰나 말을 전한 대제자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수려한 눈동자가 떨린다. 매끄러운 입매도 살짝 일그러졌다. 이마엔 약간의 식은땀이 맺혔으며 안면에는 가벼운 홍조가 돈다. 요약하자면, 더없이 민망해 보였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온 얼굴로 이 대사를 시킨 누군가를 원망하고 있었다.

그쯤 되니 수년간 저보다 어린 놈에게 적잖이 시달렸을 청년이 불현듯 불쌍해져 당보는 대화를 물렸다. 어른다운 덕담도 잊지 않았다. 화정검이라 하였던가, 그러고 보니 청명이 포함된 오룡의 일원으로 올라 있던 기억도 났다. (천하의 매화검존에게 용봉의 별호가 붙은 꼴을 보다니 정말이지 다시 없을 귀한 경험이었다. 영원히 잊지 말고 꼭 놀려 먹어야지.) 화산신룡을 제하면 오룡 중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가 나돌더니 과연 못 보던 새에 한층 더 깊은 고수의 기운을 갖추고 있었다.

화산에서 두각을 보이는 이대제자 둘에게 당보는 내심 기대하는 바가 있었다. 그의 기저에 도사리고 있는 상승의 무리武理를 향한 갈망과 집념. 청명에게 덤벼드는 세월 끝없이 망치질된 그것은 정점과 나락을 오가며 담금질을 거쳤다. 그리고 폐관에 들어 외공을 단련하며 새로운 불꽃을 피워올리기 시작했다. 아주 기초적인 신체 단련에서부터 수련을 시작한 당보는 폐관 내내 마치 무공을 처음 배우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에 빠져 있었다. 죽어 있던 몸뚱이가 활력을 얻고 강인해져 간다. 어느 경지를 넘어서고부터는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성장의 감각이 희열처럼 전신을 휘돈다. 닫힌 관을 열어젖히고 나와 다시금 삶生을 살아가기 시작한 암존의 혼은 싱그러운 무림武林의 향을 탐욕스럽게 빨아들이기 시작한 차였다.

‘혜연이라는 아이도 범상치 않았지……. 하여간 도사 형님 옆에 붙어 있으면 심심할 틈이 없다니까.’

당보는 순조롭게 익어 가고 있는 미래의 비무 상대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어른의 덕담에 사심이 섞였다. 감사히 경청하던 백천은 갑자기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소름에 눈동자를 떨었다. 한때 청명이 놈과 좀 어울려 다니시더니 뭐가 옮…… 옮기라도 했는지(진짜죄송합니다암존) 눈앞의 어르신을 대하는데 청명이 수중 수련 각 잴 때나 울리던 경종이 뎅뎅 울려 대고 있었다. 백천은 하하 웃고 정중하게 포권한 후 침착하게 자리를 떴다. 매끈한 이마를 타고 식은땀 한 방울이 또르륵 흘러내렸다. 백천은 몸이 좀 허한가 의심하며 오후 수련 강도를 높이기로 결심했다. 필사의 현실 도피였다.

멀어져 가는 균형 잡힌 등짝을 보며 당보는 내심 입맛을 다셨다. 우리 애들도 빨리 커야 할 텐데, 어떻게 키우지. 일단 내가 빼먹은 것들 좀 다시 채워 넣고, 십이비도 커리큘럼은 다 짰고……. 근데 생전 누굴 가르칠 생각을 안 해 봐서 잘 될지를 모르겠네. 하지만 저 도사 형님도 했는데 나라고 못할 건 없지. 저 형님도……. 형님…….

“그래서 이 인간 왜 안 오는 건데?!”

이른 아침마다 당가타 뒷산 봉우리에서 맴맴 울려 퍼지는 외침이었다. 당보의 거처 정리를 도맡은 아이는 새벽마다 훌쩍 자리를 뜨는 당보를 보며 ‘역시 암존……!’ 같은 눈빛을 보내고는 했다. 그냥 늙어서 잠이 없는 건데 젊은 낯짝이 혼란을 주고 있기라도 한 듯했다. 하여간 매일 아침 약수터를 오가며 당보는 고민했다. 이 오기를 언제까지 부릴지.

그렇다. 몇 달 내내 다리를 달달 떨어 대면서도 당장 화산에 쳐들어가지 않은 것은 유치한 오기 때문이었다. 당보는 청명에 대해 제법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다. 다년간의 교류가 있었고, 시간에 비해 깊은 교감이 있었다. 타고나길 혀끝이 섬세하지 못한 위인들이기에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지 못한 것들은 다른 길을 타고 오갔다. 때로는 검끝으로, 때로는 시선으로, 때로는 주먹으로, 술잔으로, 대침으로, 웃음으로…….

오랜만에 마주한 청명은 달라진 생김만큼이나 제법 변해 있었다. 당보는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라고 생각했다. 오래 살아 무엇하나 따위의 상념을 되뇐 세월이 벌써 제법 되건마는 자연스럽고 당연하게도 그리 생각하였다.

숱한 무림인이 일평생 맞닥뜨리길 기대하는 것이 있다. 기연奇緣. 그것은 절벽에서 떨어져 영약을 발견하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길 잃은 산속에서 은거 고수의 제자가 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때론 전설 같고 때론 우스운 이야기들이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은 하나같이 동일하다. 변화할 기회. 도약할 기회.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아갈 기회.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경지가 높아질수록 기연을 얻기란 점점 더 어려워진다. 삶을 바꾸는 데에 더 큰 힘이 필요해진다. 무림지존쯤 되는 고수에게 찾아올 수 있는 기연이란 상상하기조차 쉽지 않다.

청명이 매화검존이라 불리기 시작했을 때 당보는 생각했다.

‘기어코 온 중원이 형님에게 가장 외로운 놈 딱지를 붙이는구려.’

물론 당보는 칠십 평생 세상에서 가장 외로워지고 싶어 환장한 인사였기에 본인에게 붙은 꼬리표에는 별 불만이 없었다. 범인들이 무엇을 알겠나 싶기도 했고, 전쟁 중에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다만 어렴풋이 짐작한 사실에 사소하게 심기가 불편해졌을 따름이다. 재해처럼 피어난 꽃은 끝까지 재해로서 사그라들리라고. 그것은 딱밤 한 대에 사라진, 청명이라는 한 명의 인간에 대한 작은 안타까움이었다.

그렇기에 당보는 천우맹의 이름을 들었을 때 대소를 참을 수 없었다. 지우라곤 나밖에 없는 인간이 천우맹! 당보는 답지 않게 겸연쩍은 기색의 청명을 앞에 두고 크게 웃으며 생각했다.

‘도사 형님, 기연을 얻으셨소.’

청명은 본디 재해처럼 휘몰아치는 인물이다. 남에게 기연으로 가닿으면 닿았지 기연을 얻을 계제는 아니었다. 솔직히 저 인간이 햇병아리들 사이에서 뒹굴면서 요 몇 년간 흩뿌린 기연이 지난 백 년간 있었던 기연보다 많을 게 분명했다. 애초에 청명은 기연을 갈망하지 않는다. 그런 독특한 자들이 있었다. 하늘에 바라지 않는 자들. 자신의 범위를 스스로 정하는 자들. 그들은 다시 없을 기연이 눈앞에 들이밀어져도 제 손에 맞지 않으면 내팽개치길 주저치 않는 족속이었다.

도사들이 염불 외는 원시천존께서 갑자기 변덕을 부리신 건지, 무슨 안배라도 내리신 건지.

기연을 얻은 청명에게 어떤 앞날이 이어질지 알 길은 없으나 당보는 자신이 그에 함께할 수 있음에 몹시 기뻤다. 아주 살 맛이 났다. 지난 백 년간 도파민이 부족했던 당보는 인생 최대 도파민 공급처를 곱빼기로 돌려받아 대단히 즐거웠다. 싹싹한 후기지수 화산신룡과 산으로 산으로 놀러 다니며 당보는 서서히 받아들였다. 화산에는 청명이 있고, 삶은 다시 이어지고 있노라고. 그래서 냉큼 폐관 선언도 했다. 청명이 어떻게 변했는지도 구경했겠다, 슬슬 몸도 달았겠다, 내공도 얼추 다져졌겠다, 하루빨리 무위를 찾아 강호를 주유해야 살 것 같았다. 도사 형님도 응징의 주먹과 함께 반겨 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는 친애하는 형님의 인성에 대한 신뢰가 몹시 깊고 굳건했다. 일찍이 당가타에서 반주 한 상 걸치며 청명에게 전수한 말이 있었다. ‘은혜는 두 배로, 원한은 열 배로.’ 아니나 다를까 청명은 몹시 마음에 들어 했더랬다. (이후 응징의 강도가 높아져 약간 후회했다.)

그러니 당보가 현재 부리고 있는 오기의 정체는 이거였다. ‘내 형님이 이렇게 귀여울 리가 없어!’ 아니, 사람이 변해도 이렇게까지 변한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없었다. 기연 뭐 돼? 청명의 인성은 하늘에서 떡이 내린다고 고쳐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당보는 죽은 줄 알았던 친구가 살아는 돌아왔지만 내실은 탈탈 털린 줄 알았는데 회생할 준비 열심히 해 오고 있었으며 마지막 박차 가하려고 두메산골(아니다)에 틀어박혀 각고의 노력 끝에 성공적으로 재기한 겨우 그런 정도로 자신을 n개월 놀려 먹은 걸 용서할 만큼 청명을 나약하게 키우지 않았다!

청문진인 허허 웃을 소리를 꿍얼거리며 당보는 고독하게 앉아 은은한 배신감을 씹었다. 물론 당보도 진지하게 청명이 개과(Carnivora Canidae), 아니 개과(改過)하여 너그러운 마음으로 동생을 품어 주는 진정한 도인이 되었으리라고 믿는 건 아니었다. 그쪽보단 ‘당연한 짓 한 게 뭐가 예쁘다고 쪼르르 달려가서 꽃가마를 태워 줘?’ 쪽인 편이 신빙성이 높았다. 물리 응징이 생략된 것은 의심스러웠지만 평생 안 볼 것도 아니고 다음에 만났을 때 두들기면 될 일이지 않은가. 그도 아니라면…….

‘내가 너무 쎄져서 때리질 못한다?’

당보는 한 백팔십 살쯤 뒷마당에 묻어두고 히죽 웃었다. 허튼소리였지만 하여간 생각해 보니 그랬다. 청명은 물론이요 당보 또한 절찬리에 다시: 영점부터 시작하는 무림 생활 중이지 않은가! 이것은 서열의 재배치…… 아니 아주 오랜만의, 굉장히 흥미진진한 비무의 서막임에 틀림이 없었다.

너무 오래 당하고만 살아서 지난 몇 달간 대체 언제 두들겨 맞는 것인지만을 목 빼고 기다리던 당보는 보무도 당당하게 당가타를 가로질렀다. 사람들은 ‘암존이 또…….’ 하며 슥 쳐다보고 말았다. 까마득한 후손들이 겨우 반년 만에 동시대 사람들과 점점 비슷한 눈빛을 보이기 시작하든 말든 당보는 룰루랄라 짐을 쌌다. 비도 오케이. 대침 오케이. 단약 오케이, 독단 오케이, 저번에 쌤쳐 온 호리병 오케이. 등산복에 보부상용 에르메스를 걸친 당보는 마지막으로 가주에게 쪽지를 남겼다.

그리고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암존 어르신~? 식사를 거르셨기에 요깃거리를 가져왔습니다아~!”

활발한 목소리가 마당을 울렸다. 문을 기웃거리던 아이는 답이 없자 슬그머니 문고리를 밀었다.

“암존 어르시인……?”

인기척 없는 공간이 아이를 반겼다. 암존께서는 종종 들락거리는 아이에게 일찍이 이러이러할 때에는 들어오면 아니 된다 일러 주셨더랬다. 눈치를 보아 지금은 위험한 때는 아닌 것 같았다. 아이는 탁자에라도 먹거리를 두고 오고자 총총 안으로 들어섰다. 익숙하게 길을 찾아 탁자 위에 꾸러미를 내려놓는 찰나 아이는 웬 종이를 발견했다. 벼루 하나와 붓 한 필을 문진 삼아 대충 눌러 둔 종이쪽지는 절반쯤이 먹에 잠겨 까맸다. 이게 뭔가 살펴보던 아이는 살아남은 흰 부분에 무어라 글자가 쓰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찾지…… 말…… 것……?”

읽어 나가던 아이의 입이 점점 떠억 벌어졌다. 암존이…… 암존이…… 암존 어르신이……!

“가주니이이이임!”

우당탕 달려나가는 아이의 뒤로 먹물 먹은 종이가 바스락거렸다. 떠난 지 오래인 당보가 알았다면 억울함에 펄쩍 뛸 일이었다. 그 누가 알았겠는가. 신이 나 펼친 경공의 기세에 먹물이 넘쳐 성심껏 남긴 ‘화산행華山行’ 세 글자가 새까맣게 가려지리라고.

 

발밑으로 돌과 나무가 휙휙 스쳐 지나갔다. 당보는 모든 것을 무시하고 최단 경로를 잡아 달렸다. 지붕과 도로는 안 보인 지 오래요 가끔 눈에 띄는 녹림 꿈나무들 정수리나 발디딤 삼는 여정이었다. 까마득히 솟은 천년송의 가녀린 이파리 하나가 발끝에 닿아 파르르 떨렸다.

당보는 달리면 달릴수록 고조되는 심장 박동을 느꼈다. 쿵. 쿵. 가슴이 뛰고 숨이 찬다. 근육이 조여들고 손끝이 저릿하다. 경공을 펼치는 것과는 하등 상관없이 치솟는 긴장감. 거칠어지는 호흡에 따라 발자국이 남고 바람이 인다. 당보는 신경 쓰지 않고 땅을 박찼다. 그는 이 흐트러짐이 어디서 기인하는지를 아주 잘 알았다. 주화走火? 아니.

기대!

청명의 제자를 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더욱더 정순해진 내공으로, 깊디깊은 무학을 바탕으로 새로이 조각된 청명이 바로 저기 있지 않은가! 다시 만난 이후 수없이 어울리면서도 구경만 하고 손은 섞지 못했던 이름 높은 화산신룡의 무위를 직접 온몸으로 부딪혀 맛볼 때가 온 것이었다. 당보의 기저에 자리한 불꽃을 가장 뜨겁게 달구는 존재. 일찍이 맞이한 다시 없을 기연. 영영 잃었다 여겼으나 끝내 그들은 다시 만나 칼을 맞대고 등을 맞대리니. 당보는 흥에 겨워 거칠게 출수했다. 암존이 훑어간 자취를 따라 심산거목 한 그루가 세 줄기가 되어 서서히 쓰러졌다.

쩌저저적…… 쿵.

“하하하하하하하하하!”

인적 없는 산중에서 한 줄기 웃음소리만이 하늘을 갈랐다.

 

“암존! 오랜만에 뵙습니다.”

장문인과 인사를 마치고 나오니 종종 보았던 삼대제자 하나가 반갑게 말을 걸어 왔다. 그러고 보니 사천 출신이라던 청년이었다. 이 형님은 왜 자꾸 사천에서 인재를 빼 가는 거지. 백 퍼센트 본인들의 의사였으나 일단 청명을 깐 당보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물었다.

“청명 도장은 잘 있는가?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려는데 보이질 않는군.”

“아, 청명이 놈은 연무장 뒤쪽에 있을 겁니다. 얼마 전에 수련하다 새로 만든 모래주머니가 터졌는데, 얼마나 대충 만들었으면 터지냐고, 다시 만드는 거 감독하겠다고 길길이 날뛰어서…….”

재깔이던 제자가 머쓱하게 웃었다.

“큼. 제가 당장 불러오겠습니다! 암존께서는 잠시…….”

“아니, 함께 가세.”

연무장까지는 금방이었다. 담 너머로도 뭐라뭐라 잔소리하는 목소리가 선명했다. 안으로 들어서며 제자가 청명을 불렀다.

“야, 청명아. 암존 어르신 오셨다아.”

모래더미 옆에 앉아 주머니를 꿰매고 있던 시무룩한 면면들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구세주! 구세주다! 당보는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힘내게, 제군. 그리고 청명에게 다가갔다. 완성된 모래주머니에 걸터앉아 있던 청명이 일어났다.

시선이 닿는다. 청명은 오랜만에 나타난 당보를 낮게 뜬 눈으로 훑었다. 몸의 균형, 무게중심, 걸음걸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스캔을 마친 청명이 눈을 들었다. 그리고 빙긋 웃었다.

‘수고했다.’

당보는 달려오는 내내 휘돌던 흥분이 다시금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드디어, 다시, 마주하는 자리에 섰다. 당보는 당장 나가(서 한 판 뜨)자고 말하려 분주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대로 굳었다.

씨익 올라간 청명의 입꼬리가 멈추지 않는다.

입매는 쭈욱 올라가고 눈매는 쭈욱 내려간다. 당보는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왜. 또. 뭐. 왜 또 뭔 꿍꿍이로 저 인간이 저렇게 웃지? 소름이 좍 돋은 당보가 일단 튈까 하는 생각을 하는 찰나였다. 빵끗 웃은 청명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소협은 누구세요?”

좌중의 경악한 시선들, 빠르게 오가는 ‘저게 드디어 미쳤느냐’ ‘점심에 뭐 상한 게 있었는가’ ‘요새 너무 무리한 거 아니냐’ 따위의 나지막한 논의들 속에서 당보는 생각했다.

‘이 뒤끝으로 장강 메울 인간이……!’

나잇값 못 하는 할배들의 유치찬란 2차전이 시작되었다.

 

 

 

 

돌비가 드디어 회지를 내는군요...

뚱뚱한 축전 감당해 줘서 고맙고...

즐거운 돌비개인지발간기념앤솔로지 감상 되시길 바랍니다...

 

돌솥비빔밥의 회지 발간을 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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