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보청명] 七夕

자급자족 1 by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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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러십니까, 도사형님?”

“어? 아니. 그냥. 뭔가 느낌이 이상해서.”

어째 술잔을 쥐고 가만히 있는 청명의 모습이 이상했는지, 당보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본다.

“이상하다. 열은 없는데.”

급기야 손을 올려 청명의 이마에 냉큼 손을 올리고 제 이마에도 손을 올리는 자세가 아주 요사하기 짝이 없다.

“이놈이?”

“이게 다 형님을 걱정해서 하는 아우의 행동입니다.”

“으학, 간지럽다니까!”

쑥 날아오는 주먹을 피하고 킬킬거리며 그의 허리를 간지럽힌다. 아주 손쉽게 잡히는 허리를 꽉 움켜쥐고 한참을 괴롭혔다. 당하는 이도 그 손길이 썩 싫지는 않아 가만히 두니 이놈이 슬금슬금 제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는 게 아닌가.

“어허. 동작 그만.”

“에이. 어떻게 한 번을 안 넘어가시네.”

조금만 더 하면 한 대 맞을 걸 알았는지 도로 얌전히 앉아 술을 마셨다. 그 술이 마지막 술이었고, 잔이 청명의 것이 아니었다면 그는 정말 당보를 가만히 뒀을 것이다.

“크, 술맛 좋고. 역시 형님 술 뺏어 먹는 게 제일이라니까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청명이 한 대 때릴 것이라 생각했는지 눈치를 보는 게 기가 막히다. 처음부터 저렇게 눈치를 볼 거면 애초에 안 하면 되는 일이지. 그걸 굳이 지적하면 또 되지도 않는 헛소리나 하면서 술 사달라고 징징거릴 놈이다.

“얼씨구. 돈도 많은 놈이 먹을 게 없어서 도사 술을 훔쳐먹어?”

“저 그지인거 제일 잘 아시는 분이.”

“그러게 누가 저기 호북에서 티 나게 사고 치랬냐?”

아직도 눈에 선하다. 어떤 거지가 산문 앞에서 어슬렁거리길래 쫓아낼 겸 나갔더니 그게 저놈이었을 줄은. 당가를 상징하는 녹포는 어디에 팔아먹고 흙이 잔뜩 묻은 꼬질거리는 모습으로 나타난 당보는 청명을 보자마자 냅다,

‘형님. 저 밥 좀 주세요.’

그래버렸지. 제 정인이 사실 당가의 태상장로가 아니라 개방의 장로였다고 해도 믿을 그 행색, 그 말!

심지어 얼마나 굶었던 것인지 식당에 데리고 갔더니 문도들이 먹고 남은 점심밥을 다 먹어버렸다. 심지어는 남은 밥 더 없냐고 아우 대하는 게 고작 이 정도냐며 빈 밥그릇을 박박 긁는 추태에 숙수들 보기 낯부끄러웠던 청명이 아예 당보를 제 처소에 가둬놓고 화음에서 음식을 한 보따리 사서 먹였다. 제자들 먹일 간식거리라도 사냐고 하는 시전 상인의 말에 답도 제대로 못 하고 살짝 웃기만 했는데 등에서 얼마나 식은땀이 나던지.

배가 어느 정도 찬 당보가 한 말인즉슨, 저가 돌아다니다 산채를 하나 박살 냈는데 하필 그게 무당 코앞에 있던 산채라 놈들이 눈독 들이던 곳이었다는 것이다. 고로 무당 놈들 입장에선 제자들 교육을 위해, 그리고 무당의 명성을 위해 침 발라놓았던 곳을 갑자기 어떤 미친놈이 나타나 쓸어버리니 그라도 잡기 위해 사흘 밤낮을 쉬지 않고 쫓았더랬다.

‘고작 그런 걸로 이 꼴이 돼? 암존이라는 놈이?’

‘에헤이. 저라는 게 밝혀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당가에 미운털 가득 박힌 당보다. 그런데 무당 코앞에서 깽판을 쳤다는 사실이 당가에 들어가면.

‘한동안은 아주 들들 볶이겠지.’

기실 당가에서 저놈을 제어할 방법은 없다. 그게 되려면 저놈 이상의 고수가 나와야 하는데 그게 어디 쉽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라준다는 건, 저놈이 당가를 그만큼 사랑한다는 것.

마치 청명이 화산을 사랑하고 장문 사형을 따르는 것처럼.

두 사람은 몹시도 닮았다. 어쩌면 그래서 사랑하는 걸까. 남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른다. 당보가 사고 치면 가주의 잔소리를 피해서 화산에 도망을 오고, 청명이 순순히 장문인에게 귀를 잡혀주는지. 어떤 이들은 그 윗대의 인성에 찬사를 보낸다. 더러는 그들만이 두 존을 제어할 수 있다고 믿기도 한다. 두 명의 존은 그런 세인들의 오해를 풀지 않았다. 그럴수록 화산 장문인과 당 가주의 권위는 높아져 가니까.

‘화산이 객잔이냐? 응? 내 처소가 아주 만만하지?’

‘믿을 이 하나 없는 이 세상에 그럼 정인을 믿지, 누구를 믿어요.’

‘말만 번지르르하게 잘 하지.’

‘보름 정도는 있어도 되죠?’

‘그래.’

보름간은 둘이 아주 산골에 콕 박혀서 처소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을 작정이다. 심심하면 비무하고 저기 계곡에서 물고기도 잡고. 밤에는 장문사형 몰래 담 타고 내려가서 백성들 고혈 쥐어짜는 나쁜 관리도 한 번씩 쥐어패 주고. 물론 그들이 검존과 암존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청명은 권각술을 쓰고 당보는 언월도로 헤집어버릴 테니. 상상만 해도 즐겁다.

하지만 당보는 결국 보름을 채우지 못하고 당가에 끌려갔다. 당가주가 화산에 직접 서신을 보내-심지어 그 서신을 들고 온건 소가주였다.- 혹시 제 숙부님이 그곳에 있거든 부디 당가에 돌아오라 해주십사 부탁한 까닭이었다. 가주의 부탁까지 받고 하는 수 없이 소가주의 손에 연행된 당보가 다시 당가를 빠져나온 건 무려 한 달이 지나서였다.

“하지만 그놈들 질이 아주 나쁘다니까요. 하다못해 부모 공양하겠다고 오른 나무꾼까지 나무 관리세라며 돈을 뜯는데. 그걸 가만히 두고 봅니까?”

“뒈질 놈들이긴 하네.”

산적이라는 놈들이 제일 싫어하는 짓이 돈 안 되는 일이다. 물론 모든 사파가 다 그렇기는 하지만, 특히 남들을 약탈해서 피 빨아먹고 사는 놈들일수록 더했다. 그러니 보통 털어도 털만한 상단을 건들지, 양민들은 가만히 두는 경우가 더 많았다.

“덕분에 용전이고 뭐고 아주 빈털터리입니다.”

그리 말하고는 비굴하게 웃으며 청명의 접시에 있던 동파육 한 점까지 야무지게 입에 밀어 넣는다. 옳지, 내 아우. 잘 처먹기도 하지.

“이게 형님의 고기에 손을 대?!”

“으악, 악! 형님! 잠시만요! 악!”

술까지는 봐줄 수 있다. 저놈이 당가에 뭉개고 있는 동안 밀린 일을 하느라 하루에 한 시진은 잤을까 하니 술 마실 시간도 없었겠지.

근데 동파육을 건드려? 이건 아무리 당보라고 해도 안 된다. 동파육에 청경채 쓱쓱 감아 한입에 넣고 밥 한술 크게 떠넣는 게 얼마나 맛있는데.

“항복입니다, 항복이요!”

결국 당보가 두 손 두 발 다 들고 항복할 때까지 엎치락뒤치락하며 똑같이 간지럽혔다. 결국 청명의 품에 꽉 안긴 당보가 그를 끌어안았다. 따뜻했다.

마지막으로 청명이 당보를 봤을 때와는 다르게.

“당보, 보, 보야, 보보야.”

“예, 형님. 보 여기 있습니다.”

이상하지. 어느 순간부터 그의 정인에게서는 약향이 끊이지 않았다. 제 정체성 중 하나를 의원으로 정의하는 놈이니 약초 냄새가 나는 건 이상하지 않았으나 전쟁이 시작되고부터는 그보다 더 독한 냄새가 났다.

독과 약, 그리고 피.

다른 놈들의 피는 괜찮았다. 하지만 이놈을 꽉 끌어안을 때 나는 독향이 섞인 혈향은 참기 힘들었다.

심장이 쿵쿵거린다. 인간의 뇌라는 건 참 이상해서, 생각하지 않으려 하면 할수록 오히려 그 사실을 떠올리고 만다. 당보가 그의 품을 가만히 파고들었다. 이놈이 죽은 이후로는 꿈에서조차 그 지긋지긋한 혈향이 나곤 했는데. 지금은 신기하게 전쟁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좋았다.

두렵고.

만약 갑자기 꿈에서 깬다면 어쩌지. 또 백년 뒤 세계에 홀로 남아 손에 쥔 것을 놓지 않기 위해 바둥거리며 고독을 곱씹는다면 버틸 수 있을까.

팔에 힘을 더욱 줬다. 혹시나 이놈을 놓치는 일이 없게. 꿈에서조차 놓치지 않게,

다시 또 놓지 않도록.

“형님, 형님. 우리 청명 형님. 제 얼굴 좀 보시오.”

마치 어린애를 다루듯 다독이는 손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놈은 형님의 심정도 모르고 이리 군다.

“됐어. 이러고 있는 걸로 충분하다.”

죽은 놈 얼굴을 봐서 뭐 해.

충분하다. 아마 이 꿈으로 청명은 또다시 현실을 살아갈 기력을 얻을 것이다.

“제 얼굴도 제대로 기억 못 하시는 분이 말은 아주 끝내줍니다?”

“시끄럽다.”

“오늘 보면 또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르는 일 아닙니까. 예? 그러지 말고 보여주세요.”

손이 조금씩 떨렸다. ‘이 당보’는 그러니까, 지금까지 악몽에 나왔던 당보와 조금 다르게 굴었다. 늘상 비슷했다. 이대로 고개를 들면 당보는 피눈물을 흘리며 그를 바라보고 있을 터고 청명은 그에게 잘못을 빈다. 취옥翠玉과 같이 빛나던 아름다운 눈은 어디론가 가고 시커먼 눈알구멍에서는 제 죄악이 넘실거릴 터다.

이대로 아침이 될 때까지 안고 있는다면 그럭저럭 견딜만한 악몽이 되겠지. 그건 이제 악몽 축에도 끼지 못하기에, 그에게 있어서는 나름의 길몽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정인의 얼굴 따위 보지 못해도 괜찮았다.

“싫대도. 이놈이 자꾸 귀찮게 말을 걸어?”

“칠석 아닙니까. 오늘은 괜찮을지도 모릅니다.”

“아서라.”

청명의 마음이 굳게 닫힌 걸 느꼈는지, 잠시 한숨을 쉬던 당보가 그의 귓가에 조곤조곤 시를 읊었다.

 

銀河杳杳碧霞外 은하묘묘벽하외

은하수 아득한 저 노을 밖에

天上神仙今夕會 천상신선금석회

천상의 신선들이 오늘 저녁 모이는구나

龍梭聲斷夜機空 용사성단야기공

북소리 끊기고 밤의 베틀은 비워

烏鵲橋邊促仙馭 오작교변촉선어

오작교로 신선의 행사를 재촉하네

相逢才說別離苦 상봉재설별리고

서로 만나 이별의 괴로움도 나누지 못하고

還道明朝又難駐 환도명조우난주

내일 아침이면 또 함께이지 못하니

雙行玉淚洒如泉 쌍행옥루쇄여천

두 줄기 눈물은 샘과 같이 흘러내리고

一陣金風吹作雨 일진금풍취작우

서풍이 비를 불어오는구나

(이규보, 七月七日雨 中)

 

“지랄. 신선은 무슨 신선이야?”

“왜요. 별로입니까?”

“이러니까 네가 평생 나한테 재수 없는 세가 놈 소리나 듣는 거지.”

정인들이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는 날.

당보와 청명도 칠석이면 으레 손을 잡고 함께 저자를 노닐며 시간을 보냈다. 단 걸 좋아하는 당보는 산사나무 꼬치를 먹고, 청명은 그 옆에서 닭꼬치를 먹으며-형님, 사실 그 닭꼬치 쥐로 만든다는 소문이 있습니다.-온종일 돌아다니다 어디 야트막한 둔덕에 앉아 함께 불꽃놀이를 보곤 했다. 누가 뭐라고 해도 행복한 시간이었다.

“이 형님이. 보고 싶었다는 말이라도 해주면 덧납니까?”

“누가 너 같은 놈 보고 싶대? 아서라. 요즘 바빠서 너 생각할 시간도 없다.”

이제 조금 고개를 들 용기가 생긴 청명이 고개를 살짝 들었다. 정말로 멀쩡한 얼굴의 당보가 그를 보고 있었다.

“형님, 형님.”

“왜 불러.”

그와 눈을 맞추고 있는 게 그렇게 좋은지, 연신 청명을 불러대며 부비적거린다. 문득 청명은 그가 입고 있는 옷이 장로복이 아니라 이대제자의 무복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신기한 일이다. 과거가 아닌 걸까.

“형님은 정말 잘하고 계십니다.”

“죽겠다, 진짜. 누굴 약 올려?”

맑은 하늘에 먹구름이 하나둘 끼더니 빗방울이 아롱졌다. 온 세상이 잠길 듯 쏟아지는 비에도 두 사람이 있는 전각만은 끄떡없었다.

“정말 보고 싶습니다.”

“말로만 하면 뭐해. 힘들어 죽겠거든. 당가는 네 손으로 어떻게 해봐라, 좀.”

청명은 그 비가 꼭 당보의 눈물 같다는 생각을 했다.

“너무 힘들면 가끔은 쉬어가시고요.”

이상한 말만 하던 당보는 그 뒤로 하릴없는 소리만 했다. 당가의 몇 대손이, 대충 자신의 먼 증손주 뻘 되는 녀석이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뭘로 지을까 고민하다가 당군악으로 지었다는 둥, 그놈 관상을 보건대 그놈도 암기는 안 쓰고 독만 주야장천 파다가 말년에 기인을 만나 갑자기 암기술에 정통할 거라는 둥. 청명이 듣기에도 개가 풀 뜯어먹는 소리였다. 아, 화산의 개들은 정말 풀 뜯어 먹고 살긴 하지. 이게 전부 백아의 확실한 교육 효과다.

그러는 동안에도 비는 그칠 생각을 안 했다.

온갖 이야기를 풀어놓는데, 왜 자꾸 잠이 오는지. 자꾸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들기 위해 애쓰니 아까까지만 해도 저를 봐달라 징징거리던 놈이 눈가를 쓸었다.

그 잔소리를 자장가 삼아, 청명은 깊은 잠에 빠졌다.

 

**

 

“와, 저놈. 비가 이렇게 쏟아지는데 미동도 안 하고 자네요.”

“내버려둬라. 피곤했겠지.”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는데 시끄럽지도 않은지 정자에 누워 죽은 사람처럼 자는 청명을 깨우지 않기 위해 말소리를 죽인 곽회가 윤종에게 소곤거렸다. 평소 같으면 비 오는 날 적이 안 쳐들어오냐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그들을 볶아댔을 청명이다.

이 평화를 즐기기 위해 백자배에게 급보를 날린 윤종이 발소리를 죽여 암자를 빠져나가자, 그곳에는 다시 자고 있는 청명만 남았다. 도대체 무슨 꿈을 꾸는지 입이 아주 헤벌쭉 벌어져서는 히죽히죽 웃는 모양새가 아무래도 좋은 꿈을 꾸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소나기가 그치고 노을 진 하늘에 무지개가 뜰 때까지, 청명의 낮잠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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