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vzie's Hell

minuet

제스카밀. 캐릭터봇들 무도회이벤트 초뒷북. 짧음.

쨍!

샴페인 잔이 공중에서 부딪혔다. 시끄럽게 배회하던 전자선율이 잦아들던 참이었다. 음악소리가 자리를 비우자 사람 소리가 그 자리를 채웠다. 들뜬 수다소리,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 먹는 소리, 대리석바닥에 부딪히는 구두소리, 연회복이 사락사락 흔들리는 소리.

그리고 그녀의 익숙한 친우의 목소리까지.

"다들 기대를 많이했군."

"그래 보이네. 시간이 아직 이른데도..."

와장창! 저쪽에서 누군가 쓰러졌다.

"...말이지."

제스티얼은 대답대신 샴페인을 한모금 머금었다. 쓰러진 자는 흐트러진 라디오 잡음을 내며 기우뚱 몸을 가눴다. 저런 난장판은 좀 없어도 될 것 같은데.

"다음 노래는 뭐가 나오는지 아나?"

"피아노 협주곡 11번 F단조 미뉴에트."

"잠깐 쉬는시간이 있어서 다행이야. 그러지 않았다면 분위기가 조금 이상해졌을 것 같거든."

"그렇군. 사실 무도회에 연주되는 곡은 이쪽이었는데도, 말이지."

두 삼페인 잔은 딱 반의 반만큼만 비워진 채였다. 하지만 제법 많은 참석자가 연회장 중심으로 모여드는 중이었다. 전부 이번에 춤을 추려는 이들이었다.

"미뉴에트는 출 줄 아나?"

"어려운 춤은 아니지. 샴페인도 마셨으니, 이제 춤을 추러 가는 건가."

운을 띄우자 제스티얼은 익숙하게 손을 내밀었다.

"나와 한 곡 춰주겠나, 카밀라."

그리고 카밀라는 익숙하게 손을 잡았다.

"물론."


둘은 딱 한 발자국의 거리를 두고 마주섰다. 부드러운 바이올린 소리가 일제히 퍼졌다. 하나 둘 셋, 여기에 또 다른 악기들이 하나 둘 셋.

우선 몸을 살짝 숙이며 인사를 한다. 오른손은 살며시 내려놓았고, 두 왼손바닥이 공중에서 빈틈없이 맞닿았다. 그 손들을 축으로 삼아 맞주돌며 하나 둘 셋, 다시 하나 둘 셋. 발끝을 바닥이 톡 치고, 슥 그으며 또 하나 둘 셋. 걷는 동선은 시계 반대방향으로.

여기까지의 동작은 짧진 않지만,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카밀라는 제스티얼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가끔 눈을 깜빡일 뿐, 은빛 눈동자는 이쪽을 계속 응시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아마 그가 아닌 다른 이었다면 무슨 소리부터 해야하나 쩔쩔 맸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제스티얼은 푸스스 미소지었다.

"자신감에 들떴다 했거늘. 과연 카마인의 수장다워."

"허. 너라서 받아주는 줄 알아."

한 바퀴를 돌고 잠시 떨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마주 본 채 였다. 바닥을 발끝으로 찍어 그리고, 한 발을 옮기며 배회했다. 걸음걸음에 케이프 끝이 흔들리고 드레스 자락이 나부꼈다.

피아노 소리가 시작되었을 때 둘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다가섰다. 이번에는 왼손을 내려놓고, 두 오른손바닥이 빈틈없이 맞닿았다. 가늘고 긴 손과 도톰하고 큰 손이었다.

"스스로 오늘 정말 아름다운 것 아나?"

"뜻 모를 소릴."

"후후, 정말일세. 그대에게 거짓말을 한 적은 없지 않나."

"진위 여부를 말한 게 아니야. 네 말은 관계없이 참 신비롭거든."

"칭찬인가."

"너처럼."

미뉴에트는 이토록 가만하고 점잖은 춤이었다. 우아하고 정중하지만, 큰 동작없이 밋밋하여 오로지 사교활동에 맞춰진 춤. 그러니 춤을 추는 이들은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여유가 많았다.

그러니 둘은 꽤 오랫동안 춤을 추었다. 나부끼는 옷자락 속에서 한 발 한 발 무도회장을 가로질렀다. 시덥지않은 이야기가 한 말 한 말 공기중을 건넜다. 이따금 풀어내려진 흰 머리카락이 노란 조명에 섞이다가 까만 모자 끝이 그 조명을 건져 받았다. 어느새 카밀라는 제스티얼의 어깨에 손을 올렸고, 제스티얼은 카밀라의 허리에 손을 올렸다. 이젠 미뉴에트 치고 거리가 가까웠다.

그때 누군가는 그리 생각했다. 아, 이렇게까지 여유가 많을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곡 중에 왈츠가 있었나."

"있는 걸로 아네. 역시 미뉴에트는 춤인 것 치고 너무 심심하지."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가까워질 일인가. 물론 제스티얼 너는 왈츠도 잘 추겠지만."

"내 얼굴에 금칠을 하는 군. 춤추는 사람이 누군데 충실히 이끌어야지 않나."

카밀라의 손끝이 쨍하니 울렸다. 아무것도 그 손끝을 건드리지 않았지만, 뭐랄까. 비명을 지르고픈 충동이 그쯤에서부터 조용히 퍼졌다. 그 비명의 결이 어느쪽인지는 도통 알 길이 없었지만.

비명을 지르는 대신 두 손이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거리는 다시 딱 한 발자국 정도로 벌어졌다. 그대로 아까와 같은 동선을 밟고 아까와 같은 손을 맞주잡으며 한 발 한 발. 손을 바꿔잡으며 다시 하나 둘 셋. 가끔씩 제스티얼의 큰 그림자가 카밀라 위를 지나쳐갔다. 공기중을 횡단하는 언어는 없었지만 시선은 서로의 눈에 가 닿아있었다.

춤 한 곡이 그렇게 차분한 끝을 맺었다. 샹들리에에서 쏟아지는 빛이 노랗고 희었다. 그 빛이 비춘 참석자들은 바닥의 빛깔을 다채롭게 했다. 티룸에서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지 왁자지껄한 소리가 오갔고, 무도회장에는 다음 파트너를 찾는 발걸음이 가득했다.

다음 곡은 왈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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