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UL

16.

400DAY 짧은 조각글

창고 by 카리야
4
0
0

서율은 때때로 일을 집에 가지고 오고는 했다. 정확히는 일을 집에 가져온다기보다, 재택근무의 형식에 조금 가까웠지만. 대부분의 경우 말리부가 낮에 집에 있는 시간대, 그러니까 ‘오후에 출근 할 때’라는 전제 조건이 붙었지만. 요는 지금은 낮이고 서율은 거실에서 패드를 보고 있었으며 말리부는 부엌에서 늦은 아침 겸 점심을 준비하고 있었다.

오후에 출근할 때도 말리부의 생활 루틴은 똑같았다. 시계처럼 몸에 새겨진 오랜 습관이 쉬이 바뀔 일도 없었다. 되려 서율이 똑같은 시간에 일어난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식사를 챙기기 위해 더 일찌감치 일어나고는 했으니까. 그러니까…, 지금 아침 겸 점심을 준비하는 것은 말리부와 서율에게 있어 꽤 이례적인 일이라고 볼 수 있었다.

오늘따라 서율은 유독 일어나기를 힘들어 했다. 오히려 말리부의 몸을 껴안고 얼굴을 비비며 조금 더 자자고 말리부를 종용했으니. 평소라면 그 유혹에도 일어났을 말리부였으나…, 가끔은 이런 날도 있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서율의 청을 들어줌으로써 늦은 아침을 맞이했더랬다. 그 와중에도 혹시 서율의 몸이 어디 아픈게 아닐까, 하는 염려를 했지만….

‘서율 씨. 어디 아프신건….’

‘…아닙니다. 당신도 오후에 출근할테고, 오늘은 저도 집에서 일을 할 예정이라서.’

‘진짭니까? 어디 아프신 거 아니시죠.’

‘네에. 가끔은 이런 날도 좋지 않나요. 조금 더 주무시죠, 말리부.’

말꼬리를 길게 늘려가며 만류하는 통에 결국 말리부는 서율의 어리광 아닌 어리광에 지고 말았다. 가슴팍을 일정하게 다독여주는 손길에 작게 읊조리는 자장자장, 들리는 소리에 재차 눈을 감고 다시 깨어보니…, 옆자리가 비어서 당황한게 1시간 전의 일이었다. 먼저 일어나 방에 있는 창문에 커튼까지 야무지게 친, 서율은 어느새 거실에 나가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평소와 같이 편안한 차림으로. 거실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비스듬하게 탁자를 지나가며 바쁘게 손가락을 움직이는 서율을 지나쳤다. 서율 씨. 조금은 불만스레 그의 이름을 부르자 무표정한 낯으로 패드를 들여다보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걸린다.

‘일어나셨나요, 말리부? 좋은 아침입니다.’

‘저도 같이 깨우시지 않고요….’

‘당신이 너무 잘 자고 있어서요. 깨우기 미안할 정도로 곤하게 자길래….’

‘그래도….’

‘이런 날도 있는 법 아닙니까, 말리부. 뭐가 그렇게 아쉬워서 그래요.’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연인을 보며 서율이 짧게 웃음을 흘렸다. 무엇이 그리 아쉽느냐고. 딱히 아쉬운 건 아니지만…. 말리부가 순한 얼굴로 서율을 빤히 바라보자, 서율이 의아한 얼굴을 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뭔가 원하는게 있는건가? 의문감이 듬과 동시에 서율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터졌다.

서율은 거실 테이블에 패드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말리부에게 다가왔다. 그대로 팔을 뻗어 그의 뺨 언저리를 매만지자, 저항도 하지 않고 말리부가 고개를 살짝 내려준다. 비스듬히 고개를 틀며 서율이 짧게 말리부의 입술에 입맞춤을 남기고는 금세 떨어졌다. 이게 빠졌지, 참. 얄밉게 종알거리는 입술에 말리부가 눈을 가늘게 뜨고 서율의 허리를 양 팔로 감았다.

‘네, 맞습니다. 모닝 키스가 빠졌습니다.’

‘미안합니다. 저는 당신이 자고 있을 때 마음껏 하고 나와서요. 깜빡했네.’

‘식사 준비 할까요? 배 고프지 않으셨습니까…?’

‘안 그래도 준비하려다가…, 당신이 서운해 할 거 같아서 그만뒀습니다. 배고픕니다.’

서율이 칭얼거리는 어조로 대답하며 말리부의 허리에 양 팔을 둘렀다. 배고프다고 칭얼거린 것과는 다르게 그를 놓을 생각은 없어보였다. 말리부는 그대로 서율을 끌어안고 뒤뚱거리며 거실 쪽으로 향했다. 순순히 말리부에 의해 거실 쪽으로 몸을 옮기며 서율이 재밌다는 양, 웃음을 터트렸다. 그 와중에도 불안한지 시선이 발 밑을 향한 채였다. 춤을 추는 듯이 스텝을 밟으며 걸음을 옮기던 서율의 몸을 그대로 소파에 몸을 앉혔다. 푹신하게 닿는 쿠션감에 등을 살짝 기대자, 당연하다는 듯이 이마에 입술이 떨어졌다. 짧게 눈을 찡그리던 서율이 아쉬운 손길로 말리부의 허리춤을 매만지다가 떼어냈다.

금방 준비하겠습니다. 서율에게 짧게 말하며 말리부가 욕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욕실 너머로 말리부가 사라지고 문이 닫히는 모습을 보던 서율이 재차 패드를 집어 들었다.


어느새 11시 30분을 향해 가는 시계를 보며 말리부의 손이 점차 빨라지기 시작했다. 간단하게라고 했으나…, 서율을 먹이는 일에 소홀히 하는 법이 없는 말리부였다. 마지막으로 물에 담가두었던 과일을 닦고 손질하며 남은 물기를 타월에 닦아냈다. 음식을 준비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서율은 조용했다. 원래도 유독 조용한 편이긴 했으나 오늘따라 유독 기척이 옅은 것은 착각이 아닐터였다. 대부분 이 쯤이면 식탁으로 오셨는데. 같이 산지는 몇 개월 차였지만 생각보다 말리부는 서율의 생활 습관을 꼼꼼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눈을 뜨면 바로 욕실을 먼저 간다던가, 식사 준비가 다 되어 갈 때는 꼭 식탁에 미리 와 앉아 있는다던가, 책을 읽을 때는 옆에서 주는 것을 곧잘 받아 먹는다던가 하는 둥의 아주 사소하고 일상을 꽤 오래 봐야 알 수 있는 부분들. 그러니까…, 달리 말하자면 오늘 이 순간이 아주 조금 특이 케이스인 셈이었다.

“…서율 씨.”

“…….”

조용하네. 말리부는 작게 중얼거리며 서율이 있는 거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나마 따뜻한 음식이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재차 그의 이름을 불렀으나, 여전히 조용했다. 몇 걸음이면 닿는 장소에 있음에도 말리부는 괜한 불안감이 치밀었다. 갑자기 일을 하러 가게 된다던가…. 그나마 사귀기 시작했을 때와는 달리 서율이 제 시간을 챙기고 있긴 했으나, 때때로 말리부는 그가 일을 그만두면 좋겠다는 충동이 불쑥 떠올랐다. 그것은 일상에서 아주 작은 조각으로도 튀어나올 때가 있어서, 말리부는 그 충동을 억누르느라 가끔 애를 먹고는 했다.

유독 볕이 좋았던가. 말리부는무심코 거실에 있는 큰 창을 보고 소파에 앉아 졸고 있는 서율을 바라보았다. 잠이 부족했나? 어제 밤에 심하게 괴롭혔던가. 짧게 반성을 하는 중에도 말리부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서율이 제 앞에서 무방비하고 편안한 모습을 보일 때면, 어쩐지 참을 수 없는 만족감이 차올랐다. 말리부는 행여 서율이 깰까 조심하며 서율의 곁에 앉았다. 고개를 제 쪽으로 당겨 무릎에 눕히자, 닫혀있던 눈꺼풀이 살짝 열렸다.

“…말리부?”

“네, 서율 씨. 조금 더 주무시겠습니까?”

“저 잠들었나요?”

“졸고 계셨습니다. 30분만 더 주무시겠습니까?”

서율의 안경을 빼며 가지런히 테이블 위에 놓고는 말리부가 서율의 등을 받치며 제 품으로 그의 몸을 쭉, 당겼다. 서율은 입 안으로 네에. 하고 길게 답하면서 나른한 숨을 푹, 내 쉬었다. 유독 피곤해 하시네. 갈색의 머리칼을 살살 쓸어 넘기며 말리부가 단정한 서율의 얼굴을 꼼꼼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이렇게 품 안에서 잠든 제 연인을 볼 때면 말리부는 겉잡을 수 없는 마음이 샘 솟았다.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인다면, 필히 사랑일 터였다. 말리부는 가만히 서율의 손을 꼭 쥐어 들며 서율의 손등에 가볍게 입술을 내리며 차오르는 마음을 입술 사이로 내뱉었다. 사랑합니다. 누구보다도 달콤한 목소리로.

(*트레 했어요. 명암이 엉망이예요. 채색도 엉망이에요. 그냥 그렇구나, 하고 봐주세요ㅠ)

카테고리
#오리지널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