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폐허의 잔상

Berceuse Johan

알베라 숄메르 x 아벨 프리스크

문을 굳건히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아늑한 사무실 안에 퍼졌다. 고개를 숙이고 오래된 신문을 살피던 알베라는 시선을 들었다. 앞으로 쏠린 회색 머리카락을 손으로 걷어내자 닫힌 문이 보였다.

혹여 잘못 들은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던 차에 다시 똑똑, 딱딱한 소음이 들렸다. 착각이 아니었다. 눈길이 문 옆의 벽시계로 돌아갔다. 평범하게 둥그런 벽시계의 큰 손이 12를 막 지난 저녁 8시였다. 이 시간에 잡힌 약속은 없었지만, 알베라는 신문을 옆으로 치우고 흘러내린 안경을 밀어 올렸다. 사설탐정이 직업인만큼, 급한 의뢰인이 갑작스레 방문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다.

세 번째로 노크 소리가 울렸다.

“곧 나갈게요.”

몸을 의자에서 일으키자 목과 어깨에서 우두둑거리는 소리가 났다. 굳은 목을 한 손으로 주무르며 알베라는 사무실을 저벅저벅 가로질렀다. 방금 앉아있던 책상을 떠나 작은 소파와 탁상을 지나자 금방 문에 다다랐다.

잠금장치가 찰칵 돌아갔다. 반쯤 열린 문 뒤로 보이는 얼굴은 낯익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손님은 맞았기에 알베라의 입술이 잠시 벌어졌다.

“연락도 없이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훤칠한 키를 가진 냉정한 인상의 남자였다. 바깥이 추웠던지 가지런한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붉게 달아오른 귀 끝이 보였다.

“아벨 씨라면 늘 환영이에요. 들어오세요.”

알베라가 한 발짝 물러서자 아벨이라 불린 남자가 신발을 털고 들어섰다. 알베라의 시선이 텅 빈 바깥 복도로 향했다. 의아한 음성이 울리듯 새어나갔다.

“릴레인 씨는 같이 안 오셨나 봐요?”

히어로 기관에서 현장 요원으로 일하는 동생의 얘기가 나오자 아벨이 소매 끝을 매만지며 뒤를 돌아보았다.

“최근 파견 보고서가 늦어져서 오늘은 밤새울 것 같다 그러더군요.”

저런. 부재한 이를 향한 동정심에 혀를 쯧쯧 차며 알베라는 문을 닫았다. 아벨의 눈이 풀려있는 잠금장치에 닿았다. 차분한 목소리가 한층 낮게 깔렸다.

“불편하시겠지만, 문을 잠가주실 수 있겠습니까?”

알베라의 손길이 손잡이에서 멈칫했다. 그리고 천천히 잠금장치를 걸어 잠갔다. 확연한 긴장이 알베라의 입가에 서려 있었으나, 눈에는 두터운 신뢰가 깔려있었다. 아벨은 고개를 살짝 숙여 무언의 감사를 표했다.

“잠시 앉아 계세요. 커피 한 잔 타올게요.”

“불청객인 처지에 신경 써주지 않아도 괜찮습니다만.”

“어차피 믹스밖에 없어요.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이미 전기 포트에 물을 붓느라 알베라는 등을 돌리고 있었다. 아벨의 시선이 분주하게 종이컵을 꺼내 커피믹스를 뜯는 알베라의 손에서 낡은 손목시계로, 살짝 걷어 올린 하얀 와이셔츠 소매로, 그리고 등 위로 곧게 떨어지는 높게 묶은 머리카락으로 스쳤다.

당신이 의뢰인, 아벨 프리스크 씨인가요?

어느덧 3년도 더 지난 기억이 커피 향과 함께 피어올랐다. 아마 그때도 커피를 거절했었던 것 같다. 당시 20대 후반이었던 알베라는 어떻게 반응했었던가.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소개도 뭣도 없이 내뱉은 말에 어처구니없어할 만도 했으나, 알베라는 그런 아벨의 태도에도 당황하지 않았다는 건 기억한다. 지금도 손님용 소파를 앞에 두고 멀뚱히 서 있는 아벨을 보며 알베라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눈썹을 추켜세울 뿐이었다.

“서른을 넘긴 지 한참 되었는데, 슬슬 고집 꺾을 생각은 없으신가 봐요.”

앉아요, 앉아. 손님을 쓸데없이 세워두고 대화하는 취미는 없어요. 손에 김이 피어오르는 종이컵을 하나씩 들고 소파 사이에 있는 낮은 탁상에 올려놓으려다 알베라는 멈칫했다. 탁상 위에 이리저리 어질러진 종이를 이제야 본 탓이었다.

“치워둔다고 하고 잊고 있었네. 미안해요, 잠시만요.”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탁상 구석에 올려두고, 알베라는 종이를 집어 팔에 차곡차곡 올렸다. 그 움직임을 반사적으로 쫓던 아벨의 시선이 탁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종이에 머물렀다.

하얀 종이 위에 검은 오선지, 그리고 연필로 그린 듯한 음표가 반절 채워져 있었다. 지우개로 지운 흔적도 선명했다. 피아노 악보에서 흔히 보는 둥그런 음표가 아닌 막대기 끝에 숫자가 매겨진 음표를 거쳐, 새파란 눈이 다시 악보의 맨 위로 향했다. 곡 제목을 장식한 낯선 단어를 입안에서 조용히 굴려보는 순간.

“베르쇠즈 요한.”

들린 건 다른 이의 목소리여서 아벨은 고개를 들었다. 하얀 십자가 무늬가 새겨진 알베라의 짙은 회색 눈동자가 아벨을 마주해왔다. 반달 테 안경 뒤의 서늘한 눈가가 슬쩍 휘자 인상이 단번에 부드럽게 바뀌었다. 알베라의 기분이 상해 보이진 않았으나, 아벨은 예의 바르게 사과를 건넸다.

“죄송합니다. 함부로 볼 생각은 아니었는데.”

“치우지 않은 건 전데요, 뭘. 본다고 해서 큰일 나는 기밀문서는 아니니 괜찮아요.”

악보까지 치워 깔끔하게 정리된 탁상을 가운데에 두고, 알베라와 아벨은 소파에 마주 앉았다. 커피가 식기 전에 마시라는 손짓에 아벨은 순순히 종이컵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설탕과 크림이 녹아 다디단 커피의 맛이 혀를 데웠다.

“작곡도 하셨습니까?”

다분히 충동적이고 사적인 질문임을 아벨은 뒤늦게 자각했다. 건너편에서 바른 자세로 앉아 커피를 홀짝이던 알베라는 컵에서 입술을 떼고 빙긋 웃었다.

“배우다 말아서 한참 어설픈 실력이지만요.”

비밀스러운 취미가 밝혀진 소녀처럼 조금 머쓱한 기색이었다. 아벨은 고개를 저었다.

“작곡이 범죄도 아니고 부끄러울 게 뭐가 있습니까. 악보 하나 볼 줄 모르는 저보단 낫지요.”

‘범죄도 아니고’라니, 히어로 기관 고참 아니랄까 봐 어휘 선택 참 독특하시네요. 알베라는 가벼운 웃음으로 부끄러움을 지워낸 듯 종이컵을 다시 입술로 올렸다. 조금 늦게 아벨의 두 번째 질문이 닿았다.

“곡은 언제 완성하실 예정입니까?”

이번에 미소는 없었다. 알베라는 마시려던 컵을 내려놓았다. 엄지로 입술을 쓸어내리는 잠깐의 순간, 정적이 머물렀다. 이내 알베라는 어깨를 작게 으쓱였다.

“그건 저도 아직 모르겠네요.”

“자신이 없으신 겁니까? 제가 악보는 볼 줄 모른다지만, 괜찮은 곡 같아 보였는데요.”

“실력의 문제라기보단…”

알베라의 회색 눈동자가 옆으로 굴러갔다. 아벨의 시선이 그 방향을 따라붙었다가, 사무실 벽면에 걸린 사진까지 닿았다.

“마음의 매듭을 짓기 전까진 곡도 완성할 수 없을 것 같아서요.”

사진 안엔 세 사람이 있었다. 3년 전 기억의 모습보다 훨씬 앳된 얼굴의 알베라가 눈을 접어 활짝 웃고 있었다. 그 옆에는 적금발의 따스한 머리카락을 지닌 또래의 남성이 친근하게 알베라의 어깨 위로 팔을 두르고 있었다. 둘 사이엔 남자를 닮은 어린 여자아이가 손가락 브이를 그리며 보조개가 푹 들어갈 만큼 환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참으로 단란한 기억을 담은 사진 같았기에, 아벨은 그저 그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대학교 입학 직후에 찍은 사진이에요. 제 옆은 요한이고요, 저 귀여운 아이는 웬디예요. 절 언니라고 부르면서 어찌나 잘 따르던지.”

침묵하는 아벨 대신 담담하게 대화를 잇는 알베라의 표정은 평소와 같았다. 그러나 손가락은 초조하게 소파 팔걸이 위에서 꼼지락대고 있었기에, 아벨은 가면 같은 여상함에 속지 않았다.

사연 많은 사람이에요. 요즘 사연 없는 사람이 드물겠다만, 그래도 가까이 지내실 예정이면 알고 있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의료팀 소속의 동료가 넌지시 알려준 과거는 평소 아벨이 보아온 알베라와 괴리감이 들 정도로 울적했다.

알베라 숄메르 씨, 연인이 살해당했는데 그 현장에 있었대요. 연인의 동생이 실종되었는데, 정황상 납치임이 분명해서 둘이서 아이를 찾고 있었다네요. 숄메르 씨가 직접 말하고 다니진 않지만, 그때 기사가 워낙 크게 나서…. 기사에는 실리지 않았지만, 살해범이 유토피아 프로젝트의 세실리 에이바였어요. 그 악명 높은, 아시죠? 그래서 히어로 기관에선 이 얘기 모르는 사람 찾는 게 더 힘들고. 프리스크 씨는… 모를 수도 있죠. 아무래도 그때 프리스크 씨도 사정이 있었으니까요.

그제야 아벨은 자신의 의뢰를 완수한 후 알베라가 지은 후련하고 씁쓸한 표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제게 빚을 졌다고요? 무슨 말씀을. 프리스크 씨가 동생분과 재회한 모습을 본 것만으로도 충분한 보상입니다.

빈말이 아닌 진심이었다는 것을, 아벨은 지금은 알았다. 8년간 실종되었던 동생과 기적적으로 재회한 자신 위로 알베라가 누구를 겹쳐보는지 짐작할 수 있어, 그저 감사 인사만으로 뒤돌아 떠날 수 없었다.

저와 릴레인을 통해서 느낀 대리만족에 깔려있을 상실감 또한 짐작할 수 있었기에.

“그래서 무슨 일로 찾아오셨나요?”

얘기가 조금 옆으로 샜네요. 평이한 질문에 아벨의 시야가 현실로 돌아왔다. 식어가는 커피가 아벨을 반겨주었다. 알베라는 빈 종이컵을 탁상에 내려놓고 무릎 위로 손깍지를 꼈다. 인내심 있게 기다리는 모습에 아벨 역시 컵을 내려놓고 시선을 마주했다.

“릴의 부탁으로 왔습니다.”

“릴레인 씨의 부탁이요?”

용건이 짐작조차 가지 않는 듯 고개를 기울이면서도, 알베라의 눈빛엔 아벨의 말을 의심하는 기색은 없었다. 아벨은 말없이 코트 안주머니에서 두 번 접은 쪽지를 꺼냈다. 알베라는 쪽지를 순순히 받아서 펼쳤다. 당신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하더군요. 아벨의 조용한 말과 함께 알베라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경악이 스쳤다.

쪽지가 떨리는 손끝에서 구겨졌다. 빠르게 쪽지를 도로 접어 주먹 안에 말아쥔 알베라의 목소리는 속삭임보다 낮아 거의 들리지도 않았다.

“아벨 씨. 혹시 이 쪽지의 내용 보셨나요?”

“아니요. 저는 전달만 했습니다.”

한 치 거짓 없는 어조에 알베라가 앓는 소리를 내며 손에 얼굴을 묻었다. 진한 한숨이 들리자 아벨의 눈썹이 휘었지만, 고뇌에 빠진 알베라의 눈에 보일 리 없었다.

“릴레인 씨가 제게 이걸 줬다는 걸 들킨다면 릴레인 씨는 물론이고, 아벨 씨도 상당히 곤란해질 거예요.”

이미 엎질러진 물이지만, 알고는 계셔야 할 것 같아서요. 염려로 주름진 알베라의 이마를 보며 아벨은 담백하게 대답했다.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고 판단했겠지요.”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는지, 다시 흘러나오는 알베라의 한숨이 더욱더 깊어졌다. 들릴 줄 모르는 알베라의 얼굴에 아벨은 심려 끝에 나름의 위안을 건넸다.

“그게 무엇이든 간에, 저나 릴이나 당신에게 평생 갚아도 모자랄 은혜를 입었으니 저희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앞가림은 충분히 알아서 할 수 있으니까요.”

“모르지는 않는데, 이게 걱정을 안 할 수가 없는 수준이어서요.”

알베라의 반듯한 목소리가 드물게 뭉개져 나왔다. 잠깐의 침묵이 흐른 후 알베라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알베라의 시선이 주먹 쥔 제 손에 머물렀다가, 아벨을 곧게 바라보았다.

“쪽지의 내용에 대해선 물어보지 않으세요?”

“그게 당신에게 도움이 되었습니까?”

예상했던 답변도 아닌 질문이었다. 알베라의 대답은 짧은 망설임 끝에 조용히 흘러나왔다.

“네, 매우.”

“그럼 그걸로 됐습니다.”

시간도 늦었으니 더 민폐 끼치지 않고 돌아가겠습니다. 알베라 씨도 너무 늦게 있지 마십시오. 깔끔하게 인사를 건네며 일어서는 아벨을 따라 알베라도 얼결에 소파에서 일어섰다. 민폐는 아니었다는 말을 꺼낼 기회를 놓쳐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알베라도 마찬가지로 평범하게 인사를 건넸다.

“조심히 돌아가세요.”

“나가는 길은 알고 있으니 나오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능숙한 손길로 잠금장치를 푸는 아벨을 알베라는 묵묵히 응시했다. 찰칵이는 소리와 문이 열렸다. 바깥으로 한걸음 발을 뗀 아벨 뒤로 감정 어린 목소리가 닿았다.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

아벨의 고개가 반쯤 돌아갔다. 푸른 눈동자가 회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작은 끄덕임과 함께 문이 닫혔다.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가 사라진 지 한참 후에도 알베라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주먹에 힘이 풀리고, 떨리는 손가락이 구겨진 쪽지를 바스락거리며 펼쳤다. 이미 내용은 머릿속에 들어있었으나, 눈은 다시 글자를 뇌리에 새기듯 읽어내렸다.

「웬디 알프윈이라는 이름을 키메이커 프로그램 기록에서 찾았습니다. 극히 일부만 남아있던 일지라 다른 정보는 발견하지 못했으나, 웬디의 실종이 유토피아 프로젝트와 관련된 건 확실한 것 같습니다. 요한 알프윈 씨의 죽음 역시 이와 관련 없진 않겠죠. 유토피아 프로젝트가 직접 연관된 만큼, 히어로 기관에서 이 정보를 외부인인 당신에게 내주지 않을 것 같아 비밀리에 연락드립니다. 도움이 되었다면 좋겠습니다.」

급하게 휘갈긴 듯 날아가는 글씨를 한참 바라보는 눈에 어둑하고 우울한 감정이 스쳤다. 웬디, 요한. 아까는 가볍게 꺼낸 이름들이 다시 무겁게 입술을 짓눌렀다. 떨쳐내지 못한 과거의 상흔이 어깨를 내리누른다. 포기하지 못해 방황하던 길에, 이 구원 같은 빛의 무게가 실감이 났다.

“…정말 고마워요.”

닿지 못할 인사와 함께 알베라는 빠른 걸음으로 책상 뒤의 창가로 다가갔다. 단단히 여민 커튼을 확인하고, 알베라는 라이터를 꺼냈다. 치직거리는 소리와 창틀에 놓인 재떨이 위로 잿빛 종이 가루가 눈처럼 쌓였다.

알베라는 커튼을 걷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따갑게 상기된 볼에 닿았다. 잿더미가 흔들흔들 형체 없이 무너지는 것을 바라보며, 알베라는 담뱃갑에서 가느다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담배의 끝에 라이터가 닿자 붉은빛으로 물들었다가 까맣게 타들어 갔다. 숨을 들이쉬었다 한숨처럼 내뱉자 하얀 연기처럼 입김이 창밖으로 피어올랐다.

사무실 문을 연 첫날, 알베라는 똑같은 곳에 서서 담배를 입에 물고 다짐했었다. 너를 반드시 찾아낼게. 아직은 태우는 담배 연기에 해소하지 못한 후회가 섞여 있었다. 미완성인 악보에 마침표는 찍지 못했다.

이번에야말로 널 반드시 찾아낼게, 웬디.

너를 위해서, 요한을 위해서. 그리고 나를 위해서.

하지만 희망이란 이름의 단서는 던져졌고, 알베라는 그것을 다시 붙잡았다.


Written 22-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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