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폐허의 잔상

정의는 굴하지 않는다

쿠레아 아쿠아 x 준 이엘

“그래, 당장은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 언젠가 다시 얘기하자. 나중에 너를 찾아올게.”

장례식이 언제였는지 쿠레아는 정확하게 기억한다. 1998년 5월 3일, 오후 1시. 폭발 사고 후 무너진 연구소의 폐허에서 사상자의 시신을 전부 수습하는 데 총 13일이 걸렸고, 올리비아 노바의 사체는 그중 제일 늦게 발견되었다. 연고 없던 이들의 합동 장례식은 그로부터 사흘 후에 치러졌다.

날짜와 시간은 여전히 선명했다. 그날 안개비가 내렸었다는 것도 기억한다. 참석자는 많지 않았다. 이들의 유일한 연고가 같은 날 동시에 세상을 뜬 까닭이었다.

쿠레아는 울지 않았다. 이미 쏟을 눈물을 다 쏟아버려, 부어오른 눈은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말라 있었다. 상복 주머니에 넣어둔 손수건을 꺼낼 필요조차 없었다. 자기 아버지의 장례식에서도, 며칠 후 치러진 올리비아의 장례식에서도.

그다음 해, 아버지의 무덤을 찾았을 때 쿠레아는 조금 울었다. 그 후년에는 조금 덜. 시간으로 슬픔이 무뎌져 이젠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가 웃으며 안부 인사를 건넬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올리비아의 무덤 앞에서는 웃지 못했다. 그 앞에서 눈물 흘린 적도 없었다. 이름이 정갈하게 새겨진 비석을 앞에 두면 늘 똑같은 질문이 먼 과거에서 환청처럼 들려왔기 때문이다.

“레아, 정의가 뭐라고 생각해?”

지금은 그 질문에 온전한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상대는 화사한 백합 꽃다발을 품에 가득 안고 쿠레아 앞에 서 있다. 그가 낯선 얼굴로 쿠레아를 보며 웃었다. 자신의 무덤을 둘 사이에 둔 채로.

“오랜만이야, 레아.”

무려 14년이 걸린 재회였다. 하지만 처음 본다는 인사도 틀린 말은 아니었을 테다. 저를 찾아온 사람은 올리비아였지만, 올리비아의 얼굴을 하지 않았기에.

쿠레아가 수년 전의 올리비아를 떠올리기는 어렵지 않았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웨이브 진 푸석하고 색바랜 검은 머리카락. 동그란 안경테 뒤의 건조한 회색 눈동자. 주근깨 가득한 창백한 얼굴과 호리호리한 체격. 조금 음침했지만 평범하다면 평범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반면 지금 쿠레아를 마주 보는 여인은 스쳐 지나가기만 해도 기억에 남을 만큼 아름다웠다. 여인은 채 스물이 되지 않아 보였다. 쿠레아가 결혼해 아이가 있었다면 이 여인 또래쯤 되었을까. 윤기 있는 연갈색 머리카락을 느슨하게 묶어 한쪽 어깨 위로 내려뜨리고, 순한 눈매를 접어 여인은 무해한 웃음을 지었다. 여인의 이질적인 연녹색 눈동자 속에서만 쿠레아는 찾던 이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제게는 보이지 않는 미래를,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꿈을 열망하는 광기.

“스페셜은 어린 나이일수록, 위험한 상황일수록 강하게 각성한다는 가설이 있어. 그 징조가 보이는 아이들을 데려가 강력한 능력을 각성하는 계기를 줄 거야. 스페셜은 이상적인 세상으로 가기 위해 꼭 필요한 존재니까.”

세 번째 키메이커 프로그램이 강제로 중단된 직후, 새하얀 서리가 땅에 깔린 2012년 1월. 쿠레아는 올리비아 노바와 재회하는 동시, 준 이엘과 처음 만났다.

* * *

“잠시 방해받지 않고 이야기하지 않을래? 우리 나름 친구였잖아.”

“…정말 나를 친구라고 생각하긴 했었니?”

친구. 한때 올리비아에게서 듣고 싶어 했던 단어를, 쿠레아는 단칼에 부정했다. 준 이엘은 의외의 말을 들은 듯 눈을 가늘게 접었지만, 미소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 올라간 입꼬리가 돌부리처럼 걸려 쿠레아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쿠레아보다 조금 이르게 아미티 프로젝트 연구실에 입사한 올리비아는 명석했지만 조용했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다. 붙임성이 없어 타인이 먼저 대화를 걸어도 살가운 대답, 예의적인 미소 하나 보여주지 않는 이였다. 나이대가 비슷해 필연적으로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게 된 쿠레아조차 예외는 아니었다. 쿠레아 역시 처음에는 자신을 노골적으로 귀찮아하는 올리비아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부모님은 안 계셔. 브루클린 대교 사고 당시 돌아가셨어.”

때론 행복보다 불운이 깊은 공감대를 만들었다. 그저 지나가는 가벼운 질문에 대한 냉정한 답변이 무심하던 쿠레아를 올리비아 곁으로 이끌었다.

내 어머니도. 비슷한 상처의 고백에도 올리비아의 표정은 변화 없었다. 쿠레아는 그런 올리비아를 무례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 도시에서 같은 날을 사랑하는 사람의 기일로 챙기게 된 이들은 셀 수 없이 많았다.

‘스페셜’, 이능력을 지닌, 평범에서 벗어난 이들. 한 스페셜의 폭주로 브루클린 대교가 붕괴해, 그들은 준비되지 않은 채로 갑작스럽게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다르기에 위험하고, 위험하기에 다르다. 당연하게도 스페셜은 배척당했고, 그 부당한 대우에 항의하는 이들은 래디컬이라 낙인찍혔다. 브루클린 대교 참사 유족은 대부분 혐오의 선두에 있었다. 보다 중립적인 태도를 취한 이들도 눈먼 혐오의 화살을 맞고 싶지 않아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올리비아, 너는 스페셜이 싫지 않아?”

“바보 같은 질문이네. 스페셜은 이미 이 세상의 일부야. 우리가 그들을 모르던 과거에도 그랬고, 수면으로 드러난 지금도 똑같아. 그들을 혐오해서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우리가 택해야 할 길은 박멸이 아닌 공존이야.”

사람들의 날 선 말과 시선이 두려워 입을 다물고 있던 쿠레아는 부끄러워졌다. 저보다 고작 4년 더 산 올리비아가 한없이 어른스러워 보였다.

편견 가득한 세상을 무시하며 홀로 앞서가는 올리비아를 친애했고, 존경했다. 기꺼이 올리비아가 선구자로 걸어가는 길을 따라가고 싶었다. 올리비아를 향한 쿠레아의 호감은 필연적이었고, 부정할 수 없이 운명적이었다. 어딘지 불편한 느낌이 드는 회색 눈동자를 마음 저편으로 멀리 치워버릴 만큼.

그랬기에 당시의 쿠레아는 눈치채지 못했다. 올리비아가 그들을 단 한 번도 같은 ‘사람’이라 칭한 적 없다는 사실을.

* * *

“여전하구나. 네 바보같이 올곧은 면도 싫어하진 않지만, 마흔을 넘었는데도 큰 그림을 보지 못하는 건 조금 아쉬운걸.”

아직 순진하기만 하구나, 레아. 도발할 의도 없는 순수한 아쉬움이었으나, 쿠레아가 주먹을 쥐게 하기엔 충분했다.

큰 그림이라 하였는가. 쿠레아가 발견한 올리비아의 행적은 그리 건조하게 표현될만한 것이 아니었다. 어린아이들의 납치를 조사하며 드러난 키메이커 프로그램의 실체는 산전수전을 겪어온 히어로 고참도 경악할 만큼 잔혹한 실험이었다. 강력한 능력을 얻고자 사지로 밀어 넣어진 아이 중 살아남은 이들보다 죽은 이가 많았다. 온전한 시체를 찾은 경우가 그나마 다행이었다.

세 번째. 무려 세 번째 실험이었다. 세 번째 죄에 다다라서야 히어로는 실험을 주도한 유토피아 프로젝트를 추적할 수 있었다. 보고서를 받고 현장으로 향한 쿠레아의 얼굴엔 다른 이와 마찬가지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비록 실험의 참혹함에 질려서만은 아니었다.

“독립할 준비를 하고 있어. 따로 연구하고 싶은 게 있거든. 네가 온다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은데. 관심 있어, 레아?”

올리비아와 친해진 지 얼마나 됐을까, 올리비아는 쿠레아에게 제안을 하나 했었다. 아직 아버지가 소장으로 있는 아미티 프로젝트 연구소를 떠날 생각은 없었지만, 쿠레아는 올리비아를 단번에 거절하지 못했다.

무슨 연구인데? 예전에 사소한 질문 하나로 올리비아를 친애하게 된 만큼, 이번에는 가벼운 질문 하나로 올리비아에게서 뒤돌아서게 되리라고 쿠레아는 예상하지 못했다.

스페셜. 각성하지 않은 어린아이들. 잠재성을 깨우는 생명의 위협. 흘린 피 위로 꽃피우는 능력. 올리비아의 속삭임은 달콤했다. 모두가 안전하고, 배고플 일 없고, 범죄에 노출될 일 없는, 꿈만 같은 행복한 세계.

“스페셜은 이상적인 세상으로 가기 위해 꼭 필요한 존재니까. 그러니 필연적으로 그들의 능력을 키우고 통제할 방법을 찾아야 하지. 이 연구는 유토피아를 향한 첫 발걸음이야.”

긴 침묵 끝에 쿠레아는 목이 졸린 듯 간신히 짧은 문장을 뱉어낼 수 있었다.

“올리비아, 그들은 사람이야.”

올리비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들은 열쇠야, 낙원으로 향하는 열쇠.”

올리비아가 그리는 유토피아의 청사진 위로 키메이커 프로그램의 그림자가 깔렸다.

“레아, 우리는 먼 길을 돌아왔지. 하지만 너는 여전히 썩히긴 아까운 인재야. 나와 같이 가지 않겠어?”

한때는 유혹적인 제안이었다. 그러나 올리비아의 시간이 멈춰있던 동안 쿠레아는 많이 바뀌었다. 아버지를 비롯한 동료들의 목숨을 앗아간 연구소 사고 후 절망을 딛고 일어섰고, 스페셜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을 바꾸기 위해 히어로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추진했다. 그리고 그 노력은 정식 정부 기관으로 창설되어 결실을 보았다. 사람들이 더는 모든 스페셜을 잠재적 범죄자라 치부하지 않게끔, 쿠레아는 정의를 대표하는 영웅을 내세웠다.

“나는 히어로 기관의 국장, 쿠레아 아쿠아야. 너를 납치와 불법 실험 혐의로 체포하겠어. 올리비아, 아니, 준 이엘. 순순히 따라오면 다치는 일은 없을 거다.”

그만 거짓된 환상에서 벗어나. 쿠레아는 더는 올리비아의 그늘에서 그를 숭배하는 어리숙한 청년이 아니었다. 죄인을 바라보는 히어로 국장의 빛나는 금색 눈은 냉정했다.

준 이엘은 웃었다. 너무나도 화사하고 아름답게.

* * *

“환상이 아니야. 낙원은 기필코 이뤄야만 하는 미래야.”

그 어떤 낙원도 무고한 이들의 피를 흘릴 가치는 없어. 쿠레아의 지탄에 준 이엘이 드디어 웃음을 거두었다. 진지한 표정 뒤에 녹색 광기가 번뜩였다.

그럴 리가. 낙원은 그 무엇보다 가치 있는 염원이야.

쿠레아는 터져 나오는 수많은 욕설과 저주를 삼키고 단 한 문장을 준 이엘을 향해 내뱉었다.

“미쳤구나, 올리비아.”

신랄한 진심에도 준 이엘은 다시 웃었다. 한걸음, 그는 가까이 다가와 올리비아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을 쓸며 백합 꽃다발을 내려놓았다.

“본인의 무덤에 꽃을 바치는 것도 웃기는 모양새긴 하네. 꽃다발, 원한다면 재회의 선물로 네게 줄까?”

필요 없어. 버리고 가면 알아서 썩어가겠지. 제 말을 못 들은 체하는 준 이엘에게 쿠레아가 차갑게 일갈했다. 준 이엘은 생글생글 웃으며 쿠레아를 등지고 뒤돌아섰다.

“이거 조화야, 레아. 생명이 다하면 시들어버리는 생화보다 영원히 아름다운 것이 좋잖아.”

“그것이 설령 꾸며낸 가짜라 하더라도?”

준 이엘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 움직임을 따라 결 좋은 갈색 머리카락이 살랑거렸다. 인형 같은 얼굴에 기묘한 미소가 걸쳐져 있었다.

“진짜와 가짜가 무슨 상관일까? 끝에 무엇이 남는가가 중요하지.”

한참, 둘 사이에 대화 대신 서리만 쌓였다. 연한 봄을 닮은 준 이엘 위로도, 짙은 밤의 색을 지닌 쿠레아 위로도, 겨울이 내려앉았다.

“하나만 더 묻자, 올리비아. 희생을 밟고 거머쥔 행복에 의미가 있어?”

준의 얼굴이 반쯤 돌아가 쿠레아를 응시했다. 부드러운 목소리에 설핏 짜증이 서리는 걸 쿠레아는 모르지 않았다.

“널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겠어. 왜 세상이 정한 규율에 그렇게 집착하는 거야?”

“세상의 규율은 정의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니까.”

“레아, 정의가 뭐라고 생각해?”

수년 전, 올리비아가 던진 질문에 쿠레아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내가 생각하는 정의는 무엇일까. 그것이 옳은 정의일까. 혹은 그릇된 정의가 아닐까. 그런 불안을 파고들어 올리비아는 서투른 쿠레아를 쉽게 흔들었다.

여전히, 쿠레아는 자기 대답이 정답이라 확신치 않는다. 그러나 지금은 단호히 입을 열어, 과거에 자신이 외면했던 결론을 입에 담을 수 있었다.

“정의는 굴하지 않는 거야. 그 어떤 쉬운 길에도. 그 어떤 부조리, 그 어떤 궤변에도. 옳아 보이는 길이 아무리 두려울지라도.”

나는 네게 굴하지 않을 거야. 준 이엘이 눈을 접어 생긋 웃었다. 봄의 연두색이 머무는 시선이 차가웠다.

“…그래, 결국 우리가 함께하는 일은 없겠구나.”

예상은 했지만 아쉽네. 올리비아로서 네게 보이는 호의는 여기까지야. 다음엔 너는 히어로 국장으로서, 나는 유토피아 프로젝트의 선구자로서, 서로 대립할 수밖에 없겠지.

언젠가 또 만나게 될 거야, 쿠레아 아쿠아. 기다리고 있을게. 건조한 인사와 준 이엘은 일그러진 허공으로 사라졌다. 비석 앞에 오직 꽃다발만이 이별의 상흔처럼 남아있었다.

오늘도, 쿠레아는 올리비아의 무덤 앞에서 울지도 웃지도 않는다. 다만 먼 과거에서 이어져 온 질문에 매듭을 지었다는 약간의 후련함이 남아, 쿠레아는 미련 없이 무덤과 꽃다발을 뒤로하고 돌아섰다. 정의를 향해 가야 할 길이 아직 멀었다.

* * *

22살의 쿠레아는 올리비아 노바와 가까워지고 싶었고,

27살의 쿠레아는 올리비아 노바를 부정하지 못했다.

28살의 쿠레아는 올리비아 노바가 불타 죽은 모습을 보았고,

그리고 지금, 42살의 쿠레아는 준 이엘에게 선언한다.

네가 바라는 세상이 오는 것을 막기 위해, 난 오늘도 노력하고 있다고.

정의가 절대로 쉬운 길이 아니라는 걸 쿠레아는 안다. 한때 동료였던, 어쩌면 친구였을지도 모르는 이에게 총구를 겨눌 각오가 되었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두려워 자기 정의에서 등 돌리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쿠레아 아쿠아의 정의는 굴하지 않는다.


Written 22-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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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로그의 그림은 에꾸몽 (@eggu_commi)님의 커미션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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