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램덩크

[정환호장] 해피 화이트 뉴 이어

ready to dive by 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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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살기 시작한 때부터 크리스마스나 새해는 그저 지나가는 계절 속 어느날일 뿐이다. 언제부터 이렇게 건조해졌나, 싶다가도 나쁠 것 없다 싶어 생각을 멈춘다. 나이도 들어가는 마당에 언제까지 어릴 때처럼 해맑을 수는 없지. 제 부모님은 아직도 12월이 되면 대문부터 장식한다지만, 그런 면까지는 닮지 않았을 수도. 어릴 때부터 만나던 사람들이 알면 놀라 자빠질 생각이지만 호장은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연말 분위기에 감흥이 없다고 해서 형식적인 인사말마저 달갑지 않다는 건 아니다. ‘크리스마스 즐겁게 보내세요.’ 같은 문장은 전호장도 얼마든지 먼저 보내거나 답으로 돌려줄 수 있었다. 하지만 올해는 다쳐서 그런지 속이 잔뜩 삐딱해져 25일 0시부터 윙윙대며 울리는 진동을 죄 무시했고, 새로운 해가 시작되고 나서야 뒤늦게 집어 든 휴대전화엔 돌려줘야 할 안부가 셀 수 없이 쌓여있었다.

손가락 하나로 문자를 술술 넘기던 호장이 이미 잔뜩 뉘어진 허리를 더 끌어내렸다. 이보다 재미없는 겨울이 있었나. 주르륵 흘러내린 등짝이 침대에 그대로 눌어붙는다. 이상하게 꺾인 발목을 탓하는 것도 몇 달간 쉬지 않고 하니 질려버렸다. 제대로 읽히기도 전에 지나가는 문자 중 호장의 눈길을 끄는 이름은 언제나 같다. 고등학교 시절 농구부원이 모여있는 그룹 메시지에는 그 머릿수만큼 알림이 떠 있었다. 모두가 보낸 연말 인사에 전호장이 빠지든 끼어있든 상관없이 매년 개인 메시지를 한 번 더 보내는 사람. 연초나 말, 혹은 명절이나 생일에만 가끔 소식을 전하는 멀다면 먼 사람.

올해도 눈은 안 오네.

목록에서도 다 읽히는 짧은 문장이 뭐라고 기분이 이상해진다. 이정환과 함께 눈을 맞은 게 언제더라.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지는 고등학교에서의 1년, 그 한 해를 빼면 이정환을 불러낼 만한 이유가 없었다. 그때도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불러냈던 것 같은데. 잠깐 회상하던 호장은 헛웃음을 치며 머리를 휘휘 털어냈다.

하나씩 지워지는 숫자, 답장은 전부 일이 있어서 확인이 늦었다는 간단한 사과로 시작했다. 딱히 일이라고 할 건 없었지만, 형식적으로 보내는 문자가 다 그렇지 않겠나. ……라고는 했지만, 이정환의 문자에는 글자 하나 적지 못했다. 그동안 보내왔던 것처럼 올해도 고생했다거나, 다음 해는 더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는 덕담 정도면 쉬이 답장했을 텐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이정환이 생뚱맞은 문자를 보내지 않았나. 올해도 눈은 오지 않는다니. 누가 보면 매년 화이트 크리스마스로 화기애애하게 떠든 줄 알겠다.

“나오실래요?”

“갑자기?”

“화이트 크리스마스잖아요!”

갑자기 그때가 생각날 건 또 뭐야. 호장은 한 글자도 적지 못한 문자창을 끄고 전화를 내려놨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호장도 다가오는 크리스마스를 기대했다. 바라던 대로 눈까지 내렸던 고등학교 1학년의 겨울, 밖으로 뛰쳐나간 호장은 발목까지 쌓인 뽀득뽀득한 눈을 밟으며 한참 걸어 다녔다. 집 앞 대문부터 공원까지 아무도 밟지 않은 눈에 첫 발자국을 찍던 호장이 향한 곳은 공중전화 앞이다. 기다렸던 눈이 오더라도 옆에 아무도 없으면 재미가 조금 줄어들기 마련이라서. 누구든 불러내겠다는 다짐으로 호기롭게 시작한 연락도 동전이 세 개쯤 들어가면 슬슬 불안해진다. 마지막 동전을 집어넣은 전호장의 머릿속에 스친 건 한 사람이었다. 뜬금없는 만남도 거절하지 않을 법한 사람. 내키지 않아도 나와서 어울려줄 것 같은 사람.

“어딘데?”

예상했던 대로 이정환은 멀끔한 모습으로 공원에 나타났고, 계획 없이 자길 불러낸 후배를 탓하지도 않았다. 별다른 목적 없이 만나 첫 발자국이라며 자랑하는 옆에 제 것을 찍고, 따뜻한 음료를 사서 전호장에게 건네주기도 하고, 눈이 치워진 길을 무시하고 높게 쌓인 눈 위로 뛰어들었다가 발이 걸려 넘어지는 꼴을 보며 웃기도 했다. 이정환이 없는 해남을 상상하기도 하고, 질리게 하는 농구 이야기도 또 하고…….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시간이 왜 그렇게 빨리 지나갔을까. 형도 그날을 떠올리며 문자를 보냈을까? 물어보지 않으면 답을 알 수 없는 생각만 하다 다시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여전히 뭐라고 답장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어떤 답이 맞는지도 모르겠고. 하지만… 고개만 삐죽 들어 올려 내다본 창밖에는 그날처럼 눈 내리는 풍경이 가득했다. 12월 25일에 받은 문자, 1월이 되어서야 보내는 답장은 싱겁기만 하다.

눈 와요.

하지만 뒤늦은 문자에도 기다렸다는 듯 전화를 걸어오는걸. 잠시 고민하던 호장이 수신 버튼을 누르고 나니 짧은 정적이 흘렀다. 호흡하는 소리마저 크게 전해질까, 숨죽이고 있던 호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에 참았던 숨을 쏟아내며 웃었다.

“나올래?”

“갑자기요?”

예전처럼 가까운 곳에 살지도 않으면서 대뜸 나오라니. 정환도 그때를 기억한다는 것과 다름없는 통화 내용에 입꼬리가 자꾸만 위로 솟았다. 웃음기 섞인 목소리를 돌려주자 정환의 목소리에도 비슷한 것이 더해진다.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날의 애매한 오후, 가족과 함께 있을 법한 사람이 왜인지 이 주변을 운전하고 있다고. 5분이면 갈 텐데. 그런 말까지 거절할 필요는 없었다.

불편한 다리로 오래 걷지는 못해 정자 안으로 몸을 숨겼다. 눈이 길게 내리지는 않았는지 얼마 쌓이지 않은 덕분이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다가 따뜻한 음료 한 모금으로 몸을 녹이는 게 누워서 떠올리던 그날과 같다.

“눈 오는 새해는 뭐라고 부르지?”

“그런 말은 없을걸요.”

“그런가.”

들어본 적 없다. 정환도 마찬가지인지 별다른 말 없이 음료를 마셨다. 눈 내리는 날에는 역시 누군가와 함께인 게 좋다. 몇 년 전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그 사람이 같은 사람이라면… 더 좋은가. 이어지는 추억에는 무언가 있음이 분명했다. “눈이 와서 부른 거죠?” 호장의 말에 부정하지 않는 입술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새해의 시작인 만큼 조바심을 낼 필요는 없다. 모두 연휴를 맞아 어디론가 떠났는지 조용한 길거리를 가만히 바라보던 호장이 먼저 몸을 일으켰다.

“정환이 형.”

“응.”

“해피 화이트 뉴 이어.”

“하하. 엉터리로군.”

“하지만 화이트 크리스마스보다 낫지 않아요?”

날씨를 이유로 사람을 불러내기에 눈보다 좋은 건 없다. 질척이며 녹기 전까지는 불편하지도 않고, 보기에도 예쁘고, 맞아도 비처럼 축축하게 젖지는 않는 데다, 그 분위기로 숨겨놓았던 감정까지 꺼내볼 수 있으니 말이다.

“……맞아. 훨씬 낫네.”

정환은 걸음을 옮기는 호장의 뒤로 자연스럽게 따라붙었다. 눈 올 때마다 볼까요? 말하면서도 봄꽃이 내릴 때도, 장맛비가 내릴 때도 만나게 될 걸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되면 차근차근 말해보기로 한다. 이정환은 언제나 거절하지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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