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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ㄹㄷㅋ/백호열] 크리스마스 철 아르바이트 유의 기간

산타 할아버지,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백호군단 네 명을 다 보게 해주세요. 혼자만 떨어져 있으려니 아주 쓸쓸하기 짝이 없네요.

결단코 이런 소원을 빈 적은 전혀 없다.

그런데 왜 지금 그중 세 놈이 보일까.

“백호 일어났다!”

백호의 눈이 뜨이자마자 시선이 마주친 용팔이 외쳤다. 뭔가 흔들거리는 바닥, 뭔가 차가운 바람, 뭔가 탁 트였으면서 까만 천장(?). 그리고 분주하게 주변을 돌아다니는 대남구식용팔. 상황 파악은 둘째치고 백호는 성큼성큼 다가온 구식이 손에 꼭 쥐여준 물건조차도 제대로 살필 겨를이 없었다.

“던져.”

구식이 말했다. 어디로? 뭐를? 어버버 거리며 제 손을 보니 뭔가 빛이 나는 덩어리가 있다. 구식이 가리킨 방향으로는 이와 비슷하게 빛나는 가정집이 보였다. 근데 이걸 왜 던져? 말조차 제대로 안 나올 만큼 강백호는 아직 잠이 덜 깼다. 아니 누군들 이 상황에 쉽게 말이 나오겠는가. 백호의 당황이 구식에게는 답답해 죽을 지경의 늑장이었는지 금세 그의 등을 철썩 내려쳤다.

“꾸물거릴 시간 없어! 빨랑 던져!”

흔히 볼 수 없는 구식의 불호령에 백호가 반사적으로 그의 말을 따랐다. 동그란 빛이 창문으로 쑥 들어갔다. 구식이 바로 새로운 빛 덩어리를 건넸다. 던져! 발사! 으라차! 한 개 던질 때마다 고함 한 번. 등짝도 짝짝짝. 그쯤 되니 슬슬 잠이 다 깼다. 구식의 목소리에도 점점 장난기가 섞여들었다. 하여 백호는 다섯 번째 덩어리를 주려는 구식의 관자놀이를 곧바로 감싸 잡았다. 빡. 대가리 빡빡빡.

“짜식들아, 아까부터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구식이 기절시키면 어쩌냐!”

“아이고야, 내가 쟤 데려오면 일 더 커진댔지!”

평소라면 경악과 공포로 반응했을 녀석들이 오늘따라 태연했다. 안 본 사이 간이 머리통만큼 부어올랐거나 단체로 실성한 게 분명하다. 뜻밖의 상황에 백호가 되레 움츠러들자, 대남이 조금 전까지 백호가 하던 것처럼 덩어리를 던지며 대꾸했다.

“놀란 건 아는데 일단 이거만 끝내자. 다음 마을로 가면서 설명해줄게.”

대남이 바닥에 놓인 빨간 자루를 백호에게 밀었다. 자루에는 덩어리가 가득하다. 기세가 사그라든 백호가 우물쭈물 자루를 주워 빈자리를 찾았다. 그러다 문득 보이는 빨간 스쿠터. 백호군단을 태운 나무통을 이끄는 스쿠터에는 마지막 단원이 앉아 있다. 양호열은 상하의를 새빨갛게 맞춰 입은 것도 모자라 빨간 모자까지 썼다. 그러니까… 이게….

이 난리 통에도 양호열은 묵묵히 운전을 이어갔다. 동그란 뒤통수를 바라보는 것도 잠시, 백호는 결국 기절한 구식 옆에 앉아 덩어리를 던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여기 세 명도 자신과 비슷한 과정을 거쳤을 거 같았다.


크리스마스라고 해서 강백호가 쓸쓸함을 느낄 새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백호는 이브 날에도 경기를 뛰느라 여념이 없었다. 미국 프로의 세계는 참 험난해서 어떻게든 살아남을 궁리를 해야 했다. 전술 고민하느라 머리를 싸매면 싸맸지, 감성에 젖은 순간은 거의 없었다. 크리스마스이브 강백호는 자신의 팀이 이겨서 기분이 좋았고, 성탄절 잘 보내라며 팀원과 덕담까지 주고받은 뒤 개운한 맘으로 집에 갔다.

크리스마스에 아무도 안 만난다고 해서 기분이 울적하지는 않았다. 아니 크리스마스 혼자 보낼 수도 있지. 자기 집으로 오라거나, 혼자서 보낼 사람끼리 모이자는 권유도 받았지만 거절했다. 그냥 이번에는 이런 크리스마스도 보내고 싶었다. 사람이 좋고 그를 좋아하는 사람도 많은 강백호의 여유 어린 선택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혼자 집에서 씻고 밥 먹고 빈둥거리다 잠들었는데 왜 눈을 뜨니 침대가 아닌 딱딱한 나무 썰매 위인가. 왜 가끔 생존 신고로 연락을 이어간 고향 친구가 떼로 들이닥쳤는가. 아니 이건 들이닥친 게 아니라 납치잖아?

“저놈한테 낚였지 뭐.”

대남이 썰매 앞 스쿠터를 가리켰다. 산타 분장을 한 양호열…. 이 중에서 주동자를 꼽으라면 당연히 그겠지. 양호열이 웃었다. 그나마 웃음소리는 평소랑 똑같다. 호호호 이 꼴값을 떨었다면 열 받기보다 무서웠을 거다.

“나도 낚였다니까, 누가 ‘산타 아르바이트’가 이런 일이라고 생각했겠어?"

“너 이 자식 그러면서 ‘설명은 이따 할 테니까 얼른 타!’ 이 지랄 했냐?”

“한 번쯤 해보고 싶던 대사였단 말이야.”

구식과 용팔도 비슷하게 당했는지 호열에게 바락바락 악을 질러댔다. 삼 대 일로 주고받는 말싸움을 듣고 있으니 설명 없이도 대충 전말이 파악됐다. 크리스마스이브, 양호열은 한창 수요가 많은 시기니 당일치기 아르바이트나 뛰려고 했다. 누가 권유했는지는 모르지만 대충 ‘산타 아르바이트’가 있다는 소리에 승낙했고, 그것은 곧이곧대로 밤사이 산타가 되어 선물 배달을 하는 일이었다.

“넌 대체 이런 일은 어디서 찾은 거냐.”

“나 정도 되면 말이야, 일을 찾는 게 아니야. 일이 날 찾아와.”

양호열이 문득 고개를 치켜들었다. 밤하늘을 올려보는 그의 자세는 명화의 한 장면을 연출하듯 샤랄라했다. 너흰 내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해왔는지 모를걸. 낭랑한 어조에 백호군단이 짜게 식은 눈으로 흘겨봤다. 운전이나 똑바로 해.

산타 옷을 입고 나서야 양호열은 제가 마법 같은 사기를 당했음을 깨달았으나 이미 일은 시작되었다. 마법의 스쿠터 뒤에 실린 어마어마한 자루 더미는 혼자서는 도저히 배달할 수 없는 양이었다. 양호열은 이를 일찌감치 눈치채 오랜 벗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끈끈한 의리로 이어진 백호군단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썰매에 올랐다.

“다들 시간이 돼서 다행이지.”

“뭔 소리야. 나 일주일 전에 차여서 슬픔에 젖어 있었는데!”

“난 지겹게 일하고 퇴근 중이었다고!”

“난 집에 잠깐 나와서 신발도 슬리퍼다!”

“그래서 대남이는 집에 혼자 청승 떨던 중이고, 용팔이는 남은 일 없고, 구식이는 부모님이 싸워서 피난 갔다가 만난 거니까 다들 딱 되잖아?”

“네가 운전만 안 했더라면 진작 밀어버렸을 텐데.”

“어쨌든 그렇게 인원 모으고 배달하다 보니까 한 명만 더 있으면 좋겠더라고. 마침 미국 지나는 길이어서 널 데려왔어.”

호열이 백호에게 눈을 찡긋거렸다. 눈이 마주치자 백호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린가. 그러나 아까부터 밤하늘을 달리는 이 썰매와 백호군단의 후줄근한 꼬락서니와 신비스러운 선물 자루와 그 안에 담긴 빛나는 공을 보면 아무래도 믿을 수밖에 없어진다. 백호가 자루에서 공을 꺼냈다.

“이걸 오늘 안에 다 배달하면 돼?”

“어. 보면 다 똑같이 생겼지? 그러니까 아무거나 꺼내서 던지면 돼. 근데 배달지는 꼭 이것처럼 빛나는 집이어야 해. 거기가 어린이가 사는 집이거든. 두 명 이상이면 숫자도 떠.”

마침 멀리서 빛이 나는 집 한 채가 보였다. 숫자는 삼. 용팔이 공 세 개를 꺼내 연속으로 던졌다. 공이 집 안으로 들어갈 때마다 숫자도 하나씩 줄어들었다. 배달이 끝난 집은 더 이상 빛나지 않았다. 배달 하나 끝. 그러나 근거리에 마을이 있다. 썰매 바닥에 앉아 있던 백호군단이 주섬주섬 일어나 어깨와 팔을 붕붕 돌렸다.

“이렇게 된 거 얼른 해치우자. 양호열 족치는 건 끝나고 해도 안 늦어.”

한 자루씩 차지한 백호군단이 차분히 전투 태세에 돌입했다. 백호도 그들을 따라 공을 서너개씩 손에 쥐었다. 가자! 너 나 할 것 없이 외친 함성에 공이 대포알처럼 발사됐다. 백호는 분주한 군단을 슬쩍 살폈다. 기대하던 나 홀로 크리스마스이브와는 영 딴판이지만… 이것도 나름 괜찮은 거 같다.

역시 난 북적이는 게 좋아. 끌려온 입장임에도 백호의 입가에 호선이 그려졌다. 잘 보면 백호군단 전원이 그랬다.


시차 같은 현실적인 문제는 마법으로 해결했다.

“저 모래시계 보이지? 저 모래가 떨어지는 동안에는 우린 올해의 크리스마스이브 밤만을 돌아다닐 수 있어. 다르게 말하면 저게 떨어지는 동안은 꼼짝없이 이브에 갇힌 거지.”

과연 썰매 구석에는 한 뼘 크기의 모래시계가 놓여있었다. 짙은 갈색의 나무 지지대에 모래알은 눈처럼 하얗다. 남은 모래를 보아도, 떨어지는 속도를 봐도 시간이 얼마나 흐르고 남았는지 영 가늠이 안 갔다. 그래도 절반은 떨어졌으니 앞으로 네다섯 시간만 일하면 되지 않을까 어림짐작은 했다.

게다가 이 기이한 아르바이트는 나름 근로기준법도 준수하는지 휴식 시간도 제공했다. 뜬금없이 울리는 종소리에 백호군단이 어리둥절 두리번거리자 의자 대신 놓인 줄로만 알았던 나무 상자가 달각였다. 열어보니 쿠키와 우유가 담긴 단지가 하나씩 들어있었다. 우유가 따뜻해! 여기 컵도 있어! 신기한 광경에 백호군단은 아이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쿠키는 지금까지 먹어본 것 중 가장 달콤하고 입에서 살살 녹았다. 따끈한 우유까지 더하니 목구멍으로 술술 넘어갔다. 환상적인 조합에 다들 허겁지겁 단지를 비워나갔다.

백호는 단지 뚜껑에 쿠키를 담고 흘끗흘끗 앞을 쳐다봤다. 휴식 시간이 됐음에도 양호열은 자리에서 벗어나질 않았다. 호열이 넌 안 먹냐? 구식의 물음에 호열이 대충 손만 저었다. 난 괜찮아! 그 말을 듣고서도 백호는 맘이 편치 않아 호열이 있는 스쿠터로 조심스레 이동했다.

“나 앉는다.”

“뭐? 어어, 조심조심!”

호열이 재빨리 엉덩이를 앞으로 빼 백호가 앉을 공간을 만들었다. 백호는 풀썩 뒷자리에 앉아 운전대 쪽으로 쑥 쿠키를 들이밀었다.

“너도 좀 먹어라.”

“이야, 난 진짜 안 먹어도 되는데… 고맙다.”

양호열의 볼이 불룩해졌다. 음, 맛있네. 맛있다고 했으면서 호열은 쿠키에 더 손대지 않았다. 괜찮으니까 너 다 먹어. 호열이 백호의 손을 잡아 밀었다. 빨간 장갑을 끼고 있어 촉감이 보들거렸다.

“어디 가고 싶은 곳은 없어? 휴게 시간에는 어딜 가든 자유랬어.”

“딱히 없는데.”

“그럼 오로라나 구경하러 가볼까.”

스쿠터가 붕 상승했다. 백호군단이 빛나는 집을 보듯이 호열도 눈앞에서 빛나는 길이 보일까? 어떤 원리로 그들의 위치를 파악하고 이동하는지 모르기에, 백호는 물끄러미 호열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근데 왜 갑자기 아르바이트냐. 직장도 있는 놈이.”

“그냥 할 짓 없어서 시간 때우기지. 원하는 것도 있었고.”

“돈 필요하면 나한테 말하지 그랬어. 나 이제 너희 다 먹여 살릴 정도는 되는데…. 많이 어려워?”

“뭐? 아냐. 진짜 심심해서 했어. 그리고 이런 건 원래 본인이 해야 의미가 있는 법이잖아.”

호열은 목을 비틀어 백호를 보려 노력했다. 그런 시늉을 했다. 백호로써는 이해하기 어려운 소리다. 돈이 그냥 돈이지 무슨 의미를 찾을까. 모처럼 만난 건데 호열은 운전에 여념이 없고, 백호는 그런 호열의 얼굴 반편만 겨우 봤으니 영 마뜩잖았다. 그렇게 심심하면 나 보러 오지. 심통이 난 백호가 턱으로 호열의 정수리를 꾹 눌렀다. 쿠키 하나를 더 호열의 입에 밀어 넣었다. 호열은 거절하려는 양 머리를 젓다가 결국 쿠키를 물었다.

“나 챙기는 건 너밖에 없네.”

아무래도 양호열이 강백호의 장난을 선의로 착각한 게 분명하다. 그가 턱을 들어 머리 위 백호에게 미소 지었다. 드디어 마주한 얼굴은 백호의 예상보다 더 가까웠다. 밤하늘의 달빛이 호열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따뜻한 숨결, 나부끼는 머리카락, 가늘어진 눈매. 호열이 한 손으로 백호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난 역시 네가 좋아. 피부에 와닿는 말의 진동. 갑작스러운 소리에 백호가 눈을 끔뻑이고 있으면 호열의 낯이 서서히 녹색으로 물들어갔다.

우와, 오로라다! 백호군단의 외침이 뒤에서 터졌다. 기다란 빛의 장막이 하늘을 장식했다. 오로라 굉장하네— 시선을 원위치한 호열이 자그맣게 감탄했다. 백호는 대답 대신 남은 쿠키를 우적우적 먹어 치웠다. 장막은 끝없이 일렁거렸다.


이 ‘산타 아르바이트’에 차출된 인력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배달을 진행하면서 백호군단은 이따금 하늘에서 그들과 비슷한 썰매를 맞닥뜨렸다. 다양한 생김새에 다양한 언어. 이 지구촌 사회에서 영어가 공용어 취급을 받기는 했지만 모르는 사람도 태반이었기에 강백호의 존재도 썩 빛을 발하진 못했다. 그래도 언어가 안 되면 몸뚱아리가 있다. 초반에 백호군단은 손짓, 발짓을 하며 간단한 의사소통을 시도했는데, 점점 많은 썰매를 마주칠수록 온몸을 씰룩여 상대방을 빨리 웃기는 대결로 변질하였다. 그렇게 한바탕 웃기고 나면 누구랄 것 없이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치며 헤어졌다.

“나는 산타가 어느 세월에 애들한테 선물을 갖다주는 지 이해가 안 됐는데, 이제 보니 그냥 사람을 많이 쓰면 장땡이네.”

다음 마을로 이동하면서 구식이 말했다. 그러자 대남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사실은 산타가 있는 것도 신기하지 않냐? 난 산타 초등학생 때까지만 믿었다고.”

“난 애초에 믿지를 않았어. 우리 집은 그런 거 안 챙겼거든. 그냥 맛있는 거 먹는 날쯤으로 여겼지.”

“나도.”

용팔과 백호가 각각 대답했다. 자연히 의문이 따라온다. 왜 산타는 모든 어린이에게 찾아오지 않았을까? 백호군단은 해결되지 않은 산타 구인난, 나쁜 아이와 착한 아이의 판별법 따위를 토론하였으나, 성인이 되었다고 한들 그들이 추론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문제였다. 그래도 그들은 그동안 못 받은 선물을 아쉬워하기보다는 이렇게 많은 아이에게 선물이 가서 다행이라는 점에서 의견이 맞았다.

“어쩌면 우리한테 산타가 안 온 건 우리가 어지간한 말썽꾸러기라서 일지도 모르지.”

용팔의 말에 구식과 대남이 맞장구쳤다.

“맞아. 난 어렸을 때 집에서 야구하다가 전등 깨 먹었어.”

“난 세 살 때 할아버지네 창고 불태웠다?”

“넌 좀 심한데.”

“지금까지 용케 감옥에 안 갔다니 기적이다.”

“어. 지금부터 가려고.”

비좁은 썰매에 때아닌 추격전이 일어났다. 출렁이는 썰매에 스쿠터까지 흔들리자 호열이 기겁했다. 너희 좀 얌전히 못 있냐! 호열이 소리 지르자 백호가 한 팔에 용팔, 남은 팔에 구식과 대남을 끼워 공중으로 붕 들어 올렸다. 호열 산타가 놀랐잖냐! 백호는 긴급 박치기로 빠르게 사태를 진정시켰다. 천사가 된 세 명을 바닥에 내려놓은 후 백호가 소매로 진땀을 닦았다. 이러니까 얘들이 선물을 못 받았지.

아차, 이러면 일꾼이 셋이나 사라지는데. 백호가 불안하게 남은 자루를 들어 올렸다. 다행히 손에 느껴지는 무게가 가볍다. 호열에게도 물으니 앞으로 마을 한 군데만 돌면 일일 산타 아르바이트가 끝난단다.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마지막 마을로 달렸고, 신속히 공을 던져 모래시계의 모래가 다 떨어지기 전에 배달을 끝마쳤다.

“고생 많았다, 강백호!”

“어엉. 호열이 너도!”

“혹시 기운 있으면 쟤들 빈 자루에 한 명씩 넣어줄래? 그렇게 하면 따로 안 바래다줘도 집으로 이동한다더라.”

호열의 말대로 따르니 상당히 수상한 모습의 자루 세 대가 생겨났다. 왠지 그대로 밖에 던져버려야 할 것 같은 기분…. 백호가 충동에 지기 전에 자루는 제 부피를 점점 줄였고, 이내 다시 빈 자루 세 대로 돌아갔다. 입구를 열어보니 세 명 전부 사라졌다.

“…효과 죽이네.”

“그렇게 말하니까 어감이 좀 그렇다.”

백호가 스쿠터 쪽으로 몸을 틀었다.

“호열이 넌 이제 어쩔 거야?”

“난 이제 너 바래다줘야지. 그 뒤에는 썰매 반납하고. 그담에 집에 가서 쉬어야 하지 않겠냐.”

“우리 집 갈래?”

백호가 스쿠터 뒷자리로 쿵쿵 뛰어내렸다. 호열의 배 앞으로 손을 뻗어 껌딱지처럼 끌어안았다. 난 어차피 크리스마스 혼자 보낼 계획이어서 네가 와도 전혀 문제없고… 오랜만에 보니까 진짜 반갑고… 백호가 자질구레한 변명을 대는 사이 호열은 제 배 위로 꾸물거리는 손가락을 잡아 떨어뜨렸다.

“그건 안 돼. 내가 지금 이러고 다닐 수 있는 건 다 산타의 기적 덕분이야. 업무 중에는 어딜 가든 전부 배달지가 되지만 업무가 끝나면 복귀해야 해. 안 그럼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고.”

“돌아갈 때는 비행기 타고 가면 되지!”

“그게 아니라 애초에 출발지 아닌 곳으로 새면… 에잇, 나도 모르겠다.”

호열이 장갑 두 짝을 다 벗어 썰매 쪽으로 휙휙 던졌다. 맨 손가락으로 백호의 손가락을 감싸 쥐었다. 호열의 손가락은 겨울 공기가 스며 차가웠으며, 호열의 성격대로 단단하면서 부드러웠다. 호열이 엄지와 검지로 백호의 손톱을 만지작거렸다.

“그럼 소원 빌어줘. 네가 소원을 빌면 가능할지도 몰라.”

“소원?”

“응. 설마 너희 이브 밤 내내 무상 노동했다고 생각했어?”

호열이 천진하게 웃었다. 맞닿은 신체에서 호열의 웃음이 쿵쿵 전해졌다.

“내가 이 아르바이트 한 것도 무슨 소원이든 하나 들어주겠다 해서 받아들인 거거든. 그런데 받고 보니 도저히 나 혼자서는 못 할 짓이라 소원권을 쪼갰어. 다섯 등분으로 나눈 거라 효력도 약해졌지만, 백호 넌 착한 아이니까 산타가 관대하게 넘어갈지도 모르지.”

호열이 손가락을 펴 백호군단의 소원을 추측했다. 아마 대남이는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빌었을 거고, 용팔이는 누구도 건들지 않는 무탈한 휴일, 구식은 크리스마스트리 아래 가정의 평화를 바랐을 거다. 사소하다면 사소하지만 아무나 쉽게 이루어줄 수 없는 바람. 쉽게 지나칠지도 모르는 기적. 이런 사소한 소원을 산타는 확실하게 들어준다고 했다.

“…넌 뭘 빌고 싶었는데?”

“나? 나는 말이지….”

호열이 푹 백호의 가슴팍에 등을 기댔다. 멀리서 빛무리가 성큼 몸을 일으켰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온다. 시계의 모래알은 방금 다 떨어졌으리라. 호열은 밝아져 가는 하늘을 응시했다. 배에 올라온 백호의 팔과 등 뒤의 상체. 살결은 따스하고 맥박은 요동쳤다. 얼굴까지 바라보니 노을에 물들어 아름답게 타올랐다. 호열은 그것이 좋아 슬쩍 웃었다가, 자신도 그와 다름이 없음을 깨달았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좋아하는 사람의 얼굴을 직접 보면서 인사하고 싶었어. 내 소원은 그게 다였어. 메리 크리스마스, 강백호.”

…! 백호가 호열을 안은 채로 휙 몸을 숙였다. 갑자기 강해진 포박에 호열이 운전대를 놓쳤다. 통제를 벗어난 스쿠터가 마구잡이로 흔들거렸고, 썰매와의 이음새마저 뒤틀려 요란하게 분리됐다. 이 바보야, 운전 안 끝났다고! 놀란 백호가 호열을 놓고 호열은 다급히 운전대를 다시 붙잡았다. 그러나 이미 썰매는 저 멀리 떠나가고 스쿠터도 마찬가지로 제멋대로 질주했다. 사람 살려어어어어—!

폭주하는 스쿠터의 속도라도 줄이려 발버둥 치길 수 분, 두 사람은 이 길의 끝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지면이 가까워질수록 백호는 이 동네가 정말 낯익음을 알아차렸다. 호열아, 저쪽. 백호가 호열을 콕콕 찔러 어느 한 건물을 가리켰다. 넋이 나간 호열은 어리둥절히 백호가 말한 방향대로 운전대를 틀었다. 그쯤에 이르러 미친 망아지 같던 스쿠터는 온순한 양이 되었다.

스쿠터가 깃털처럼 느리게 지표면에 닿았다. 시동을 끈 호열이 스쿠터에서 내리고, 백호는 그 옆에 서서 영업 사원처럼 양팔을 들어 올렸다.

“우리 집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런 미친 산타.”

호열이 얼굴을 감쌌다. 따지고 보면 사고를 친 건 강백호고 산타는 소원을 들어줌으로써 두 사람을 구한 것에 가까웠지만 호열은 당장 아무나 욕하고 싶은 심정이었고, 백호를 욕할 마음은 전혀 없으며, 이 아르바이트 하면서 산타의 평가가 바닥으로 쳤기에 결국 산타를 욕하기로 결심했다. 듣든가 말든가. 호열은 자신이 나쁜 아이로 불리든 천하의 후레자식으로 불리든 전혀 신경 안 쓰는 사람이다.

그래도 두 사람이 여기 있다는 건 이게 백호의 소원이란 뜻이지.

흡. 호열은 입가를 가렸다. 죽다 살아난 사람치고 너무 싱글벙글해졌다. 어쨌든 간에 백호도 기쁜지 히죽히죽 웃었다. 어라. 백호는 문득 빨간 스쿠터에서 못 보던 물건을 발견했다.

“이거.”

“뭔데?”

어느샌가 운전대에서 모래시계가 붙여졌다. 썰매에 있던 것과 똑같은 만듦새다. 하지만 지금은 크리스마스 당일인데. 그렇담 이건… 호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여기서 보낼 수 있는 제한 시간인가 봐.”

“뭐야? 에이씨, 돌아갈 때는 내가 비행기 표 사준다니까!”

“당장 여권도 없는걸. 뒤탈 없이 놀고 가려면 이대로 따르는 게 낫겠다.”

“그럼 이게 지금 얼마만큼 보낼 수 있는 거야?”

호열은 모래시계를 살펴보았다. 음 그러니까, 이 정도면…. 호열은 그 순간 자신과 똑같이 시계를 노려보는 백호를 발견했다. 눈살을 찌푸리고 입술을 비죽이는 저 얼굴. 아, 웃기다. 호열은 스쿠터와 시계를 저 멀리 치워뒀다. 백호의 얼굴을 붙잡아 제 눈앞으로 쭉 당겼다.

“크리스마스를 즐길 만큼은 되니까 걱정 마.”

그대로 머리를 끌어안으니 백호가 당황한 듯하면서 금세 호열을 마주 안았다. 백호가 완전히 몸을 일으키자 호열의 다리가 허공에서 대롱거렸다. 두 사람은 채신머리없이 깔깔거리며 그 자리를 빙글빙글 돌았고, 이내 호열의 발이 땅을 딛고 나서는 한 팔로 서로를 안으며 신명 나게 집 안으로 들어갔다.

머잖아 어둡던 실내에 불이 켜지고 따스함이 올라오니, 웃음소리와 캐럴이 저 하늘까지 가득 퍼지니, 그날의 크리스마스는 과연 사랑만이 충만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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