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덩

[ㅅㄹㄷㅋ/호백호] 초콜릿 폭포를 맛보진 못하더라도

새천년 맞이 달 여행 당첨자가 마지막으로 등장했습니다!

양호열!


이제 와서 팔겠다 하면 무리겠지. 세계에서 단 세 장뿐인 당첨권을 만지며 호열이 생각했다. 다른 손에는 오늘 자 조간신문이 들렸다. 일 면에 실린 커다란 제 얼굴. 무표정의 영역을 가까스로 벗어난 미소, 농작물을 소개하는 농부처럼 쑥 들이민 당첨권. 사진의 초점 자체도 호열보다는 네모난 종이에 잡혔다. 뭐, 호열도 그편이 더 맘 편하다.

과자 하나 사 먹었다고 이런 난리 통에 휩싸일 줄이야. 호열은 새삼 인생의 변동성이 경이로워졌다.

포장을 뜯었을 때 웬 종이가 먼저 보이길래 이물질인가 싶었는데. 꺼내고 보니 그게 해당 회사에서 대대적으로 선전하던 이십일 세기 달 여행권이더라. 미국 기업이라 종이에 죄 영어뿐이었지만 이미 이 홍보를 들어보기는 했다. 정작 자신은 그저 유행이라기에 맛이나 보자며 장바구니에 담은 거지만.

어제 기자와 카메라, 회사 관계자 앞에서 진품 검증까지 끝마쳤으니 팔겠다 하면 사겠다 하는 사람이 넘칠 테다. 이미 제안도 받았다. 우주를 좋아하고 돈이 썩어나는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호열을 찾아왔다. 이미 정한 거 안 무를 거라며 돌려보냈지만, 사실 혹하긴 했다. 온천 여행권쯤 됐으면 바로 갔을 텐데…. 호열이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렇게 된 거 준비나 해야지. 호열은 신문과 당첨권을 저 멀리 치우고는 관계자가 준 서류를 꺼냈다. 앞으로의 일정표를 보며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가늠했다.

당장 영어부터 배워야 할 판이지만.


우주에는 평소 관심이 많으셨나요?

-남들만큼 좋아한다고 생각합니다. 가끔 달이 환하면 멈춰서 감상하는 정도. 네, 그쯤으로 좋아하네요.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쩍단 말이지.”

짐 챙기는 걸 도와주면서도 대남은 의심을 버리지 못했다. 호열은 가방 구석에 속옷을 끼워 넣으며 대꾸했다.

“난들 믿어지겠냐.”

“진짜 달에 보내주겠대?”

“진짜 달에 보내주겠대.”

“민간인을 말이지. 우주 비행사는 다 군인 출신이거나 과학자랬는데.”

“시대가 바뀌었잖아. 그게 이 기획의 목적이기도 하고. ‘누구나 비상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우주에서 태어났다. 우주에 못 가는 사람이란 없다’.”

“‘이십 일세기는 우주 관광의 시대다’.”

부엌에서 돌아온 용팔이 거들었다. 대남에게 노끈을 건넨 용팔은 얼추 정리가 끝난 방을 둘러봤다. 바닥에 놓은 책더미에서 한 권을 빼내 장을 팔락였다. 백호 군단 중 한 명이 장난삼아 들고 온 잡지로, 호열이 떠날 우주여행 특집 기사가 실렸다. 용팔이 바닥에 앉아 대남의 귀에 쏙쏙 박히도록 기사를 낭독했다.

“최초의 민간 우주여행. 기획사는 민간 기업 ■■이며, 미국의 항공우주국 나사와 협력 예정. ■■사의 경영인과 그의 남편, 베테랑 우주 비행사 삼 인의 탑승이 우선 확정되었으며 그 외 삼 인은 국제적 규모의 추첨으로 선정. 추첨 과정에서 제과 기업 ○○사와 협업이 이루어짐.”

“윌리 웡카 따라 했네.”

언젠가 다 같이 본 영화를 떠올리며 구식이 단번에 말했다. 이 쌀쌀맞은 평가는 호열도 내심 동의했다. 영화 속 달콤한 정원을 생각하는지 용팔이 입맛을 다셨다.

“나라면 초콜릿 공장 쪽이 더 기쁠 거야.”

“찰리는 나중에 공장 물려받던데. 너도 아예 우주비행사가 되려나?”

용팔에게서 잡지를 가져가며 구식이 농을 던졌다. 호열은 듣기만 해도 지쳐 천장을 바라봤다. 달에 간다는 것만으로 이미 여기저기서 연락을 해대는데, 만약 그가 한 단계 더 발전한 모습을 보여주면 어떤 반응이 나올지 상상도 안 됐다. 장난스러워진 분위기에 대남이 흠 콧바람을 냈다가, 마지막으로 호열에게 신신당부했다.

“아무튼 뭐 하나 수틀릴 거 같으면 곧장 뛰쳐나와. 대기업이랑 민간인이야. 무슨 일 생기면 네 쪽이 불리해.”

“알겠다니까.”

잠가둔 가방을 구석에 밀어뒀다. 당분간은 못 오겠구나. 대청소가 끝나가는 집은 사람이 바글거림에도 어쩐지 썰렁했다. 열쇠는 이미 복사해 구식에게 맡겼고, 자잘한 서류 준비도 이 주 전에 끝냈다. 이제는 정말 떠나기만 하면 된다. 부스럭 바닥에 드러누웠다. 둥그런 전등이 머리 위에서 빛났다. 천정을 응시하는 호열에게 구식이 문득 코웃음 쳤다.

“강백호 있는 미국 가서 좋겠네!”


훈련 일정은 안내받았는지.

-전문 우주 비행사는 우주로 가기 전 이 년 동안 훈련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민간인이고, 임무 수행이 아닌 관광객 신분으로 가기에 이 과정이 상당히 간략화되었습니다. 올해 가을부터 반년간 미국 텍사스주에서 훈련받은 후 비행선에 오를 예정입니다.


미국은 땅덩어리가 더럽게 크다. 인구도 많다. 호열을 제외한 나머지 당첨자가 전부 미국인일 정도로. 오히려 호열이 당첨된 게 이례적일 지경이었다. 예의상 내민 초대장을 덥석 받아들인 객이 된 것 같았다.

호열은 속내를 무던히 감추며 두 명의 당첨자와 인사했다. 첫 번째 당첨자, 평범한 대학생. 원래는 그의 언니가 당첨자였으나 홑몸이 아니라 동생에게 양보했다고 한다. 두 번째 당첨자, 교사. 중년의 나이로 당첨자 중 가장 연장자이지만, 건강 걱정이 안 될 만큼 혈색이 좋았다.

여행을 주관한 ■■사의 경영인이 그들에게 말했다.

“앞으로 육 개월간 다들 잘 지내길 바랍니다. 우주 한복판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지구의 누구도 도와주러 올 수 없으니. 우리는 서로를 의지해야 해요.”

다행히도 훈련 기간 내내 그들 셋은 꽤 잘 어우러졌다. 교사는 여유가 넘쳤고, 대학생은 붙임성이 좋았다. 호열은 제일 조용한데다가(언어의 한계였다) 청일점이었으나 그만큼 상대의 말을 경청해주었기에 다들 좋게 봐줬다.

간혹 쉬는 날이면 대학생의 주도로 교사의 차에 타 번화가로 향했다. 휴스턴은 부유한 동네라 어딜 돌아다니든 대부분 쾌적했다. 대학생이 점심상을 앞에 둔 채로 다음 주 일정을 벌써 정하려 할 때, 호열이 손을 들어 끼어들었다.

“나 다음 주는 안 돼. 친구 만나야 해.”

“친구?”

“늘 전화하던 그 친구니? 미국에 사는?”

교사의 물음에 호열이 끄덕였다.

“그래. 이왕 여기 온 거 고향 친구는 봐야지. 차 필요하면 말해. 바래다줄 테니.”

“버스 시간 이미 알아둬서 괜찮아요.”

“다른 나라에서 사는 게 어떤 느낌일지 모르겠어.”

대학생이 손가락 거스러미를 뜯으며 말했다.

“난 지금 생활이 가장 집에서 멀어진 순간이야. 대학도 같은 지역에 있거든. 친구도 마찬가지고.”

“내 친구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도 별로 색다른 기분은 안 들어.”

호열이 유리잔에 손을 뻗었다. 입술을 대기 전 괜히 잔의 무늬를 감상해봤다.

“다음 주에 친구를 만나면 실감 날 거야. 그 애가 미국에 있으니까. 걔를 보고 나서야 나도 그 유명한 기회의 땅에 왔구나 싶겠지.”


아직 민간 수준에서 우주 관광은 무리라는 의견이 있습니다. 이 점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이건 저에게 할 질문이 아닌 거 같은데. 옆에 있는 ■■사 직원께 넘기겠습니다.

-우리 회사의 기술은 이미 세계의 입증을 받았습니다. 현재까지 네 대의 발사체를 지구 저궤도에 진입시켰으며, ■■사의 독자적 연구로 메탄을 활용한 액체 엔진을 개발해냈습니다. 나사와 협업한다고는 하나 나사가 우리 회사를 검수하는 것이 아닌, 두 사업체가 동등한 지위에서 서로를 발전시키고 보완해나갈 것입니다. ■■사의 기술은 그만큼 독보적이며 안전합니다.


강백호가 사는 지역은 캐나다 근처고, 양호열은 멕시코 근처다. 미시간주의 지독한 냉기를 탈출하고 싶던 백호는 만날 장소를 정하자는 말에 바로 자신이 그리로 가겠다 외쳤다. 그리하여 호열은 공항 자동문 앞에 서서 백호의 비행기가 도착하길 기다렸다.

얇은 외투를 옆구리에 낀, 자동문이 열리자마자 두리번거리는 백호에게 팔을 휘저었다. 피로도 추위도 그의 몸을 얼리지 못했는지 백호가 곧바로 호열에게 쿵쿵 달려들었다.

“이게 얼마 만이야!”

추위 한 자락도 느껴지지 않은 온기가 호열을 덮쳤다. 뜨끈한 통나무를 받는 기분으로 호열이 다리에 힘을 줬다. 비행기 시트의 냄새, 옆자리 승객의 체취, 옷에 배인 기숙사의 공기와 이국적인 향신료 내음이 호열에게 도달했다. 숨이 막혀올 지경이 되어 다급히 백호의 옆구리를 두드렸다. 미묘하게 달라진 얼굴의 강백호가 익숙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짜식, 외국물 좀 먹었다고 얼굴 쫙쫙 폈네.”

“너만 하겠냐.”

백호는 산책 나온 강아지처럼 길거리의 모든 풍경에 호들갑을 떨었다. 날씨 칭찬은 오 분마다 터뜨렸으며, 호열이 요기라도 채우라며 내민 샌드위치는 부스러기까지 싹 입안에 털어 넣었다. 호열이 지내는 훈련장으로 데려갈 수는 없기에 관광용 나사 투어에 갔더니, 글쎄, 백호가 뭐만 봤다 하면 너도 저거 타냐? 저거 입어? 저런 거 먹으면 간에 기별은 가? 벌써 먹어봤다고? 어떤 맛인데? 라며 호열의 얼굴을 붉히게 했다.

왜 붉혔냐 하면 다른 관광객의 시선을 끌었기 때문이고, 외국인 두 명의 대화가 왜 시선을 끌었냐면 백호가 그 모든 질문을 굳이 영어로 했기 때문이다.

모자 쓰고 올걸. 호열이 조금 후회했다.

“나 그거 보여줘.”

길었던 투어가 끝난 뒤, 호수의 공원에서 백호가 말했다. 호열이 어젯밤 챙겨둔 당첨권을 지갑에서 꺼냈다. 완만하게 휘어진 종이를 받은 백호가 그것을 백지수표처럼 손끝으로 신중히 잡았다. 윤슬의 빛이 강백호의 눈동자에 반사됐다. 백호가 종이의 글자를 읽는 속도로 호열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 초콜릿 영화 같다.”

“애들 전부 똑같은 소리 했다.”

호열이 낄낄거리며 숨을 뱉었다. 거센 바람의 그의 호흡을 훔쳐 갔다. 서늘함만 들어찬 기류, 따갑지만 따스한 햇살, 머리끝까지 시퍼런 하늘과 가장 새하얀 구름이 오감을 채우고 들뜨게 했다.

날씨가 좋아서 다행이야. 그러한 생각이 얼핏 스쳤다. 백호가 온 보람이 있어.

백호가 종이를 도로 내밀었다. 햇살이 막 구름을 벗어나, 호열이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호열은 눈 감은 채로 종이를 받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바람 소리가 귓가를 거칠게 채웠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하려다 곧 관뒀다.

“어릴 때 생각난다. 가끔 늦은 시간까지 밖에서 놀았잖아.”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으레 그렇듯 추억을 공유하는 시간이 나왔다. 호열이 웃으며 그들 앞 난간에 팔을 기댔다.

“엄청 늦은 건 아니었지? 자정이 될라치면 네가 항상 우리더러 얼른 집에 들어가라고 성화였으니. 진짜 늦게까지 논 적은 딱 한 번이었나. 구식이가 그날 몰래 집에 들어가다가 걸려서-”

“콧수염 밀 뻔했지!”

백호가 손바닥으로 난간을 철썩 내려쳤다. 우렁우렁한 웃음이 물살 위로 퍼졌다. 그들은 난간을 붙잡고 낄낄거리며 구식이가 신식이가 될 뻔했느니 실없는 농담을 재잘거렸다. 허리까지 숙이며 웃어젖히던 강백호는 아- 소리를 내면서 박장대소를 갈무리했다. 쭉 편 등으로 청명한 하늘을 직시했다.

“아무튼, 그때 달 구경하는 거 좋아했어. 별 구경도 좋아했고. 야경 보는 것도 좋아했는데-”

“우리 바둑이는 산책만 나가면 뭐든 좋아하지요.”

강백호가 양호열의 관자놀이 부근을 잡았다가, 툭 놓아줬다. 아무래도 간만의 만남이니 한 번은 봐주나 보다. 잠시 박치기의 문턱을 밟고 온 양호열이 심장께를 부여잡았다.

“잠자코 들어라. 어쨌든 그때 밤하늘 보는 거 좋아했어. 예쁘잖냐. 근데 예쁜 건 아는데, 언제 본들 똑같은 광경인데 가끔은 무섭더라. 이유는 몰라.”

바람이 여전히 거세다. 호열이 몸을 틀어 백호를 정면에 뒀다. 하늘에서 내려온 햇빛이, 물결에 부딪혀 올라온 반사광이 백호의 얼굴을 밝혔다. 머리칼이 바람에 맞춰 시시각각 맑고 붉은빛을 퍼뜨렸다. 이번에는 그가 호열을 바라봤다. 눈썹과 광대와 콧대와 턱에 진 그림자, 좁아진 동공, 선명한 홍채. 두 사람이 거울처럼 서로를 마주했다.

“호열아.”

백호가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그의 낯 자체는 정물처럼 잠잠했지만 호열은 난간을 잡은 손에서, 달싹이는 입술에서 망설임을 읽었다.

“무섭진 않냐. 거기에 가는 게.”

허. 호열의 자세가 느슨해졌다. 얘도 참 별소리를. 속삭임은 백호에게 닿지 않았다. 호열은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안 무서워.”

“정말로? 하나도 안 무서워? 일주일 넘게 저 우주를 돌아다니는데도? 외계인 만날지도 모르는데? 운석이라든가?”

“너무 애 같은 발상 아냐?”

놀림 받는다고 생각했는지 백호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이마가 깨질라 한 발 뒤로 물렀으나 그의 손이 더 빨랐다. 태양보다 흰빛이 호열의 눈앞에 번쩍 터지고, 잠시 뒤 호열은 바닥에 손을 짚어 상체를 일으켰다. 화풀이를 했음에도 백호의 낯은 여전히 뚱했다.

“백호야. 걱정할 일은 하나도 없다. 나 진짜 무사히 다녀올 거야.”

“누가 장담하냐? 그 회사에서 그래? 하나도 문제없다고?”

이거로군. 호열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결국 백호는 장담을 요구한 거다. 탄탄한 이론, 과학적인 설명, 이해하지는 못할지언정 어쨌든 대단하게 들리는 어려운 도식 따위. 옅은 걱정을 말끔히 없애줄 판에 박힌 말. 이 여행은 모든 게 순탄하리란 확언. 호열은 손을 그대로 이마에 옮겨 기억을 되짚는 시늉을 했다.

“이것저것 설명해주긴 했어. 근데 무슨 소리인지는 다 까먹었고, 사실 이해도 못 했어. 어쨌든 네가 우려하는 일은 안 일어나. 계약서도 꼼꼼히 확인했다니까? 뭐든 문제 생기면 바로 발 뺄 거야. 이건 애들하고도 약속한 거고.”

“정말이지?”

“백호야.”

여전히 호열은 바닥에 있다. 물살은 쉬지 않고 흘러가며 바람도 이에 지지 않는다. 내리쬐는 빛 아래 물고기가 간간이 튀어 오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 순간을 노리는 새 떼. 한 마리가 강으로 하강했다가 백호의 등 너머로 솟아올랐다. 난간에 앉을까 말까 하다 떠난 새는 은백색 초승달을 물고 있었다.

호열이 손을 뻗었고, 백호가 그를 잡아 올렸다.

“이런 거에 겁먹고 물러나면 양호열이 아니지.”

비틀거리며 일어난 호열이 옷을 털었다. 흙먼지를 떼어내고 구김까지 정리한 후 백호에게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주먹으로 어깻죽지를 가볍게 쳤다. 옷 너머의 신체는 흔들림 없이 단단했다.

“나도 너처럼 뭔갈 해보고 싶어. 뭔가 멋진 일, 깊이 열중할 수 있는 그런 일 말이야. 몇 달 구른다고 너처럼 멋진 사람은 못 되겠지만… 우주여행 자체는 충분히 멋지잖냐. 그래서 도전하고 싶다.”

“…호열이 넌 언제나 멋졌거든.”

“고맙다.”

백호는 코를 훌쩍였으며, 호열은 못 들은 척 넘어갔다. 또 다른 물고기가 호수에서 통 튀어나왔다. 물방울이 별빛처럼 흩뿌려졌다.


그날 양호열은 꿈을 꿨다. 초콜릿 영화의 주인공이 되는 꿈.

아니, 주인공일까? 어쩌면 조연일지도 몰랐다. 당첨된 아이는 전부 백호 군단이었고, 황금색 표를 쥔 채 공장 앞으로 모였다. 파친코 가게가 열리길 기다리던 때처럼 시시덕거리며 시간을 때웠다. 꿈속에서도 그들은 당연히 친구였다. 깃펜을 잡고 계약서에 서명하려는 순간 대남이 외쳤다. 꼼꼼히 살펴! 그러나 꿈이라서인지 벽면의 글자는 당최 읽을 수가 없었다. 너나 할 것 없이 작대기만 직 그어놓고 입구로 들어갔다. 복도를 지날 때 구식이 히죽였다. 호열이 너 이제 공장장 될 수 있겠네? 그에 호열도 응수했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지.

온갖 과자로 꾸며진 정원에서 백호 군단은 정신없이 뛰놀았다. 야구공만 한 초콜릿을 방망이만 한 막대사탕으로 날려버렸으며, 김대남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커다란 생크림을 보길래 얼굴을 크림에 처박았다. 그대로 술래잡기하려던 차 어디선가 강백호가 밧줄처럼 생긴 젤리를 들고 와 카우보이처럼 붕붕 돌렸다. 젤리가 부딪히는 곳마다 나무가 파이고 버섯이 뭉개졌다. 공장이 서서히 박살 나는데도 말리러 오는 이는 없었다. 윌리 웡카 씨는 어느샌가 사라졌다. 처음부터 없었을지도 모른다.

호열이 제 머리만 한 곰돌이 젤리를 따 백호에게 내밀었다. 이거 백호 네 머리색이랑 똑같다! 강백호도 타이어만 한 비스킷을 들어 올렸다. 이건 꼭 달 같지 않냐? 네가 갈 곳 말이야!

뭐? 호열이 미간을 살짝 좁혔다. 무슨 소리야?

대답은 듣지 못했다. 아래에서 풍덩 소리가 나더니 구식의 새된 비명이 울렸다. 용팔이가 빠졌어! 정원 한가운데의 초콜릿 강에서 이용팔이 허우적거렸다. 가장 가까이 있던 구식이 끌어올려 주려다 같이 휘말렸다. 이어서 대남이 팔을 뻗었다. 대남의 휘청이는 상체를 호열이 잡았고, 백호는 아마 호열의 발목을 잡았던 거 같다. 풍덩, 풍덩, 풍덩….

다섯 명이 사이좋게 배관을 타고 올라갔다. 세상을 채운 초콜릿 색이 가시고 나자 그들은 공장 밖 뒷문에 널브러져 있었다. 주섬주섬 일어나 서로를 깨웠다. 야, 재밌었다. 이제 집에 가자.

주택가로 접어드니 밤이 되었다. 한 명 한 명 떠나보낸 후 마지막에 길을 걷는 건 백호와 자신이었다. 가로등도 없는 길목에서 양호열이 발밑을 확인하느라 여념 없을 때, 옆의 강백호는 하늘을 보고 있었는지 그의 어깨를 잡아 뒤로 당겼다. 다른 손으로 위를 가리키며 호열에게 속삭였다.

호열아, 저기 좀 봐. 오늘 달이 엄청 환해.

공장에서 보았던 비스킷. 둥그렇고 고운 비스킷이 하늘을 장식했다.


훈련은 놀이동산과 고문장이라는 양극단을 번갈아 갔다. 미국에 온 지 삼 개월 차에 양호열은 머리에 피가 쏠리는 감각과 빠져나가는 감각을 각각 경험했으며, 산소부족으로 아주 멍청하게 굴기도 했다. 훈련을 도와주는 동선자, 같이 우주선에 오른다는 베테랑 우주비행사는 그들 세 명의 곡소리를 천상의 연주쯤으로 여겼다. ■■사의 경영인은 첫날 이후로 머리카락 코빼기도 보지 못했다. 일하느라 바빠 시간이 날 때 따로 훈련을 받는다더라.

그 부부도 그들처럼 죽어 나간다고 우주비행사가 알려줬을 때, 양호열은 짓궂은 쾌감이 들었다. 아무리 돈이 썩어나도 피할 수 없는 고난이 있긴 한가 보다.

삼 개월 내내 백호와 꾸준히 연락했다. 전화는 수시로 했고 달에 한 번은 얼굴을 맞댔다. 가끔은 관광객처럼 엽서를 보냈다. 호열은 우주선과 별이 그려진 엽서를 골랐으며, 백호는 나이아가라 폭포 엽서를 보냈다. 주소란에 적힌 영어는 본문에 적힌 글자보다 더 정돈된 필체다. 호열은 이 차이를 곧잘 눈여겨보았다.

백호의 경기가 열리는 날 호열이 미시간 주로 넘어갔다. 흐릿한 날씨를 뚫고 도착한 체육관은 환한 열기가 넘쳤다. 백호가 코트에 나올 때마다 목이 터져라 연호했다. 천재 강백호의 명성이 성공적으로 퍼졌는지 주변에서도 다들 그의 이름을 외쳤다. 호열은 제 목소리가 묻히지 않게 소리 지르며, 강백호에게 그의 응원이 닿았을지, 제가 왔다는 사실이 이 경기에 영향을 줬을지 궁금해했다.

경기 종료 후 백호가 관중에게 인사했다. 제 한 몸 다 바쳐 뛰었기에 온몸이 땀에 푹 젖었다. 조명 아래 그의 피부가 번들거렸다. 호열은 백호 자체가 하나의 항성 같다고 생각했다.

“내 목소리 들렸어?”

경기장 밖에서 만났을 때 호열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백호는 즉각 답했다.

“당연히 들렸지!”

즐거운 연말이었다. 호열은 제때 도착할 날짜를 계산해 백호군단에게 연하장을 보냈다. 새해가 되고 나서 연락 한 통씩 돌리자 다들 연하장 잘 받았다며, 이제 얼마 안 남았구나라며 호열의 여행에 행운을 빌어줬다. 그리고 모두가 똑같이 붙인 질문.

“끝나면 바로 올 거냐?”

짝을 이루는 똑같은 대답.

“글쎄. 마침 삼 월이면 대학 리그가 본격적으로 들어간다길래. 그것까지만 보고 갈까 봐. 여비도 얼추 맞을 거 같고,”

모의 우주선에서 일주일을 보내는 훈련을 기점으로 백호와 연락이 뜸해졌다. 훈련이 심화될 수록 외부와의 접촉에 제한이 걸렸다. 보안 때문에 그리될 것이란 건 알았으나, 전화 한 통 하는 것도 힘들어지자 훈련생 사이에서 울적한 기운이 감돌았다. 눈에 띄게 처진 그들에 우주비행사는 자신이 받았던 훈련이나 예전에 간 우주정거장, 이쪽 업계 이야기를 들려주며 분위기를 띄우곤 했다. 쉽게 접하지 못하는 정보였기에 반응은 괜찮았다.

“그 표현 기억하는 사람? 멋있는 말이었는데.”

밀린 일기를 쓰던 대학생이 불쑥 물었다. 교사가 되물었다.

“무슨 표현?”

“우주로 가면 우리 시야가 급격히 넓어진다는 거요. 지구가 정말 작아 보이고, 내 근심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면서 가치관이 변하는 경험. 그걸 뭐라고 불렀더라….”

“조망 효과.”

호열이 룩으로 비숍을 잡으며 말했다. 자기 차례가 온 교사가 곧장 그의 룩을 나이트로 잡았다. 이런. 호열이 제 실수를 뒤늦게 알아챘다. 대학생은 일기장에 다시 고개를 파묻었다.

훈련이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세 사람은 빈 시간마다 서로를 찾았다. 편의 시설이 나쁘지 않아 책과 보드게임, 영화 따위는 쉽게 구했다. 교사가 호열에게 체스 두는 법을 가르치는 동안 대학생은 옆에서 일기를 썼다. 대학생과 호열이 대전할 때 교사가 그가 이기면 돈을 주겠다기에 고군분투했지만 참패했다. 덕분에 실력은 금방 올랐다. 두 사람이 체스를 두는 차례에 호열은 백호에게 보낼 편지를 썼다.

호열은 대학생을 따라 조망 효과를 설명하는 글을 썼다. 어쩌면 우주에 다녀온 뒤의 난 방구석 철학자가 될지도 몰라. 제가 생각해도 터무니없는 말을 덧붙이며, 저처럼 터무니없어 할 백호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렸다. 직접 보면 좋을 텐데 말이지. 기쁨과 아쉬움이 동시에 들었다.

얼굴도 못 보고 전화도 어려운데다가 편지만 겨우 쓰는 상황. 어째 미국에 오기 전으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그러나 한 달 넘게 걸리는 국제우편을 벗어난 것만으로도 천운이다. 호열은 상황이 확실히 다름을 인지했다. 그래, 상황은 달랐다.

상황이 달라져 갔다.


엔진에 결함이 발견됐다.


공기에도 색이 존재한다면 이 방은 회색으로 가득 찼으리라. 따사로운 오후의 햇살이 들어섰지만 호열은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호열이 창 너머에 정신이 팔려있자 책상 건너 상대가 정중히 집중시켰다. 아. 호열은 자세를 고치며 계속 얘기하라는 몸짓을 했다. 무슨 소리가 나올지 이미 알겠다만.

엔진 결함, 잠정 연기, 호열은 다른 방에 있을 대학생과 교사를 생각했다, 세 사람을 따로 부른 건 담합을 차단하려는 목적이겠지, 보상금과 차선책, 두 사람이 이 제안을 받아들일까, 둘 다 그리도 달에 가기를 원했는데, 지구 저궤도 여행으로 전환, 엔진이 문제라지 않았습니까, 문제가 되는 엔진은 새로운 우주선 그러니까 이번 달 탐사 우주선에 처음 적용하는 기술입니다 기존 엔진은 안전합니다 발견된 결함도 고칠 수 있지만 시간이 걸리는 게 문제지요 올해 안에 떠나는 건 사실상 불가합니다, 그럼 제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보완한 달 탐사선을 탈 때까지 대기하거나 이미 검증된 우주선을 타고 저궤도를 돌고 오는 것 그것도 아니면 여행 포기, 하, 양호열은 백호 군단을 생각했다, 수틀리면 곧장 뛰쳐나오기, 문제가 생기면 바로 발 빼기, 튼튼하고 반듯한 다리, 여길 도망칠 만큼 충분히 빠를까?

호열아, 저기 좀 봐. 오늘 달이 엄청 환해.

창가의 빛이 흐려졌다. 두꺼운 구름이 해를 가려 세상을 어둡게 했다. 그러나 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잿빛 구름에 희고 둥그런 원이 생겼다. 그래, 언젠가의 밤처럼. 가로등도 없던 길목, 규칙적인 발걸음, 지척에서 퍼진 온기.

손끝에 내려앉은 흰빛.


기자 회견 전부터 당첨권을 사겠다는 사람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이 제안을 뿌리친 이유가 있으신가요.

왜 달을 선택했나요?


세기말의 봄의 어느 하루의 밤. 호열은 부엌등 하나만 켠 채 제 손을 내려다봤다. 정확히는 손에 든 네모난 종이를. 식탁 위에는 뜯긴 과자가 있다.

달 여행권… 장소는 미국…. 글귀를 읽는 호열의 눈은 저녁상을 볼 때와 다름이 없다. 이 종이의 추정값을 어디선가 들은 것도 같다. 유럽 여행이라든가 새 차를 산다든가, 그런 것을 다 해도 남을 만큼의 가치라지. 미국. 호열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이 여행에는 미국에 머무르는 시간도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이걸 팔면 같은 미국이더라도 그가 원하는 날, 원하는 장소에 있을 수 있다. -그래.

셈은 빨랐다. 내일 아침 이 종이를 살 사람을 찾아봐야겠다. 달과 돈을 저울질하며 주저하지는 않았다.

달에 가고 싶던 적은 한 번도 없으니.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우주. 태곳적부터 그 자리에 있던 달. 호열은 그런 것이 꽤 낭만스레 취급받는다는 건 알았으나 자신이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다. 우주는 그저 우주며, 달도 그저 달일 뿐이다. 남들이 좋다 해서 남들처럼 행동하고 싶지는 않다. 거기까지 생각한 호열은 당첨권을 내려두었다. 전화 소리만 들려오지 않았다면 그대로 계획을 따랐을 거다.

반사적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이 시간이면. 수화기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방금까지 제가 떠올린 인물이다. 어, 백호야. 호열이 부드럽게 웃었다. 아냐, 안 바빠. 슬슬 자려 했지. 너는? 이제 나가려고?

형식적일지언정 다정한 말투. 양호열은 그러한 대화를 강백호와 한참 주고받았다. 백호의 이야기를 들으며 중간중간 반응하던 중, 백호가 불쑥 물었다.

‘호열이 넌 요즘 어때? 뭐 새로운 소식 없냐?’

“나?”

호열의 말문이 막혔다. 새로운 것, 달라진 것, 근사하지는 않더라도 흥미로운 것, 꺼낼만한 소식, 당장 떠오르는 변화.

최근 그랬던 적이 있던가. 그의 일상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부터 지극히 단순해졌다. 학생 때부터 해온 아르바이트를 이어가다 지인 소개로 공단에 취직했다. 처음 하는 일이라 낯설었지만 머잖아 적응하고 그 이후로 쭉 다니고 있다. 이따금 쉬는 날이면 군단과 만나서 예전처럼 논다…. 그게 전부다. 무탈하고 별일 없는 삶. 별거 없는 삶.

나야 뭐 평소대로 지내지. 그렇게 말하면 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야 뭐….”

호열은 말끝을 늘이며 집안을 둘러봤다. 이곳에 해답이 있길 바라는 맘으로. 그러나 이 집은 그를 닮아 그만큼 달라진 게 없다. 밝은 부엌으로 시선이 갔다. 탁자 위 튀는 빛. 호열이 반사적으로 말했다.

“나 달에 가.”


“그러니까 강백호한테 들려줄 얘깃거리가 없어서 달에 가기로 했다?”

배달 초밥을 급히 삼킨 구식이 반문했다. 호열은 캔맥주를 오래 들이켰다. 집 정리라는 고단한 노동을 마치고 먹으니 입맛이 평소보다 배로 돌았다. 연어알을 입에 넣기 전 대답을 툭 뱉었다.

“응.”

“이거 완전 또라이일세.”

대남이 혀를 찼다. 용팔의 반응은 그보다 유했다. 호열이 그에게만 초밥을 한 판 더 사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확실히 평생의 술안주는 되겠네.”

“백호는 이거 아냐?”

“모르지. 걔가 그걸 왜 알아야 하냐?”

“우리도 이걸 왜 알아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물어보길래 말해줬더니. 호열은 눈을 홉뜬 채로 구식을 쳐다봤다. 친구가 눈총을 보내든 말든 구식은 타격 없이 콧수염만 긁었다.

“걔가 계기긴 해도 선택은 내 의지야. 확실히 나 요새 심심하게 살긴 했잖아.”

“그것도 백호가 없어서 심심한 거겠지.”

호열이 곧장 구식에게 발을 날렸다. 날아온 다리를 잡은 구식이 그대로 몸을 굴렸다. 갑자기 시작된 레슬링에 대남과 용팔이 서둘러 일어났다. 초밥을 들고 벽에 붙어 재빠르게 승패를 토론했다. 젓가락이 날아가고 붕어 간장이 짜부라졌다. 집 정리가 반 시간 추가됐다.

늘어난 쓰레기봉투를 밖에 내놓은 뒤, 호열이 하늘을 살폈다. 오늘의 달은 유달리 크지도 밝지도 않고 평범하다. 둥글지도 않고, 신비스럽지도 않다. 태평한 빛을 눈에 담았다. 이건 분명 그의 의지다. 거짓은 한 톨도 없다.

달이 뭐길래. 우주가 뭐길래. 왜 다들 저곳에 목을 매고 안달을 낼까. 남들은 왜 저걸 볼 때마다 감상에 젖을까.

달을 볼 때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밤이 있다. 그 밤의 달은 완벽한 원형이었으며 구름이 얇게 깔렸다. 제 어깨에 문득 실린 힘에 돌아보니 그 자리에는 가장 아끼는 친우가 있었다. 그의 눈은 별처럼 반짝였다. 손끝은 빛났다. 흰빛이 내려앉은 그의 입꼬리가 잔잔히 올라가….

호열이 눈을 감았다. 마음속으로 달을 그렸다. 호열이 그린 달은 강백호를 담았다. 백호야.

백호야, 나는 알고 싶다. 내가 달에 간다고 했을 때 뭘 그렇게까지 야단 떨었는지 이해하고 싶어. 왜 넌 저게 멋지다고 했니. 저게 뭐길래 그리도 시선을 빼앗겼니. 가까이 가면 이유가 보일까. 너는 이 거리에서 본 달의 매력을 나는 코앞까지 가야 겨우 볼 수 있을 거 같아. 내가 달에 간다면, 백호야. 너와 같은 눈으로 달을 바라볼 수만 있다면. 그걸로 나는 만족하겠지. 저걸 볼 때마다 그저 아름답다고 여기며, 이 아득한 거리감을 더는 느끼지 않을 거야.

그래서 나는 그런 선택을 했다.

내 이유는 전부 그러한 마음에서 비롯되었어.


광란의 삼월. 호열은 광기 한가운데에 있다. 의식을 한데 모은 군중이 동시에 소리치고 열광하며 파도친다.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악을 썼다. 입에 붙은 응원가, 구호, 가장 중요한 이름. 코트 위의 백호가 날아올랐다. 림으로 도약하는 순간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화려한 덩크. 정적이 깨졌다. 거센 파도가 몰아쳤다.

그 순간 백호의 눈이 호열과 마주쳤다. 검지로 호열을 가리키고는 그대로 엄지를 추켜세웠다. 주위의 군중이 환호했다. 호열만이 어리둥절히 몸을 굳혔다. 여긴 가장 구석진 자리다. 호열은 수비 하러 달리는 백호를 멀거니 바라봤다. 목소리 들린다는 거 정말이었구나.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백호네 팀은 날이 갈수록 승승장구했다. 방금의 승리로 그들은 사월에 닿게 되었다. 사월…. 경기장과 조금 떨어진 길목에서 호열이 뒤꿈치로 땅을 박찼다. 곧이어 백호가 다가오고, 보폭을 맞춰 거리를 걸었다.

“아까 덩크 대단했어.”

“고맙다.”

“밥이나 먹자. 나가면서 누가 떠드는 거 들었는데 이 근처에 맛집 있대.”

“그렇냐.”

툭툭 끊기는 대화. 경기의 열기가 가라앉은 백호는 언제 그랬냐는 듯 데면데면 굴었다. 호열은 무시하고 말을 이르려다, 금세 관뒀다. 호열이 멈춰서자 백호도 두세걸음 만에 멈췄다. 뒤를 돌아봤지만 다가오지는 않았다.

“백호야.”

호열이 백호를 불렀다. 양호열은 강백호를 무시 못 한다. 백호가 그러하듯이. 익숙한 이의 부름에 백호가 침을 삼켰다. 느리게 고개를 떨구었다. 다행히 호열이 코앞으로 가면 시선이 맞는다. 토라진 아이처럼 비죽인 입술. 그러나 눈동자에서 침통함이 엿보인다.

“우리 오늘 신나게 보내기로 했잖아.”

“응.”

“너나 나나 중요한 일 앞두고 있는데 서로 축하해주자.”

“…너만큼은-”

너만큼은 안 중요해. 잘 버티던 얼굴이 속절없이 구겨졌다. 백호는 그대로 호열을 꾹 끌어당겨 품 안에 처박았다. 도저히 얼굴을 확인할 상태가 못 되었지만 또렷이 들리는 훌쩍거림은 그의 심정을 여과 없이 비추었다. 호열이 손목만 겨우 움직여 백호를 토닥였다. 아이 취급하면 싫어하겠지만 뿌리치지는 않을 거다. 정말로 싫은 게 아니니까.

“언제는 바로 발 뺀다면서, 거짓말쟁이 자식.”

백호가 코를 킁 들이켰다.

“미안해.”

“그 말 들으려는 거 아니거든.”

팔의 힘이 느슨해졌다. 직전보다 움직임이 자유로워진 호열이 백호 등에 손을 얹었다. 부드럽게 마주 안아 백호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렸다. 우주선 결함은 당연히 언론에 퍼졌다. 예정이 어그러졌으니 숨기려야 숨길 수 없었다. 백호는 생떼를 써 겨우 호열을 만났으나, 그 시점에서 이미 모든 건 결정 난 후였다.

“나 여행 포기 안 해.”

백호가 얼른 짐 챙기고 이 동네를 뜨자 했을 때 호열의 대답이었다.

“…달에 가겠다고?”

“아니.”

호열이 위를 가리키려다 곧 멈췄다. 어차피 가는 방향은 똑같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백호가 뚫어져라 지켜봤다.

“지구 저궤도에 가려고. 그건 더 안전하대.”

어이없는 헛웃음.

“지금 와서 그 말을 믿어?”

“믿어야지. 이미 간다 했어.”

“너 미쳤냐?”

백호야말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을 테다. 언론에서는 이미 호열을 포함한 모든 여행객을 반송장처럼 대했다. 결함을 낱낱이 분석해 이것이 초래할 비극을 간단한 영상과 그림으로 만들었다. 언어는 더 자극적이었다. 사람들은 어렵지 않게 그들을 폭죽으로 상상해냈다. 백호도 그중 하나였다. 하지만 호열은 완고했다.

몇 차례 언쟁과 한 번의 멱살잡이. 흔한 일은 아니지만, 양호열이 한 번 마음 먹은 건 누구도 꺾지 못한다. 강백호조차도. 그렇기에 백호는 결국 제 고집을 꺾었다.

저궤도 우주선은 사월 발사 예정이다. 호열은 이틀간 지구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그사이에 결승전이 있다. 두 사람은 같은 시간 다른 공간에 있을 것이다. 호열은 그것을 알면서도 택했다.

“그놈의 우주에 대체 뭐가 있다고.”

울음을 가라앉힌 백호가 호열을 놓았다. 옷소매를 당겨 축축한 눈코입을 닦았다. 별로 효과는 없었다. 백호는 부러 부끄러움을 감추려 짜증 부렸다. 우주에 뭐가 있냐니. 그 말은 호열을 웃게 했다. 백호에게서 그런 발언이 나올 줄이야. 멀건 웃음에 백호가 멀뚱히 바라봤다.

“이거 그냥 하는 말 아닌데.”

“어?”

“거기에 뭐가 있어서 가냐고. 야, 호열아. 나 네가 달에 그닥 흥미 없던 거 처음부터 알았어.”

백호의 목소리는 어느덧 차분해졌다.

“너 나랑 얘기했을 때도 그랬잖아. 멋진 일을 해보고 싶다고. 뭔가에 열중해보고 싶었다며. 정작 달 얘기는 내가 더 했었지. 새해에 엔진 뉴스가 한창 나왔을 때는 애들이 나한테 전화로 뭐라 했는지 아냐? 네가 무슨 무용담 만들러 달에 간댔더라. 이 중에 네가 달에 가려던 진짜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니, 그게 전부 이유일 수도 있지만… 이 정도도 충분하잖아. 지난 반년 동안 넌 열심히 달렸고 들려줄 얘깃거리도 많이 쌓지 않았냐? 넌 이미 원하는 거 다 이뤘어. 그런데도 떠나려는 이유가 뭐야. 떠날 거면서 달은 또 왜 포기한 거고?”

“…그럼 나 달에 갈까?”

“그 소리가 아니잖아!”

백호가 씩씩대며 발을 크게 굴렀다. 오랜만에 보는 약이 오른 백호다. 반가운 모습에 호열이 태평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이야. 미안. 백호 넌 볼 때마다 놀리고 싶어지네. 음, 어쨌든 네 말뜻은 이해했어. 그렇지, 사실 난 달에 흥미가 없지…. 그래. 그래도 난-”

코를 슬쩍 긁었다. 이 말을 하려니 어쩐지 쑥스럽다. 그래도 어물쩍 표현하지는 말자. 지난 반년 동안 호열이 느리게 얻은 깨달음이니. 그래, 백호의 말대로 호열은 이미 많은 걸 이뤘다. 일 년 전의 그라면 상상도 못 했을 노력을 하고, 백호에게서 자신이 언제나 멋진 녀석이라는 말도 들었다. 낯선 환경에서 익숙하게 생활하는 백호를 보는 것도 얼마나 새로웠던가. 이 나날은 여행 자체보다 더 반짝일 테다. 그럼에도 그가 가려는 이유는.

호열을 허리를 곧추세우고 어깨를 똑바로 폈다. 백호를 보는 호열의 눈은 한 점의 흔들림도 없다.

“난 지구를 좋아해.”

고요 사이로 호열의 말이 또렷이 울렸다.

“우리가 사는 이 행성이 좋아. 지구라는 단어 하나로 담기에는 커다란 세상이지. 같은 순간임에도 어느 곳에 있느냐에 따라 우리는 겨울과 여름, 낮과 밤으로 갈라져. 어떤 땅은 수풀과 습지로 뒤덮였는데 어떤 땅은 모래와 바위만 가득하고. 결국 하나의 물웅덩이인 바다도 들여다보면 제각기의 일이 일어나. 이렇게 시시각각 변덕스러운 세상이지만 결국에는 다 지구야. 우리는 모두 지구에 살고 있어. 난 그걸 기억하기 위해 가는 거야. 저궤도에 올라 이 행성을 내려다보면서, 우리가 분리된 딴 세상에 사는 게 아니라 한 세상에 묶여 살고 있단 걸 체감하고 싶어. …우주에 다녀온 누군가의 말에 따르면 이런 감상은 평생 간다더라. 난 이 일체감을 평생 잊지 않으려 우주선에 오를 거야.”

미국에 도착한 첫날, 호열은 그때의 감상을 기억한다. 휴스턴, 미시간주와 완전히 떨어진 동네,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의 모습과 거리 자체도 그곳과 사뭇 달랐겠지만, 호열에게 그것은 크게 중요치 않았다. 그것들을 보면서 호열은 제가 미국에 왔음을 깨달았다. 백호가 사는 미국으로. 호열은 이 감각이 언제 어디서나 제 안에 살아있기를 바란다.

백호가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할까. 호열은 궁금했으나 그저 호기심에서 멈췄다. 대답을 원하지는 않았다. 백호는 이미 호열의 여행을 받아들였다. 그 사유까지 이해하길 바라는 건 욕심이다. 그저 제 맘이 오롯이 전달되었기만을 바랄 뿐. 이후는 백호의 몫이다.

호열의 말을 소화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지 백호는 말이 없었다. 백호의 입술이 자그맣게 열린 것도 같았으나 소리가 나오진 않았다. 이렇다 저렇다 평가를 하는 대신 호열의 얼굴을 잡았다. 엄지로 광대와 볼을 꾹꾹 쓸어냈다. 백호의 손에서 경기장의 냄새가 났다. 백호가 사랑하는 공간. 백호는 그 손으로 호열을 껴안았다. 머리칼에 제 뺨을 힘 있게 문질렀다.

마침내 백호가 말했다. 무사히 다녀와. 응. 호열의 대답이었다.


대학생은 여행을 포기했고 교사는 엔진의 수리를 기다리기로 했다.

“언니가 울면서 전화했어. 내가 이 여행으로 잘못되기라도 하면 평생 자길 용서하지 못할 거래. 나도 누굴 걱정시키며 떠날 마음은 없어.”

“난 그래도 달에 갈 거야. 난 늙어서 너희보다는 시간이 모자라. 내 치아랑 머리숱이 남아있을 때 가둬야지.”

세 사람은 각기의 선택을 존중했다. 헤어지기 전 그들은 포옹하며 앞으로의 길에 행운을 빌었다.

“훗날 우리 셋 다 우주에서 만날 수도 있어요. 이십일 세기는 우주 관광의 시대니까.”

대학생이 속삭였다. 그러자 교사가 곧바로 정정했다.

“아니, 그건 아니지. 우린 이미 우주에 있어. 우린 모두 우주에서 태어났잖니?”

그 말이 옳다. 그들은 이미 같은 우주에 만나 같은 여행을 준비했었다. 호열은 이제 자신만의 여행을 떠나려는 두 사람에게 인사했다.

“우리가 언젠간 다시 같은 길에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웡카베이터는 상하좌우, 대각선, 곡선, 네가 원하는 어느 곳으로든 이동할 수 있단다!

뭐라고요? 낯선 목소리에 호열이 번쩍 눈을 떴다. 곱슬머리에 모자를 쓴 외국인. 영화에서 보고 지난 꿈에서는 등장하지 않았던 윌리 웡카가 오늘 꿈에는 나타났다. 백호 군단은 없다. 호열이 상황 파악을 하든 말든 웡카 씨는 능숙히 결말로 달려갔다. 그가 유리창을 짚었다.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을까 맞혀보렴.

유리 너머로 마을이 보였다. 빨간 지붕 대신 검회색 지붕, 제각각의 멘션과 아파트와 빌딩, 사람들이 몰린 파친코 가게, 학생을 뱉어내는 학교, 학생을 삼키는 전차, 기찻길 옆 물결치는 바다. 호열이 이곳이 어딘지를 알았다. 그러나 도착할 곳은 아니다.

우리는 지금 사랑하는 사람 곁으로 가고 있어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내가 원하는 어느 곳이든 갈 수 있다며요?

호열이 윌리 웡카를 돌아봤다.

제 여행의 목적지는 늘 그곳이에요. 제가 얼마나 멀리 떠나든 언제나 그리로 돌아가요. 언뜻 제가 그 외의 장소를 목적지로 잡은 것 같아도, 그곳들은 전부 경유지이지 목적지는 아니었어요. 제 모든 여행은 다 한 곳으로 도착해요. 그러면서 또 새로운 여행을 시작하고요. 하지만 지금은 돌아갈 순서예요. 여기서 내리면 난 그곳에 갈 거예요. 사랑하는 이의 곁에.

윌리 웡카가 호열을 흐뭇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는 제 융단 재킷만큼 부드럽게 호열의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초콜릿 향이 어렴풋이 감돌았다. 푸근한 목소리가 웡카베이터에 울렸다.

부디 오래오래 행복하기를.


창문에 두 손바닥을 댔다. 얼룩덜룩한 대륙, 푸르죽죽한 바다, 하얀 구름과 눈. 사진으로만 보아온 광경이 저 아래에 있다. 한눈에 담길 정도로 멀리 있지만 지형을 알아볼 만큼 가까이 있기도 하다. 이마까지 창에 갖다 대었다. 콧등에 눌리는 미끄러운 감촉. 저곳이 지구다. 그들이 나고 자란, 모든 인간이 살아가는 행성. 호열이 아는 사람은 전부 저곳에 있다.

눈을 살며시 감고 방금 본 세계를 뇌리에 새겼다. 다시 눈을 뜨면 그곳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둥그렇고 푸른 행성. 입 새로 속삭임이 새어 나왔다.

-아름답다.

정말 아름답다, 백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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