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덩

[ㅅㄹㄷㅋ/호백호] 해동 중학교의 양호열 후배님

해동 중학교에는 양호열 후배님이 있습니다.

처음의 그는 친구입니다. 등교 첫날, 교실에 들어가 뒷자리에 앉은 그를 본다면 당첨. 운이 좋으시군요. 그와 같은 반이니.

그를 볼 수 있는 것도 행운입니다. 그는 자기가 원하는 대상에게만 얼굴을 비쳐요. 숫기 없는 아이, 활달한 아이, 말썽꾸러기, 잠꾸러기, 먹보, 음침한 아이. 뚜렷한 공통점은 없어 보이지만 다들 심성은 착한 아이랍니다. 어딘가 순수한 구석이 있어야만 그의 목격담을 낼 수 있지요. 본인들은 동의할지 모르겠지만.

워낙 조용히 있어 처음에는 눈에 띄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루 이틀, 며칠, 몇 주가 흐르고 나면 이상한 점을 깨닫죠. 언제나 자리를 지킬 것처럼 앉아만 있다가, 또 어느 날에는 홀연히 사라지는데 아무도 그를 찾지 않아요. 당신이 친구가 있다면 그의 행방을 지나가듯이 물어볼 테고, 그러면 그들은 말하겠죠. 저 자리에 누가 앉았다고 그래?​

당신은 여기서부터 선택의 기로에 섭니다. 대화를 더 이어가 당신이 헛것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거나, 잠자코 입을 다물어 혼자만의 비밀을 만들거나. 안심하세요. 뭘 선택하든 이미 그는 당신의 친구입니다. 결국 당신은 그에게 말을 걸어요.

그는 경계심을 누그러뜨리는 인상입니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얼굴인 것 같다가도, 그래도 아주 흔한 얼굴은 아니란 결론이 나오겠죠. 잘 다듬은 눈썹과 숨 쉬듯 자연스러운 입가의 호선. 과거 불량아의 상징이었던 두툼한 머리는 깨끗한 눈 덕에 그리 위협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흔하기보다는 호감 상이에요. 당신이 두려움을 느끼지 않은 것도 그 덕일지도요.​

눈이 마주치면 그는 당신에게 웃어 보입니다. 당신이 어떤 아이인지, 어떤 소리를 듣고 사는지 상관없이. 분명 우리는 모르는 사이인데. 당신이 얼마나 오래 그를 모른 척한들 그는 항상 친근히 웃어주므로, 당신은 결국 스스로 거리를 좁힙니다. 그가 침범하지 않은 서로의 간격에 발을 들여요. 이때 느끼는 감정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이는 조금 무서웠다고 말하기도, 어떤 이는 설렜다고도 했죠. 누군가는 패배감을 느꼈답니다. 자기는 분명 그가 먼저 다가올 줄 알았다나. 자기만 상대가 궁금한 거 같아서 불만족스러웠답니다. 귀여운 투정이죠. 첫 접촉에서 그는 절대 먼저 다가가지 않아요. 그 나름의 배려입니다.

당신은 인사할 겁니다. 안녕. 혹은 안녕하세요. 그럼 그도 당신에게 인사합니다. 안녕. 이건 탐색전보다는 청문회에 가깝습니다. 당신은 묻고 싶은 게 정말 많을 테고, 그는 그저 당신의 궁금증을 해결해주기만 할 테니. 당신은 그의 이름과 정체와 꿍꿍이를 파헤칩니다. 이름은 양호열이야. 아마 귀신이겠지? 나도 잘 모르겠어. 왜 여기 있는지도 몰라. 언제부턴가 이 학교에 묶였어. 그래서 이대로 지내고 있어. 묶였다. 당신은 생각합니다. 지박령? 단명한 학생의 원혼? 어떤 저주에 휘말린 희생양?

당신은 그가 삼 년은 넘게 이 학교에 존재했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두 번째 선택의 기로. 그를 뭐라고 부르지? 이름? 아니면 선배? 뭐가 어쨌든 그는 당신의 호칭을 받아들입니다. 당신에게 새로운 만남도 주선합니다. 학년마다 날 보는 아이가 한 명씩 있어. 원한다면 네 얘기를 해줄게. 네가 그걸 왜 원하겠냐고? 너만 헛것을 보는 게 아니란 증거니까? 거부하거나 승낙하거나. 뭐든 상관 없습니다. 그래도 만난다면 좋은 친구가 생기겠죠. 당신들은 어딘가 통하는 구석이 있습니다. 착한 심성 덕일까요?​

대화가 길어지면 그는 당신을 은근히 보내려 합니다. 이제 그만 가야지. 집에 갈 시간이야. 종이 쳤어. 친구들이 부르네. 오래 혼잣말 해봤자 좋을 거 없어. 그렇죠, 당신은 귀신하고 대화 중이죠. 새삼스럽게 깨달은 당신이 순순히 그의 말에 따릅니다. 그를 볼 수 있다던 선배들을 만나고 싶어지죠.

선배들은 당신과 딴판이거나 엇비슷할 겁니다. 당신들은 충돌하듯 섞이듯 하나로 뭉칩니다. 그들은 당신보다 먼저 그를 알았기에 가진 정보가 많습니다. 짧은 역사에서도 기록할 만한 정보가 있지요. 선배들은 선뜻 당신에게 그것을 물려줍니다. 물이 아래로 흐르는 모양새로. 당신은 그 물살에서 다른 곳에서 겪지 못했던 소속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모험을 시작하기도 전에 끝을 맞이합니다.

호열이는 여기 졸업생이야. 십 년은 족히 넘었어. 올해로 서른 살이지. 저렇게 나타난 건 팔 년쯤 됐대. 적어도 선배들, 그러니까 지금은 졸업생인 선배들 기록으로는 그래. 호열이는 여기 졸업하고 북산고로 갔어. 거기 졸업하고 나서는 대학 진학 안 하고 일을 시작했대. 그 이후에? 옆 동네에 가게 차렸어. 정비소인데 가끔 놀러 가면 밥 사준다.

무슨 소리냐고? 응, 그래. 양호열은 잘 지내. 걔 안 죽었어. 멀쩡히 살아있어.

그럼 쟤는 뭐냐고? 우리도 몰라. 귀신도 아닌 애가 왜 저러고 돌아다닐까….

우리 세대에 남은 수수께끼는 그거뿐이야. 나머지는 이미 선배들이 다 풀어갔다.

허무하니?​

허무하신가요. 허무할 겁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이미 쓰였고, 현재로서 우리는 그걸 읽을 수만 있습니다. 책장을 넘겨볼까요. 마저 읽어봅시다. 적어도 처음 읽는 동안은 모험은 지금 일어나는 것이니.​

호열 아저씨는 좋은 사람이야. 우리가 호열이라고 불러도 화 안 내. 화낼 것도 없지? 우리도 호열이랑 친구인데. 우리는 이미 호열이랑 말을 놔서 늙은 호열이랑도 말 놔도 돼. 본인에게 허락받은 거야. 어쨌든, 아저씨 호열도 호열이를 알아. 몇 번 만난 적 있어. 그런데 우리 호열이는 자꾸 잊어. 우리를 잊지는 않는데, 그 외의 건 자주 잊어버려. 여기서 우리는… 여기 학생일 때의 우리를 말해. 내가 고등학교로 진학하면 호열이는 날 잊겠지. 더 이상 해동중 학생이 아니니까. 나도 호열이를 못 볼 거야. 그래도 상관없어. 그때에는 기억력 좋은 호열 아저씨 보러 가면 돼. 간식도 사주고 밥도 사주고 말도 잘 들어주는 호열 아저씨. 호열이 미래 버전 아저씨.

우리가 호열이를 보듯이 호열이도 가끔 누군가를 봐. 우리도 못 보는 누군가를. 그때의 호열이는 우리랑 얘기를 안 해. 하루 종일 그 사람하고 같이 웃고 떠들어. 그러다 어느 순간 다시 돌아와. 누구랑 있었냐고 물으면 무슨 소리냐고 되물어. 건망증이 도진 거지. 걔는 우리를 무시한 것도, 자기가 온종일 혼자서 박장대소한 것도 기억 못 해.​

그럴 때의 호열이는 어떤 이름을 자꾸 외쳐. 강백호. 호열 아저씨는 그 사람이 자기 친구랬어.

강백호 알아? 농구 좋아하니? 강백호는 그쪽에서 엄청 유명한 사람이야. 지금 미국에서 선수로 뛰고 있대. 강백호도 해동중 출신인데, 농구는 북산고 가서 시작했어. 근데 우리 학교 농구부는 부원 모집 기간만 되면 그 강백호를 배출한 학교라고 홍보하더라. 이거 뭐 봉이 김선달도 아니고. 아무튼 호열이는 종종 강백호랑 있어. 강백호랑 지내는 호열이는… 좀 달라. 애처럼 굴고 화도 내고 바보 같은 표정도 지어. 아마 호열 아저씨의 학창 시절이 그랬겠지.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 호열이, 호열이 아저씨, 아저씨 옛날 버전 호열이랑 있는 거야. 그중 우리 호열이랑 옛날 호열이는 이심동체고. 이해했어? 어려우면 맘대로 생각해. 어차피 우리도 좋을 대로 구분한 거야.​

당신은 수업 시간, 쉬는 시간 상관없이 선배들의 일지를 읽어 내려갑니다. 첫 장, 양호열과 통성명을 하다. 두 번째 장, 양호열의 이상 행동을 목격하다. 세 번째 장, 양호열이 부르는 이름을 듣다. 강백호? 네 번째 장, 교무실에 보관된 졸업 앨범에서 양호열과 강백호를 찾아내다. 잠깐 보려고 한 거예요. 사진을 왜 훔쳐요. 농구요? 양호열이 농구 했어요? 아, 강백호가? 다섯 번째 장, 강백호와 관련된 자료에서 양호열을 찾아내다. 사이사이 닿은 잡담, 오늘 해남고로 간 선배가 놀러 왔다. 우려가 현실이 됐다. 선배는 코앞에 있는 호열이를 못 봤고, 호열이는 선배를 못 알아봤다. 나 어제 북산고 다녔다던 사촌 오빠한테 물어봤는데 잘 모르겠대. 그래도 졸업식 때 봤댔으니까 그 이후에 무슨 일이 생겼겠지. 지금 일주일 내내 뉴스에서 강백호 기사 나오고 신문에도 강백호 사진, 학교 정문에도 강백호 현수막, 선생님도 미국에서 성공한 농구 선수 강백호의 학창 시절을 얘기하는데 왜 그 친구의 행방은 알 길이 없냐. 불공평한 세상. 거기로 가면 단서가 더 나올까? 선배 북산고로 가게요? 응. 농구부도 들어갈래. 그리고 어느 장, 바이크가 고장 난 졸업생이 양호열을 만나다.

너 왜 살아있어?

난 태어날 때부터 살아있었는데.

바이크를 수리받은 졸업생이 해동중의 양호열 이야기를 들려주다. 양호열, 믿지 않다가 졸업생과 재학생 여럿이 몰려오자 생각을 바꾸다. 제안하다. 거부하다. 설득하다. 마지막 장, 어른 양호열이 학생들과 함께 해동중으로 잠입하다. 양호열과 양호열이 만나다.

무엇도 변하지 않다.

그대로 시간이 흐르다. 더는 새로운 장이 쓰이지 않다.

당신은 낡고 깨끗한 종이를 내려봅니다. 낡고 누덕누덕한 표지를 덮어 가방에 넣어둡니다. 방과 후 계단참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으면 선배들이 와 당신과 보폭을 맞춥니다. 멀리서 양호열이 잘 가라며 손을 흔듭니다. 선배들도 주저 없이 손을 흔듭니다. 당신도 그들을 따라 합니다. 학년마다 한 명씩은 보여서 다행이야. 세 명부터는 덜 이상해 보이거든. 삼 학년 선배가 당신에게 군중심리가 무엇인지 아느냐고 질문합니다. 몇몇 심리학 실험 이야기를 하는 사이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도착지는 정비소. 조금 전 학교에서 본 친구가 순식간에 자라 일을 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이상한 기분에 휩싸이면서도 덜 이상해지는 감각을 느낍니다. 그가 마른 천으로 손을 닦다가 선배들을 봅니다. 너희들 왔니? 당신을 봅니다. 신입이구나. 당신은 선배들을 따라 정비소 뒤 사무실로 들어갑니다. 푹 꺼진 소파에 앉아 기다리니 양호열이 다과를 들고 들어옵니다. 차 우려뒀어? 이거 저기 옆집에서 새로 개발한 과자랜다. 어, 그건 저기 치우고. 그래.

양호열은 선배들의 근황을 묻고 당신의 소개를 듣습니다. 실없는 농담, 약간의 공감, 가벼운 웃음이 이불처럼 풀썩이다 느리게 가라앉습니다. 찻잔이 달각이는 소리와 함께 양호열이 목소리를 바꿉니다. 그 애는 여전하지? 그렇다는 대답에 그의 눈이 감깁니다. 이제 팔 년인가. 참 끈기 있는 녀석이야.

그의 목소리에서 맥없는 억양, 약간의 걱정, 가벼운 달관이 감지됩니다. 걱정은 자기 자신보다는 멀리 떨어져 있는 어린 날의 그를 향한 것 같습니다.

눈을 뜬 양호열이 당신과 시선을 맞춥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면 편히 말해. 그 애와 관련됐지만 그 애가 답하지 못하는 질문이라든가. 일단, 나도 그 애가 정확히 무엇인지 몰라. 하지만….

양호열이 식은 찻잔을 빙빙 돌립니다. 아마도 그건 내 바보 같은 생각의 결정체겠지. 걔가 가끔 누군가랑 어울리는 거. 그 강백호 선수랑 있는 거 말이야. 그건 분명 내 잘못이 커. 나는 그러니까… 그 사람의 오래된 친구야. 너희 학교에서, 너희 나이일 때부터 친구였어. 우린 정말 친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만. 그때는 매일 같이 얼굴 맞대고 살았지. 그러다 북산고 가고, 그 녀석이 농구를 시작했을 때 진심으로 응원했어. 지금도 응원하고 있어. 친구가 세계적으로 잘 나가면 당연히 기쁘지. 난 그 녀석이 이렇게 돼서 기쁘다. 정말 그런데…

손가락이 잔을 두드립니다. 어쩔 땐 아쉬워져. 그 녀석을 신문 기사에서 만나지 않고 학교에서 보던 날, 시차 맞추며 통화하지 않고 바로 고개 돌려 부르던 날, 나는 그 녀석이 여자애한테 편지 쓰는 걸 구경하면서 돈 내기 할 때가 좋았는데, 이제는 내 집에도 걔가 보낸 편지가 몇통 있어. 그 국제우편의 줄무늬를 보면 어쩐지… 헛헛해질 때가 있지. 그래. 아마도 그런 마음이겠지. 지금 해동중에 나타나는 그 아이는 분명 그런 못난 마음이 뭉쳐져 만들어진 걸 거야.

내가 가장 그리워하는 시절을 반복해서 살아가는 거지.

그렇다고 귀신 같은 게 등장할 만큼 절절하지는 않았는데 말이야. 왜 나타났는지 정말 모르겠네. 부적 산 게 잘못되기라도 했으려나? 양호열이 싱거운 웃음으로 말을 끝냅니다. 해가 지기 전 양호열이 당신들에게 축객령을 내립니다. 붉어져 가는 하늘 아래를 걸으며 이 학년 선배가 그들만의 연례행사를 알립니다.

호열이 아저씨를 찾고 나서 우리는 매년 여름방학에 학교에 가. 밤에 수위 아저씨 눈을 피해서 호열이랑 호열 아저씨를 만나게 하지. 거창한 의식은 아니야. 그냥 아저씨가 호열이한테 자기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줘. 설득을 하는 거지. 네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내 삶에 만족하고 강백호도 잘 살고 있으니 이제 좀 승천해라, 뭐 이런 느낌. 효과는 없어. 애초에 학교만 벗어나면 바로 호열 아저씨를 잊어버리는데. 그래도 매년 찾아가. 아저씨 의지도 있지만 우리 협박도 좀 들어갔어. 왜 협박했냐고? 그거야 당연한 거 아냐?​

우리야 호열이랑 지내는 게 좋지만, 걔가 계속 저러는 게 맘 편하지는 않아. 처음 호열이 아저씨랑 만나고도 변한 게 없었을 때, 이번에는 강백호한테도 연락하려 했었어. 여기 당신 친구랑 똑같은 귀신이 있는데 한 번 와서 보라고. 이미 미국 팬레터 보내는 주소도 알아냈었고. 근데 아저씨가 결사반대했대. 그게 뭐라고 굳이 알리냬. 그래서 선배들이 화냈대. 우리 친구 무시하지 마라, 우리는 지금 해동중에 있는 양호열을 위해서 하는 거다, 본인 아니면 간섭 말라. 이렇게 저렇게 싸우다가 결국 아저씨가 매년 호열이 찾아가서 설득해보는 걸로 타협했어. 효과는 전혀 없지만, 진짜 쥐뿔만큼도 없지만, 호열 아저씨의 이야기를 듣는 호열이는 정말 즐거워 보이거든. 호열이는 강백호 이야기를 좋아해. 금세 잊는 기억일지언정. 그래서 아직 강백호에게 말 안 했어.

여름방학, 밤. 당신은 비공식 동아리의 신입으로서 처음 연례행사에 참여합니다. 깜깜한 현관, 큼직한 창문 덕에 밝은 복도, 당신들이 조심히 발을 옮기며 친구를 부릅니다. 호열아, 양호열, 어딨어? 머잖아 그가 나타납니다. 이 시간에 웬일이야? 그것도 한꺼번에 우글우글. 네가 만나볼 사람이 있어. 당신들의 뒤에서 오래된 그가 앞서 나옵니다. 안녕, 호열아. 그의 눈이 커집니다. 당신은 뭐야? 뭐기는. 양호열이지. 우리 제법 만났는데 이제 이름 정도는 기억해주지 그러냐. 양호열이 나지막이 웃습니다. 그가 다 커버린 자신과 자신의 친구들을 번갈아봅니다. 양호열이 익숙하게 그의 옆까지 다가갑니다. 서 있지만 말고 좀 걸을까. 너한테 들려줄 말이 참 많다. 이번에 백호가 또 한 건 해냈거든. 백호? 응, 강백호. 우리 친구.

그가 목을 기울입니다. 눈썹을 찌푸립니다. 확신 없이 말끝을 흐립니다. 뭔가 기억날 거 같은데…. 양호열이 그의 등을 두드리는 시늉을 합니다. 금방 기억할 거야. 기억하면 즐거울 거야. 백호는 그런 사람이니까. 단단한 목소리에 그가 홀린 듯 양호열을 따라 복도를 걷습니다. 당신들은 멀어져가는 그들을 묵묵히 바라봅니다.

기다란 복도를 채운 검은 그림자. 두 인영이 나란히 걸어갑니다. 한 명은 부드러운 걸음에 내리 깐 목소리, 한 명은 발을 구르며 목청 좋게 상대방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모퉁이를 돌 때 그의 옆얼굴이 드러납니다. 한껏 올라간 입꼬리, 가로등 빛을 받아 반짝이는 눈동자. 그가 당신들을 잊을 때 짓던 표정.

작아진 외침이 들립니다. 백호가 미국에 갔다고? 대단하다! 그 소리마저 잦아들 때, 마침내 당신이 있는 곳에서도 말소리가 나옵니다. 즐거워 보이지. 선배 중 한 명이 말합니다. 당신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입니다. 훗날 당신이 더 이상 그의 친구가 아닐 때, 그가 당신을 잊고 당신의 영원한 후배가 된 후에도. 그가 언제나 저렇게 웃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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