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ㅅㄹㄷㅋ/호백호] 해동 중학교의—
여름방학이 끝난 뒤 당신은 교실로 돌아옵니다. 누덕누덕한 표지 속 손때 묻은 종이를 보며, 끝났되 끝나지 못한 이야기를 되뇝니다.
호열이와 호열 아저씨가 만난 다음 날, 다시 학교로 가니 호열이는 우리를 모르는 호열이가 됐다. 몇 시간이고 기다렸지만 그 애의 원맨쇼는 멈추지 않았다. 그 애는 결국 개학식에서 한 달이 지나서야 우리를 기억해냈다.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다. 강백호 이야기를 한 것만으로도 신나서 그럴까? 하도 좋아서 강백호를 모르는 양호열로 돌아가기 싫던 걸까?
진짜 강백호를 만나면 얼마나 날뛰려나.
손끝으로 고운 종이를 매만집니다. 강백호를 모르는 양호열. 당신들의 친구. 늘 웃지만 그의 진실한 미소는 그와 다름을 당신은 압니다. 글씨가 손가락을 타고 당신의 마음에 응어리집니다. 예기치 못한 한숨이 새어 나옵니다. 그러자 정면에서 다가온 인기척. 무슨 일 있어? 당신을 상심에 젖게 한 장본인이 당신을 걱정해줍니다.
당신은 아무것도 아닌 척 대응합니다. 공책을 덮고 천연덕스럽게 딴소리를 합니다. 무난한 변명에 납득한 듯 그가 자리로 돌아갑니다. 곧이어 교사가 들어와 수업을 시작합니다. 당신은 교과서를 펼칩니다. 재미없는 수업을 귀담습니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
지금 개학식에서 며칠이나 지났지?
당신은 공책의 내용을 꽤 정확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조금 전 읽은 부분은 말할 것도 없지요. 그는 개학식에서 한 달이 지난 시점에서 당신들의 친구로 돌아왔습니다. 맨 처음, 양호열과 양호열이 처음으로 만난 해 말이에요.
그러나 올해, 지금의 그가 당신들을 기억해낸 건 개학식에서 일주일을 막 지난 참입니다. 아, 이 교사는 워낙 엄해서 조금이라도 한눈파는 티를 냈다간 혼쭐이 날 것입니다. 당신은 머릿속으로 공책을 복기해봅니다. 이듬해의 양호열. 전년처럼 한 달 뒤에 돌아왔어요. 그다음 해에는? 그때는 누구도 기록하지 않았지만, 삼 주 뒤의 기록에서 이미 그는 당신들의 양호열이었습니다.
중얼거림을 막으려 손톱을 깨뭅니다. 쉬는 시간 종이 울리자마자 당신은 빠르게 교실을 나섭니다. 이 학년과 삼 학년. 이 중 가장 많이 아는 이는 삼 학년이겠으나 교실은 이 학년이 더 가깝습니다. 교실 문 앞에서 이 학년 선배를 부르자 선배는 바로 당신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다가온 선배에게 질문합니다. 작년의 호열이는 언제 돌아왔느냐고.
이 학년 선배가 멀뚱히 당신을 바라봅니다. 글쎄. 이 주는 간 거 같은데. 왜 그래?
당신은 삼 학년 교실로 뛰어갑니다. 공책의 기록은 당신 안에 새겨졌습니다. 그를 회상합니다. 당신들을 잊은 양호열, 강백호만을 찾는 양호열. 그런 그를 목격한 순간은 당신이 체감한 것보다 훨씬 적었습니다.
이야기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조금씩, 아주 미미하게 달라지며.
이 학년 선배는 회의적입니다. 고작 기억해내는 시점 가지고 그러는 건 억측 아냐? 호열이랑 호열 아저씨를 언제 만나게 했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어. 삼 학년 선배가 당신을 지지합니다. 둘을 만나게 한 날짜는 다 비슷했어. 개학 일주일 전. 공책을 보면 다 그쯤에 만났어. 이거 말고도 호열이가 강백호를 떠올리는 날이 줄고 있고. 내가 일 학년이었을 때랑 지금을 비교하면 확실히 달라.
호열이는 점점 강백호를 잊어가.
왜 그렇지?
명쾌한 답은 처음부터 없습니다. 애당초 그가 생겨난 이유도 모르는데.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추측으로 가득 찬 인물입니다. 그의 원본 격인 양호열도 어림짐작만 할 뿐이죠. 어떤 마음의 집성체. 양호열은 그를 그리 칭했습니다. 그 마음이 서서히 달라져서 그에게 반영된 걸까요.
그렇담 그는 이대로 영영 영문도 모른 채, 더는 그리워하지도 않는 시절을 살아갈까요? 그렇게 살다가 어느 순간 자취를 감추려나요?
아. 그건 너무 쓸쓸한 처우입니다.
그러면, 이 학년 선배가 운을 뗍니다. 이제 우리는 뭘 해요? 당황스러운 아이의 낯이 당신 앞에 있습니다. 당신들은 변화를 일으킨 세대가 아닙니다. 그가 누구인지 탐색하던 세대도 아니며, 양호열을 학교로 데려온 세대도 아닙니다. 변화는 과거에나 일어난 일이고 당신들은 변화를 만드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윗세대도 처음부터 이 모든 걸 스스로 헤쳐 나갔겠죠. 아무것도 모른 채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상황을 이끌어갔어요. 그들은 아이였으며 지금의 당신들도 아이입니다.
우리는 이제, 삼 학년 선배가 뒤를 잇습니다. 새로운 시도를 해야지. 삼 학년 선배의 낯은 어쩐지 희망차 보입니다. 변화를 오랫동안 바라온 눈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요? 선배들이 호열이 아저씨 협박하던 법 기억 안 나? 말 안 들으면 강백호한테 다 불어버린댔지. 지금 그러면 돼. 강백호한테 편지를 쓰자. 해동중의 양호열 이야기를 들려주는 거야.
그리하여 당신들은 종이와 연필을 들어 여태까지 있었던 일을 적어 내립니다. 우체통에 편지를 넣을 때 여행을 앞둔 것처럼 심장이 콩닥거립니다. 빨갛고 파란 테두리의 편지 봉투가 까만 구멍으로 툭 떨어지고, 당신들은 흥분을 이기지 못해 서로 손뼉을 부딪칩니다. 일 쳤다! 가쁜 숨을 내쉽니다. 숨결에 많은 감정이 섞여나옵니다. 그를 위해 움직였다는 기쁨, 어른 양호열을 배신했다는 죄책감, 그럼에도 기어이 이 선택을 고집한 욕망. 여린 마음에 갖가지 감정이 널을 뛰어 그날 당신들은 오랫동안 잠이 들지 못합니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강백호는 당신들의 기대에 전혀 부응하지 않습니다.
국제우편이 도착하려면 이 주일은 걸린다고 합니다. 이 주일은 기본이고, 그보다 길어질 수도 있다는 말이죠. 상대에게 갔다 한들 그걸 또 언제 읽어주며, 답장은 또 언제 보내 줄까요? 당신들은 편지를 보낸 뒤 일주일을 넘긴 시점에 이메일로도 긴긴 사정을 적어 보냈지만, 한 달 반이 지난 지금까지도 상대방은 감감무소식입니다.
이 양반 편지를 읽긴 해? 이 학년 선배가 분통을 터뜨립니다. 이럴 거면 팬레터 주소가 왜 있냔 말이야. 호열이 아저씨가 저번에 강백호는 교과서를 폈다 하면 뻗었댔는데, 편지 읽다가 잠든 거 아냐? 중학생의 여과 없는 힐난이란. 삼 학년 선배는 침묵을 택했으나 처음의 열의가 뚝 부러진 건 대번에 알아볼 수 있습니다. 당신도 말할 것 없고요.
강백호한테 말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는데. 강백호 만나러 미국에 가지도 못하고. 중학생인 우리가 할만한 건 이거밖에 없었어. 풀이 죽은 삼 학년 선배가 혼잣말합니다.
당신은 공책을 만지작거립니다. 공책의 귀퉁이를 문지르는 건 어느새 당신의 두 번째 습관이 되었습니다. 첫 번째 습관은 공책을 항상 지니고 다니는 것이고요. 세 번째 습관은 일지를 암독하는 것입니다. 선배들에게 일어난 일, 선배들이 일으킨 일을 생각하고 또 생각합니다. 바이크가 고장 난 졸업생이 양호열을 만나다. 이야기에서 퇴장당한 인물이 다시금 등장하는 장. 당신이 가장 애정하는 대목입니다.
도움을 청해봐요. 선배들에게.
선배들이 당신을 쳐다봅니다. 당신이 말하는 선배가 자신들이 아님을 바로 알아듣습니다. 삼 학년 선배가 입을 엽니다. 그럼 우리는 결국 기대기만 하는 거잖아. 난… 우리 힘으로 해냈으면 했어. 호열이의 상태를 눈치챈 건 다름 아닌 우리예요. 강백호에게 말하기로 결정한 것도 우리잖아요? 이 학년 선배가 동조합니다. 선배에게 가르침을 받는 것도 후배의 도리죠. 넌 나한테 윗사람 대우 전혀 안 해주면서. 삼 학년 선배가 톡 쏘아댑니다. 어쨌든, 이 도움 요청도 우리만 할 수 있는 일이에요.
삼 학년 선배가 잠시 침묵하다가, 알겠노라 답합니다. 이따 선배한테 연락해볼게. 그 말을 하는 삼 학년 선배의 안색이 조금 새파랗습니다. 이런 식으로 일 벌인 걸 알면 한 소리 하겠네. 뭐, 이미 엎질러진 물 자기들이 어쩌겠어. 삼 학년 선배는 혀를 차며 제 머리를 헝클어뜨립니다. 보기보다 잔소리를 많이 들어온 후배였나 봅니다.
가느다란 인연의 실이 통통 움직입니다. 능남고로 간 졸업생은 친구들을 모아 편지를 다발로 보내겠다고 말하고, 새 바이크를 산 졸업생은 양호열의 정비소를 몰래 뒤져 강백호의 집 주소라도 찾아줄까 묻습니다. 대학생이 된 졸업생은 이번 겨울에 미국에 가보겠다 약속합니다. 어떤 졸업생은 우려를 표하지만 강경히 말리지는 않습니다.
돌파구는 순식간에 나왔습니다. 북산고로 진학한, 현재 농구부원인 어느 졸업생이 강백호와 대화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현 북산고의 농구부 감독이 그 당시와 같은 사람인 건 천운입니다. 농구부원인 졸업생이 수화기 앞에서 목을 가다듬습니다. 실감조차 안 나는 먼 나라, 언젠가 자신도 가고 싶은 그 땅에 자리 잡은 누군가가 지금 전화기를 들고 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지만 자제력을 발휘합니다. 당장은 부탁받은 말, 자신도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꺼내야 합니다. 차분한 목소리로 해동중의 졸업생이 말합니다.
해동 중학교에는 양호열 후배님이 있습니다.
팬레터 보내는 주소가 한 번 바뀌었다고, 강백호는 말합니다. 예전 주소로 보낸 편지는 조금 늦게 자신에게 온다고, 요즘은 또 워낙 바빠 편지 볼 겨를도 없다고 합니다. 그렇게 시간에 쫓겨 사는 이가 이 터무니없고 허무맹랑한 이야기에 오랜 동창 한 명이 엮였단 사실 하나로 곧장 이곳으로 날아오다니. 강백호의 반응은 너무나 빨라 당신들조차 당황할 정도입니다. 당신들이 그를 아끼듯, 강백호 또한 양호열을 아낀단 증거겠지요. 그중 제일은 그를 만들어낸 양호열이겠지만요.
정말 와주셨네요…. 기죽은 당신들을 보는 강백호의 눈에 미심쩍음이 섞였지만, 구태여 표하진 않습니다. 새삼스레 느끼지만 정말 낯섭니다. 양호열은 그를 닮아 익숙하기라도 하지, 강백호와는 진실로 초면입니다. 과거 모습은 고사하고 현재의 양호열과 강백호가 친구인 모습도 상상해내기 어렵습니다.
너희가 얼마나 간절했으면 영감님에게 떼까지 썼겠냐? 강백호가 농구부원인 졸업생의 등을 팡 두드립니다. 그리고 나도 그게 궁금해. 만나고 싶어. 왜 호열이는 이런 일을 나에게 숨겼을까. 우리는 뭐든 터놓은 사이거든.
당신들이 조용히 시선을 교환합니다. 강백호에게는 해동중에서 일어나는 기이 현상만을 전달했지, 양호열의 생각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가끔 강백호만을 찾는다는 사실도요.
어쨌든, 필요한 사람은 전부 모였습니다.
학기 중, 밤. 교정 가장 어두운 구석에는 그를 불러낼 수 있는 당신들이 있습니다. 그에게 변화를 가져다줄 강백호도 있습니다. 당신들은 요령 좋게 수위 아저씨를 피해 학교로 잠입합니다. 농구부원인 졸업생은 망보기를 자청했습니다. 당신들의 움직임은 어느 때보다 일사불란하지만 어느 때보다 새가슴입니다. 흥분과 두려움이 귓가에서 쿵쾅거립니다. 호열아. 호열아, 너 어딨어. 경직된 목구멍으로 소리를 쥐어짭니다.
이제 와서 드는 생각이지만, 이로써 그가 사라질까요. 가장 그리워한 사람을 만났으니 모든 것에 만족하고 작별 인사를 건넬까요? 마음이 더 커져서 그를 볼 수 있는 사람이 와글와글 늘면 어쩌죠. 아, 머리에 들어찬 먹구름 같은 만일, 이 길고 구차한 과정이 무용해진다면, 강백호가 그를 보지 못하는 경우라도 일어난다면, 그 또한 어른이 된 강백호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강백호는 호언장담했지만—
백호야!
당신들은 소리 나게 숨을 들이켭니다. 그대로 호흡이 멈춥니다. 정적이 들어찬 교내에 다시 누군가 외칩니다. 강백호! 그가 부릅니다. 어째서. 이 학년 선배가 평소와 같은 크기로 말합니다. 긴장은 사라지고 혼란이 대체합니다. 그의 목소리가 복도를 타고 울립니다.
하지만 당신들의 시야에 그는 없습니다.
당신들은 뒷생각도 않은 채 달려 소리의 진원지를 찾습니다. 어떤 나무 문 너머에 말소리가 선명히 들립니다. 급히 문을 열면 그곳에 그가 있습니다. 언제부턴가 해동중에서 살아가던 양호열, 본인도 존재 이유를 모르던 양호열, 간혹 늦은 시간에 찾아가면 금세 당신들에게 와주던 양호열, 당신들을 아는 양호열.
그가 어느 때보다 밝게 미소 짓습니다.
그의 앞 빈 의자를 바라보며.
…한 번도 이런 적 없었잖아. 삼 학년 선배가 누구에게 향한 지 모를 말을 뱉습니다. 밤에 오면 항상 우릴 기억해줬잖아. 요즘 이런 적도 잘 없었잖아. 왜 하필 오늘인데? 이 허탈감은 분노와 닮았습니다. 당신들의 친구는 여기 없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그는 강백호만을 바라보는 양호열입니다. 선배의 항변도 그에게 닿지 않습니다.
이 학년 선배의 포기는 아직입니다. 강백호의 소매를 잡아 그의 앞으로 데려갑니다. 강백호가 머뭇대며 빈 의자에 앉습니다. 그와 시선을 맞추려 몸을 구깁니다. 아. 걱정 하나는 사라졌네요. 강백호는 그를 제대로 보고 있습니다. …호열아? 학교에 들어온 뒤로 강백호가 처음 입을 엽니다.
그가 눈이 안 보일 만큼 웃습니다. 달빛 아래 그의 눈물이 반짝입니다. 너 그러다간 내일이 스물 세 번째 실연이 될 거다! 맥락을 알 수 없는 말이 교실 천장을 울립니다. 이 학년 선배가 두 손을 얼굴에 가져갑니다.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뱉습니다. 망했네. 이 학년 선배가 책상에 걸터앉습니다. 당신도 교탁에 손을 짚어 몸을 지탱합니다.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당신들은 오늘을 거의 마지막 기회로 여겼습니다. 강백호는 금세 미국으로 돌아갑니다. 이것도 몇 년만의 귀국입니다. 강백호가 다음에도 해동중을 찾아와줄까요. 그를 만나며 대화를 시도해볼까요. 양호열이 매년 그러하듯 강백호도 그에게 시간을 내어줄까요? 그건 강백호가 원한다 해도 쉽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막막함이 걷잡을 수 없이 들어찹니다.
…호열이가 지금 왜 이러니? 강백호가 두 번째로 말을 합니다.
그의 시선은 강백호와 계속 어긋나지만, 강백호는 여전히 그를 관찰합니다. 그는 여전히 잡담 삼매경입니다. 얘가 하는 말들, 들어보니까 전부 옛날에 나랑 한 대화인데… 너희가 설명한 호열이랑 다르지 않니? 이 호열이는 그러니까—
호열이 아저씨 어릴 때랑 똑같죠. 말 그대로. 이 학년 선배가 다리를 까닥입니다. 과거를 뚝 떼온 것 같죠? 가끔 저래요. 평소에는 우리 친구인데. 가끔가다 저렇게 돼요. 우리도 볼 수 없는 백호 아저씨 어린 시절하고 한참을 낄낄거려요. 쟨 그럴 때만 저렇게 신이 나요. 이 학년 선배가 말을 멈춥니다. 바닥 결을 내려다보며 읊조립니다. 얄미운 자식.
왜 이건 말 안 한 거야? 강백호는 이해하지 못한 눈으로 당신들을 돌아봅니다. 이런 호열이도 있단 걸 숨기려 했어? 왜? 그것만큼은 끝까지 숨겨주고 싶었어요. 우리가 아저씨를 배신하긴 했지만, 그래도 덮어줄 건 덮어주고 싶어서. 삼 학년 선배의 말에 강백호의 눈이 끔뻑입니다. 호열이가 이걸 숨기고 싶어 했다고?
다시 어린 양호열을 살핍니다. 그 또한 강백호를 살피고 있습니다. 웃음이 살짝 가신 눈. 그가 강백호를 뚫어져라 바라봅니다. 작은 손이 강백호의 뺨 근처로 올라옵니다. 어두운 교실에서 그의 눈이 하염없이 빛납니다. 의심할 여지 없는, 티끌 하나 없는 순수한 마음이 눈동자에서 흘러나옵니다. 백호. 앳된 목소리에도 묻어납니다.
그가 강백호에게 향했던 손을 도로 물립니다. 후 입바람으로 무언가를 떼어냅니다. 체육 시간에 그렇게 날뛰었으면 먼지는 좀 털지. 어어, 다 뗐어. 안 털어도 돼. 이번에 그는 강백호의 말을 경청합니다. 손바닥 위의 입이 완만한 곡선을 그립니다.
강백호는 그 모든 순간을 눈에 담습니다.
교실 창가에서 흰색에 가까운 노란 점이 보입니다. 타원형 빛이 운동장 바닥을 휘젓습니다. 학생, 거기서 뭐 해? 이봐! 멈춰! 농구부원인 졸업생이 미끼가 되어 수위를 따돌립니다. 이런, 당신들의 한밤 소동이 수위 아저씨의 귀에도 들렸나 봅니다. 밤 중에 어른 한 명과 학생 세 명이 교실에 모인 광경이 어떻게 보일까요. 상상하고 싶지 않으므로 얼른 자리를 뜨기로 합니다. 백호 아저씨. 이제 가요. 당신과 이 학년 선배가 강백호의 팔을 붙듭니다. 강백호는 꿈쩍도 안 하려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교실을 떠나는 순간까지도 강백호의 고개는 그에게 고정되었습니다.
언제부터… 소란 틈에서 강백호의 말을 들었습니다만, 혼잣말 같아 대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학년 선배는 질문으로 여겼는지 팔 년 전이라고 대꾸합니다. 뛰느라 정신이 없어 했던 말, 숨겼던 말이 가감 없이 튀어나옵니다.
두 분이 스물두 살일 때겠네요. 우리가 셈한 기간이 팔 년이지, 실제로는 더 됐을 수도 있어요. 호열 아저씨가 우리 호열이를 만난 건 사 년 전부터예요. 으앗, 숙여! …저기 담벼락으로 가요. 아저씨 키가 크니까 우릴 건너편으로 던지면 되겠어. ……호열 아저씨도 걔가 왜 나타나는지 몰라요. 근데 자기가 가장 그리워하는 시절이 그때랬어요. 지금이 가장 좋아야 하는데, 자꾸 중학생 때가 생각난대요. 과거 좀 그리워할 수도 있지, 참 내. 아저씨들 여전히 친구라면서요. 바쁜 건 아는데 얼굴 좀 비추면서 살아요. 아아, 근데 오늘 완전히 공쳤네…. 백호 아저씨, 앞으로 몇 시간 뒤 출국이랬죠? 혹시 조금 미룰 생각 없어요? 아니면 다음에 또 우리 호열이 만나준다거나—
쉬이잇. 삼 학년의 손이 이 학년의 입을 덮습니다. 삼 학년 선배가 물끄러미 강백호를 바라봅니다. 강백호는 누구도 바라보지 않습니다. 바닥을 보며 무언갈 골똘히 생각합니다. 괜찮으신가요? 말소리도 들리지 않는지 묵묵부답입니다. 망부석으로 굳어있으려니 멀리서 농구부원인 졸업생이 나타납니다. 날랜 발이 추격자를 따돌린 모양입니다. 너희 괜찮니? 안 들킨 거지? …강백호 선배님? 괜찮으세요?
어어. 강백호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입니다. 응, 괜찮아. 나는 그냥… 팔이 올라갔다가 도로 내려갑니다. …이제 가봐야겠다. 가야겠어. 네가 애들 좀 챙겨줄래? 이거, 가는 길에 택시 있으면 타. 받아둬.
반가웠어, 후배님들. …말해줘서 고맙다.
강백호가 떠납니다. 뒷모습은 어쩐지 넋을 잃은 것만 같습니다. 무언가에 정신이 팔린 모습입니다. 농구부원인 졸업생이 식은땀을 마저 닦습니다. 당신도 코를 킁 들이켭니다.
이 학년 선배가 목덜미를 긁습니다. …호열 아저씨한테 물어볼 거 같죠? 삼 학년 선배가 까진 팔꿈치를 살핍니다. 나도 모르겠네.
당신도 강백호가 어떻게 나올지 전혀 모르겠지만, 한동안 정비소에 얼씬도 말아야겠다고 다짐합니다.
다음날 학교에서 당신을 기다린 건 언제나의 그입니다. 어제도 만난, 어젯밤은 영 협조를 안 해준 당신의 친구. 당신은 그가 얄밉다는 의견에 은근히 공감합니다. 돌아온 그를 이리저리 관찰해봤지만 그는 조금도 달라진 게 없습니다. 강백호 투입 작전은 수포도 돌아갔군요. 한숨을 쉽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가 눈을 말똥거립니다.
당신이 하나 잊은 사실. 어떤 변화는 아주 느리게 일어납니다. 변화는 이미 시작됐습니다. 그리고 이건 예상 못한 사실. 변화의 대상이 꼭 그일 필요는 없습니다.
너희도 보여? 찬 바람이 불어닥치는 계절, 삼 학년 선배가 벤치를 가리키며 묻습니다. 보여요. 당신과 이 학년 선배가 동시에 대답합니다. 둘 다 보여? 선배가 재차 묻습니다. 보인다니까요.
양호열과 강백호, 둘 다 보여요.
기다란 벤치에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습니다. 서로를 바라보며 목청껏 떠들어댑니다. 강백호가 기운차게 가슴팍을 두드리고, 양호열은 배를 부여잡습니다. 가까운 곳에서 당신들이 조금 전부터 입김을 내뿜으며 빤히 지켜보지만, 그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서로에게 집중합니다. 투명한 방벽이 그들에게 둘러진 것만 같습니다.
언제부터 저랬는지 아는 사람? 나흘 전에 호열이 주변으로 뭔가 일렁이긴 했어요. 빨강 유리알에 투과된 빛 같은 게. 오늘 호열이가 우리한테 인사했던가? 아뇨. 인사할 거 같니? 아뇨. 앞으로 쭉 저럴 거 같은데요. 어째서? 강백호가 있으니까요.
잠시 침묵이 내려앉습니다. 일기 예보에서는 오늘 눈이 내린답니다. 묵직한 구름이 머리 위에 자리합니다.
우리 호열이는 사라지고 강백호 친구 양호열만 남았구나. 작별 인사를 할 틈도 없었네. 선배는 조금 아쉬워할 뿐, 낙담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흰 숨결이 흩어집니다. …호열이를 만들어낸 마음이 그리움이라면, 저 백호를 만들어낸 마음은 무엇일까.
우리야 영영 모르겠죠. 이 학년 선배가 어깨를 으쓱입니다. 그래도 음, 그 마음이 제대로 서로에게 가기는 했네요. 어긋나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눈송이가 떨어집니다. 겨울방학이 끝나면 곧 봄방학이 오겠죠. 새 학기는 그 뒤를 바짝 쫓아옵니다. 이 학년이 된 당신이 교정을 거닙니다. 빨간 머리와 까만 머리를 마주칩니다. 일 학년 때 곧잘 그랬던 것처럼 그들을 구경합니다. 주위를 돌아다니는 신입생의 얼굴도 훑어봅니다. 삼 학년이 된 작년의 이 학년을 발견한 당신이 그 곁으로 다가갑니다.
어때. 삼 학년 선배가 말합니다. 당신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습니다.
일 학년 중 누구도 저 두 사람을 보지 못합니다. 당신은 해동중의 기이 현상을 목격하는 마지막 세대입니다.
아깝게 됐네. 너도 후배가 생겼으면 좋았을 텐데. 삼 학년 선배가 과자를 오독거립니다. 선배가 당신에게도 과자를 나눠줍니다. 있지, 너 정비소 안 간 지 한참 됐지? 그럼 모르겠네. 거기 사장 바뀌었어. 방학 때 그 앞을 슬쩍 지났는데 간판이 달라졌더라고. 호열이 아저씨 몇 개월 전에 장사 접었대.
딱딱한 과자가 치아에서 부스러집니다. 삼 학년 선배가 짓궂게 웃습니다. 그 건실한 아저씨가 가게 팽개치고 어디로 갔을까. 선배의 눈이 과자의 비닐 포장만큼이나 반짝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뉴스, 어제는 미국에 놀러 간 졸업생 선배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강백호 경기 보러 가니까 누가 거기 있었냐면…
당신이 해동중을 떠나는 날, 당신을 해동중의 유령을 찾아다닐 겁니다. 이제는 오직 당신만이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유령을요. 그들은 지난날과 똑같은 모습으로 웃고 떠들며 교정 한구석에 자리 잡았을 겁니다. 당신은 그리로 가 오래도록 그들을 바라볼 겁니다. 당신이 좋아했던 미소는 변함없이 그곳에 존재합니다. 안녕. 당신은 당신을 볼 수 없고 들을 수도 없는 친구에게 인사한 후 유령처럼 그곳을 떠납니다. 그들은 당신의 등장과 퇴장을 눈치채지 못합니다. 즐거운 웃음소리가 당신의 뒤편에서 울려 퍼집니다. 당신은 산뜻한 걸음으로 체육관에 갑니다. 졸업장과 꽃다발을 품에 안아 무대에서 내려옵니다.
해동 중학교에는 양호열 후배님이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는 볼 수 있는 사람이 없어 그가 아직도 거기 있는지 확실치 않다는군요. 그는 그대로 사라진 걸까요, 아니면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여전히 그곳에 있을까요. 무엇 하나 알 길 없지만 확실한 것 하나. 적어도 그는 외로운 유령이 아닙니다.
언젠가 해동 중학교에 가게 된다면 학생들을 유심히 살펴보세요. 빨간 머리의 학생을 발견할지도 모를 일이잖아요. 그 옆에는 항상 검은 머리의 학생이 붙어 다닙니다. 그가 바로 양호열 후배님이에요. 그리고 그의 상대, 빨간 머리의 학생이 강백호 후배님입니다. 언제나 그들은 같이 다니죠.
귀를 기울이면 두 사람의 말소리도 들릴 겁니다. 하지만 굳이 듣지 않아도 알아볼 수 있지요. 두 눈에 선명히 보이지 않나요.
그들은 진실로 행복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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