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료

[준섭호장] 열차 밖 방랑자들

부외자들에서 이어집니다.

공간 by 뇌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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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상! 저기 하얀 돼지가 있어요!”

“… 그래.“

전호장은 조심스럽게 몸을 웅크린다. 살금살금, 처음 보는 동물에 다가가 본다.

돼지가 맞을까? 그림으로만 접했던 동물이다.

눈을 마주친 순간, 총소리가 허연 눈밭에 퍼진다.

탕!

“호장이는 모르겠구나, 이건 곰이야.”

“곰.“

“일본어로는 시로쿠마. 북극에 살아서 영어로는 폴라베어라고 해. 한국어로는… 뭐지?”

“글쎄요.”

“사전… 음, 이 주위에 도서관이 있으면 좋을 텐데.”

“여긴 어디일까요?”

글쎄…

진은 호장의 입에 구운 고기를 집어 먹여본다. 핏물이 뚝뚝 떨어지게 구워주고 싶었는데 괜히 탈이 날 까봐 바싹 구웠다. 전호장은 입을 아 하고 내밀었다. 

“진짜 맛있다…”

호장이 모닥불을 피워 곰의 고기를 익혀 먹고 있을 때, 진은 그 옆에서 곰의 가죽을 벗겨내고 있었다. 날카로운 칼은 아니더라도 부서진 열차의 파편은 충분히 칼의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탄환이 박혀있는 자리에서 흐르는 피가 진의 얼굴, 몸, 입고 있는 옷에 묻었다. 다른 생물의 피를 이렇게 손에 듬뿍 적시는 것도 오랜만이다. 아니, 처음이라고 해야 할까? 진은 모닥불에서 핏물이 줄줄 흐르는 고기를 먹고 있는 호장에게 다가갔다.

“맛있어?“

“엄청요. 단백질 블록보다 질기긴 해도 정말 정말 맛있어요! 진 상도 어서 먹어요.“

“…”

“아, 그 전에 먼저 씻어야 되겠네요. 눈은 주위에 충분히 있어요. 고드름도 저기 몇 개 챙겨놨고, 솥은…”

“행복하다.“

“…”

“…너는?”

“저도 그래요.”

그래…

카카카캇!! 역시 열차 안은 좁고 좁은 세상이었던 거죠. 저 같은 위인을 담기엔. 같은 대답을 기다렸던 진 소이치로는 담담하고 진지한 호장의 반응에 살짝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

열차는 폭팔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모른다. 나는 앞칸에 가지 않았다. 반란에 참여하지 않았고, 그 날 내내 호장이랑 잠만 잤다. 진짜 잠만 잤다. 그러다가 무슨 폭팔음이 들렸고...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기억은 호장이가 쓰러져 있던 날 업고 가파른 절벽을 기어올랐다는 것. 붉게 물들은 호장이의 손가락. 그 붉은색의 손가락을 보고 정신을 차렸다. 호장이는 눈 위에서 피를 뚝뚝 흘리며 날 깨우고 있었다. 싸대기를 사십번은 때렸다고 내게 고백했다. 난 그 말을 듣고 얼굴을 매만졌다. 굳은 피딱지가 손에 묻었다. 

앞의 반란은 성공한 걸까? 이름만 들어보고 말은 섞지 않았던 그 얼굴들. 그 얼굴들은 세상을 부쉈고,…

그들이 살아 남았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지금 앞에서 곰의 고기를 야무지게 먹고 있는 전호장이랑 내가 어떻게 살아있는지도 모르겠다.

후쿠다.

후쿠다도 살아있다면…

“무슨 생각 해요?”

“눈이 더 녹으면 끔찍해지겠단 생각을 하고 있었어.”

“왜요? 전 이 지긋지긋한 눈이 빨리 녹고 건물을 더 구경하고 싶은데! 형상만 보기 싫단 말이죠. 눈이 막고 있어서 안에 못 들어가서 아쉬워요.”

“…”

전호장은 쿠쿠쿠, 하고 이상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근데, 은근 진 상도 감성적인 부분이 있단 말이죠. 눈이 그렇게 좋아요?"

“…얼어있는 시체들이 녹으면 냄새 날 거 같아서.”

“으악!”

“그러니까 눈이 더 녹기 전에 사람이 많이 안 죽은 곳으로 이동하자. 사실 여기도 어디인지 잘 모르겠지만…”

“뭐야, 진 상 여기 어딘 줄 몰라요? 글 읽어보세요.“

우리가 열차에서 멀어져 자리를 잡은 곳은 일본도 중국도 한국도 미국도 아니었다. 내가 모르는 문자가 이렇게 많았던가. 세상에 언어가 100개가 넘는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는데…

“밖 세상에서 18년 동안 뭐 배웠어요?!”

“넌 내가 파파고인 줄 알아?”

“파파고가 뭔데요?”

진은 생각했다. 전호장에게 이 세계를 다 보여줄 수 있을까? 생명체가 살 수 있을 정도로 따뜻해졌다. 여전히 일본의 겨울보다는 춥지만. 그래도 불을 피울 수 있고, 눈이 점점 녹고 있고, 무엇보다 전호장에게 세상을 보여줄 수 있다. 그렇다면 농구도... 

호장이랑 농구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진은 그 사실이 행복해서 미소를 머금었다.

“호장아.”

“네. 진상.“

“앞으로도 같이 다니자.”

“엑, 당연하죠! 저 버리려고 했어요?“

세상에 나와보니까 어때?

“좋아요.”

“그래…”

진짜 좋아요!!!

전호장은 갑자기 밥을 먹다 말고 진의 품에 달려들었다. 진은 호장을 밀치지 않고 그냥 냅둔다.

“하고 싶은 거 있으면 이야기 해. 최대한 하자.”

“…”

“아, 그런 건 못 하겠다. 일본에 가고 싶다, 같은 거…”

“저 데이트 하고 싶어요. 진 상이랑요.”

“…”

많이 하자…

“만약 우리가 소설 속 주인공, 아니다. 주인공이 아니어도 괜찮아. 우리가 소설에 존재하는 엑스트라라면.”

“응? 네.”

“여기서 끝나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저는 여기서 끝이면 싫을 거 같아요. 기왕 시작된 거, 사슴 고기 먹어보고 싶어요.”

“그래. 잡으면 구워서 줄게.“

전호장은 진의 말을 못 알아 들은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도 호장다웠다. 진은 곰의 가죽을 벗기다 말고 또 웃었다. 

진과 전호장이 유사 어바웃타임을 찍고 있을 때 조금 떨어진 어딘가에서는 푸른거탑이 펼쳐지고 있었다.

“야! 너 이름이 뭐냐고!!! 왓 이즈 유어 네임 ㅅㅂ롬아.”

“무섭다…“

“코와이? 니 얼굴이 더 코와이 이새끼야. 아오 쪽바리 새끼, 씨발 존나 말이 안 통해.”

“…씨바? 씨바루? 디쥬 컬스 앳 미?“

“이건 또 어떻게 알아들었대…”

안영수는 열차의 앞좌석에 탔던 한국인이다. 

17년동안 돈 줄거 다 주고 잘 살고 있었는데 뒤에선 밥주라고 지랄에, 잘 놀고 있던 자기들의 마약을 훔쳐가질않나 아무튼간 개같은 꼬리칸 새끼들때문에 강제로 서바이벌을 시작해야했던 영수. 

불쌍한 영수씨, 혐오스런 영수의 일생…

그런 영수에게 눈 앞에 있는 후쿠다 킷쵸는 좋은 먹잇감이었다.

“하… 마이 네임 이즈 안영수. 오케이? 야 쪽바리. 왓유어 네임. 대답.” 

“마이네임 이즈.. 후쿠다 킷쵸. 씨바루새끼야.“

후쿠다는 눈물이 고였다. 

진진… 보고 싶어… 넌 존나 착한 새끼였구나…

네 사람이 만나기 20분 전. 후쿠다 킷쵸는 눈물을 흘렸고, 진 소이치로는 미소를 짓고 있었고, 안영수는 개 빡쳐있었고, 전호장은 바보같이 고기를 뜯었다. 

열차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새로운 열차에 탑승한 사람들은 다시 긴 여행을 시작한다.

아래에는 소장이랑 여담입니다 (안 읽으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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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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