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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섭호장] 성모 마리아와 알 카포네

슬램덩크 준섭호장

공간 by 뇌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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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었다. 괴상한 생명체가 호장의 입에서 나온 것은. 음식에 비유해야 할까? 당장 떠오르는 것이 없다. 이걸 음식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토사물 주제에 살아있다. 저녁에 뭐 안 먹고 잤는데. 감촉, 미역같이 미끌미끌하다. 색깔은? 전호장은 한 손으론 눈을 비비적거리고 한 손엔 그것을 올려놓는다.

문득 초등학교 때 했던 한 과학실험이 생각난다. 닭의 생성 과정을 배웠을 때. 2주 정도 된 유정란을 유리막대로 깨트렸던 순간이 기억났다. 페트리 접시에 담았던 생명을 기억한다.

내가 깨트리지 않았으면 병아리가 되었을 어떤 존재. 세포덩어리.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심장과 눈과 내장이 껍질이라는 그릇을 뚫고 흘러내린다. 생명의 발생을 짓밟았던 때를 기억한다. 전호장은 실험에 가장 열정적으로 참여하는 호기심 많은 아이였는데, 그날만큼은 적극적일 수 없었다. 그날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집에 돌아갔었다. 계란후라이를 3개월 정도 못 먹었었지. 지금은 맨날 먹지만.

그 기억은 고등학생이 된 지금도 지워지지 않고 가끔 호장을 괴롭혔다. 부리를 개폐하기도 전에 심장이 멈추었던 그 존재…

그 병아리가 왜 지금 생각이 날까. 전호장은 자신의 입에서 기분나쁜 붉은 액체(점도를 보아하니 피는 아닐 것이다.)와 함께 태어난 혈액 덩어리를 바라봤다. 그것은 언뜻보면 도마뱀처럼생겼다. 전호장은 그 존재의 심장박동이 자신의 손가락을 타고 등허리를 이리저리 타고오르는걸 느낀다. 엄지만한 크기의 존재. 크기가 너무 작지만 너무 크다.

그것은 분명 숨을 쉬고 있었다. 그것은 … 전호장은 손바닥 만한 페트리 접시에 담았던 생명을 떠올리며 자신의 손으로 그것을 깨트려버릴까 조심하며 책상 위로 그걸 올려놓았다. 그것은 꿈틀댄다. 살아있다는 증명이라도 하는 듯이··· 기특하다고 해야하나? 징그럽다고 말해야 하나?

전호장은 그걸 내려놓고 나서야 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리고 볼을 꼬집는다. 보조개가 생길 정도로 세게. 아프다.

내가 뭘 만들어낸 거야?

준섭이 형, 잠깐만요…

전호장은 지금 막 달아오른 분위기를 버티지 못했다. 왜 그래? 준섭은 보다 능숙하게 전호장의 위에 올라탄다. 그리고, 그래, 혀를 섞었다. 입천장에 준섭이 형의 혀가 닿았을 때. 전호장은 이것이 자신의 꿈이라는 걸 자각했다. 신준섭의 혀가 자신의 기도를 타고 흘러내리는 것 같았으니까… 아니, 혀가 아니라 이것은 분홍빛의 리본 끈이다. 부드러운 리본 끈이 자신의 몸을 하나하나 만진다. 까끌까끌한 사포같은 면으로 내장을 하나씩 쓰다듬고는 상처에 약을 바르듯 부드러운 면으로 사포로 갈린 곳을 문지른다. 그것은 점점 호장의 몸에 스며든다. 그 순간 참을 수 없는 역겨움이 올라왔다. 수치스러움과 거부감이 동시에 호장을 덮친다. 토할 거 같아…

자신의 꿈 안에서 전호장은 신준섭과 말 그대로 한 몸이 되었다. 신준섭의 하체는 기분 나쁜 점액이 되어 전호장의 배에 스며들었다.

하지마요 준섭이 형······. 

전호장이 할 수 있는 저항은 이게 전부였다. 신준섭의 표정은 어두운 그늘이 져서 보이지 않았다. 그늘? 그건 그늘이었나.

섹스가 아니었다. 그건 섹스도 아니고 그냥 기분 나쁜 꿈이야. 기분 나쁜 꿈. 단정지어 악몽이라고 불러버리는 건 싫었다. 어쨌거나 좋아하는 선배와의 꿈이었으니까. 내용이 좆같았지만 않았더라면 기분 좋은 하루가 되었을텐데.

호장은 몽정을 꾼 적이 한 두번 정도 있지만 이 꿈은 몽정이라고 하기엔 기괴한 점이 많았다. 꿈이 영화의 장르라면, 이 꿈은 로맨스보다는 호러에 가까운 영화일 거다. 평점은 2점대. 어떤 매니아에게만 평가가 좋은 그런 영화 있잖아? 신체가 절단되는 장면만 모아놓은 영상. 내용은 없고 자극만 담아놓은 포르노들. 가끔은 감독이 뭔 미친새끼라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담아놓은 건데 거기에서 하나하나 의미를 찾는 사람들이 있지. 호장은 그런 사람들이 한심하다고 생각했었다. 의미 찾기가 제일 의미없다고, 재미만 느끼면 된다고.

그게 호장의 의견이었다. 사실 영화를 많이 보는 편도 아니었지만··· 아무튼, 잠시 그 사람들과 지금 자신의 차이가 무엇일지 떠올려본다.

전호장은 자신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부산물에 굳이 의미를 부여하지 않기로 했다. 그의 단순한 생각회로는 그의 장점 중 하나였다. 깊게 생각하지 않기. 의식하려하지 않기.

그런데 의미는 없어도 그 장면이 뇌에서 자꾸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비록 내용은 싫었지만. 전호장은 그 괴상망측한 꿈을, ······전호장은 그 꿈을 꾼 직후 자신이 무언갈 내뱉었다는걸 떠올렸다. 리본끈이 호장의 내장을 하나씩 쓰다듬었던 촉감을 기억한다. 내장이 만져지는 건 이런 기분이구나…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몸 안이 문질러진다. 아아, 아. 고통인지 쾌락 때문인지 모를 괴로운 신음이 호장의 이 사이에서 새어 나왔다.

그 생명체는 꿈의 그 리본 끈과 나의 내장이 만들어낸 걸까? 내장과 리본 끈…안 어울려.

꿈에 일어난 일이 현실에 영향을 준 걸까?

전호장은 무언가에 도망치듯 자신의 방에서 나온다.

뭘 뱉었다고?

병아리가 되기 전의 병아리 같은 거요. 잠이 덜 깨서 잘은 못 봤는데. 병아리는 아니지만… 도마뱀처럼 생긴 것 같기도 해요. 암튼 제 입에서 뭐가 태어난거같아요. 뭘까요?

역시 이런 걸 상담할 사람은 준섭이형 말곤 없지… 전호장은 여느 때보다 진지했다. 그 꿈의 출연자, 그러니까 영화의 배우가 준섭이 형이라는 끔찍한 사실은 이야기하지않았다. 급하게 만들어낸 인물은 준섭이 형을 대신해줬다. 사실은 제가 좋아하는 애가 있는데요, 전호장은 꿈을 간결하게 이야기했다. 하체가 염산을 부은 듯 녹아내린 살덩이가 자신의 배에 스며들었다고. 수치심도 살짝 느껴졌지만 괴상한 꿈에 대해 누군가에게 하소연이라도 하고싶었다. 신준섭은 그 이야기를 경청해주었고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빼 턱을 매만진 뒤 명쾌하게 말했다

몽정이네.

아 그러니까 그런 느낌이 아니라고요.

좋아하는 애가 올라탔다며. 그리고 혀까지 섞었다며. 깨고 난 다음에 팬티부터 빨았을 거 아니야?

윽. 저도 그럴 줄 알고 깨자마자 바지부터 벗었는데 안 서 있었어요… 묻어 있지도 않았고요.

음, 그렇구나.

신준섭은 표정 하나 안 바꾸고 남이 듣기에 부끄러운 말들을 쏘아붙였다. 아니 이 형은 가끔보면 진짜… 전호장은 얼굴에 열이올라 괜히 셔츠 단추를 열었다. 준섭은 말없이 걷는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자전거 안 탔네요.

아 응. 자전거 타는 거 그만두려고.

왜요?

그냥. 걸어 다니는 것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아서.

신준섭의 멀끔한 옆태를 바라본다. 전호장은 어쨌건 아침에 같이 나선다면 좋았다. 아침에 신준섭을 보는 건 전호장의 작은 기쁨 중 하나였다.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처음 마주친 사람이 준섭이 형이면 마음이 차분해졌다.호장은 그와 등교하며 나누는 대화가 즐거웠다. 일어나기 싫어도 일어가서 학교로 도착하게 만드는 힘이 되어줬다. 본인은 잘 모르겠지만. 어느새 학교에 도착했고, 중앙현관에 들어섰다.

그럼 가볼게.

좀 이따가 봬요!

준섭은 대답 없이 2학년 층으로 올라갔고 호장은 1학년층에 남았다. 못 들었나? 호장은 교실로 들어갔다.

꿈과 생명체에 대한 생각이 전호장의 수업 시간에 영향은 줬지만 아침에 준섭을 만나 그런건지 모르겠다만 이래도 되나 싶을정도로 마음이 가벼웠다. 남에게 털어놓기만 해도 가벼워 질 수가 있구나. 오늘은 따로 농구부 활동이 없는 날이어서 전호장은 집에 얼른 가서 그것이 있는지 확인해야했다. 마음같아서는 꾀병을 부려서라도 그걸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환각이었을지도? 아침에 비몽사몽해서 헛 것을 본 거면 어떡하지. 

기왕 말해버린 거, 그거 준섭이 형한테 보여줘도 되지 않을까? 예전에 준섭이형이 도마뱀을 키웠다고 했었다. 꽤 오래 키워서 아직도 도마뱀의 먹이가 집에 남아있다고 들었는데. 좀 이따가 집 올때 그거 가져다 달라고 해야겠다. 

전호장은 점심시간에 조용히 반에서 자습하고있는 신준섭을 찾아가 오늘 자기 집에 놀러오라고 했고, 신준섭은 알겠다고 했다. 도마뱀 이야기도 꺼냈는데, 전호장은 혹여나 먹이가 아직 남아있으면 그것을 줄 수 있겠느냐 물었고 준섭은 흔쾌히 부탁을 들어 주었다. 말린 밀웜 가져갈게 라고 하며. 

호장은 집으로 향하는 길에 구멍가게에 들러 사슴벌레가 먹는 젤리를 샀고, 집에 도착했다. 부모님은 아직 집에 안 오셨구나. 호장은 서둘러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그것은 책상 위에 올려져 있었다. 호장이 내려 놓았던 장소 그대로다. 

그러니까 이게 너가 뱉은거라고?

그것은 꼬물거리는채로 전호장 책상에 올려져 있던 먹다남은 비스켓을 먹고 있었다. 전호장도 침대 위에 올라가 비스켓을 먹고 있었다. 준섭은 잠시 둘이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신준섭은 유심히 그 핏덩이를 바라본다. 호장아, 이거 정말 네가 뱉은 거 맞아? 그렇다니깐요… 전호장은 벌써 적응한 건지 체념한 건지 담담한 반응이었다. 신준섭은 그 엄지손가락만 한 새끼핏덩이를 허연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천천히 훑는다.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러 잠시 준섭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것은 심장이 뛰고 있었고 숨을 쉬고 있었다 코도 입도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어째선지 온 몸으로 체감이 되었다. 그리고 그건 신준섭을 혼란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너 이거 키울 거야?

신준섭은 묘하게 차가운 시선으로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전호장은 잠시 망설이다가 금방 죽겠죠, 이게 뭐든요. 라 대충 대답하고 조용히 창문을 열었다. 벌써 노을이 지고 있구나. 

아 맞다, 밀웜 가져 왔다면서요. 그거 줘 볼까요? 그래 한번 줘봐. 신준섭은 봉투에 담아온 건조밀웜을 호장에게 내밀었다.

오, 잘 먹는다.

준섭과 호장은 자기네 엄지손가락만한 생명을 지켜보았다. 그것은 밀웜을 녹여 먹는 것 같았다.

이름 지어줄까요?

이게 뭔 줄 알고?

그래도 계속 이거저거 하기엔 불편하잖아요.

이게 죽고 나면 이름 붙인 거에 후회할걸?

준섭은 평소보다 훨씬 싸늘하게 말했다. 기분이 안 좋나? 호장은 괜히 머쓱함을 느꼈다. 그리고 잠시 자신의 기가 막힌 작명 센스를 발휘하려 책이 엉망진창으로 나열되어 있는 책장을 슥 훑었다.

그때 호장의 눈에 들어온 책 이름은 사고의 파편을 반추하라 였다.

사고의 파편을 반추? 어려운 단어가 3개나 붙어있으니 이해될만한 것도 이해되지 않았다. 저런 책을 내가 언제 샀었지? 

전호장은 그냥 자기 마음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를 쓰기로 했다. 그냥, 자기, 마음 셋 중에 제일 나은 것. 그래! 이거다!

마음이 어때요? 뭐 얘한테는 특징도 없고. 믿음소망사랑... 이런 건 너무 진부하잖아요. 

그거 진짜 태명 같다.

...좋은 의미죠?

응.

준섭은 풉 하고 잠시 미소를 지었다. 아까 봤던 그 싸늘한 표정은 전부 거짓으로 느껴졌다. 하하하…

이거 무럭무럭 자라날까요? 사실 뭔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동물이 맞는 거 같긴한데, 이렇게 생긴건 저도 처음 봐요. 기생충 같은 건가? 나 회충약 먹었는데?

전호장은 멈출 수 없는 사고를 말로 와다닥 밀어붙였고 준섭은 익숙하게 끊을 타이밍에 목소리를 내었다.

이제 ’이거‘ 가 아니잖아.

맞다 맞다. 미안하다 마음아.

형.

응, 호장아.

같이 키우면 안 돼요?

호장은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자신이 마음을 키우면 금방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선인장도 말라 죽였던 사람이 바로 전호장이었다. 반면에 신준섭은 식물을 기가 막히게 잘 키워냈다. 준섭의 방에선 허브 향기가 났다. 호장이 좋아하는 향을 호장은 만들어낼 수 없었지만, 준섭은 의도치 않아도 만들 수 있었다.

나는 안 돼. 다른 사람한테 부탁해봐. 민구 형이나, 익현이 형한테 말야. 아니면 너 같이 다니는 친구 중에 축구부인 걔 있잖아.

그래도 형이 잘 키울 거 같은데…

나는 안 돼.

형이 적임자인데.

전호장.

네...

호장은 준섭이 이렇게 간단히 거절할 줄 몰랐다. 바로 그래 알겠어, 라는 대답이 나올 줄 알았는데.

준섭이 형. 

응.

그래도 가끔 봐주면 안 될까요? 저 진짜 자신이 없어요.

형 뭐 키우는 거 잘하잖아요.

······가끔 도와줄게. 

준섭은 집으로 돌아갔고 호장은 어렸을 때 썼던 작고 투명한 곤충 수집 통에 마음을 넣었다. 물이랑 비스킷과 밀웜을 조금 넣어줬고, 마음은 준섭이 놓고 간 손수건에 둘러싸여 잠을 잤다. 전호장은 자신의 몸에서 나온 게 아닐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입에서 나온 게 아니고 창문으로 참새의 알이 떨어졌는데, 그게 내 입에 실수로 들어가서 난 껍질만 먹고 참새가 입에서 태어난 게 아닐까? 조금 황당하고 웃긴 생각에 호장은 수집통을 씨익 바라보았다. 어쨌든 무언가가 자기의 방에 들어서니 호장은 괜히 이 방이 달라 보였다. 부모님의 반대로 햄스터를 키운 적은 없지만 키운다면 이런 기분일 것 같았다. 손에 잡히는 작은 생명. 기분 나빴던 것도 잊은 채로, 정말 이름을 붙이니까 체감이 나네. 

준섭이 형이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했던 말이 떠오른다.  ‘잘 키워봐’ 라고 했다. 나는 거기에 ‘하핫, 슈퍼 루키한테 길러지는 건 영광일 거예요.’라고 받아쳤다.

준섭의 거절이 자꾸 생각났고 예전에 준섭이 형 집에서 같이 봤던 영화에 나왔던 모범생 커플이 떠올랐다. 같이 강아지를 주워서 키우다가 결국 이어지는… 중간의 트러블은 기억이 잘 안나지만 마지막의 키스 장면은 아직 까먹지 않았다. 문득 다시 아까의 꿈이 떠올라서 기분이 묘해졌다.

나는 준섭이 형과 쉬는 날에 같이 영화를 보는 날이 잦았다. 영화를 보는 건 내 취향이 아니었고 영화를 하나하나 볼 때마다 영화에 대한 편견이 늘어만 갔다.

그래도 영화를 하나 보고 나면 괜히 뭐라도 하나 한 것 같은 뿌듯한 기분이 들어 좋았는데, 준섭이 형도 그랬을까? 사실 준섭이 형은 영화를 보는 내내 눈을 한 번도 화면에서 떼지 않았다. 그 모습에 괜히 나도 집중해서 화면을 뚫어져라 봤었지. 준섭 형의 옆 모습도 열심히 봤지만. 

준섭이 형의 영화 스펙트럼은 정말 넓었다. 이상한 괴물이 나타나 이유없이 사람들을 학살하는 영화에서부터 1시간 동안 대사 없이 눈빛과 몸의 움직임으로만 스토리를 진행하는 영화까지. 난 사실 굳이 형이 그런 걸 골라서 틀 때마다 지루해 미칠 뻔 했지만 준섭이 형은 뭐든지 재미있게 봤던 것 같다. 감상을 딱히 물어보지는 않았다. 

내가 아까 이야기했던, 의미 없는 영상에 의미 부여하는 사람. 신준섭 형은 솔직히 말하자면 그 사람들에 가까웠다. 준섭이 형에게 수치스러움을 무릅쓰고 제일 먼저 꿈에 대한 이야기를 물은 것도 그렇다. 꿈에 의미 부여를 해줄만한 사람이니까. 문학소년? 그런 사람이 신준섭 형일지도 모른다.

솔직하게 말해보자면 ’몽정이네.'말고 다른 대답을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엄지만 한 크기로 난 살아있어요 를 전신으로 말하고 있는 어떤 마음을 보며 전호장은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준섭이 형이 좋아. 준섭이 형은 행동이 정말 다 예상이 가면서도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비틀려진 곳이 있었다. 그런 부분을 찾아낼 때 마다 보물찾기하는 초등학생 마냥 재미를 느꼈다.

 형은 나에게 특별한 사람이 되어줄 사람이고 나는 언제나 형의 특별한 사람이 되어 줄 자신이 있었다.

준섭이 형이랑 얼굴을 보고 제대로 이야기한 건 그날이 마지막이었던 거 같다. 

준섭이 형은 더 이상 아침에 나를 데리러 나오지 않았고, 2학년 층에 가도 볼 수 없었다. 형의 공 연습을 도와주려 남으면 정환이 형이 나를 일부러 데리고 나섰다. 방해라고. 분명 준섭이 형이 부탁했겠지. 준섭이 형은 달라졌다. 더 이상 내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다.

처음엔 너무 당황스러워서 몇 번 붙잡았던 것 같다. 음, 내가 뭐라고 그랬었더라… 

호장은 기억을 천천히 되살린다. 낡은 시디를 시디롬에 넣고 모니터를 쳐다 보듯이 호장은 자신의 머리를 최대한 역재생해본다. 그 시디에는 기스가 많다. 보관을 엉망진창으로 해놓으니 어쩔 수 없나? 이러면 읽어낼 수가 없잖아···.

 호장은 잠시 시디를 넣는 공간을 살펴본다. 시디롬엔 먼지가 끼여있다. 별다른 방법이 없으니 일단 쓰기야 하겠다만. 기계가 시디를 집어삼키기 전, 잠시 호장은 그 시디를 내리쳐 부수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시디의 기스가 신경이 쓰여서가 아니다.

호장은 시디의 기스를 하나씩 닦고 다시 모니터를 본다.

비디오가 재생된다. 

준섭이 형! 제가 뭐 잘못했어요?

신준섭은 전호장의 물음을 회피하고 저벅저벅 복도를 걸었다. 수업 시간이라 복도에 있는 건 호장과 준섭 뿐이었다. 텅 비어있는 복도와 두 명.

준섭은 잠시 운동장에서 체육수업을 하다가 물을 가지러 나왔는데 그때 하필 수업 중 화장실에 다녀온 호장이와 마주쳐버린 거다.

제가 잘못했으면요, 차라리 저한테 뭐라고 해주세요. 계속 이렇게 저 피할 거예요? 형 원래 저한테 안 그랬잖아요. 이게 뭐예요? 저 진짜 상처받았다고요. 

전호장은 신준섭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손목을 확 낚아챘다. 제발 좀…

호장의 눈엔 간절함이 눈물이라는 형태로 고여있었다.

형은 예전과 같이 상냥하게 길고 하얀 손가락으로 내 눈물을 닦아줬고,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네가 잘못해서 내가 피하는 게 아니야.

그,그럼 뭔데요?!

네가 싫어졌어. 그게 다야.

네?…

전호장은 역재생을 시작한 걸 후회했다. 아 그렇군요 제가 싫어졌군요. 호장은 준섭이 형이 설마 그럴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했기에 그 기억이 꿈같이 느껴졌다. 준섭이 형이 그러고 무슨 말을 했더라. 비디오가 꺼졌다. 그리고 텅 빈 검은 화면만이 날 보고 있다. 준섭 형은 날 돌아서고 떠났다. 

정말 당연한 이야기지만 전호장과 신준섭의 관계가 뒤틀려도 시간은 흐르고 마음은 자라고 있었다. 평범한 동물처럼 털이 나지는 않았지만, 엄지만 했던 몸이 이제는 중지만큼 컸다. 전호장은 곤충채집통을 책상만 한 오렌지 색 박스로 바꾼지 오래다. 얼마정도 지났을까? 준섭이 형이 자신을 싫어하기 시작한 날. 그날 이후로 세 달이 지났다.

전호장은 슬슬 관계가 나선모양으로 꼬였다는 걸 인정하기로 했다. 아니 원래 꼬여 있었는데 내가 몰랐던거겠지. 준섭이 형은 내가 싫었던 거야. 날 참았던 거야. 전호장은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가 신준섭에게 어떻게 느껴졌을지 생각하다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날 꿈 이야기가 너무 역겨웠나? 상대가 준섭이 형이라는 걸 형이 알아 차렸던 걸까. 그게 정을 떨어트린걸까.

애초에 형은 날 좋아한 적이 없던 것 아닐까.

난 무엇 때문에 준섭이 형을 좋아했지?

농구부 활동은 계속했다. 신준섭은 3학년이 되어서도 농구부를 할 것이었고, 농구부의 차기 주장 후보였다.

농구부 활동을 할 때는 준섭이 형이 잠시나마 예전처럼 자신을 대해주는 느낌에 오히려 짜증이 치밀어올랐지만, 사실 더욱 짜증 나는 것은 그 상냥한 얼굴을 보는 것이 행복한 자신이었다. 

전호장은 신준섭을 좋아하는 마음을 버리자는 마음을 먹었다.

정말 간단하지 않은 작업이었다. 이렇게 소화를 오랫동안 한 게 처음이다. 내 마음아. 마음은 말랑말랑하면서도 벽돌같이 단단한 구석이 있었기에 고작 인간의 몸이 만들어 낸 위액 따위로 소화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 기다리기만 할 수는 없었다. 

전호장은 그런 사람이니까. 무언가 더 필요해. 전호장은 열정적인 덩크로 그걸 녹였고, 자신의 또 다른 친구들과의 추억으로 마음을 녹였고,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때로는 타학교 친구의 오토바이뒤에 타는 등 소소한 일탈을 즐기며 마음을 열심히 녹여댔다.

이 모든 게 내 착각이었던걸지도 몰라.

관계가 수평적이지 않았던걸지도 몰라.

계속, 쭉 참아줬는데 그걸 나만 몰랐던 걸지도 몰라.

전호장은 천천히 일어서서 신준섭이 준 건조 밀웜을 쓰레기 봉투에 넣었다. 그리고 이제는 쭈글쭈글해진 마음을 조용히 준섭의 손수건으로 덮어서 땅에 묻어주었다. 손바닥만한 마음. 몇 개월 동안 살아있었더라. 마음은 죽었다. 죽었을 땐 그렇게 슬퍼했는데 요즘은 정말 그게 존재했었는지도 가물가물하다. 이제 호장은 2학년이 된다. 

그리고 아침은 밝아온다.

아침이었다. 괴상한 생명체가 자신의 입에서 나온 것은. 음식에 비유해야 할까, 당장 떠오르는 것이 없다. 이걸 음식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저녁에 뭐 안 먹고 잤는데. 미끌미끌하고 검붉은 게 마치 선지 같구나. 신준섭은 한 손으론 눈을 비비적거리고 한 손엔 그것을 올려놓는다. 아, 짜증 난다. 자신이 자면서 뭘 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잠옷이 축축하다는 감각이 신준섭을 불편하게 했다. 내가 뱉은 무언가를 토하며 같이 더러워 졌을 거다. 신준섭은 이불을 들어 액체를 치우려 물티슈를 뽑았다.

아.

그 붉은 덩어리랑 같이 뱉어낸 것이 아니다. 신준섭은 급하게 화장실로 가서 자신의 바지를 벗었다. 준섭의 큰 눈이 더 크게 변했다. 아, 이건…

준섭이 형, 잠깐만요…

짝사랑하는 후배랑 어떤 하얀 공간에 있었다. 질척이는 소리를 내면서.

그리고, 그래, 혀를 섞었다.

자신의 꿈 안에서 신준섭은 전호장과 한 몸이 되었다. 신준섭의 하체는 기분 나쁜 점액이 되어 전호장의 배에 스며들었다.

한 번쯤은 물이 되어보고 싶다고 생각한 준섭이었다. 어떠한 유리병에도 들어갈 수 있고, 어떤 모양이든 변하는 물의 속성이 가끔은 부러웠다. 나도 저렇게 흐르는 사람이 된다면. 투명 인간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듯이 물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는 거다. 준섭은 그것을 부끄러워하지도 않았고 딱히 표출하지도 않았다. 마음속 깊은 곳에 가라앉아 조용히 준섭을 이루었을 뿐이다. 다리가 없어, 아니 다리가 없는 게 아니야 내 다리가 녹은거야 물처럼. 준섭은 호장의 위로 올라탔다. 아 정말…

준섭은 호장의 복부에 흡수되는 감각을 느낌을 즐기며 저도 모르게 혀로는 호장의 입술을 핥았다. 상체까지 물이 되면 좋을 텐데. 꿈이니까······. 가능하다면 재미 좀 보고싶은데. 신준섭은 아직 물이되지않은 자신의 상체를 전호장의 배에 대고는 쿡쿡 눌러댔다. 역시 몸이라는 벽은 싫어.

전호장의 열은 신준섭의 상체로 이어지고, 준섭은 그것에 행복함을 느꼈다. 호장아… 신준섭은 이제야 호장을 이해할것만 같았다.

아니다, 호장이를 이해한 게 아니란 걸 이제야 깨달았다. 나는 날 이해한거구나. 신준섭은 신준섭을 이해했다.

하나도 모르는 걸 수도 있지만 자신을 이해하는 것은 너무나 기분 좋은 일이었다.

하지마요 준섭이 형······.

꿈속의 호장이의 한마디에 신준섭은 굳었다. 벽에 박힌 사람같이 신준섭은 전호장의 복부에 꼼짝없이 삼켜졌다. 생각해보니 삼켜졌다는 표현보다 늪에 빠졌다는 표현이 맞는 것 같다. 그리고 호장의 당황스러움이 너무 잘 보여 방금 자신이 뭘 저지른건지 드디어 자각했다. 호장아 미안해 미안한데 아, 몸이 안 빠져… 미안해. 신준섭은 일어서려다 상체도 되려 녹아 호장의 몸에 들어가는 걸 느낀다. 장기가 보여. 보이는 걸 넘어 지금은 하나하나 만지는 것 같아. 말랑하지만은 않구나. 너의 혈관에 내가 타고 들어간 거 같아 호장아. 너의 적혈구가 보여...

나 네가 되어버렸나 봐.

신준섭은 자신의 체액으로 더러워진 속옷을 손세탁하며 꿈 생각을 했다. 어떻게 끝났는지는 생각이 안 난다.

처음이지만 능숙하게 신준섭은 뒤처리를 깔끔하게 했고, 

자기가 뱉어낸 핏덩어리는 손으로 주워 휴지로 덮어 변기에 내려 버렸다. 콩닥콩닥 하는 소리가 느껴졌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변기 물이 내려가는 소리를 들으면서- 집다가 터졌는지 어느새 붉은빛이 묻은 휴지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걸 보면서-

준섭은 자신의 마음을 깨달았다. 나는 호장이를 좋아했구나. 자각을 못 하고있었구나.

이제 자전거는 타지 않을 거야.

신준섭은 자기가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미 사라진 존재에 두려움을 느꼈다. 엄지만한 핏덩이가 준섭의 심장을 쿵쿵하고 마구 잡아 패는 것 같았다. 신준섭은 도망치듯 자신의 방에서 나온다. 달리고 달려서 호장의 집으로 향한다. 

뭘 뱉었다고?


준섭이 형! 패스해줘요!

전호장!

"오늘 경기 좋았어요! 역시 현수 형이야. 진철이 형도 진짜 공 잘넣고. 오늘 다들 손에 풀 바르고 뛰었나 봐요!"

"또 까분다 전호장."

2학년이 된 전호장. 어느새 학기는 좀 흘렀고 고대하던 능남과의 연습경기가 끝났다. 주장 윤대협과 주장 신준섭. 둘은 가볍게 경기 후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

사이가 좋구나. 준섭이 형은 두루두루 다 잘 지내는구나 아직도.

예전 같으면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3점 슛의 천재! 라고 외치며 형의 등을 마구마구 두드렸을 전호장은 이제 멀리서 그를 지켜보는 사람이 되었다.

"준섭이가 이거 전해달라고 했어."

전호장은 이슬이 서려 있는 작은 이온 음료 캔을 받는다. 신준섭이 아이스 박스에 담아 놓았던 거다. 경기 끝나고 농구부원과 다같이 마시려고. 

마음을 접은 지 오래지만 가끔 울컥함이 올라올 때는 어쩔 수 없었다.

이제 이거밖에 안 되는 건가?

준섭이 형이 자신과 영화를 보았던 시절이 이젠 몽롱하게만 떠올랐다. 형은 왜 나랑 같이 영화를 봤었지. 내가 그런 거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도, 그게 형의 스트레스 해소법이었나.

준섭이 형.

응, 호장아.

저 사실 영화 안 좋아해요.

알고 있어.

그런데 왜 같이 봐요?

너랑 같이 영화를 보면 말이야… 이상하게 여러 번 본 영화에서도 다른 게 보이거든.

저랑 있는 게 어지간히 좋으신가 봐요.

응, 너랑 있는 거 좋아. 새롭고.

호장은 죽은 마음을 떠올린다. 밀웜과 물을 아무리 곁에 놔두어도, 핫팩을 가져다 대 보아도 이미 그건 일반쓰레기 봉투에 넣어 처리할 사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죽어가는 걸 보며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을 떠올린다. 이름 붙이지 말걸, 진짜 정들었단 말이야.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고 다음 날 호장은 박스와 밀웜과 손수건을 일반쓰레기 봉투에 모조리 넣어서 버렸다.

호장은 차가운 캔 얼굴에 대고 괜히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정말로,

그 마음이 진짜 내 마음이었구나… 정말 내 마음 이었던 거야, 준섭이 형에 대한 마음.

내가 좋아했던 마음말이야… 그게 모습으로 나타났던 거구나. 그게 눈에 보였던 거야.

저도 형이랑 있는 거 좋아요.

신준섭은 농구부 선배들 사이의 전호장을 본다.

내가 멋대로 관계를 끊었을 때. 호장이는 처음엔 화를 내기도 했고 눈물을 흘려대기도 했다. 지금은 친해지기 전의 전호장, 그러니까 내가 전호장을 좋아하기 전의 전호장으로 돌아왔다. 1학년 초반 농구부에서 제일 튀었던 그 아이로.

준섭은 호장의 볼에 맺힌 땀을 보면서 잠깐 자신이 변기에 내렸던 그 괴생명체를 떠올린다.

호장이에 대한 내 마음이 눈에 보였던 날을 기억한다. 그 마음이 빙글빙글 빙글빙글하고 붉게 터져 물에 붉은 물감을 떨어트린 것 마냥 물이 붉게 번졌던 장면을 기억한다. 좋아하는 마음을 접었던 그날을 기억한다.

아침에 나누었던 대화를 기억한다.

몽정이네.

돌이켜보면 자신에게 던진 말이었다.

준섭은, 호장의 집에 들러 자신이 아침에 뱉었던 것과 똑같이 생긴 것을 보고 구역감을 느꼈다. 준섭이 쥐어 터트렸던 것. 호장이가 지금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바라보고 있는 저것. 밀웜을 먹는 저것.

그리고, 호장이가 마음이라고 이름을 붙인 마음. 

같을 수 없는 마음.

호장아······. 

네가 마음을 안 날에 난 마음을 죽였구나. 

후일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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