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료

[준섭호장] 방

공간 by 뇌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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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장아, 씻고 누우라니까?”

“…”

“천국 같다…”

그 말에 준섭은 전호장을 빤히 바라보았다. 호장이는 최근에 살이 더 탔다. 호장이가 침대 위에 올라가 뒤척일 때마다 그의 움직임에 맞춰 반바지의 경계선이 확실하게 나타났다. 반바지는 헐렁했고 그 헐렁한 느낌은 호장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준섭은 그 경계선을 보고 잠시 목마름을 느꼈고, 가방을 내려놓고 1층에 내려가 얼음물 두 잔을 따라온다. 정수기에서 나오는 물줄기를 바라보면서 신준섭은 잠시 생각한다.

이렇게 지낸 지 얼마나 되었더라.

2주는 이렇게 지냈던 것 같은데··· 호장은 최근 여름방학 훈련이 끝나면 준섭의 집에서 될 때까지 머물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 많았다.

자기 집의 에어컨이 고장 났다는 이유였다.

아, 진짜 말이 돼요? 지금까지 잘 써왔는데! 수리가 글쎄 한 달이나 걸린대요! 사실 엄마는 선풍기 쓰라고 하는데… 그걸로 어떻게 이런 폭염을 버티느냐고요!

호장은 그런 말을 나불거리면서 준섭의 눈을 쳐다보았다. 준섭이 형, 부탁해요… 준섭은 거절할 이유도 없고, 딱히 상관없었기에 집에 오는 걸 허락했다.

컵에 물이 넘치려고 하는 걸 바라보면서 신준섭은 그때 거절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침에 전호장을 태우고 학교에 간다. 점심에는 당연히 전호장을 본다. 저녁 훈련에도 전호장을 본다. 저녁 훈련이 끝나고 나면 땀범벅이 된 채로 들러붙어 내 자전거를 타고 우리 집에 놀러 온다. 이게 2주는 넘었다. 내 방엔 이제 전호장의 색깔별로 맞춰진 헤어밴드가 돌아다닌다.

한 번씩은,

씻지도 않고 자신의 침대에 올라가서 누워있는 호장을 보면 준섭은 화보다는 냉정함이 치밀어올랐다. 그리고 지금이 그 순간이었다. 

“호장아, 씻으라니까?”

전호장은 신준섭의 말투가 날카로워진 걸 느끼고 순간적으로 뒤로 돌아 신준섭을 바라보았다. 준섭의 얼굴은 무표정이다. 그는 냉정히 호장을 바라보고 있다.

“아, 알겠어요. 미안해요 준섭이 형.“

“그래.”

호장은 서둘러 침대에서 일어나 샤워실로 향했다. 아, 망했다. 너무 피곤해서 그냥 누웠는데.. 준섭이 형 분명 많이 화났겠지? 내가 예의 없었어. 사과해야겠다…

호장은 차가운 물로 머리와 몸을 식히고, 하루 동안 열심히 흘린 땀을 씻어내린다. 샤워를 하고있으면 순간적으로 자기가 해왔던 모든일에 면죄부를 부여받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준섭이 형한테 사과해야겠지… 호장은 샤워를 마치고 타올로 몸을 닦았다. 준섭이 형 집에는 하얀 타올밖에 없었는데, 타올은 항상 가지런히 정리되어서 꽂혀있었다. 우리 집이랑은 다르구나. 준섭이 형 집이구나. 갑자기 호장은 여기가 자신의 집이 아니라는 사실이 난감하게 느껴졌다. 아! 너무 편안해서 까먹었어. 준섭이 형 집이 내 집같고 우리집이 잠만 자는 숙소로 느껴진 지 얼마나 되었더라? 호장은 자연스럽게 드라이기를 꺼내 머리를 말린다. 바람이 뜨거워.

전호장이 샤워하러 샤워실로 들어간 그때, 신준섭은 전호장이 누웠던 침대를 바라보았다. 이 방은 신준섭의 방. 신준섭이 생활하는 곳, 신준섭을 이루는 일부. 누군가와 잠시 이 방에 같이 있어도 신준섭은 그 흔적을 금방 지우고 다시 자신의 방으로 만들었다. 필요한 것만 있는 방. 푸른 벽지와 흰 침대.

신준섭은 자신의 침대에 앉았다. 포근하진 않다. 나는 포근한 느낌을 싫어하니까. 일부러 단단한 매트리스를 골랐었지. 무언가에 집어삼켜지는 기분은 싫다. 평평한 바닥이 좋아. 준섭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흐트러진 이불을 정리하고 있는데, 이불에 전호장의 땀 냄새가 났다. 자신의 땀 냄새가 아닌 건 바로 알아챌 수 있다. 전호장의 땀? 

신준섭은 그 순간 불쾌함을 느꼈다. 어떠한 무늬도 없는 흰 이불에 전호장의 흔적이 명확하게 남아있다. 아, 진짜…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아도 전호장이 여기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잠시만, 정보값이 너무 많지않나? 

전호장은 머리를 다 말리지도 않고 신준섭의 방에 들어왔다. 

신준섭은 침대에 누워 바닥에 떨어지는 물을 바라본다. 방금까지 전호장의 머리를 식혔을 물… 신준섭은 자신의 방을 어느새 전호장과 공유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하루 종일 같이 있다. 같이 자지만 않을 뿐이지. 곁에 하루 종일 붙어 다니는 것과 같이 사는 것은 뭐가 다르지? 집은 뭐지. 공간이란 뭘까. 함께 있는것이 공간이지. 함께 있는 것. 어떨 때는 특별하지 않은 장소도 사람으로 인해 특별하게 변하기도 한다. 내 방이 그렇게 변한 건가? 특별한 전호장의, 전호장? 내 공간, 내 침대, 내 일부에…

전호장이 존재한다.

지금 내 앞에도 전호장이 있다.

“준섭이 형?”

신준섭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미안. 잠시 생각할 게 생겨서.”

“아까.. 멋대로 침대 쓴 거 용서해 주는 거예요?”

“괜찮아." 

호장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형 이제 꼭꼭 씻고 올라갈게요. 제가 진짜 원래 그렇게 딱 바로잡힌 사람이 아니어서, 우리 집에서 했던 것 처럼 해서 그랬어요. 하하. 여기는 준섭이 형 집이니까 준섭이 형의 말을 따라야하는데. 전호장은 생각을 거치지 않고 숨도 쉬지 않고 말을 계속한다. 준섭은 하나도 흘려보내지 않고 말을 머리에 넣어놓았다. 응, 그렇구나. 

나를 이루는 것에 타인이 존재한다는 것을 자각하는 건 썩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전호장이 집에 돌아가고, 시간은 오전이 되었다. 새벽에 늦게 깨어 있는 건 오랜만인데.

신준섭은 전호장의 체취가 남아있는 이불을 덮었을 때, 잠시 그 생각이 들었다. 나는 호장이랑 뭐가 되고 싶은 거지? 호장이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사실 평범한 학생이라면 해볼 법한 생각이다. 호감이 있는 사람과 함께하는 게 즐겁고, 상대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하는 건 당연한 행동이지. 하지만 준섭은 평범이랑은 거리가 먼 길을 걸어왔기 때문에 그 감정이 익숙치않았다. 처음 겪는 혼란이다. 속이 메스꺼워서 준섭은 그날 하루 종일 잠을 설쳤다.

다음 날, 신준섭은 하루 종일 지친 상태로 연습을 했고 수업을 들었고 전호장의 말을 들었다. 

“준섭이 형! 같이 가요!“

“싫어.”

“예?”

신준섭은 자연스럽게 자전거 뒷자리에 올라타려는 호장을 막고 차가운 시선으로 호장이를 내려봤다.

호장아. 더워?

아, 네…

얼마나 더운데?

많이 덥죠.

너네 집 에어컨 수리는 언제 끝나는데?

네?

에어컨에 대한 질문을 듣자 호장은 고장나버렸다.

-모든 게 거짓말이었다. 준섭의 방이 궁금했던 호장은 말이 되는 이유를 만들었다. 에어컨이 고장 나버렸다고, 그래서 덥다고. 그러니까 형의 방에서 쉬고 싶다고. 완벽한 이유잖아? 거짓말이라는 것만 빼면 정말 완벽했다. 호장은 신준섭의 방에 들어갔고 당연하듯이 샤워를 했고 몸을 닦고 침대에 누웠다.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냥, 점점 형이 궁금해졌고. 형이랑 함께하는 건 즐거웠으니까. 그래서 함께 더 있고 싶었으니까. 특별하다는 기분! -

신준섭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전호장을 쏘아보았다. 189cm의 위력이 깊은 곳에서 끌어져오르는 걸 느끼고, 호장은 식은땀이 났다.

그러니까, 어떤 말로 시작해야 할까? 사실은 거짓말이었다는 말부터? 아니면 멋대로 침대에 올라간거? 타올을 막 쓴거? 머리카락을 흘리고 다닌 것...? 너무 많은 걸 했기 때문에 호장은 잠시 사고회로가 멈추었다.

“수리 아직 덜 끝났구나.”

“…”

대답을 고르고 있는 호장을 뒤에 두고 준섭은 한숨을 쉬면서 자전거에 탔고 호장에게 뒤에 타라는 눈빛을 보냈다. 호장은 아무 말 없이 뒤에 올라탔고, 준섭은 페달에 힘을 준다. 풍경이 준섭과 호장을 지나쳐가고, 해가 지고있었다.

전호장은 땀을 많이 흘리는 편이었는데 얼마나 심했냐면 준섭이 호장의 여분수건을 가지고 다닐 정도였다. 준섭의 땀인지 호장이의 땀인지, 호장이가 붙잡고있는 준섭의 허리는 누군가 물을 부은 듯 따뜻함이 번졌다. 호장이는 허리를 꼭 잡고 있지만 아무 말이 없다. 내가 너무 쏘아 올렸나? 불편하게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샤워하러 갈게요…

전호장은 집에 오는 내내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다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말을 꺼냈다. 그래, 오늘은 네가 먼저 씻어. 호장이가 갈아입을 만한 옷이 더 남아 있던가? 옷장을 살핀다. 내가 1년 전에 입었던 잠옷… 호장이한테는 딱 맞겠지.

물소리가 멈추고 헤어 드라이기 소리가 들리자 준섭은 옷을 챙겨서 호장이에게 주고 몸을 씻기 시작했다. 

준섭이 샤워를 마치고 방에 들어왔을 때, 전호장은 신준섭의 침대에 대자로 누워있었다.

“…”

“…“

“준섭이 형.“

“응. 호장아.”

“곧 있으면 여름도 끝나고…”

“응.”

“이제 형 집에 놀러 오는 일이 없을 거 같아요.”

“응.”

“그동안 제가 많이 불편하게 했어요?”

준섭은 잠시 호흡을 멈추었다. 무언가 깊게생각할때, 마음속에 깊이 가라앉은 걸 떠올리려고 할 때의 습관이었다. 준섭은 잠시 숨을 멈췄고 다시 숨을 내쉰다.

“아니야.“

호장의 눈이 동그래졌다. 하지만, 그치만, 그럼 어제는, 아까는 왜…

신준섭은 책상에서 일어나 호장에게 천천히 다가간다.

호장아. 온도가 너무 낮은 거 같아.

…에어컨 잠시 끌까요?

아니,

준섭은 갑자기 호장의 다리에 올라탔다. 뭐지? 호장은 잠시 숨을 멈추었다. 이것은 견디지 못할만큼 당황스러운 일이 일어났을 때, 진정하기 위한 하나의 습관이었다. 

준섭은 호장의 다리에 올라가서 천천히 호장의 몸에 몸을 맞대었다. 호장의 허리와 준섭의 허리가 겹쳐진다. 호장의 귀에 준섭의 심장소리가 들린다. 두 개의 심장이 닿았다. 육신의 차원을 넘어서 닿고 있는 거 같아. 육신? 어? 호장은 문득 자신이 예전에 보았던 뱀 다큐멘터리가 떠올랐다. 뱀이 나왔는데. 무슨 내용이었더라. 꼬리부터 머리까지 등을 타고 아래턱을 비볐었던 장면. 그 장면이 지금 떠올랐다.

호장아. 너는 몸이 따뜻하고 나는 몸이 차가우니까 이러고 있으면······ 점점 정신이 아득해진다. 뭐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누군가 내 머리에 끓는 기름을 부은 것 같아… 머리가 터질 거 같아.

준섭은 호장의 가슴팍에 자신의 얼굴을 묻었다. 그리 단단하지도 않고 푹신하지도 않은 평범한 몸. 준섭은 호장의 얼굴을 바라본다.

 이러고 있으면 따뜻해. 너의 몸에는 열이 많고 나는 열이 적으니까. 준섭은 계속 무언가를 중얼거렸는데, 발음은 호장의 몸에 닿아 뭉개졌고 호장은 이미 아무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었기에, 의미 없는 말이 허공을 떠돌았다. 

준섭이 형, 잠시만요. 잠, 잠시만. 무거워? 아뇨. 그런문제가 아니에요. 전호장은 한쪽 손으론 얼굴을 가리고 다른 손으로는 약하게 준섭을 밀어냈다. 준섭은 허리를 다시 세우고 호장을 쳐다본다. 많이 무거웠나?

준섭은 그때- 자기의 허벅지에. 정확히는 호장이와 피부가 맞닿은 곳에 무언가 닿는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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