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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멸렬한 계절,

(* 추모 로그를 겸한 글입니다. 편히 받아주세요. uu)

https://youtu.be/xwnkddO5WgM?si=Ei1jVGPimotmIrSU

지켜지지 않은 약속들이 있었다. 7년을 넘어 다시 2년을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더는 같은 무게를 지닐 수 없게 되는 순간이 온다. 찾아올 것을 모르지 않았으나 예상과 인지는 닥쳐온 현실의 상쇄할 뿐 틀어막지 못할 따름으로 이후의 풍랑은 온전히 스스로의 몫이었다. ‘한동안 연락이 어려울 겁니다.’ 담담히 이별을 고하는 너는 경험과 학습으로 빚어진 옅은 미소를 하고 있었던가. 눈은 어떤 색을 띠었을지 모르겠다. 어느 온도로 메일런 힐을 보았는지 알 수 없었다. 알았어도 잊어버렸다. 흔들리는 차체와 쉼 없이 움직이는 창밖의 풍경을 대신하여서 너를 지워낸 탓에. ‘여유로워지면 다시 찾아와 주어.’ 흔히 할 법한 문장을 읊조리고 너와 꼭 닮은 모습으로 웃었다. 가장 거대한 대륙을 횡단하는 열차 안, 마주 보고 앉은 사람이 둘. 진실로 웃고 있는 이는 하나 없다.

기실 날 적부터 유달리 낮았던 체온을 보호할 명목의 장갑이 도움이 되었던 횟수는 손에 꼽는다. 그것은 여름의 무더위를 이겨내기에는 거추장스러웠고 여름의 한기를 버텨내기에는 연약했다. 따라서 그 얇은 천에 부여된 건 상징이다. 너와 내가 친우라는 이름 아래 있을 수 있으며 또 여전할 것이라는 어린 날의 약조였다.

허면 약조가 끊어진 우리들에게 무엇이 남지. 함께한 열흘의 설원 속에서 하나 둘 헤아렸다. 얼마 안 있어 셈할 수 있는 것들이 표상하여 망막에 맺힌다. 고요한 마을을 누비는 걸음과 어른들 몰래 찾은 달밤의 바닷가, 노트 구석에 자리한 형편없는 낙서, 함께 몸 뉘던 잔디밭, 그 사이로 비집어 들어온 미려한 울림의 자장가 따위의… 조각난 추억들. 모두 과거에 묶여있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상자에 안치하여 곱게 치장한들 그것들의 바램을 막을 수는 없다. 언젠가의 재회는 괴리를 동반한 채 이루어질 터였다.

‘저를 잊지 말아주시겠습니까.’

너의 부탁을 시작으로 우리는 기대와 실망의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됐다. 쉬이 내다볼 수 있는 미래를 등진 채 메일런 힐은 상자의 뚜껑을 닫았다.

‘쉽게 잊지는 않을 거야. 너의 일이잖니.‘

그 손엔 여전히 장갑이 자리한다.


알고 있어? 푸른 눈을 하고 있는 자들은 때때로 보랏빛을 띠곤 한다고 하더라. 감정이 요동칠 적이면 그리된대. 인간의 이성으로 제어할 수 없는 신체의 생리 반응이지. 책으로 접하고 입으로 전해 들으며 알음알음 축적한 지식의 끄트머리, 아주 오래 묻어두어 존재조차 잊은 것이 너로 인해 부상한다. 그날, 그 말을 하던 날들에 너는 무슨 색을 하고 있었나. 알 수 있었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의미 없는 생각의 내열들.


닿아온 손에 온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차갑다 못해 시리기까지 한 기묘한 감각에 낯을 굳혔다. 그제야 우리가 체온 나눌 수 있던 까닭은 네가 사람이기 때문이었음을 깨닫는다. 시야 아래로 비치는 투명감이 지독하리만치 낯설다. 떼어내기 위해 몸짓해도 허공을 휘저을 것이 분명하여 그저 네게서 멀어진다. 고작 두 뼘 겨우 들어갈 수준의 틈이었으나 그 정도면 족했다.

“기다림은 익숙하단다. 견디는 것 정도야 어렵지 않았지. 그러니 포기하는 사람은 나여야만 했어.”

애당초 관계라는 게 본래 그렇다. 서로의 여건에 따라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고 후일을 기약하나 종래에는 그 사실마저 잊어버린다. 어쩌면 십수 년을 넘어 수십 년을 동일한 무게로 함께하는 이들이 존재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우리들은 그들처럼 될 수 없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이루고 싶은 것이 있었다. 만들고 싶은 세상이 있었다. 무언가를 열망하는 와중 그보다 가벼운 애정을 붙들고 가지 말라 울음 짓는 건 기만도 못 된다. 집착은 더더욱 아니다. 그래서 놓아주었다. 사라진 온기를 그리워할지언정 결코 닿을 수 없다 해도. 너도 잘 알고 있듯이, 세상에는 그런 인간 또한 존재하기 마련이다.

길지 않은 시간 공상을 눈에 담았다. 희게 바랜 색들 속 어릴 적 넘겨주었던 귀걸이 하나. 메일런 힐에게 주고 남은 귀걸이 하나. 5년의 세월 동안 끝내 버리지 못한 미련의 증거. 이제는 더듬어 봤자 부질없을 흔적들이다. 탁한 빛의 눈동자가 눈꺼풀 너머로 모습을 숨긴다.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고 안에 든 것을 꺼내든다. 절그럭, 손안으로 억눌린 쇳소리가 들렸다.

“내게 선택지는 없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윽고 메일런 힐이 뒤로 돌아선다.

호그스미드에 위치한 작은 집이 있다. 방은 2개, 홀로 살기에는 넓지만 사람 하나 들이기에는 적절한 크기다. 생활에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구태여 들일 이유를 찾지 못해 몇몇 가구를 제외하면 사람 사는 흔적 없는 곳. 그 한편에는 항상 무화과 무늬의 상자가 쌓여 있다. 집주인은 결코 열어볼 일 없어 장식품과 동일한 취급을 받는다. 누군가 의문을 제기하여도 단지 주인을 기다리고 있노라 하였다. 그것만을 위해 마련된 자리는 이제 사라질 것이다. 너를 따라서. 네가 없으므로.

괴물이 포이베를 등지고서 하얀 천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는다. 천을 벗겨내는 손길이 소중한 것 대하듯 조심스러웠다. 오늘은 바람 없는 날이다. 가는 길은 잔잔한 항해가 될까. 위안 삼을 수 있는 건 그게 전부다. 절걱. 움직일 때마다 쥐고 있는 것이 제 존재를 드러낸다. 눈길 한 번 주지 않았으나 무엇에게도 빼앗기지 않을 셈이었으니 성물에 기대어 기도 올리는 신자의 꼴이었다.

“…페베.”

잿빛 피부와 맞닿은 입술 새로 속삭인다. 차라리 너를 진정 잊을 수 있었다면 좋았으련만. 이는 제게 한없이 불가능한 명제였던지라.

“너를… 내 삶에서 지울 수 있을 리가.”

그러니 퍽, 불요한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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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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