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 부조浮彫

그래, 널 잃는 것보다 날 잃는 게 쉬울 것 같아

Lucid by 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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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조(浮彫, relief): 평면에 입체적인 형상을 조각하여 부분 입체로 만드는 조형기법

율서야,

은예슬이 살포시 웃었다. 그녀에게선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부드러운 미소였다. 조금이라도 세게 쥐면 부서질까 두려웠는지, 조심스럽게 눈앞의 작은 손을 쓰다듬었다. 예슬아.. 넌 내가 왜 좋아? 그녀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미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글쎄. 난 네 옆에 있으면 더 행복해지는 것 같아서.

“ … 예슬아. ”

“ 율서는 죽었다고 몇 번을 말해…. ”

쩌적- 달콤한 환상에 금이 갔다. 부서진 파편들이 심장을 마구 찔렀다. 쿵쿵 뛰는 심장에 고개를 들자 눈앞에는 다래가 울렁이며 앉아 있다. 더 이상 곱슬거리지 않는 라임빛 머리카락, 유독 초췌해진 얼굴. 아니야, 이게 아닌데…. 연갈색 머리카락, 동그란 연갈색 눈, 풍성하게 기른 머리카락은 아스라지고 그녀의 눈앞에 남은 것은 빛바랜 라임색뿐이었다.

*

예슬아, 나 숨쉬기가 너무 힘들어. 이것도, 이것도, 다 진짜 내가 아니잖아. 이제 그만하자, 나 너무 힘들어. 네가 웃는 걸 볼 때마다 슬퍼서 미쳐버릴 것 같아.

나랑 같이 있자.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은예슬은 그녀의 몸을 숨 막히게 껴안았다. 한 번 밀어내면 깨질까, 주저하던 중 기어이 창백한 손은 내 뺨을 쓰다듬었다. 은색과 검은색이 섞인 머리카락이 어깨에 살포시 닿았다. 예슬아, 예슬아…. 그만해, 제발.

순간 움직임이 멈췄다. 그녀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은하수처럼 반짝이던 두 눈은 빛을 잃어버렸고, 방금까지만 해도 날 껴안으려던 손은 갈 곳을 잃고 허공에서 정지했다.

나도,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았어…. 미안해 다래야.

왜 울어.. 지금 울고 싶은 사람은 나인데 네가 울면 나는 어떡하라고….

금방이라도 깨져버릴 것 그 처절한 눈동자를 볼 때마다 나는 수렁으로 빠지는 것만 같다. 짓무르고 검은 눈가를 보면 심장이 쿵 떨어지는 느낌이다. 환상 속 네 웃음은 정말 행복해 보여서 슬펐는데, 지금 모습은 너무 비참해 보였다. 소리 없이 눈물만 뚝뚝 흘리던 너를 도저히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문율서의 죽음 이후 은예슬은 가끔씩 방에 들어와 송다래를 껴안곤 했다. 잠에 취해서인지, 아니란 걸 알면서도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인지. 가끔 은예슬은 그녀를 문율서라고 부르곤 했다. 꼭 껴안고 있을 때도, 부드럽게 입을 맞출 때도, 어김없이 그녀의 입에선 '문율서' 석 자가 흘러나왔다. 나는 송다래라고 장난스레 웃어넘겨도, 정신 차리라고 소리를 질러도 똑같았다. 그 애는 내가 '송다래'라는 걸 상기시켜 줄 때마다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네가 언제부터 울음이 그렇게 많았다고 그래.., 가슴 한쪽이 뻐근하게 아려왔다. 나는 이상할 정도로 네가 우는 모습에 약했다.

“ 다래야. ”

“ …. ”

“ 은예슬 지금 정상 아니야. 맞춰 주는 거 그만해. ”

나지막이 건네는 김제현의 말에 침묵으로 답했다.

알아, 예슬이 정상 아닌 건 내가 제일 잘 알지. 몇 년을 같이 지냈는데. 자기 감정 표현도 제대로 못 하는 애잖아, 그래서 한 번 무너졌을 때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내가 너무 잘 알아. 걔에게 율서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도 알아. 내가 맞춰주는 게 걔한테 아무런 득이 안 되는 것도 잘 알아.

그런데, 내가 환상을 깰 때마다 걔가 어떤 눈을 하는지 너는 모르잖아, 환상 속에서 살 때 얼마나 행복하게 웃는지도 넌 모르잖아. 대체 내가 어떻게 그만둘 수 있겠어…. 걔한테 남은 건 진짜 나뿐이야, 나에게도 남은 건 이제 예슬이뿐이야. 우린 이제 진짜 둘밖에 없어….

넌 한 번이라도 은예슬 이러다 죽겠구나, 하는 생각 해 본 적 있어? 나는 매일매일 그 생각을 해, 나도 내가 이 짓을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어. 그래서 더 맞춰주고 싶은 거야. 걔가 그러다 죽을까 봐, 그래서 혼자 남겨질까 봐. 차라리 바락바락 소리 지르고 화내는 게 낫지, 난 걔가 울면 진짜… 아무것도 못하겠단 말이야…….

…김제현은 침묵했다. 눈물자국 덕지덕지 말라붙은 눈으로 은예슬이 불쌍하다고 말하는 송다래나, 그런 송다래에게 병적으로 집착하는 은예슬이나 똑같았다. 저렇게 초췌한 얼굴을 하고 누가 누굴 보고 불쌍하다고 하는 거야. 가장 힘든 건 본인일 텐데.

김제현의 말 중에 틀린 건 아무것도 없다. 이런 관계가 잘못되었다는 것도, 내 방법이 궁극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저 나는 바스러져 가는 너를 조금이라도 붙잡고 싶었다.

“ 응? 다래야 제발…. 나 미칠 것 같아, 죽을 것 같아. 율서가 보고 싶어…. ”

그런 내가 너를 거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은예슬은 또 한 번 두 손 가득히 허상을 끌어안았다. 송다래는 이번에도 그녀를 내치지 못했다. 네가 우는 것보단 이게 나으니까.., 그런데 이상해 예슬아, 분명 내가 선택한 결과인데 왜 이렇게 아픈지 모르겠어.

예슬아, 네가 생각하는 '나'는 문율서와 송다래, 둘 중 누구야? 너는 ‘진짜 나’를 기억하긴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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