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곁에 있을게
Don't worry babe I love you babe
난 널 망치고 싶어, 나락으로 밀어 넣고 벌레처럼 기어 올라오는 걸 웃으며 구경하고 싶어, 마치 네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환생, 무조건적이고도 사기적인 그녀의 기술. 그 기술로 인해 한서영의 복수극은 완전히 비틀렸다. 변수 많은 기술을 무조건적으로 믿었던 게 잘못일까, 문율서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했던 한서영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공간에서 환생하고 말았다. 온몸을 감싸는 푹신한 감촉에 놀라 눈을 뜨자 보이는 하얀 피부, 검은 머리카락.., 잠깐만, 뭐야?
한서영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그녀를 응시한 채 그대로 굳어 버린 김제현을 보고 나서야 그녀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기술 오류? 혹은 회귀? 확실한 것 하나는 지금 한서영이 김제현의 침대에 앉아 있다는 것이었다. 황급히 손을 더듬어 매터를 찾았다. 긴장하고 싶지 않아도 저절로 떨리는 손이 볼썽사나웠다, 이 상태로 괴물 아저씨 부르면 끝장인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 매터에 욕설을 내뱉던 한서영은 그제야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잠깐, 여긴 어디지? 그녀가 익히 알던 제현의 방이 아니었다. 블랙 앤 화이트로 정갈하게 꾸며진 김제현의 방과 달리, 이 방은 원목으로 가득한 산장 같은 분위기였다.
“ …여긴 또 어디야, 또 도망갔어? ”
“ 무슨 소리야 서영아…. ”
애인을 대하듯 퍽 다정하게 느껴지는 말투에 한서영이 코웃음쳤다. 또 무슨 바람이 불었어? 병약한 도련님이라도 되는 것 마냥 침대에 고이 앉아 있는 꼴을 보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진짜 여긴 어디야, 오럼에 내가 모르는 공간이 생겼나? “ 오럼은 또 뭐야, 잠 덜 깼구나 너. ” 저건 또 뭔 신박한 개소리야, 한서영은 순간 그의 검은 머리통을 으깨버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녀의 손에 매터가 없다는 사실이 천만다행이었다. 말장난 따윈 그만둬. 신경질적으로 방문을 열고 나간 한서영의 말문이 턱 막혔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름다운 평원, 광활하게 펼쳐진 자연 앞에 말았다. 대충 뭔지 알겠다, 이거 설마 평행세계 그런 거야?
*
정리해보자. 삼일 동안 모아본 정보는 다음과 같다. 오럼, 특공대, 파동, 그딴 거 없음. 자운이랑 홍연이도, 증오해 마지않는 송다래랑 문율서도 없음. 김제현은 여기서도 아픔. 그리고 여기서의 '나'와 김제현의 관계는….
그래, 소꿉친구라 부르면 적절하겠다. 어색하디 어색한 네 글자에 구역질이 나왔다. 친구는 개뿔, 토사구팽하고 버리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늘상 봐왔던 웃는 얼굴로 사형선고를 내리던 김제현의 모습은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있었다. 잔잔했던 심장이 분노로 요동쳤다. 그리고 깨달은 것 또 하나, 꿈을 통해 '이곳의 한서영'의 기억들이 돌아온다는 것. 물론 그리 대단한 기억은 아니었다.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역겨운 것들도 많이 남아있었다.
- 서영아 좋아해,
파란 하늘을 등진 채 수줍게 웃으며 말하는 모습은 청춘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손을 꼭 잡는 감각이 너무 생생해서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한 번도 본 적 없고, 다시 보고 싶지도 않은 걔의 미소에 반사적으로 인상을 썼다. 오만상을 쓰며 손을 빼려 비틀어도 빌어먹을 몸은 꼼짝하지 않았다. 씨발, 놔! 식은땀을 흘리며 꿈에서 깨어나도 불쾌함은 가시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나는 널 사랑해야 해, 나는 널 사랑해야만 해, 하고 외치는 것 같았다. 이딴 게 어디 있어.. 내가 어떻게 그 새끼를 사랑해?
프라이팬으로 머리를 깨트릴까, 아니면 주사기에 약을 섞을까. 아니야, 개 패듯 패서 죽이고 싶은데…. 웃기지도 않는 꿈 속 기억들은 증오로 덧칠했다. 역겨운 기억들에 증오를 끊임없이 덧바르다 보면 차츰 잊혀졌다.
사랑해야 해.
지치지도 않나, 김제현은 매일 내게 말을 걸었다. 궁금하지도 않는 속사정이나, 추억들 같은 거. 날 기억상실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웃기지도 않아. 기분 나쁜 사랑이라는 단어가 자꾸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좆같네 진짜, 한서영이 입술을 짓씹었다
서영아, 넌 뭐랄까, 참 벌레 같아. 열심히 일해도 결과는 달라진 게 없네, 가끔 널 보면 하찮은 개미를 보는 것 같아….
언젠가 그에게 들었던 말이 뇌리에 콕 박힌다. 죽어가고 있는 주제에 어떻게 그런 말을 해, 살아남으려고 아득바득 몸부림치는 네가 더 벌레 같으면서…. 너는 이렇게 무력하잖아, 지금 내가 여기서 무슨 짓을 해도 비명 하나 못 지르고 죽어버릴 거잖아. 침대에 힘없이 누워 시름시름 앓는 김제현의 모습이 유독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 모습을 보자 올라오는 묘한 희열에 더 불쾌해졌다.
사랑해야 해, 나는 김제현을 사랑해야만...
김제현은 생각보다 내게 많이 의지했고, 나는 걔를 생각보다 많이 증오했다. 매터 없이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나약한 팔을 저주하며 그를 의자로 패죽이겠다는 다짐은 김제현의 '차라리 이제 그만 죽고 싶어….' 라는 말에 무너졌다. 내가 왜 네 뜻대로 놀아나 줘야 해, 친절하게 죽음을 선물해주고 싶은 마음 따윈 추호도 없었다. 슬슬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도 잘 모르겠다. 걔를 죽이고 싶은 걸까, 옆에 두고 싶은… 아니다, 이 소리는 그만두자. 무엇이든 걔가 고통스러워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쉴 새 없이 들었다.
지금 내게 보여주는 다정한 얼굴과 나를 내려보던 차가운 얼굴이 대비되어 더욱 기묘했다. 홧김에 주삿바늘 때문에 피멍이 든 그의 팔을 꾹 눌러 버렸다. 고통스운 신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꾹꾹 눌러댔다. 됐어, 저리 가.
사랑, 더 이상 그런 말로는 설명할 수 없어.
그 날은 유독 비바람이 거센 밤이었다.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열린 방문 사이로 빛이 새어들어왔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냉기에 손발은 얼어붙을 듯 차가웠고, 검은 머리카락 사이에 가려진 이마는 차가운 손발과 달리 펄펄 끓고 있었다. 아파? 응.
김제현은 정말 나약하구나. 거짓뿐인 말로 족하다면 기꺼이 네 곁에 있어줄게. 금방이라도 토할 것만 같은 속을 잠재우고 네 등을 몇 차례 쓰다듬었다. 대체 이 감정은 뭐길래 이렇게 불쾌하고 짜릿하지? 한서영이 새어나오는 미소를 죽였다. 다행이다. 넌 분명히 죽어가고 있어, 내 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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