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너미

mp3 (by.디너)

캐해 정립용 첫 연성

별일 없는 날이었다.

다른 지역에서 열리는 대회가 있었고, 주림고 선수들은 45인승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기록에 남지 않는 비공식전은 드물게 참가하고 따로 차를 타는 경우가 더 많던 강산이 함께라는 점이 평소와 조금 달랐지만, 아예 없었던 일은 아니라 대수롭지 않았다.

그리고 그 강산은 버스를 타면 자연스럽게 주신이의 옆자리에 앉는다.

주신이와 강산, 둘은 제법 자주 붙어다녔다.

테니스 스타일부터 배경까지 대칭점에 서있는 것 같은 두 사람이 친밀한 사이인 건, 단 하나의 공통분모로 설명이 가능했다. 범재들은 감히 넘볼 수 없는 천재라는 점.

그러나 테니스 코트 위에서 상대를 누구보다 괴롭히는 두 천재는, 코트 밖에선 고등학생1, 2일 뿐이다. 차에 갇혀 있는 몇 시간이 갑갑하고 답답하고 지루한 아이들 중 하나일 뿐. 강산보다 이런 상황에 익숙한 주신이는 버릇처럼 자리에 앉자마자 mp3를 꺼내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구형 mp3를 조작한 신이는 이내 팔짱을 끼고 편한 자세를 잡았다.

주로 코치나 가족 차로 이동하곤 했던 강산은…현재 심심했다. 동행인이 거의 연장자기는 했지만 어쨌든 얘기할 사람이 있었고, 대화가 재미 없으면 스마트폰으로 영상이나 기사 등을 찾아 보며 시간을 때워 왔는데, 모처럼 또래와 같이 가는 날의 옆자리 승객은 벌써 자기 세계에 빠진 모양새다. 만약 그 승객이 주신이가 아니라면 항상 하듯 스마트폰부터 꺼냈을 테지만, 주신이가 맞다. 웬만해선 강산과 길게 얘기 나누는 걸 피하는 그 주신이 말이다. 강산은 주신이와 얘기하고 싶었다.

무슨 얘기를? 당장 생각나는 주제는 없다. 아무거나…? 일단 대화를 시작하면 뭐라도 말하겠지. 그런 마음이다. 테니스 얘기를 해도 좋고, 너무 무겁지만 않으면 가족 얘기를 해도 좋다. 물꼬를 트면 주신이가 어떻게든 받아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뿐. ‘어쩌면 이렇게 별 생각 없어서 주신이가 꺼리는 걸 수도…? ‘하는 의문은 한 톨도 없다. 뭐든 상관 없다. 지금 심심하니까….

빤히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을까? 창 밖을 바라보고 있던 주신이가 한숨을 얕게 쉬며 고개를 돌렸다. 강산이 반색했다. 어떻게 알았지? 늘 느끼지만 주신이 얘는 남의 머릿속을 훤히 읽는 것만 같다. 주신이가 초능력 같은 건 없다고 했지만 당하는 사람 입장에선 거짓말 같다. 방금 전까지도 밖을 보고 있었으면서 강산이 대화 나누고 싶어하는 걸 아는 것처럼 쳐다보지 않나. 마음을 읽거나 뒤통수에도 눈이 달렸거나 둘 중 하나는 분명해.

얼른 말하라는 듯이 주신이가 눈짓했다. 강산은 입을 열었다. 근데 뭔 말 하지? 잠깐 머뭇대자 mp3의 버튼을 꾹 누른 주신이가 이어폰을 뺐다.

"왜?"

"어떻게 알았어?"

차게 식은 눈을 한 주신이가 엄지손가락으로 창문을 가리켰다. 아, 비쳤구나. 그나저나 얘는 테니스할 때랑 아닐 때랑 차이가 너무 심하단 말야. 강산이 무슨 말을 하든 기본적으로 저런 표정이다. 앗차, 이야기를 잇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도로 이어폰을 껴버릴 것 같은 몸짓에 강산이 아무 말이나 툭 던졌다.

"야, 뭐 듣냐?"

이어폰 쥔 손을 들어올리던 주신이가 멈칫했다.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오른손을 슥 내민다. 강산은 조금 혼란스러워졌다. 같이 듣자고? 왜 저렇게 미묘한 표정이야? 웃음기도 약간 있는 것 같고, 주저하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 골탕 먹이기 직전의 표정 같기도 한…애매모호한 얼굴이다. 어쨌든 강산에게 나쁠 건 없으므로, 미심쩍어 하면서도 순순히 이어폰을 받아 오른쪽 귀에 꼈다.

줄 있는 이어폰이 생소하다. 블루투스 이어폰이 나온지 몇 년 됐다고. 게다가 10년 전에도 스마트폰이 있었는데 이 시대에 mp3라니. 둥글둥글한 직사면체의 mp3는 손을 어지간히 타온 듯 모서리와 버튼이 닳아 군데군데 색이 빠져 있었다. AS는 되나? 회사 망한 거 아냐? 본인한테도 실없어 보이는 생각을 하며, 강산은 꼬물꼬물 움직이는 주신이의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단단한 손가락 끝이 버튼 하나를 달칵 누르자…강산이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소리가 흘러나왔다.

당연히 노래나 음악을 기대했다. 그런데 실상은 사람 목소리, 그것도 굉장히 열렬한 어조의…. 주신이가 같은 버튼을 몇 번 누르자 볼륨이 더 커진다. 강산은 몇십 초 집중해서 듣고 나서야 무엇인지 알았다. 이거, 테니스 경기 중계잖아?

아니, 누가 테니스 시합 중계 라디오를 mp3에 담아서 들어? 영상으로 보면 되잖아? 그게 훨씬 확실하잖아? 스마트폰 쓰고 있잖아…? 이걸? 굳이? mp3로? 왜…?

생생한 중계가 귓가를 스쳐 지나간다. 더 좋은 수단이 있는데 왜 옛날 기기로 불편하게 듣는지…강산이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뭔가 사연이 있을 것 같아서 가볍게 물어보기도 좀 그렇고…. 주신이라면 이유가 있겠지, 스스로 납득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 당황스러움이 가시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걸…계속 들어야 하는지도. 속았다. 대체 누가 경기 중계를 저렇게 잔잔한 표정으로 듣냐고.

주신이는 어느새 고개를 똑바로 돌리고 의자에 몸을 파묻은 상태였다. 평온하게 눈을 감은 채. 귀로는 이렇게 격렬한 경기 해설을 들으면서 얼굴은 잠든 것처럼 평화롭다니. 역시 겉과 속이 다른 능구렁이라고 해야 할까….

듣겠다고 한 건 자신이었으므로, 강산은 어쩔 수 없이 주신이의 이어폰을 나눠낀 상태로 멍하니 허공을 보았다. 재미…없어. 주신이와 얘기하고 싶었지 이런 아저씨 목소리를 듣고 싶은 건 아니었다. 어느 경기인지 감도 안 오고 별로 궁금하지도 않아. 그런데 주신이 쟤는, 이런 순간에도 테니스 생각만 하냐….

낡은 옛날 mp3. 얼마나 썼을까? 저거라면 어느 때든 들을 수 있겠네. 평소에도 갖고 다니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닳았을 리가 없다. 강산이 주신이와 만난 건 고작 1년 전. 주신이는 언제부터 테니스를 이렇게까지 좋아하게 됐을까….

본인한테 듣지 않고서야 아무리 고민해도 답을 알 수 없다. 아, 그래, 그런 거. 그런 게 궁금했다. 주신이와 시합하는 것도 재밌지만, 코트 위에서 아무리 공을 주고 받아도 알 수 없는, 말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들이 궁금해. 여기까지 생각한 강산은 자기가 무얼 원하는 지 깨달았다. 나는 코트 밖의 주신이가 궁금한 거구나. 이미 아는 것들 말고, 모르는 것들에 대해서 말야.

강산은 어느샌가 무의식중에 주신이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눈으로 대화하는 스킬은 없으니까 쳐다봐도 강산의 궁금증에 주신이가 답해줄 일은 없다. 오히려 부담스럽게 왜 쳐다보냐고 욕할지도…. 강산은 후다닥 자세를 바로했다. 강산은 못하지만 주신이는 소리 내지 않고 눈빛 만으로도 욕할 줄 안다. 눈치 빠른 능구렁이에게 들킬세라 허리를 꼿꼿이 세운 강산은 대신 곁눈질로 주신이의 얼굴을 힐끔힐끔 봤다. 이건 설마 안 들키겠지.

눈 감고 있는 주신이는 보통 때엔 보기 힘든 모습이다. 시합 중에나 상대방에게 집중하지 일상에선 그렇지 못하고 애초에 주신이와 강산 사이에서 테니스를 빼면…남는 게…있나? 일생일대의 라이벌 관계라면서도 모르는 게 참 많다. 코트 위의 주신이는 잘 안다. 테니스에 한해선 서로를 누구보다 잘 안다고 할 수 있을지도. 주신이 머릿속에 있는 강산의 정보에 비하면 티끌만 할 것 같긴 하지만, 주신이의 키나 낼 수 있는 파워의 총량, 어느 구종을 구사하는지, 구질은 어떤지, 어떤 마음가짐으로 시합에 임하는지 등, 테니스에 필요한 정보들은 기본적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테니스에 필요 없는, 어쩌면 쓸모 없어 보이는 정보들은…새삼스럽지만 거의 모른다.

사실 주신이를 만나기 전의 강산은 코트 위에서조차 상대방에게 관심이 없었다. 자기밖에 모르던 오만한 독불장군에게 상대를 바라보는 방법을 알려준 사람은 주신이다. 주신이는 강산의 첫 친구이자 난생처음 쓰라린 패배를 알게 한 라이벌이고, 어느 면에서는 스승이다. 그렇다면 처음으로 테니스와 관련 없는 모습도 알고 싶어진 사람이 주신이인 것도, 자연스럽지 않나?

강산은 알고 싶은 대상을 흘깃 훑는다. 팔짱을 껴서 근육이 조금 도드라진 두 팔과 자고 있는 것처럼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가슴. 넥라인 안쪽으로 드러난 빗장뼈와 느슨해진 목을 타고 올라 턱과 살짝 다문 입을 지난다. 뻗은 콧날과 양 볼에 골고루 퍼진 주근깨를 구경한다. 주신이의 주근깨더러 너무 많아서 개미가 기어다니는 줄 알았다고 했던 적도 있던 것 같지만 지금 보기엔 나름대로 매력 포인트 같다. 그리고 강산은 과거에 연연하지 않지.

가끔 지금처럼 진고동색 머리카락 몇 올이 눈을 가리고 콧잔등까지 내려올 때가 있다. 눈을 찌르지 않을까 궁금한 건 강산 뿐, 주신이는 덥수룩한 헤어스타일이 편한 듯하다. 다크서클이 옅게 드리운 눈은 초록빛이 도는 눈동자가 가운데 박혀있다. 올…무슨 색이라고 했는데. 까먹었다. 경기 중엔 지나칠 정도로 반짝반짝 빛을 내며 공을 따라다니는-

눈동자?

"왁!"

"강산…."

어, 언제부터…? 그러고보니 mp3 소리도 안 나오고 있었잖아! 어버버, 강산이 더듬더듬 말을 잇지 못하고 시선을 피하자 눈썹 사이가 좁아진 주신이가 눈을 마주쳐왔다. 강산은 확신했다. 저건 욕이다. 100% 욕이야! 그것도…최소 쌍욕…!

"…눈깔 치워라…."

"어, 어! 잘게! 잔다고! 도착하면 깨워줘!"

이 정도로 끝나는 게 다행이지! 지은 죄가 있는 강산은 퍽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등받이에 몸을 던지고, 곧바로 눈을 질끈 감고 과장되게 숨을 쉬었다. 드르렁, 피유, 드르렁, 피유, 작위적인 소리를 내는 강산 옆에서 작고 깊은 한숨을 쉬어낸 주신이가 강산의 귀에서 이어폰을 빼갔다. 의자에 몸을 기대는 야트막한 진동과 부스럭대는 소리가 잦아 든 후에야 강산은 놀란 마음을 진정할 수 있었다.

조금은 지나친 반응 같지만 도둑이 자기 발 저린다던데, 훔쳐보던 자신이 대도둑이 된 것 같아서. 그만큼 놀랐나 보다, 하고, 강산은 무던한 것처럼 넘기려고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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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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